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이야기] 그 날, 그 부대에서 -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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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기차가 덜컹거렸다.
오늘도 눈부신 가을햇살이 내려쬐는 대전행 열차를 나와 해성이 형은 타고 있었다.

해성이 형을 바라보자, 형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상병 약장이 달린 전투복을 입은 형은 오늘도 정말 귀여웠다.
사실 꾸벅꾸벅 졸 만도 하다.
어제 이런 저런거 하느라 잠을 좀 적게 잤으니까.


생각해보면 아침부터 난리였다.
커튼을 전부 다 쳐두고 잔 탓에, 우리는 오전 10시쯤에나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형!!”

나는 해성이 형을 흔들어 깨웠고,
형은 눈을 한껏 부비면서 기지개를 펴다가 나를 꼭 끌어안고는 다시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형 아침 열시야 벌써.”
“응…… 10분만 더 자자…… 너무 졸려…….”

그리고는 머리 끝까지 다시 이불을 올려놓고는 나를 꼭 끌어안는 형.
으으 정말 뭐라고 할 수도 없고……

복귀자는 저녁 6시 전까지는 부대를 복귀해야 했다.
그러니까 서울에서 대전까지 대충 두 시간 조금 덜 걸리는 걸 생각하고, 밥먹고 이동할 거 생각하면 대충 오후 한 두시에는 출발해야해……

그치만 나도 피곤했었고,
그날 새벽에는 둘 다 한 번으로는 안돼서 두 번씩 서로 난리도 아니었어서…….
새벽 네시쯤에나 나가 떨어져 잠들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우리 둘은 오후 한 시 쯤에나 체크아웃 시간에 맞춰서 나갈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카운터의 여직원 목소리를 뒤로하고 우리는 모텔을 나왔다.
복귀를 해야 했기에 우리는 전투복 차림으로 나가게 됐는데,
군인 두 명이 같이 나가는 것을 뭔가 이상하게 생각하는지 카운터 여직원 분이 뭔가 따갑게 뒤통수에 자꾸 시선을 보내는 것이 느껴졌다.
키를 반납할때까지도 그걸 지긋이 지켜보는 느낌이 들었다.

“뭔가 이상한가…….?”
“군복 차림이라 그런 거 아닐까?”
“하긴 또 그렇기도 하겠다.”

근데 뭐 어쩌겠어, 하면서 해성이 형은 밖에 나와서 기지개를 쫙 한 번 폈다.
정말 짧아도 너무 짧은 이틀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밥을 먹고 못내 아쉬운 감정을 뒤로 하고 대전행 열차를 탔다.
열차에서도 꽉 잡은 해성이 형의 손이, 너무나도 믿음직스러웠다.
꾸벅꾸벅 졸면서도 내 손은 절대로 놓지 않는 그 손.

대전역에서 내려 우리는 버스터미널로 이동했다.
마지막으로 대전역을 나오면서 나는 우리가 출발했던 지점인 대전역의 대합실을 다시 한 번 돌아보았다.
왜 대합실이 그렇게 기억에 남는걸까?
고작해야 표 파는 곳일 뿐인데.
많은 사람들과 엇갈려 지나치면서, 그런 풍경을 눈에 담았다.

“뭐해?”
“아……. 음…….”

뭔가 알 수 없는 느낌에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러고보니 슬슬 바꿔놓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도 했었지.
나는 그걸 실행하기로 했다.

“나 이제 다시 존댓말 써야할 거 같아.”
“아직 부대 갈려면 멀었는데…….”

내가 그렇게 단호하게 말하자, 형은 못내 아쉬운 듯이 말 끝을 흐렸다.
그렇지만 그것도 잠시, 형은 이해한다는 뜻의 끄덕임을 나한테 전해왔다.

“실수할까봐 그러는거지?”

나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형은 내가 말을 하면 한 다섯 수 앞을 보고 얘기하는 것 같았다.
그만큼 눈치도 빠르고, 이해심도 깊다.

형은 그런 나한테, 잠시동안의 작별같은 쓰다듬을 했다.

“부대 안에서 자주 못해줄 거 같으니까. 지금 좀 해줄게.”
“ㅋㅋㅋㅋ 남들 안 볼때 자주 하잖아.”
“그게 무슨 자주야 ㅋㅋ”
“나 이러다가 탈모 생기면 형 때문이야.”
“헐 왜 그게 내 탓이야.”
“몰라 아무튼 형 때문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우리는 한참을 웃었다.
역 근처에서 대전의 명물이라고 불리는 성심당에 들러서 우리는 튀김 소보로 한 쌍을 샀다.
밥을 먹고 들어가기에는 시간이 어중간했고, 배도 그렇게 고프지 않아서 우리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튀김 소보로를 대합실에 앉아서 먹었다.
바삭한 식감 안으로, 달콤한 통단팥이 느껴지는 나쁘지 않은 맛이었다.

“또 휴가 쓸 수 있으면 좋겠다.”
“아니면 급하면 외박이라도 같이 나가면 되지.”
“외박은 소대원들이랑 같이 나와야 되잖아. 아니면 따로 써야되고.”

벌써부터 다시 나올 궁리를 하는 해성이 형은,
정말로 부대에 들어가기 아쉬워 하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둘 다 군인이라서 맨날 보고사니까 그건 좋다.”

헤헤 하고 웃는 해성이 형의 얼굴은 어제 막 올라와서 보던 것 보다 훨씬 환해져 있었다.
말투도 표정도 그대로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이 사람이 나를 더 편하게 생각하게 됐다는 걸.

“맞아. 안 그랬으면 일과 끝나고 맨날 전화해야 했을 걸.”
“그것도 그렇네 ㅋㅋㅋ”

형은 옆 자리에서 피식 웃으면서 얘기했다.
그렇게 우리는 아무렇게나 떠들면서 부대까지 이동했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은 거의 다섯시 반,
우리는 저만치 멀리에 아슬아슬하게 위병소가 보이는 곳까지 걸어왔다.

“이쯤이면 안보이겠지?”
“아마도 ㅋㅋ”

나는 대충 형이 뭘 할지 짐작이 갔기에,
그렇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 없이, 형은 나한테 고개를 기울여서 입을 맞췄다.
살짝 입술이 적셔지는 가벼운 키스.
그 키스에는 이번 휴가때 다 못한 아쉬움이 끝끝내 묻어있었다.

“ㅋㅋ 가자.”
“예.”

내가 드디어 존댓말을 쓰기 시작하자, 정해성 상병님은 조금 놀란 것 같았다.
그런 형한테 나는 고개를 끄덕여서 괜찮음을 보여줬다.

“슬슬 써야합니다 존댓말 ㅋㅋ”
“어우…… 적응안된다.”
“정해성 상병님도 슬슬 일코해야됩니다.”
“일코? 그게 뭐지 먹는건가 ㅋㅋ”
“일반인 코스프레 말입니다 ㅋㅋ”
“몰라 ㅋㅋ 내가 그걸 몰라서 물어본게 아니잖아 ㅋㅋㅋ”

그렇게 정해성 상병님은 늘 그렇듯 당차게 위병소 문을 통과했다.
위병소 근무자는 강혁 상병님과 나랑 동기였던 2소대 녀석이었다.
강혁 상병님은 이쪽을 슬쩍 보더니,

“휴가 복귀야?”
“예.”

그렇게 물어오는 질문에 정해성 상병님이 대답했다.

“기분 되게 좋아보이네 해성이.”
“딱히 별 일 없습니다.”
“으음? 뭐 알겠어. 들어가 봐.”

우리는 위병소를 통과해서 부대 안으로 복귀했다.
늘 여느때와 다름없이 부대는 한적하고 조용하고 변함이 없었다.
일과시간이 끝나서 공을 차고 있는 부대 사람들…….
휴가 복귀 보고를 하러 들어간 상황실 너머로 보이는 늘 야근중인 원준이……
그러고보니 못 보던 애 하나가 있는데 쟤가 그 들어왔다는 신병인가보다.
아마도 주말 끝나고 내일 쯤 얘기해보면 되겠지.

나는 주머니 속에 만져지는 자그마한 자물쇠를 꺼냈다.
그 곳에는 우리 둘의 군번줄 인식표가 짤그락 소리를 내면서 같이 걸려 있었다.
내심 보면서 기분이 좋았다. 사람들이 커플링을 왜 하는지 조금 알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다음 휴가때는 좀 더 계획을 세워서 와야겠다.
그렇게 다짐하면서 나는 다시 부대에 몸을 적응시키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꾸만 너무 귀여운 정해성 상병님이 눈 앞에서 지워지지가 않는다…….
정상적으로 부대생활 가능할까 난…….?



- 25.

고작 5일 정도 부대를 비웠을 뿐인데, 부대에서는 꽤 여러가지 변화가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드디어 내 후임병이 왔다는 거다.
중대 후임병도 하나 생겼고, 그리고 작전과에도 똑같이 동기인 신병 하나가 와 있었다.

복귀한 생활관에는 한인혁 일병님이 어리버리한 신병 한 명을 데리고 이런 저런걸 알려주고 있었다.
사실 막 휴가에서 돌아온 터라 그다지 신경쓰이지 않았지만…… 아니 신경 쓸 겨를이 없다고 해야하나.

나와 정해성 상병님이 같이 생활관으로 들어오자,
한인혁 일병님은 살짝 놀라면서 우리를 맞이했다.
그런 한인혁 일병님에게 정해성 상병님은 쓱 하고 뭔가를 내밀었다.

“자.”
“이게 뭡니까?”
“선물.”

비록 뭔가 굉장히 성의없는 갈색 박스긴 했지만,
정해성 상병님은 무심한 듯이 그렇게 던지다시피 한인혁 일병님에게 박스를 주고는 가져온 짐을 정리하기 시작하셨다.
사실 짐이라고 해봤자 거의 빨랫감밖에 없지만……

“와 이거 어떻게 아셨습니까?”

한인혁 일병님이 뜯은 박스에서는 티슈형 섬유유연제가 나왔다.
생각해보니 저건…… 내가 나가기 전에 한인혁 일병님한테서 대신 좀 사달라고 부탁을 받았던 물건이었다.
인터넷 주문하기도 귀찮은 물건이고 해서 마침 내가 나가고 하니 사오라고 했던 건데…….
너무 미안하게도 나는 저걸 완전히 송두리째 까먹고 있었다.

“너 보현이한테 부탁했다면서.”
“예 맞습니다.”
“뭐 필요하면 나한테 말해.”

그냥 단지 카페에서 주절거리면서 했던 것 중에 한인혁 일병님 얘기가 나와서,
생각해보니 이거 사오라고 했었어 ㅋㅋ 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걸 캐치를 한건 둘째치고 대체 언제 산거야……? 샀더라도 어제 샀을건데 내내 같이 있었잖아.

나중에 나는 생활관 청소시간에 한인혁 일병님이랑 그 건에 대한 얘기를 하게 되었다.

“나 진짜 깜짝 놀랬어 ㅋㅋ”
“뭐 말입니까?”
“섬유유연제 ㅋㅋ”
“아 그거 저도 놀랐습니다. 사실 까먹어서 죄송하다고 할려고 했는데……”
“까먹어도 돼 그런건. 아무튼 요즘 정해성 상병님 뭐 잘못먹었나……?”

그건 아닐겁니다 라고 대답하면서 나는 피식 웃었다.
그런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한인혁 일병님.

“너 그 혹시……”
“…….?”
“너도 막 그 그런거야? 아버지가 엄청 고위 공무원이시거나 뭐 그런.”
“아닙니다.”
“아니면 그 뭐야 정해성 상병님 친척이야?”
“아닙니다 ㅋㅋㅋ 그런쪽으로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뭐야 그럼……”

끝끝내 고개를 갸웃하다가 나한테서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고 실망하는 한인혁 일병님.
그런 뒷모습을 신병은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 맞다. 이름 뭐야?”
“이병 김한영!”
“아 여기서는 병사들끼리 경례 잘 안해. 그거 안해도 돼 ㅋㅋ”

나는 문득 이등병때 생각이 나서, 동그란 안경을 끼고 머리를 빡빡 민 한영이를 보고 기분이 살짝 풀어질 수 밖에 없었다.
이 애도 나랑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겠지.
최대한 무섭지 않은 선임이 되어야 겠다, 뭐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주말이 지나고,
나는 월요일에 작전과로 정상 출근을 했다.
늘상 그렇듯 간부인데도 왜 병사보다 일찍 출근을 하는 지 정말 모르겠는 과장님이 자리에 계셨다.
엄청난 담배연기 속에 말이다.

“다녀왔냐?”
“예.”
“어유 잘 먹어서 그새 살이쪘네.”
“아닙니다 ㅋㅋ”

그런 나한테, 과장님은 쓰윽 시선을 돌려서 내 자리 옆 테이블에 앉은 사람을 바라봤다.
당연히 나도 똑같이 시선을 돌렸고, 그 끝에는……

“니 쫄병 들어왔다. 인사해.”

나보다 조금 큰 키, 대충 175 정도는 될 것 같은 느낌.
왠지 작전과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이상하게 훤칠한 느낌의 신병은 황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시선이 맞닥뜨렸다.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새로 온 신병의 얼굴은 뭔가 놀라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고,

“이병 한진수! 어제 작전과 처음 들어왔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뭔가 이등병이라기엔 너무 정확한 발음으로 나한테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목소리 탓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이상한 위화감이 들었다.

“앞으로 보현이 너가 하는 일 중에 교육파트만 인수인계 해주면 돼. 쟤가 이제 교육업무 할거니까.”

뒤에서 과장님이 모락모락 담배구름을 만들면서 얘기하셨다.
즉슨……. 얘가 그 빈 PC의 주인이라는 것이군.
내 오른쪽 자리의 PC는 원래는 편제상 있었어야 할 ‘교육병’ 이 쓰는 PC였다.
하지만 선임들이 다 전역한 상태로 나랑 원준이만으로 굴러가는 작전과에서, 교육업무는 내가 거의 다 도맡아서 하고 있었다.
사실 전부 다 하고 있는지 어떤지는…… 인수인계 해주는 사람도 없어서 아무도 모르지만.

“예 알겠습니다.”
“원준이는 어디갔냐?”
“모르겠습니다. 찾아옵니까?”
“냅둬라. 조금 늦나보네.”

그렇게 과장님이 말하자마자 작전과 문이 벌컥 열렸다.
헐레벌떡 뛰어온 원준이는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있었다.

“뭐하다가 이렇게 늦었어?”
“아닙니다 그…… 생활관에 뭐좀 가지러 갔다가 늦었습니다.”
“그래 알았다. 업무해.”
“예.”

그리고는 그제서야 원준이는 나랑 신병…… 진수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나를 보고는 무척 반가운 표정을 지어주는 원준이.

“와 보현이다!!”
“조용히 해 ㅋㅋ”
“휴가 어땠어?”
“뭐…… 괜찮았어 ㅋㅋ”
“야 얼굴도 확 펴고 완전 좋았나보다 ㅋㅋ”
“몰라 ㅋㅋ 일이나 해.”
“ㅋㅋㅋ 알았어 나중에 물어볼게.”

나랑 간단한 잡담을 마치고는 원준이는 업무를 시작했다.
과장님은 잠깐 어디론가 나가시는 것 같았고, 그 틈에 나는 새로온 신병에 대한 호구조사를 시작했다.

“고향이 어디야?”
“부산입니다.”
“오 나랑 같네. 대학교는?”
“XX대학교입니다.”
“오 거기 우리 학교 근처야.”
“혹시 거깁니까? 그 ㅇㅇ 대학교?”
“어 맞아 ㅋㅋ”

나는 그런 간단한 잡담을 하면서 진수의 긴장을 조금 풀어주려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말하는데도 진수는 이상하게도 표정이 살짝 굳어있었다.

“그렇게 긴장 안해도 돼.”

나는 그렇게 넌지시 말했다.
진수는 대답 대신에, 내 전투복 오른쪽에 이름을 유심히 보는 것 같았다.

“혹시 성함이……. 김보현 일병님 맞으십니까?”
“어 맞아.”
“그…… 혹시……”

그렇게 진수는 약간의 뜸을 들이고는 뭔가 이상한 얘기를 했다.

“저희 혹시 어디서 본 적 없습니까?”

그제서야 나는 진수가 나를 그렇게 유심히 쳐다본 이유를 알게 됐다.
그나저나 이름까지 봤는데도 나를 알아본다는 것은 정말 나를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나는 진수같은 얼굴 상을 본 적이 없다. 적어도 아는 사람 안에선 말이다.

“나는 잘 모르겠는데…… 착각한 거 아냐?”
“아…… 죄송합니다.”
“죄송할 건 없어. 동향사람이라 착각할 수도 있지.”
“아닙니다. 그냥 아는 분이 너무 똑같은 이름이고 외형도 비슷하셔서 같은 분인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머쓱해하면서 진수는 당황해 했다.
당황하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듣자하니 진수는 원준이랑 동갑이라는 것 같았고,
그래서 나이도 당연히 두 살이나 차이가 났다. 학교 동창일 리도 없다.
그러면 그 외에는 내가 알 사람이 없을텐데……
하지만 나는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기로 했다.

일단 나는 진수에게 간단하지만 하는 사람은 피말리는 전화받기를 연습시킬 겸 시켜놓고,
늘상 하는 업무를 시작했다.

사람이 한 명 추가되긴 했지만,
작전과는 여전히 평소랑 너무나도 다를 것이 없었다.
상급부대에서 간부를 찾는 전화에 매번 쩔쩔 매면서 전화받는 진수.
오늘도 수많은 CD와 저장매체에 둘러싸여서 헤롱거리는 원준이.
다른 처부들한테 거의 반 협박수준의 부탁을 해가면서 억지로 일지를 종합하는 나.
그냥 너무나도 평소같았다.

누군가 낯익은 사람이 작전과 문을 기웃거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한창 일지를 모으러 각 처부를 돌아다니다가,
나는 복도 앞에서 또 이상한 그림자가 작전과 문 앞을 서성이는 것을 보았다.
뭐 이젠 이상할 것도 없다. 그건 정해성 상병님이었다.

“뭐 하십니까.”

눈치 못채게 슬쩍 다가간 나는 정해성 상병님 뒤에서 나지막하게 그를 불렀다.
화들짝 놀란 정해성 상병님은 뒤를 돌아보더니 그제서야 가슴을 쓸어내리는 것 같았다.
ㅋㅋㅋ 아니 저렇게 또 귀엽게 놀랄 건 뭐야.

“야…… 누가 그렇게 놀래키래.”
“그냥 놀라는 정해성 상병님 보고 싶었습니다.”
“진짜 ㅋㅋㅋ 개짬이 못하는 말이 없어.”

누가 들을새라 소곤소곤 말하는 정해성 상병님의 볼을 나는 푹 찌르고는 그대로 냅다 PX로 도망갔다.
일병쯤 돼서 나는 이제 과장님 눈치만 잘 보면 PX정도는 그냥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이것도 어째보면 난 야근하느라 내 자유시간을 많이 뺏기니까 어느정도 정당성은 있지만 말이다.

“이 시간에 어째 막사에 계십니까?”
“중대장님 심부름 왔어. 미니버스 잠깐 부대 들른다길래 타고 왔지.”

PX에서 정해성 상병님은 익숙한 손길로 아이스크림을 꺼내면서 얘기했다.
정해성 상병님은 날씨가 제법 쌀쌀한 10월 말인데도 아이스크림을 여전히 놓지 않고 있었다.

“잠깐 여기서 좀 기다리겠습니까?”
“왜?”
“저희 신병왔는데 얘좀 원준이한테 맡겨놓을려고 그럽니다.”
“뭐야 그럼 같이가. 과장님 안계시잖아.”
“ㅋㅋㅋㅋ 원준이가 눈치챕니다.”
“원준이 정도야 괜찮지 않냐?”
“그것도 그렇긴 합니다….ㅋㅋㅋ”

확실히 원준이는 워낙 철도 없는데다가 마음가는대로 행동해서 내가 적절히 잡아주면 막 뭔가를 떠벌리고 다닐 애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캔 커피 두 개를 더 사들고 정해성 상병님이랑 같이 처부 사무실로 향했다.
다행히도 우리 부대 PX는 처부 사무실들이 모인 복도 한 가운데 있어서 그렇게 가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작전과 문을 열고, 나는 과장님이 안 계신지 확인하고 원준이와 진수에게 커피를 하나씩 나눠줬다.

“진수야 얘랑 잠시 붙어있어.”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나는 진수에게 말하고 쓱 원준이 쪽을 쳐다봤다.
원준이는 이미 문 근처에 벽을 살짝 기대고 딴청 중인 정해성 상병님을 발견한 지 오래인 모양이었다.
놀랍게도…… 정해성 상병님은 그걸 보더니 원준이한테 다가와서는,

“수고 많네.”

하고는 어깨를 툭툭 치고는 지나가는 거였다.
나도, 원준이도, 아무것도 몰랐겠지만 진수도 그 장면을 벙찌게 쳐다볼 뿐이었다.

저 만치 정해성 상병님이 떨어지자, 그제서야 원준이는 정신을 차리고는 나한테 얘기를 했다.

“나도 저런 분대장님 줘라.”
“안돼.”
“치사하네…… 그럼 올때 PX에서 마실거 사와줘.”
“돈 주면.”
“완전 치사해……”
“나 돈 없어. 휴가때 다 써서 ㅋㅋ”
“알았어 ㅋㅋ 갔다와.”

나는 그렇게 사무실을 원준이랑 진수에게 맡겨두고 잠시 빠져나왔다.
내가 나올떄쯤엔 또 전화가 한 통 걸려와서 진수가 진땀을 뺴고 있었다.
약간의 연민의 감정을 품고, 나는 정해성 상병님이랑 다시 PX로 향했다.

“아니 아까 그거 뭡니까.”
“뭐가 ㅋㅋ”
“원준이 어깨 친거 말입니다.”

그렇게 다급하게 물어오는 나한테, 형은 피식 웃으면서 슬쩍 곁눈질을 했다.

“뭐야. 질투해?”
“아니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ㅋㅋㅋㅋㅋㅋ”
“뭐야 그럼 ㅋㅋ”

흐응, 하고 쳐다보는 정해성 상병님.
정말이지 저런 능글맞은 표정을 찍어서 부대 게시판에 붙여놓고싶다……

“으……. 됐습니다. 암 것도 아닙니다.”
“표정이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데?”
“ㅋㅋㅋㅋㅋㅋ 아 진짴ㅋㅋㅋㅋ 정해성 상병님 넘 밉습니다.”
“넌 맨날 내가 밉다더라…… 서러워서 살겠나 진짜…… “

그렇게 PX에 앉아서 우리는 오붓하게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비록…… PX병이 있어서 단 둘의 오붓한 시간은 아니었지만,
일과시간에 정해성 상병님 얼굴 한 번 보는게 난 정말 너무 좋았다.

“너는 왜 아이스크림 먹어.”
“정해성 상병님이 먹길래 그냥 먹는 겁니다.”
“뭘 그런걸 따라해 ㅋㅋ 그냥 너 먹고싶은거 먹지.”
“아닙니다 ㅋㅋ 아이스크림 맛있습니다.”
“ㅋㅋㅋ 바보네.”

그렇게 잡담을 떨면서 앉아있자, 뒤에서 PX병이 조금 이상한 듯이 쳐다봤다.
뭐 일단은 일과시간이기도 했고, 게다가 저 PX병은 오며가며 모든 사람한테 입이 가볍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나보다 4개월 선임이라서 내가 어떻게 할 방법은 없었지만.

“이 시간에 어떻게 막사에 계십니까?”
“뭐?”

PX병이 무척 가볍게 물었는데, 정해성 상병님은 순식간에 표정을 싹 굳히고는 정색을 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싶을 정도였긴 했는데,
하지만 정해성 상병님이 굳힌 얼굴은 정말 딱 예전에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이 사람…… 나한테는 엄청 노력하고 있는 거였구나……

“그냥 3중대원들 전부 오늘 나가길래……”
“너 우리 중대냐?”

뭔가 말 끝을 길게 흐리는 PX병의 말을, 정해성 상병님은 싹둑 자르고 되물었다.
여기서 나는 본부중대와 3중대간에 있는 약간의 마찰?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서로 도와주되, 하는 일에 대해서 간섭은 일절 하지 않는 암묵적인 선 말이다.
PX병은 할 말이 없는지 그대로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조금의 정적이 이어지고,

“우리 중대가 뭘 하든 넌 니 일이나 해.”
“예……”

그리고는 그대로 PX병은 조금 빡친 표정으로 포스기에 시선을 돌렸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PX병은 저걸로 인터넷에 접속해서 웹툰같은 걸 볼 수 있는 모양이었다……
아마 분명히 그때도 그런 걸 보고 있었겠지.

“신병은 어때.”

조금 정적이 흐르고, 정해성 상병님은 나한테 그런 걸 물었다.
신병? 소대 신병…… 한영이 말하는 거면 주말 말고는 제대로 이야기 걸 시간도 없었다.

“한영이 말씀하시는 겁니까?”
“어. 너가 가르쳐야 될 거 아냐. 인혁이가 전부 다 하기는 좀 그래.”
“아직 말도 제대로 못 걸어 봤습니다……”
“으이구……”

정해성 상병님은 뭔가 말을 아끼는 느낌이었다.
아마 평소 습관대로라면 이 대목쯤에서 내 볼을 꼬집었겠지.
하지만 오늘도 당연하다시피 야근이 잡혀 있고, 내일은 뭐 어떻게 할 수도 없이 상황근무고, 모레는 오침만 주구장창 할 것이다…… 신병이랑 얘기할 시간이 없어…….

“걱정돼서 하는 얘기야. 너무 중대 사람들이랑 멀어지는 거 같아서 요즘.”
“음…….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는거면 저도 신경쓰겠습니다.”
“어…… 그래.”

그리고는 정해성 상병님은 메모장이랑 펜을 쓱 꺼내더니 한 장을 찢어서 뭔가 썼다.
내가 뭐라고 알아보기도 전에 정해성 상병님은 그 종이를 쪽지처럼 접어서 나한테 건넸다.

“미니버스 곧 출발이라. 가 볼테니까 마저 먹고 들어가.”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정해성 상병님은 자리를 정리하고 떠났다.
덩그러니 PX병과 나만 남은 PX는 텅 빈 하얀 테이블만 있을 뿐이었다.

“보현아~”

뒤에서 PX병 선임이 부르는 소리가 났다.

“예.”
“정해성 상병님이랑 얘기 자주해……?”

그는 뭔가 머뭇거리면서 얘기했다.
나는 무슨일인지 영문을 몰라서 그냥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럼 죄송하다고 잘 좀 전해줄래? 일 커지는거 싫어가지고……”
“직접 하시는게 더 낫지 않습니까?”
“아 물론 직접 사과는 당연히 하지. 근데 정해성 상병님이 나 엄청 싫어하실까봐……”
“아…… 잘 모르겠지만 일단 얘기는 한 번 해 보겠습니다.”
“고맙다……”

소심하게 그렇게 말하고는 PX병은 다시 시선을 포스기로 돌렸다.
나는 조금 잘 모르겠다는 느낌으로, 아까 받은 접힌 쪽지를 펼쳐 보았다.

‘일과 끝나고 막사 뒤편’

빠르게 휘갈겨 쓴 것 같은 글씨체가 날림으로 적혀있었다.
그걸 그렇게 써야 했나 싶기도 했지만…… 나름 그렇게 고심해서 적었을 정해성 상병님 생각에 저절로 피식 웃음이 지어졌다.


그래서 일과가 끝나고 해가 다 져서 어둑어둑해진 그때.
나는 아무도 없는 어두운 계단참에서 정해성 상병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지나지 않아서 정해성 상병님이 멀리서 터벅터벅 걸어오는 것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왜 이렇게 빨리왔냐 ㅋㅋ”

작은 목소리로, 하지만 주변이 너무 조용해서 잘 들리는 그런 목소리로 정해성 상병님은 얘기했다.

“별로 오래 안기다렸습니다 ㅋㅋ”
“뭐야 ㅋㅋ 여기서까지 존댓말 써?”
“부대에서는 안 됩니다. 진짜 큰일납니다 들키면.”
“알았어 ㅋㅋ 의외로 이런 부분에서는 엄격하네.”

정해성 상병님은 그런 볼멘 소리를 했고, 나는 별 수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이게 다 제가 개짬이라서 그렇습니다……”
“맞아. 너가 개짬이라서 그런 건 맞는 듯.”

ㅋㅋㅋ 하고 웃는 정해성 상병님.
그런 그의 옆구리를 나는 장난스럽게 푹 찔렀다.

“아파 ㅋㅋ 진짜 요즘 나 너무 많이 때리는 거 아냐?”
“맞을 짓을 하신다고는 생각 안하십니까?”
“너무하다 진짜……”
“어지간히 얄미워야지 말입니다.”
“ㅋㅋㅋㅋ 근데 이게 내 원래 성격인데 어쩌냐 ㅋㅋ”

피식 웃으면서 정해성 상병님은 쓰윽 하고 하늘을 올려다 보셨다.
같이 따라올라간 시선 끝에는 조금씩 차가워지는 겨울의 공기가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담배 안피십니까?”

문득 떠올라서, 나는 정해성 상병님에게 그렇게 물었다.
생각해보면 정해성 상병님은 늘 담배를 피고 있었다.
담배 종류도 기억난다. 프랜치 블랙.
그렇게 물어오는 나한테, 으쓱 하면서 정해성 상병님은 말했다.

“끊었어.”
“?? 언제부터 끊으셨습니까?”
“너랑 사귀고 나서부터?”
“……딱히 안 끊으셔도 됩니다.”

나는 뭔가 미안해진 마음으로, 정해성 상병님에게 말했다.
하지만 정해성 상병님은 이미 결단을 굳힌 것 같았다.

“넌 담배 안 피잖아. 나만 맨날 피우겠다고 그러는 것도 좀 그렇고, 애초에 담배 그렇게 많이 피지도 않아.”

그리고는 정해성 상병님은 내 쪽을 지긋이 바라봤다.
아니 또 갑자기 왜……

“그리고 키스할려면 내가 끊는게 맞지 ㅋㅋ”

이 말을 하고는, 정해성 상병님은 나한테 키스를 했다.
나는 누가 볼 세라 당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느낌에 그대로 몸을 맡겼다.

“진짜……”
“왜 ㅋㅋ”
“누가 보면 어쩔려고 그러십니까.”
“안봐 ㅋㅋ 누가 이 시간에 보일러실 앞에 와.”

정해성 상병님은 그렇게 어깨를 으쓱하고는,

“솔직히 일과 하는데 맨날 너 생각나서 집중이 안되더라고. 이렇게라도 풀어야지 ㅋㅋ”

그렇게 머쓱하게 웃는 정해성 상병님.
그런 그한테 나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얘기했다.

“저도 그렇습니다 ㅋㅋ 아까 솔직히 보러 안와주셨으면 좀 미칠 것 같았습니다.”
“그치? ㅋㅋㅋ”
“예…… ㅋㅋㅋㅋ”

진짜 어쩔 수가 없는 느낌이었다.
업무를 하려다가도 불쑥불쑥 지금쯤이면 정해성 상병님 밥먹겠네, 작업하겠네 하고 생각하는 스스로에 가끔씩 멍을 때릴때가 있었다.
그러다가 한 번은 옆에서 원준이가 ‘너 뭔 생각하냐 ㅋㅋ’ 하고 나한테 물어볼 정도로 헤벌쭉해 있었던 적도 있으니까……
아무래도 좀 더 조심하지 않으면 안되지만…….

“으이구 ㅋㅋㅋ”

그리고는 정해성 상병님은 나를 꼭 끌어안았다.
들킬까 조마조마 하면서도, 우리는 이런 일상이 계속 흘러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실 우린 들켜도 이젠 어쩔 수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는 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이게 너무 좋았다.
내 전부를 줘도 아깝지 않을 사람이, 이 사람 말고 존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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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작전과에 신병이 왔습니다 (의미심장)

댓글과 추천은 늘 감사합니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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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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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돼가서 덩달아 행복한데
작전과 신병으로 뭔가 얼켜 드나 걱정이 크네
작가님! 더  달달하게 해주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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