어비스워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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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영이에게 전화를 해 보고 싶었다.


그 녀석과 예전처럼 아무 이유 없이 전화를 하고 으레 그렇 듯, 그냥 일상의 소소한 얘기도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휴대폰을 손에 쥐고 그의 번호가 액정창에 빤히 보이는데도 막상 손가락으로 그의 번호를 누를 용기가 나지 않았다.
혹시라도 그의 입에서 ‘너 나 몰래 주형이 형 만났다면서?’ 라는 말이 튀어 나온다면 나는 뭐라고 그에게 해명을 해야 할까.

그냥 우연이 만났고 아무일도 아니었다고, 그냥 커피만 마셨을 뿐이라고 구질구질한 이유를  구구절절 장황하게 늘어 놓으면서 그가 오해하지 않고 믿을 수 있도록 내가 설명할 수 있을까?
혹시라도 나의 말 어딘가에서 그가 다시 의심을 할 만한 것을 찾아내고 나를 슬며시 떠 보면서 나를 녀석이 의도하는 덫에 걸리도록 하는 것은 아닐까?

평상시에도 잘 나간다는 변호사인 그의 아버지의 유전인자를 그대로 물려받은 듯, 똑똑하고 논리적이며 가끔은 섬뜩하게까지 느껴지게도 하는 그의 능글능글한 언변은 그가 정말 나와 같은 이십대인지 아니면  인생을 많이 살아 본 오십대에 접어드는 아저씨의 모습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라고 생각을 해 본적도 있었다.

그래서 그냥 시간이 흘러가고 어느 누구의 입에서도 어떤 말도 나오지 않는 상태로 그렇게 유야무야 하게 되기를 바라면서 그대로 있기로 했다.

사실 아무일도 아니었기에 시간이 흐르면 그렇게 조용히 잊혀질 일이었다.



점심식사를 막 끝낸 후,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나의 휴대폰의 액정창에 우영이의 이름이 뜨고 말았다.

머릿속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고, 어떤 말을 할 것인지 준비도 되지 않은 채, 나는 그저 크게 심호흡을 한번 하고 나서 전화기를 귀에 댔다.

“여보세요?”

 “야! 너 이번 주 토요일 밤에 뭐 해?”

나의 걱정과는 달리 그의 목소리를 여전히 밝았다.
한순간 마음속으로 안심이 되면서 한층 기분은 편안해 졌지만, 그가 주형이 형에게 내가 아프다고 말을 한 이유를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여전히 마음에 걸렸다.

“별일 없는데...”

 “그럼...”
내 말을 다 듣기도 전에 녀석은 나의 귀에 대고 기분좋은 듯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너하고 나, 둘이서만 술 한잔 하자. 너 다시 서울 올라온 다음에 우리 둘이 만난 적도 없잖아.”

 “.........”

 “예전처럼 세상 돌아가는 얘기도 하고.... 네가 나에게 제일 친한 친군데 내가 좋아하는 사람 생겼다고 너한테 좀 홀대한 것 같기도 하고 말야.”

그렇게 말을 늘어놓는 그의 말투에서는 나에 대한 어떤 다른 감정이 섞여 있는 것 같진 않아 보였다. 그는 여전히 예전의 그였다.

“그리고, 너 서울에서 다시 자리잡게 된 것도 축하하고 말야. 내가 토요일에 한번 크게 쏠게. 토요일이니 우리 한번 토할 때 까지 마셔 보는거야. 좋지?”

 “어.. 나야 좋지.”

쓸데없는 걱정으로 그에게 전화도 못하고 있던 나와는 달리, 그는 여전히 그였다.  내가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의지하고 삶을 공유할 수 있는 그런 진실한 벗이 바로 그 녀석이라는 것을 그런 혼자만의 쓸데없는 불안한 걱정으로 잊고 있었다.




기분좋은 토요일 밤의 시간은 이제 열한시 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우영이와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알맞게 취한 나는 기분이 좋아져서,  나 만큼 또한 기분 좋아 보이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소심하게 걱정을 하면서 그에게 연락하는 것도 주저했던 내 자신이 어이없다고 느껴졌다.

그렇게 크지 않은 소주집은 빈 자리가 없이 꽉 차 있는데도, 적당한 음악과 또한 적당한 대화로 타인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편하게 대화를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고 있었다.

내가 따라주는 소주잔을 들고는 갑자기 우영이가 피식 하고 웃었다.

“왜? 뭐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어?”

 “아냐.” 그가 여전히 눈을 찡그리고 웃어 보이고는 나에게서 소주병을 받아들고 나의 잔을 채웠다.

“뭔데?”

 “사실....” 말을 꺼내기 전 그가 나를 보고 다시 한번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주형이 형이 저번에 같이 못있어 줬다고, 다시 자리 한번 만들어 보라고 연락이 왔었어.”

그의 말에 갑자기 옅은 긴장감이 가슴을 채웠다. 아마 나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도 굳어져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내 딴에는 그 형하고 분위기 좀 만들어 보려고 했거든...”

의식적으로 표정관리를 하려고 애를 쓰면서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제 본격적으로 작업을 좀 걸어보려고... 나는 술 좀 덜 마시고 형을 좀 취하게 만들면, 그래서 형의 이성도 좀 풀어지고 하면, 둘 사이에 무슨 썸씽이라도 벌어지지 않을까 하는 꿍꿍이에서 말야...”

그가 히죽거리며 한번 웃고는 나와 소주잔을 슬며시 부딪치고는 입에 갖다 댔다.

“그런데?” 그의 눈치를 보면서 잔을 들어 입안에 털어 넣고는 빈 잔을 내려놓으면서 내가 물었다.

“그래서 그러겠다고 형에게 말을 해 놓고 아무에게도 연락을 안했었어”  녀석이 피식하고 웃었다.

“그리고 약속장소에 나와서 혼자 앉아있는 나를 보고 의아해 하는 형에게 종석이하고 민호는 다른 선약이 있어서 참석 못한다고 하고 너는 몸이 안좋은 것 같아서 집에서 쉬겠다고 했다고 내가 둘러댔거든....”

 “...........”

그의 말에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런 거였군. 역시 별거 아니었는데,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나 혼자 소설을 쓰고 자빠져 있었던 거야. 소심함으로 만리장성을 쌓을 놈.
어이가 없어서 피식 하고 웃음이 나왔다.

“근데, 2차로 자리를 옮긴 술집에서 말야. 하필 그 두 녀석이 술을 처먹고 있었던거야.”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녀석이 한숨을 내 쉬었다.

“아, 정말.... 종로 바닥이 좁은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그렇지 하필 그 자식들이 거기서 술을 처마시고 있을게 뭐냐?” 기가 막히다는 듯 우영이가 헛웃음을 지어 보였다.

“일부러 거의 가보지도 않은 곳으로 정했는데 정말 재수도 없지.” 그가 다시 한번 피식 하고 웃었다.

“새끼들. 그러면 눈치보면서 자리도 피해주고 그래야 할 것 아니냐. 그런데 내가 눈치를 주는 데도 끝까지 버티면서 형 앞에서 살살거리더라니까.”

그의 말에 그 광경이 머리에 떠 올라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소주병을 들고 다시 그의 잔을 채워 주었다.

“결과적으로 영양가는 하나도 없고, 너만 그 자리에 빠지게 됐다. 미안.”

 “아냐.” 웃음을 참으면서 그의 씁쓸해 하는 표정을 바라보았다.

“너가 그러려니 해 줘. 알았지?” 그가 술잔을 나에게 내밀어 건배를 하면서 웃어보였다.




새벽 두시가 넘어가자 슬슬 피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술에 약한 나는 그때까지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그렇게 늦게까지 있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친구녀석들 중에서 어떤 놈은 만취한 후에 어떻게 변하는지, 어떻게 개가 되기도 하고 미친 놈이 되어 술주정을 하는 지 직접 내 두 눈으로 본 적이 없었다.

 
그저 몸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면서 집에 돌아가서 편하게 눕고만 싶었다.
그래서 어떤 이유를 그럴듯하게 대고 이제 술자리를 마치자고 말을 꺼낼지 타이밍을 찾고 있었다.

“그, 나쁜 개애새끼.”
갑작스럽게 녀석의 입에서 튀어나온 욕설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왜 그래?”

 “종석이 새끼 말야.” 우영이의 눈동자의 초점이 흔들리고 있었다. 꽤 취한 듯 했다.

“그 새끼는 친구도 아냐.”

“.........”

“내가 뻔히 주형이 형 좋아하는 거 알면서 그렇게 꼬리를 쳐?” 평상시에 보이지 않던 일그러진 표정으로  잔뜩 힘을 준 그의 눈에 배신감이 꿈틀거리는 듯 보였다.

“나 같으면... 그래 나 같으면...” 우영이가 다시 날 바라보았다.

“슬며시 자리 비켜준다. 친구니까 잘 되라고... 잘 해 보라고..”

“.........”

“그런데 그렇게 들러붙어서 내 눈치를 보면서 살살 형한테 꼬리를 쳐?”

그가 소주잔을 들고 한입에 털어 넣고는 손아귀에 힘껏 움켜쥐고 ‘탁’ 하고 테이블 위에 내려치듯 내려놓았다. 주변의 사람들 몇몇이 그런 그를 돌아보았다.

갑자기 그렇게 돌변한 그의 모습과 행동에 나는 적잖게 놀랬다. 마치 지킬박사가 갑자기 하이드로 변한 것 마냥,  배너박사가 순식간에 헐크로 변한 듯한 녀석의 갑작스럽게 돌변한 태도에 어떻게 그 녀석을 상대해야 할지 불안해질 정도였다.

“왜, 걔가 어떻게 했길래 그래?”

“아. 진짜 말하기도 짱난다.” 그가 소주잔들 들고 내가 따르는 술을 받았다.

“‘형 휴대폰 신형이네요’ 그러면서 ‘디게 좋은거다’ 그러면서.... 그 회사꺼 끔찍하게 싫다고  그렇게 욕을 해대고 그 지-랄을 떨더니,  있는 끼를 다 떨면서 형 전화 번호 따려고....” 그가 말을 멈추고 다시한번 일그러진 표정으로 콧방귀를 끼었다.



‘카톡’

그 순간 내 휴대폰에 카톡이 왔다는 신호가 울렸다.

슬쩍 확인해 본 액정창에 ‘박주형’에게서 카톡이 왔다는 글이 떠 있었다.

순간, 깜짝 놀란 나는  우영이의 눈치를 살피면서 휴대폰의 액정창이 보이지 않도록 급하게 뒤집어 쥐고는 테이블 아래의 허벅지 위로 가져갔다.
긴장으로 가슴이 뛰고 입안이 바싹 말라 버렸다.

다행히 우영이는 보지 못했던 듯 싶었다.

녀석은 마치 자신의 앞에 놓인 술잔과 눈싸움이라도 하는 듯 그렇게 비어있는 소주잔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그를 의식하면서 슬며시 카톡의 내용을 확인했다.

‘토요일 잘 보내고 있지요? 지금 자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5분 정도 후에 다시 확인해보고 톡 확인한 것으로 나오면 전화 할게요. 시간 되면 내일 영화 같이 봐요.’

“우영아.”

두 번 생각할 틈도 없이 손에 휴대폰을 움켜쥐고 그를 불렀다.
녀석이 힘들게 고개를 들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지..지...집에서 어..엄마가 전화 좀 달라시네....전화 좀 하고 올게.” 갑작스럽게 둘러대느라 제대로 정확히 말도 못하고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녀석의 시선이 나에게서 다시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소주잔으로 옮겨갔다.



술집의 문 밖으로 나와 한쪽 구석에서 휴대폰을 들고 그의 번호를 누른 후 귀에 갖다 댔다.

“여보세요?” 신호가 미처 가지도 않은 듯 했는데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저기요...” 주변을 슬며시 돌아보고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 아직 안자고 있었네? 뭐하고 있어요?” 그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형...그게 중요한게 아니고...” 몸을 돌려 벽을 보고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손바닥을 펴고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네?”

 “이런말 해서 죄송한데요.  저... 형 좋아하지 않아요.” 낮은 목소리로 휴대폰에 대고 말했다.

“........”

 “그리고 저 복잡해지는 거 싫어요. 저 좀 내버려둬 주세요.” 그에게 사정하듯 말했다.

“그리고, 지금 저 우영이하고 같이 있어요. 연락하시지 마세요. 부탁드려요.”

그의 대답도 듣지 않고 나는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주위를 다시한번 돌아본 후, 문을 열고 안쪽으로 발을 옮겼다.


“무슨 일인데?” 이제 완전히 만취한 듯한 표정으로 꼬부라진 혀로 알아듣기 힘든 말투로 녀석이 나에게 물었다

“아...별거 아냐. 잘 지내는지 궁금하시다고...”

“아...”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냥 전화를 하지. 노인네가 문자는....”

어쩐지 그렇게 말하면서 일그러진 표정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녀석의 눈빛이 나의 말을 믿지 못하고 있다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아... 그게..내가 자고 있는지도 몰라서...” 당황한 나는 그냥 순간적으로 머리에 떠오르는 핑계를 댔다.

“그래?” 그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빈 술잔을 나에게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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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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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우는 좋은 친구네요.
주형은 황당했을 듯.
우영에게 확실하게 선을 그어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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