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비스워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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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꽃 냄새를 담은 햇볕이 창문안으로 내리쬐고 있던 토요일 오전이었다.
밀린 빨래를 하고 비좁은 원룸 건물의 옥상에 간신히 널고 내려온 후, 지저분한 방을 돌아보면서 청소기를 찾고 있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야, 오늘은 무슨 날인지 아냐?” 우영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밀린 빨래하는 날! 방금 끝냈다.” ‘휴’ 하고 한숨을 내쉬면서 그에게 대답했다.
그런 나의 대답에 녀셕의 어이없다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것 말고, 또...?” 그가 다시 물었다.
그의 말에 시선을 컴퓨터의 모니터 옆에 놓여있는 탁상용 캘린더로 돌렸다.
“이제 나랑은 상관없는 어린이 날이지.”
“맞아. 근데 어린이 날 하면 뭐 생각나는 것 없냐?” 여전히 무엇인가 더 구체적인 답을 원하는 듯 그 녀석은 다시 물었다.
그제서야 예전에 대학교 다니던 시절, 어린이 날이 자신의 생일이라고 그 녀석이 노래하듯 했던 것이 떠올랐다. 어린이 날과 겹친 자신의 생일은 한번만 들으면 결코 못 잊을 것이라고 했었다.
하지만, 여전히 회사일을 이해하고 처리하는 일에 서툴러 똥, 오줌 못가리고 있던 나는 다른 곳에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친구는 커녕 내 자신의 생일도 생각지도 못했고 또 그럴만한 여유도 없었다.
“밤에 간단하게 술 한잔 하자. 다른 약속 없지?”
“그렇긴 한데....”
“왜? 무슨 일 있어?” 쉽게 그러겠다는 대답을 하지 못하는 나에게 그가 다시 물었다.
‘나 말고 또 누가 나와?“ 조심스러운 말투로 그에게 물었다.
“너 말고 또 누가 나오겠어?” 우영이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너한테 제일 먼저 전화하는거라... 너도 아는 애들 두세놈한테 전화 해보고 오면 오는 거고 말면 관두는 거지...너랑 나랑 둘이서 있어도 좋잖아. 술 한잔 하면서 창 밖으로 지나가는 잘생긴 것들 구경도 좀 하고...”
“그래. 알았다.” 그의 말에 피식 하고 웃고는 대답했다. 주형이 형이 올 것으로 예상했던 나는 내심 조금 부담스러웠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무슨 상관일까 싶었다. 전에 우영이가 말했던 것처럼, 자리 좀 지켜주다가 눈치 보면서 슬며시 빠져나가면 되는 것이었다.
우영이에게는 다시 묻지 않았지만, 혹시나 했던 나의 그 합리적인 의심은 사실이 되어 버렸다.
그 녀석은 나 이외에 다른 친구를 부르지 않은 듯 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술집의 입구에 사람의 모습이 비칠때마다 녀석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을 곧 눈치를 채게 되었다. 그리고 역시나 어느 순간 문을 열고 들어오는 주형이 형의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의 생일에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을 부르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 아닌가.
하지만 그런 그의 등장에 나는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태연하게 나를 보고 손을 한번 들어 보이고는 우영이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런 그의 모습에 그가 뻔뻔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하긴 그와 우영이를 대하는 나의 표정도 마찬가지로 그에게는 그럴듯하게 태연하게 보일 듯 싶었다.
그는 도대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런 상황을 만드는 것일까?
그가 우영이에게 그들의 관계에 명확하게 선을 그어 놓았다고는 했지만, 여전히 그는 우영이가 자신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한 내가 녀석의 친한 친구라는 것도 뻔히 알면서도 그는 나에게 접근을 했다.
그리고 또 다시, 여전히 마치 아무일도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이 자리에 나와 내 앞에 앉아있는 그가 이중적인 인간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웃음을 띤 표정에 농담을 하면서 소주잔을 들고, 나와 우영이의 잔과 함께 부딪치면서 건배를 하는 그는 도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인간일까?
“너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태연한 척 했지만, 미처 내가 감출 수 없던 표정도 있었던 듯, 나를 보고 우영이가 물었다.
“아, 별거 아니고...아직 회사일이 서툴러서... 매듭을 못 지어 놓은 것이 자꾸 떠올라서...”
1차만 어떻게 버티고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그에게 그렇게 둘러댔다.
“2차는 생일 축하도 할 겸, 내가 ’딥블루씨‘에서 한잔 살테니까 이제 일어서자.”
휴대폰을 흘끗거리면서 시간을 확인하는 듯 보이던 그가 우영이를 보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런 그의 말에 한층 밝아진 표정으로 녀석은 형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산을 하고 나와서 2차도 같이 가자고 우영이는 나의 팔을 잡아 끌었다.
“그럼.....” 그런 녀석을 돌아보면서 내가 입을 열었다.
“내가 작은 케잌이라도 사올 게.”
“케잌은 무슨... 내가 뭐 어린애냐?” 우영이가 피식하고 웃었다.
“아냐. 그래도 축하는 해 줘야지. 거기 분위기도 좋다면서, 축하 노래도 불러주고, 네 소원도 좀 빌고...” 내 말에 우영이가 피식 하고 웃었다.
“작고 싼 걸로 하나 사올게. 먼저 가서 있어.” 주형이 형을 등지고 녀석을 보면서 슬쩍 눈치를 주었다.
“그래 그럼.... 싼 걸로 하나 사와. 많이 먹지도 않을 건데....” 그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주형이 형의 팔꿈치를 슬며시 잡고 몸을 돌렸다.
느긋한 걸음으로 골목을 빠져나와 1호선 입구가 보이는 큰 길까지 천천히 걸어나왔다.
그리고 주머니에 들어있던 휴대폰을 꺼내들고 집으로 돌아간다고 둘이서 오붓한 시간을 보내라는 문자를 우영이에게 보냈다.
그리고 막 얼굴을 들고 돌아서려는 나의 앞을 누군가가 가로막았다.
“케익을 사려면 이쪽 방향이 아닌데...” 그가 빤히 나를 바라보았다.
“아...사실은...”
그가 가만히 서서 내가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케익은 핑계였구요. 그냥... 내가 그 자리에서 빠져주는 것이 도와주는 것일 것 같아서요.”
가능한 뻔뻔한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왜?”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우영이하고 나하고 둘만 남겨놓는 것이 도와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
무표정한 얼굴로 갑작스럽게 묻는 그의 질문에 말문이 막혀 버렸다.
“우리는 그런 감정은 없는 사이라고 내가 확실하게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무리 그래도....”
내가 입을 다시 열자 그가 다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우영이가 형을 좋아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 나에게 이렇게.....”
나의 그 말에 그의 표정이 이해할 수 없이 복잡하게 변했다.
하지만 슬기운이 조금씩 돌기 시작한데다 이미 그를 이중적인 인간이라고 판단하고 결정해버린 나는 그런 그의 표정을 냉정하게 다시 볼 수가 없었다.
그저 ’자신은 명확하게 구분을 지어 놓았으니 그것으로 벌어지는 결과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대방의 탓이다‘ 라고 단순하게 돌려버리는 무감각하고 제멋대로인 인간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형, 저 좋아요?”
나를 보고 있는 그를 도전적으로 바라보면서 가능한 건방진 투로 입을 열었다.
“나랑 하고 싶어요? 그래서 따라 나오신 거예요?”
“..........”
그가 그렇게 말하는 나를 아무 말 없이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형이 아는 사람 두셋 더 불러서 그룹으로 할래요? 어때요?“
나의 말에 그의 얼굴이 점점 굳어지더니 나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한숨을 쉬었다.
순간,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제서야 감각도 현실로 돌아와서 그와 나의 옆을 흘끔거리면서 지나치는 사람들의 눈길이 느껴졌다.
“아 이게 무슨....”
그를 보고 얼굴을 붉히고는 몸을 돌렸다.
“야. 이승우.”
지하도를 향해서 막 발을 옮기려는 순간 그가 나를 불렀다.
“네가 하고 싶은 얘기 끝났으면, 내 얘기도 듣고 가.”
그의 말에 나는 다시 발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무슨 말을 하시고 싶으신데요?”
여전히 빈정거리는 말투가 나의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내가 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 얘기는 듣고 가야지.”
그의 표정은 진지해 보였고 진심이 담겨 있는 듯이 보였다.
그리고 방금 전, 내가 술에 알맞게 취해 간이 배 밖으로 나와 그에게 내뱉었던 말에 대한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타인에게, 그것도 한참 연상인 사람에게 그렇게 버릇없이 면박을 주었으면 그래도 그의 말도 들어주어야 할 듯 했다.
“지금 우영이는 혼자있을텐데...”
커피를 들고 와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 그를 보면서 내가 입을 열었다.
그런 나를 보고 그가 고개를 저었다.
“종석이하고 민호가 지금 같이 있을거야.”
“.......”
“전에 종석이가 내 휴대폰 번호를 받아 간 적이 있었는데 어제 녀석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오늘이 우영이 생일이라고... 그래서 2차에 시간 맞춰서 딥블루씨로 오라고 말해 놓았다.”
“........”
“너를 보면서 떠오르는 친구가 있었다.” 느릿한 말투로 그가 입을 열었다.
“내가 지금 네 또래일 때였어.”
“........”
“그때 나는 사귀던 애가 있었는데, 걔나 나나 부모 잘 만나서 아무 걱정없이 풍족하게 살았다. 어렸을 때부터 남 부럽지 않게 살면서 아들 교육이라면 악착같이 매달리던 어머니 덕에 그럴듯한 대학에 들어가고 또 남 부럽지 않은 대기업에 취업을 하고....”
그가 말을 멈추고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알게 된 그 친구는 이름도 낯선 그런 대학을 나와서 또 일이 잘 풀리지 않으려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취업도 되지 않고... 그러다가 대형마트 보안요원으로 일했다.”
“..........”
“평상시에는 밝아 보이던 그 녀석이 술에 취하면, 미래가 불안하고 삶이 버겁다고 힘들게 털어 놓곤 했었어. 보통 친구들이 그러듯이, 나도 그 녀석에게 잘 될거라고, 괜찮아 질거라고 말해줬다.
그렇게 공허한 내 얘기를 들으면서 그 녀석이 정말로 위안을 받았을까?”
“.........”
그 당시에 철없던 나는 그런 그 녀석을 보면서 입으로는 위안을 주는 척 했지만, 속으로는 ‘그러게 학교 다닐 때 공부 좀 하지.“ 라던가 ’너도 참 구질구질하게 산다.‘ 라고, 나와 달리 그렇게 살아가는 그를 나보다 열등하다고, 한심하다고 생각을 한 적이 없다고 내가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정말로 그 녀석을 나와 동등한 위치로 생각하고 있었을까? 그 만큼 그 녀석을 내 마음속으로 친구로 ‘존중’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그런 나의 본심을 녀석은 정말 알지 못했을까?“
그렇게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던 그가 잠시 말을 멈추고 어두운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고 한숨을 쉬었다.
“더 나이가 들고, 그래도 좀 생각하는 게 깊어지면서 그제서야 불현듯 어느 날 문득 생각이 들더라.
그 녀석을 만나면서 또 그런 그를 보면서 내가 상대적 우월감을 느낀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런 순간순간을 즐긴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너 참 안됐다.’ 하면서 ‘쯧쯧‘하고 혀를 차면서 그에 비해서 나의 더 나은 현실을 그에게 은근히 자랑하면서 과시한 것은 아닐까?“
“.......”
“그리고 사실, 그것이 바로 내가 녀석을 친구라는 미명하에 내 옆에 두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나에게 우월감을 주는 녀석, 항상 나의 존재를 부각시켜주는 녀석, 내가 친구라고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하는 녀석... 너는 그것이 진정한 ’우정‘ 이라고 생각하니?”
그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그의 과거사를 늘어 놓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녀석과 내가 친구가 된 것은, 살아온 배경이나 가치관이 비슷한 이유도 아니었고, 취미나 삶의 목표에 공통점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단 한가지....성정체성이 ‘게이’ 라는 것 이외에는 그 녀석과 내가 같은 공간에서 친구라는 인연을 맺고 지낼 이유가 없었어.
게이가 아니었다면 결코 공존이나 양립할 수 없는 사이였겠지. 친구사이는 고사하고 말이다.”
“.......”
“그와 대화를 하면서도 ‘정말 너와 나는 공통점이란 전혀 없고 사는 세계도 너무 다르구나’ 하는 생각을 자주 했으니까.”
“.........”
나와는 상관없는 그의 그런 말에 갑자기 피곤함이 몰려왔다. ‘그래서 날 더러 어쩌라구. 왜 내가 너의 그런 과거사를 들어줘야 하는건데..’
“어느 날 술 자리에서 술에 취한 녀석이 문득 그런 말을 했었다.
‘친구들과 같이 있어도 마치 혼자 있는 것 처럼 외롭다’고...... 난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인간은 외로운 동물이라는 무의미한 말을 했다.“
그가 말을 멈추고 창밖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나중에서야 가끔은 그런 생각을 했다.
그 녀석에게 나는 뭐였을까 하고 말이다. 아무리 내가 아닌 척 행동을 했다고 해도, 순간순간 그 녀석이 느꼈을 나와 그 녀석의 거리감을, 한참 힘든 구덩이에서 발버둥 칠 때, ‘친구’ 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만나서 위로하는 척 하면서 은근히 자기 잘난 체를 하던 나를 보면서 그 녀석은 정말로 위안을 받았을까? 아니면 오히려 더 극복하기 힘든 현실에 좌절감만 키우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그가 말을 멈추고 고개를 다시 나에게 돌리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해 내 앞에 놓여진 커피잔을 내려다 보았다.
“그 녀석이 군대를 갔다 온 후에 겨우 스물 두셋 정도의 나이에. 지금 내 나이 또래의 나이 든 사람과 사귄 적이 있다고 말을 했었다. 말할 수 없이 좋아 했는데, 자신에게 키우던 강아지 한 마리만 덜렁 남겨둔 채 그 사람은 교통 사고로 죽었다고 했다.
그 녀석이 맡아서 그렇게 기르던 그 개가 죽은 후에 그 친구는 그 남자의 유품을 묻어놓은 옆에 같이 묻었다. 유품이라 봐야 기껏 그 남자의 양말하고 신발이었지만...“
“........”
“가끔은 그런 그 남자를 생각하면서 눈물을 짜는 그 녀석을 보면서, 괜찮다고, 더 좋은 사람을 만날거라고, 인연이 아니었을 뿐이라고 위로의 말을 해 주었다.
그런데, 정말 내가 그 녀석에게 건넨 것이 위로였을까? 그 녀석과 헤어지고 난 후에, 그때 애인하고 그 녀석의 등 뒤에서 ‘정말 구질구질하게 가지가지 한다.’ 라고 내가 내 뱉은 말을 아직도 기억한다. ‘발에 채이는 게 젊은 사람들인데 무슨 이유로 그렇게 나이 든 사람을 만났을 까’ 하고 내 애인에게 물었었지.
내 애인이 이렇게 말 했던 것을 기억한다. ‘서로 좋은 거지, 그 녀석은 공짜로 데이트를 하고 용돈 받고, 그 늙은이는 젊은 놈의 매끈한 살 맛좀 보고...’
그렇게 말하면서 우리는 키득 거렸다.“
그의 말에 나는 슬며시 고개를 돌려 그를 보고는 다시 창 쪽으로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런데 말이다. 어느 해, 크리스마스 날에, 그 녀석이 우리를 데리고 허름한 술집으로 데리고 갔지. 그 아저씨가 자주 갔던 곳이라고 하면서 말야.
그곳에서 맥주잔을 손에 든 그 친구 녀석의 눈에 눈물이 맺히는 것이 보였다.
당황한 나는 그 친구를 빤히 바라보았는데, 자신의 연인이었던 그 아저씨를 회상하는 말을 읊조리던 그 친구의 표정에 비치는 그 애틋함과 고통이....“
그가 다시 한번 말을 멈추고 낮은 한숨을 쉬었다.
“그런 그 녀석의 모습이 나에게 충격으로 다가와서, 그제서야 그 녀석의 진심이 느껴진 나는 철 없던 나와 내 애인이 친구랍시고 위로하면서도 그 녀석의 등 뒤에서 한 말이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그가 고개를 들고 빤히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네 또래일 때, 그 친구 녀석은 그저 자기 말을 넉넉하게 들어 줄 친구가 필요했던 것일 지도 몰라. 아니 확실히 그랬을 거다, 그런데, 그때의 나는 잘난 내 멋에 사는 것에만 집중했다. 녀석은 그저 나의 삶의 악세사리였다. 심심풀이 땅콩이었고, 솔직히 말하면 친구라기보다 충실한 부하 정도로 녀석을 대했을 거야.”
“.........”
“다른 의도 없이 녀석의 말을 들어주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는데...... 그 녀석이 원하는 것은 잘난척하는 나의 충고도 아니고 동정을 원한 것도 아니고 그저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필요했을텐데..... 그래서 친구라는 나를 찾았던 것일텐데... 친구라는 미명하에 녀석을 대하던 나는 녀석에게 기본적인 공감조차 해 주지 못했다.“
“........”
“우영이를 알게 된지도 거의 일년이 다 되어가는 것 같은데 말이다.”
“.......”
“그 녀석을 보면 예전에 나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아니 틀림없이 과거의 나였다. 매너 있는 척, 겸손한 척 하면서 슬며시 타인을 통해서 자신의 우월감을 즐기면서 자부심을 느끼는 부류이지.....”
“......”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말이다.”
그가 말을 멈추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네가 보아왔고 생각하는 그런 우영이의 이면에는 많은 다른 가리워진 부분이 있다는 거다. 지난 일년동안 나는 그런 녀석을 보고 겪어왔다. 네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이상으로 나는 녀석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어. 물론 겉보기에는 녀석은 어디하나 흠잡을 곳이 없는 녀석처럼 보이지. 하지만 그것은 그냥 녀석이 보여주는 부분일 뿐이다. 그 속에 숨어있는 녀석의 본 모습은 네가 알고 있는 것과 많이 다르다.”
“.......”
“결코 나는 녀석과 감정적으로 엮이지 않을거다. 그리고 녀석도 그것을 뻔히 알고 있다.”
그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취해서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인지, 취한 그가 횡설수설하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 둘 다 서로 다른 언어로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럼....”
말을 마치고 창밖을 향하던 그의 시선이 다시 나에게 돌아왔다.
“그렇게 우영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 꼬박꼬박 녀석이 자리하는 모임에 와서 시간을 보내는 형은 뭐에요?”
“........”
“그렇게 우영이를 속속들이 잘 안다면서.... 그렇게 우영이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으면서도 항상 녀석의 주변을 지키고 있는 형을 이해할 수가 없네요.”
그가 나를 빤히 보고는 어두운 표정으로 입가에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나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이중인격자로 보일수도 있을 것이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어떤 일은 내 눈에 보이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겠니?”
“.......”
“처음부터 확실히 알아차리고 있었는데도 미궁에 발을 들여놓은 나의 탓이 가장 크다는 것을.... 그런 나의 경솔함을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오늘 내가 한 말을 네가 그냥 흘려버리지 말고 마음속에 두길 바란다.”
어두운 표정으로 나를 빤히 보던 그가 다시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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