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너머를 달리는 그림자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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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상대가 나보다 강한가 약한가를 따져보는 것으로 인간관계를 시작하는 것이 가지고 있는 본능인 듯 싶다.
그리고 그런 본능에 충실한 것에, 나보다 약자를 짓밟고 그럼으로서 자신이 느끼는 우월감과 굴복한 상대를 경멸적인 눈으로 내려다 보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 것이 인생에서 인간이 느끼는 가장 큰 쾌락인 지도 모르는 일이다.
재호가 나를 괴롭히기 시작하기 훨씬 전부터 이미 우리 반의 허접한 양아치 두세놈은 나를 말 그대로 ‘물’로 보고 지냈다.
그런 부류의 녀석들은 사람을 한번 보기만 하면 우습게 알고 제멋대로 대해도 되는지 아닌지를 자연스럽게 가늠할 수 있는 더듬이를 가지고 있는 듯 했다.
나에게 일부러 시비를 건다거나 왕따를 시키는 건 아니었지만 그런 한두녀석이 은근슬쩍 내 책상위에 놓여있는 학용품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말없이 잠깐 한번 쓰려고 가져갔던 지우개부터 시작해서, 볼펜 한자루와 샤프가 되고 형광펜으로 옮겨가더니 급기야는 힘들게 구한 나의 문제집까지도 녀석들은 손을 대기 시작했다.
한두번은 내가 어디에 잘못두고 기억을 하지 못하는 듯 싶었다.
하지만 누구든지 확실히 눈에 띄도록 쓰여진 ‘한우진’ 이라는 나의 이름이 참고서의 표지에 나의 글씨체로 큼지막하고 선명하게 보이는데도 그 녀석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내 이름을 없애는 수고도 하지 않은 채, 마치 처음부터 자신들의 것인 양 뻔뻔하게 자신의 책상위에 올려놓았다.
아마 나는 그런 놈들에게는 그 정도로 우습게 알아도 좋은 그런 무녀리 같은 존재였던 듯 싶다.
내 옆의 친구녀석이 나보다 먼저, 그 놈들이 나의 것을 쉽게 가져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녀석은 분개했다. 나에게 가서 달라고 말하라고 했다. 왜 남의 것을 가져갔는지 따져보라고 내게 추궁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용기가 없었다.
나는 태생이 그저 주변의 눈치를 보면서 도망다녀야 하는 토끼새끼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런 나를 보면서 녀석은 안타까워했다.
그 당시 녀석은 나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유일한 친구였다.
재호의 눈치를 보면서도 녀석은 나에게 말을 걸어주고 사소한 일들을 도와주고 하교길에는 일부러 나를 골탕 먹이려고 맷돌이라도 집어 넣은듯이 정말 더럽게 무거운 재호의 가방을 어깨에 메는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굴욕감에 죽고 싶었지만, 날이 갈수록 그런 일에 익숙해졌고 또한, 처음에 그런 나를 보고 더러는 측은하다는 듯, 대부분은 킬킬거리던 그런 주변의 같은 반 녀석들에게도 흔해빠진 일이 되어버렸다.
우연히 그 놈의 어머니를 만난 적이 있었다.
2학기 중간고사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였다.
중고책방에서 힘들게 구했던 수학참고서가 또 다시 사라져 버렸다.
아무리 관리에 신경을 쓴다고 해도 슬쩍 남의 물건에 손을대는 놈들은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이번에도 수황이 아니면 윤식이 그 양아치같은 두 놈중 하나가 틀림없었다.
어렵게 참고서 얘기를 엄마에게 꺼냈지만 살 돈을 주실거라는 기대감은 처음부터 없었다.
뻔히 엄마의 입에서 나올 얘기를 알고 있으면서도 참고서를 살 돈좀 달라고 말을 꺼내는 내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대학은커녕 고등학교도 간신히 다니는 우리집 같은 형편에서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것과 같은 거였다.
상황은 항상 그랬다.
사실, 참고서를 살 필요가 없었다.
공부를 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인 세계였다. 그저 졸업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공장에 들어가 몸으로 때우는 기술을 배울 것은 내 앞에 놓여진 뻔한 길이었다. 이미 어렸을 때부터 그것을 나는 뻔히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인문계 고등학교를 진학했다.
고달픈 재호의 종놀이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나는 아침이면 그렇게 꾸역꾸역 등교를 했다.
그렇게 모든 일들이 뻔하게 흘러간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리고 내 힘으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치 아무 생각도 없는 것처럼 그렇게 늪을 향해 꾸준히 걸음을 옮겼다.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서는 나의 소매를 뒤에서 할머니가 슬며시 잡아 당기셨다.
“참고서가 얼마나 하게?”
서글픈 미소를 얼굴에 가득 담고는 뼈에 가죽만 남은 주름진 손으로 내 손을 잡으셨다.
“새건 만오천원인데 중고로 사면 만원까진 안될거야. 할머니.”
한숨을 슬며시 내쉬시고는 희미한 미소를 띄고 할머니는 나를 올려다 보셨다.
“어떻게 할머니가 한번 구해볼테니 어여 학교에 갔다 와.”
그렇게 말하는 할머니의 말씀에 희망을 전혀 걸지 않고 나는 몸을 돌렸다.
늦은 밤, 골목을 돌아 집으로 걷고 있던 나의 눈에 할머니가 대문 밖에서 서성이시는 모습이 들어왔다.
그리고 나를 발견하시곤 종종걸음으로 내게 다가오셨다.
“헌책 말고 그냥 새책사거라.” 천원짜리가 돌돌 말린 꾸깃거리는 지폐를 할머니가 슬며시 나의 바지 주머니 속에 넣으셨다.
“할미가 해줄수 있는게 이것 밖에 없어. 미안해.”
여위고 퀭한 눈, 그리고 창백한 얼굴로 할머니는 그렇게 말씀하시고 나의 팔을 대문 안으로 끄셨다.
지폐를 잘 펴서 바지 주머니에 깊이 넣어 두었다.
그리고 잠자기 직전에도, 아침에 잠이 깨었을때에도 벽에 걸려있던 낡은 교복의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확인을 했다.
토요일이니 오전에는 집안일을 돕고 점심식사 후에 서점에 들르면 될 듯 했다.
반듯하고 큰 서점에는 사람들이 북적였다.
참고서를 찾아 손에 집어들었다. 깨끗한 표지를 마치 감동이라도 한 듯 손바닥으로 문질러 보았다. 책을 펴고 코를 집어넣어 책 냄새를 맡았다. 새 책 냄새가 콧속에 싱그럽게 번졌다.
기분좋게 계산대의 줄에 섰다.
내 앞에 선 사람이 계산대 위에 두꺼운 책 여러권을 올려놓았다.
“이십일만 팔천원입니다.”
계산원의 말에 앞의 남자가 카드를 내밀었다.
‘책을 저렇게 큰돈을 주고 많이 살 수도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부자인 그 남자가 부러웠다.
계산을 끝낸 그가 옆으로 비켜간 후에 나는 책을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바지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하지만 손가락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반대편 쪽의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았다.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잠시만요.”
계산대의 직원의 눈치를 보면서 당황해진 나는 두 손을 바지주머니 속에 다시 넣어 보기도 하고, 주머니가 있지도 않은 윗도리의 가슴부분을 문질러도 보았다.
눈앞이 깜깜해졌다.
“분명히 바지주머니 속에 넣어 두었는데.....”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 혹시 하는 생각이 발치의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런 나를 얼굴을 찡그린 채로 계산대 직원이 빤히 바라보았다.
“저기...”
그때였다. 나의 등 뒤에서 누군가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운서고 학생이지?”
한 아주머니가 나를 보고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손으로 내가 입고 있는 교복을 가리키셨다.
“네...”
얼떨떨하게 그녀에게 대답을 했다.
나의 뒤에 줄을 선 사람의 초조한 표정을 읽기라도 했다는 듯 그 아주머니가 지갑을 열고 게산대의 직원에게 카드를 건넸다.
“이걸로 계산해줘요.”
갑작스러운 일에 어안이 벙벙해진 나는 뭐라고 말도 못하고 멍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카드를 받아든 계산원은 한번 나와 아주머니를 번갈아 본 후 알겠다는 듯 계산을 시작했다.
“우리 아들도 운서고 다니고 있어서...”
그녀가 슬며시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을 따라 간 곳에 놀랍게도 재호 그 자식이 서 있었다. 시선은 나를 무시하고 외면한 채 마치 지나가는 사람들이라도 보는 듯했다.
“......”
“뒤에서 보니 어디서 돈을 잃어버린 듯 하길레....”
거절 하려고 했지만 이미 계산은 끝나버렸다.
“건강하게 잘 지내요. 열심히 공부하고....” 그녀가 나를 보고 다시한번 환하게 웃었다.
“학교에서 우리아들 혹시 만나면 친구처럼 잘 지내고....”
그렇게 미소를 보이고는 그 아주머니는 등을 돌리고 재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슬슬 걱정이 되었다.
또 내일이면 녀석은 나에게 다가와 만 오천원을 내 놓으라고 윽박지를 것이고, 이자까지 이만원 혹은 삼만원을 요구할 것이 틀림 없었다. 아니면 수업중에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양호실로 가는 척하면서 학교의 뒷담을 넘고 프랜차이즈 빵집에 가서 원하는 빵을 사오라고 시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암담했다.
집에 도착했다.
새 책을 들고 방으로 들어오는 나를 보고서 엄마가 깜짝 놀라셨다.
“너 돈은 어디서 나서....” 엄마가 나에게 물으셨다.
“할머니가 주셨어.”
“너 어디서 거짓말을....." 갑자기 엄마가 나에게 화를 냈다.
“진짜야" 그런 엄마를 보면서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할머니에게 물어봐.”
“너....." 나를 빤히 바라보면서 엄마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공부도 못하면서 무슨 참고서가 필요해?”
“.......”
“아침에 네 바지 주머니에서 할머니가 너에게 주신 돈 내가 꺼냈어.”
엄마의 말에 놀라 고개를 돌려 엄마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어디서 돈이 나서 그 책 샀는지 말해 봐.”
“엄마!” 아무 말도 없이 내 주머니에서 돈을 가져간 것이 엄마였다는 것에 너무 화가 났다.
“엄마는!” 나를 노려보며 오히려 엄마가 더 큰 목소리로 화를 냈다.
“한푼두푼 모아서 생활비로 쓰는데, 너도 얼른 고등학교 졸업하고 취업해서 네 밥값이라도 해야 할 것 아냐!”
“.......”
“넌 안돼. 아무리 공부해도 머리가 안따라가.”
“......”
“니가 뭐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으면 잘 될거 같니? 너 같이 머리나쁜 놈은 아무리 좋은 환경에도 안되는 거야.”
나는 엄마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런말을 듣는 것이 하루이틀도 아니었다.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니까, 가서 그 책 반품해서 돈으로 가져 와.”
“그 책.” 엄마가 항상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너무도 화가 났다. 그래서 엄마에게 소리를 질렀다.
“엄마가 사준것도 아니잖아. 엄마가 준 돈도 아니면서...”
방을 나와서 힘껏 방문을 꽝 하고 닫은 후에, 운동화를 구겨신고 집 밖으로 뛰어 나왔다.
그리고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 거리를 정처없이 배회하기 시작했다.
“왜 그랬어?”
옷을 갈아입는 내 등 뒤에서 승우가 나에게 물었다.
“뭐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미 그가 묻는 이유를 나는 알고 있었다.
나의 말에 그가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건데?”
편한 복장으로 갈아 입은 후, 그의 시선을 피하면서 커피포트에 물을 올렸다.
강윤이네 커플도 오랜만에 만나서 그렇게 살갑게 너에게 대하고...“
”........“
”근데 넌 마치 무표정하게 빳빳하게 얼굴은 굳어가지고...“
몰리에르에 늦게 도착한 승우는 나의 표정에 심기가 좋지 않았다. 게다가 어떻게 연락이 되었는지, 예전부터 조금 알고 지내던 한 커플도 우리와 합석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과거에서 불어온 냉기로 온 몸이 얼어붙어 있었다.
그리고 문가에서 인기척만 들려오면 초조해진 나는 바늘 방석에 앉은 듯한 느낌이었다. 불안해서 그곳에서 견딜수가 없었다.
”무슨일인지 얘기는 해줘야 알지.“
”.......“
”너....“
나를 부르고는 그가 말을 잇기 전 잠시 머뭇거렸다.
”나 모르게 바람피고 있냐?“
”뭐?“ 그의 말에 어이가 없어서 그를 돌아보았다. 아마 순간 피식하고 웃기도 한 듯 했다.
”그런거 아냐?“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해.“
”나 몰래 바람피다가 혹시라도 종로에서 나 있는 자리에서 셋이 딱 마주쳐서 개꼴 되는 거 두려워서 그런거 아니냐고.“
”아니야. 아니라고.“
그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전혀 그런거 아니야.“
”그럼 너 도대체 왜 그래?“ 그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지겨워진거야? 나랑 같이 있는 거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싫어? 그래서 그래?“
이번에는 그냥은 지나갈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자라리 말해 버리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까지 질질 끌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얼마정도 이야기를 걸러서, 나의 자존감도 완전히 무너뜨리지 않는 한도 내에서 말해 준다면 될 듯 싶었다.
”걔가.....“
마침내 변하는 나의 표정을 보고 그가 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나 고딩때 나 왕따시켰어.“
”누가?“
”그 자식. 의사 과정 밟고 있다는 놈.“
마치 믿지 못하겠다는 듯, 여전히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표정으로 승우는 빤히 나를 바라보았다. 더, 더, 더 설명해 보라는 듯 보였다.
”그 놈이 나 괴롭혔다구. 학교다니기 싫을 정도로 나를 괴롭혀서 그 놈 마주치기 싫다고.“
”정말이야?“
”그래.“
”근데,....“ 승우의 표정은 내가 기대했던 그런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를 의심하는 듯 보였다.
”걔, 나랑 친하진 않지만, 주변에 평은 좋은 애던데..“
”....“
그의 말에 나도 빤히 그를 바라보았다.
”밴드 회원들이 하나 같이 그랬거든, 애가 생긴 것처럼 착하고 성실하고, 다른 사람 챙겨주고, 천상 의사 될 심성이라고....“
그의 말에 기가 막혀서 말문이 막혀 버렸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너, 그럼 내가 없는 말 꾸며대고 있다는 거야? 지금?“
”그런 말은 아니고....“ 그가 말 끝을 흐렸다.
”그게 그 말 아냐. 나는 그 놈한테 고딩때 빵셔틀 당하고 괴롭힘이란 괴롭힘 다 당했다고 하는데, 너는 그 놈이 착한 놈이라고 하는 거잖아 지금! 그 짐승보다 못한 놈을.. 이름만 들어도 치가 떨리는 그 개 자식을 너는 지금 내 앞에서 옹호하고 있잖아. 지금!“
너무 화가 치밀어 나의 입 밖으로 터져 나오는 말을 막을 수가 없었다. 분노에 얼굴을 뻘개지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래. 알았어.“ 그가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 다 믿어줄게.“
그리고 그는 나에게 등을 보이고 걸음을 옮겨 끓고 있는 커피포트의 플러그를 손으로 잡고 슬며시 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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