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너머를 달리는 그림자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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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말을 다 믿어주겠다던 승우의 말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렇게 그와 말다툼을 한 후, 우리는 서먹하게 지냈다.
퇴근 후에도 나는 휴대폰으로 유튜브를 보거나 게임을 했고, 그는 갑자기 무슨 자격증 시험을 보겠다고 공부를 시작했다.
처음엔 그냥 그렇게 얇고 투명한 막 하나가 우리 사이에 드리워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조금씩 눈에 띄지 않게 두툼해진 그것은 우리 둘의 거리를 멀어지게 했다.
그리고 어느 새 잠자리에서 조차 그의 손을 한번 잡아보기도 어색해져 버렸다.
주말에는 그는 만나보지 못했던 친구들을 만난다면서 외출을 했고 나는 팝콘을 하나 사서 들고 혼자서 영화관을 찾았다.
말다툼의 시작은 나로 인한 것이었고, 화를 먼저 낸 것도 나였기에 그와 정식으로 화해하고 싶었던 나는 미안하다는 말을 꺼낼 수 있는 기회를 찾기 시작했다.
원래의 우리들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마치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애틋한 연인처럼 스킨쉽에 목말라 하던 그때의 우리의 모습이 너무나도 간절했다.
술에 알맞게 취한 그가 집으로 돌아온 어느 토요일 밤이었다.
그의 표정도 그리 나쁘지 않아 보여서 화해의 말을 꺼낼 최상의 때인 듯 싶었다.
옷을 갈아입고 테이블에 앉은 그를 보고는 커피를 끓여서 그의 앞에 내 놓았다.
“친구들하고 잼있었어?”
나의 말에 그가 술기운에 발그레해진 얼굴에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그냥 그랬지 뭐.”
“저번에.... 내가 미안했어.”
불쑥 꺼낸 나의 사과의 말에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그렇게 화를 내서....”
“.....”
“그리고 처음부터 너에게 솔직하게 다 말을 했어야 하는건데...”
나의 말에 그가 피식하고 웃음을 지었다.
“우진아.”
입 주위에 씁쓸한 미소를 띄면서 그가 나를 불렀다.
“나도 너에게 할 말이 있어. 또 사과해야 할 것도 있고....”
“뭔데?”
그의 뜻밖의 말에 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얼마전에 길에서 우연히 예전 밴드모임 회원을 한명 만났어.”
“.......”
“조금 친했던 사이라서 오랜만에 반갑다고 커피한잔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나한테 물어보더라구. 왜 회원 탈퇴를 했는지...”
그의 말에 옆에 놓여있던 의자를 슬며시 테이블로 끌어당겨 그의 맞은 편에 앉았다.
“갑자기 변명거리가 없어서 그냥 솔직하게 네 얘기를 했어. 걔가 고등학교때 너를 괴롭혔다고. 그래서 그 녀석과 같은 밴드에 있는 것이 불쾌하고 불편하다고 내가 말했지.”
"....."
“그 사람도 깜짝 놀라더라고. 정말이냐고. 자기한테도 믿기힘든 충격적인 얘기라고...”
그가 말을 멈추고 커피잔을 들고 한모금 마시고는 다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시선을 떨구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커피잔에 두었다. 그리고 검지손가락으로 커피잔에서 흘러내린 물방울을 문질렀다.
“나중에 밴드회원 몇 명한테서 연락이 왔어. 그거 심각한 내용이니 그냥 지나갈 수 없는 일이라고. 만나서 어떻게 된 일인지 확인해 봐야 한다고...”
“......”
“그런데, 그 자리에 그 자식도 나왔더라. 너 괴롭혔다는 그 놈. 재호인지 뭔지...”
녀석의 이름 석자에 공연히 나의 심장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입술은 바짝 말랐다.
“그 녀석이 내 얼굴을 보면서 그러더라. 자긴 그런 적 절대 없다고. 네가 사람을 잘못 본 것 같다고....”
“뭐?”
그의 말에 나도 몰래 큰소리가 버럭 튀어나왔다.
“그냥 한번 듣기만 해봐.”
그가 날더러 진정하라는 듯 손짓을 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자기 자랑은 아니지만 고등학교 내내 전교1등 놓친 적 없다고. 주변 신경쓸 새 없이 공부만 했대. 그러다 보니 인간관계가 좁아져서 자기 바로 옆자리에 있는 애들하고만 친하게 지냈고 그렇게 끼리끼리만 놀다보니 같은 반 애들도 잘 기억 못한다고 하더라.”
“.....”
“그런 그 놈 말에 내 휴대폰에 있는 네 사진 그 녀석에게 보여줬어.”
“.....”
“근데 너 기억 나지않는다고. 잘 모르겠다고 그러더라구.”
그의 말에 몽둥이로 뒷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자기는 맹세코 남을 괴롭힌 적 없다고... 그때 같은 반에 다니던 친구들 불러서 자기가 한 말 모두 확인시켜 줄 수 있다고”
“.....”
“그리고, 원한다면 너하고 삼자대면이라도 해서 이런 말도 안되는 오해를 풀어주겠다고....”
그런 그의 말에 허탈한 한숨이 나왔다. 할 말을 잃은 채, 그를 멍하게 쳐다보았다.
그 자식이 그렇게 뻔하게 나올 것이라는 것도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 녀석이 가고 난 다음에 다른 사람들이 그러더라구. 혹시 잘못 기억하고 있을 수도 있다고. 사람이 기억하는게 항상 맞는 것은 아니라고,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왜곡될 수도 있는 거라고. 혹시 너가 다른 사람과 정말 착각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게 말이 돼?”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마치 그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너 같으면 그런것도 제대로 기억 못하겠냐? 다른 일도 아니고 2년동안 너를 끈질기게 괴롭힌 놈도 제대로 못 알아볼 것 같애?”
그가 나의 그 말에 마치 하고 싶은 말이 있는 표정인 듯 보였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도 처음에 그렇게 말했었잖아.”
“뭘?”
뜬금없는 그의 말에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걔랑 무슨 일 있는 거 아니냐고 내가 너한테 물었을 때, 너가 걔 알지도 못하는 애라고....”
“그거야....”
점점 그의 태도가 짜증나기 시작했고 내 자신이 한심하다고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가해자는 그 놈이고 끔찍한 고통을 받았던 피해자는 나인데 오히려 마치 내가 덫에 걸린 듯한 상황인 듯 싶었다. 마치 그물에 걸려 물 위로 올려져서 펄떡거리는 물고기가 된 심정이었다.
“그때는 너한테 솔직하게 말할 수가 없어서 그랬던 거야.”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도 자존심이란게 있잖아. 너한테 괜찮은 놈이라는 인상을 계속 주고 싶었다구. 너에게 멋진 놈은 아니더라도 덜떨어진 녀석으로 비춰보이기는 싫었어. 어떻게 내가 같은 반 놈한테 빵셔틀에 폭행이나 당하고 분풀이 상대 였다는 그런 말을 쉽게 할 수가 있었겠어.”
나도 모르게 뺨에 흐르는 눈물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나의 뿌연 시야에 비치는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그 순간 나의 마음속에 투영된 그는 내가 꿈꾸던 연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상대에 대한 공감과 믿음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대리석 같은 차가운 눈빛만이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침대에 누웠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를 잠식했다.
그 자식이 나를 괴롭혔다는 사실보다, 그리고 뻔뻔하게도 자신의 그런 악랄한 과거를 덮고 오리발을 내밀면서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그 개*식보다, 나를 대하던 승우의 무감각한 표정이 나를 더 괴롭혔다.
그는 더 이상 내 곁에 있어주는 아군이 아니었다.
저만치 멀찍이 물러나서 무신경하게 떨어져 있는 타인이었다.
그리고 더 이상 우리가 같은 공간을 공유하면서 같이 살아야 할 이유가 사라졌다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승우를 향한 나의 마음도 그렇게 식어버리는 듯 했다.
“혹시 지금 빼놓고 가는 게 있으면 나중에 택배로 보내줘.”
대충 짐을 정리한 후에 여전히 무표정하게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노트북의 화면만 응시하고 있는 승우를 돌아보며 태연한 척 말을 걸었다.
“착불로 해줘. 그것도 귀찮으면 그냥 버리던지....”
“......”
“이번 달 내가 낼 월세는 이번 주말안에 이체시켜줄게.”
“어디로... 가려구?”
여전히 시선은 모니터에 두고 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겁고 지친 말투였다. 나 때문에 힘든 것인지 아니면 나와 헤어지는 것에서 나온 아픔 때문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아마도 전자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 살던 개봉역 근처 원룸으로 갈거야. 아침에 전에 있던 곳의 주인하고 통화해놨어. 빈방 있다고....”
“......”
“우리 너무 일찍 같이 살기 시작했나봐.”
마치 후회라도 된다는 듯 가방을 집어들면서 그를 보고는 어이없는 듯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이렇게 쉽게 끝이 올 줄도 모르고...”
“나, 너랑 있으면서...” 나의 말에 나지막히 그가 입을 열었다.
“행복했어. 그래서 같이 살자고 한 거고...”
그가 나를 한번 흘끗 보고는 다시 나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래.”
그런 그의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나는 아무 말 없이 발을 옮겨 현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조용히 문을 열고 나와 일부러 그의 모습을 돌아보지 않고 조용히 현관문을 닫았다.
그렇게 다시 혼자가 되었다.
덩그러니 텅 빈 원룸의 벽에 기대어 앉아 창을 통해 들어오고 있는 햇볕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짐이라도 풀어야 하지만 아무 의욕도 없었다. 모든일이 귀찮았다.
그 놈과는 처음부터 상대가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재호, 그 자식을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봤자 고통받는 것은 나 혼자였다.
그냥, 기억속에서 지워버리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짜피 그 길밖에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그래도 나는 꿋꿋하게 살아갈 것이다.
겨우 10대였던, 어렸던 그때에도 그런 굴욕속에서도 살아남았던 나였다.
다시는 그런 삶을 살지는 않을 것이다. 싸워 이길 수 없다면 도망칠 것이다.
그리고 다시 시작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나의 마음속에 그 당시에 나의 옆자리에 앉았던 그 친한 녀석이 떠올랐다.
그 녀석 이름이 뭐였더라? 그래 선일이었다. 정선일.
2학년이 되면서 사회성 부족한 내가 쭈뼛거릴 때 나에게 말을 걸고 장난을 걸던 녀석이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녀석은 나의 성정체성을 눈치채고도 그냥 웃어넘겼던 그런 친구였다.
학교 근처에 피시방 하나가 새로 오픈하면서 기존에 있던 피시방과 경쟁이 붙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그 피시방의 알바생이 학교 앞 큰길에서 지나가는 학생들에게 두 시간 무료이용쿠폰을 나눠 준 적이 있었다.
새로 오픈한 곳의 시설이 너무 좋기도 했고 또 다른 이용 혜택도 많았기 때문에 그렇게 공짜쿠폰을 뿌려댔지만 그다지 손님을 끌지는 못했다.
그래도 녀석과 나는 그 무료쿠폰을 들고 삼월말이었는지 사월초였는지 그 즈음에 같이 그 피시방을 들어갔었다.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정신없이 총질을 해대는 녀석의 눈치를 보면서 호기심과 욕구를 이기지 못하고 나는 슬그머니 나체의 남자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이트를 몰래 찾아들어갔다.
그리고 모니터에 크게 윈도우 첫 화면을 띄어 놓은 채 한쪽 모서리에 작은 화면을 띄워놓고는 사타구니 사이의 큰 물건과 잘 발달한 근육을 자랑하는 남자들을 눈치껏 훔쳐보고 있었다.
그렇게 어느 한 순간 넋을 놓고 있던 중에 게임이 끝난 녀석이 손을 뻗어 마우스를 잡고 가려진 화면을 클릭해 버렸다.
녀석의 잽싼 마우스 위의 손놀림에 손바닥만 했던 그 사이트의 화면이 한순간 모니터 전체에 펼쳐져 버렸고 그렇게 화면 가득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근육을 자랑하는 나체의 남자들의 사진들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당황한 나는 놀라서 녀석의 손에서 마우스를 빼앗아 황급이 그 사이트의 화면을 없애버렸다.
등에 식은땀을 흘리면서 핑계를 찾던 나를 한번 흘끗 보고는 그 녀석은 이해할 수 없는 묘한 표정을 한번 지어보이고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아무말 없이 자신의 화면에 로딩이 완료된 게임에 시선을 돌리고는 곧 다시 적군을 상대로 총질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후에도 나를 대하는 녀석의 표정이나 행동에도 그 전의 평상시와 다를바가 없었다.
그는 그런 녀석이었다.
갑자기 그가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졌다.
그 녀석을 찾을 수 있다면 녀석이 나를 위해서 진실을 말해줄 수 있을 듯 싶었다.
재호, 그 자식을 마주하진 않는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승우에게 나의 말이 전부 사실이었음을, 그의 마음속에 나에 대한 의구심이 있다면 속 시원하게 증명해주고 싶었다.
나는 손을 뻗어 방바닥에 놓여있던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엄마에게 전화해서 내 고등학교 졸업앨범을 어디에 두었는지 물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끝나버린 사이지만 그렇게 말끔하게 의혹을 해소 시켜줘야만 나의 새로운 시작도 그것의 의미가 있을 듯 싶었다.
휴대폰의 연락처에서 ‘엄마’를 찾아 나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렇게 그와 말다툼을 한 후, 우리는 서먹하게 지냈다.
퇴근 후에도 나는 휴대폰으로 유튜브를 보거나 게임을 했고, 그는 갑자기 무슨 자격증 시험을 보겠다고 공부를 시작했다.
처음엔 그냥 그렇게 얇고 투명한 막 하나가 우리 사이에 드리워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조금씩 눈에 띄지 않게 두툼해진 그것은 우리 둘의 거리를 멀어지게 했다.
그리고 어느 새 잠자리에서 조차 그의 손을 한번 잡아보기도 어색해져 버렸다.
주말에는 그는 만나보지 못했던 친구들을 만난다면서 외출을 했고 나는 팝콘을 하나 사서 들고 혼자서 영화관을 찾았다.
말다툼의 시작은 나로 인한 것이었고, 화를 먼저 낸 것도 나였기에 그와 정식으로 화해하고 싶었던 나는 미안하다는 말을 꺼낼 수 있는 기회를 찾기 시작했다.
원래의 우리들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마치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애틋한 연인처럼 스킨쉽에 목말라 하던 그때의 우리의 모습이 너무나도 간절했다.
술에 알맞게 취한 그가 집으로 돌아온 어느 토요일 밤이었다.
그의 표정도 그리 나쁘지 않아 보여서 화해의 말을 꺼낼 최상의 때인 듯 싶었다.
옷을 갈아입고 테이블에 앉은 그를 보고는 커피를 끓여서 그의 앞에 내 놓았다.
“친구들하고 잼있었어?”
나의 말에 그가 술기운에 발그레해진 얼굴에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그냥 그랬지 뭐.”
“저번에.... 내가 미안했어.”
불쑥 꺼낸 나의 사과의 말에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그렇게 화를 내서....”
“.....”
“그리고 처음부터 너에게 솔직하게 다 말을 했어야 하는건데...”
나의 말에 그가 피식하고 웃음을 지었다.
“우진아.”
입 주위에 씁쓸한 미소를 띄면서 그가 나를 불렀다.
“나도 너에게 할 말이 있어. 또 사과해야 할 것도 있고....”
“뭔데?”
그의 뜻밖의 말에 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얼마전에 길에서 우연히 예전 밴드모임 회원을 한명 만났어.”
“.......”
“조금 친했던 사이라서 오랜만에 반갑다고 커피한잔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나한테 물어보더라구. 왜 회원 탈퇴를 했는지...”
그의 말에 옆에 놓여있던 의자를 슬며시 테이블로 끌어당겨 그의 맞은 편에 앉았다.
“갑자기 변명거리가 없어서 그냥 솔직하게 네 얘기를 했어. 걔가 고등학교때 너를 괴롭혔다고. 그래서 그 녀석과 같은 밴드에 있는 것이 불쾌하고 불편하다고 내가 말했지.”
"....."
“그 사람도 깜짝 놀라더라고. 정말이냐고. 자기한테도 믿기힘든 충격적인 얘기라고...”
그가 말을 멈추고 커피잔을 들고 한모금 마시고는 다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시선을 떨구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커피잔에 두었다. 그리고 검지손가락으로 커피잔에서 흘러내린 물방울을 문질렀다.
“나중에 밴드회원 몇 명한테서 연락이 왔어. 그거 심각한 내용이니 그냥 지나갈 수 없는 일이라고. 만나서 어떻게 된 일인지 확인해 봐야 한다고...”
“......”
“그런데, 그 자리에 그 자식도 나왔더라. 너 괴롭혔다는 그 놈. 재호인지 뭔지...”
녀석의 이름 석자에 공연히 나의 심장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입술은 바짝 말랐다.
“그 녀석이 내 얼굴을 보면서 그러더라. 자긴 그런 적 절대 없다고. 네가 사람을 잘못 본 것 같다고....”
“뭐?”
그의 말에 나도 몰래 큰소리가 버럭 튀어나왔다.
“그냥 한번 듣기만 해봐.”
그가 날더러 진정하라는 듯 손짓을 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자기 자랑은 아니지만 고등학교 내내 전교1등 놓친 적 없다고. 주변 신경쓸 새 없이 공부만 했대. 그러다 보니 인간관계가 좁아져서 자기 바로 옆자리에 있는 애들하고만 친하게 지냈고 그렇게 끼리끼리만 놀다보니 같은 반 애들도 잘 기억 못한다고 하더라.”
“.....”
“그런 그 놈 말에 내 휴대폰에 있는 네 사진 그 녀석에게 보여줬어.”
“.....”
“근데 너 기억 나지않는다고. 잘 모르겠다고 그러더라구.”
그의 말에 몽둥이로 뒷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자기는 맹세코 남을 괴롭힌 적 없다고... 그때 같은 반에 다니던 친구들 불러서 자기가 한 말 모두 확인시켜 줄 수 있다고”
“.....”
“그리고, 원한다면 너하고 삼자대면이라도 해서 이런 말도 안되는 오해를 풀어주겠다고....”
그런 그의 말에 허탈한 한숨이 나왔다. 할 말을 잃은 채, 그를 멍하게 쳐다보았다.
그 자식이 그렇게 뻔하게 나올 것이라는 것도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 녀석이 가고 난 다음에 다른 사람들이 그러더라구. 혹시 잘못 기억하고 있을 수도 있다고. 사람이 기억하는게 항상 맞는 것은 아니라고,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왜곡될 수도 있는 거라고. 혹시 너가 다른 사람과 정말 착각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게 말이 돼?”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마치 그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너 같으면 그런것도 제대로 기억 못하겠냐? 다른 일도 아니고 2년동안 너를 끈질기게 괴롭힌 놈도 제대로 못 알아볼 것 같애?”
그가 나의 그 말에 마치 하고 싶은 말이 있는 표정인 듯 보였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도 처음에 그렇게 말했었잖아.”
“뭘?”
뜬금없는 그의 말에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걔랑 무슨 일 있는 거 아니냐고 내가 너한테 물었을 때, 너가 걔 알지도 못하는 애라고....”
“그거야....”
점점 그의 태도가 짜증나기 시작했고 내 자신이 한심하다고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가해자는 그 놈이고 끔찍한 고통을 받았던 피해자는 나인데 오히려 마치 내가 덫에 걸린 듯한 상황인 듯 싶었다. 마치 그물에 걸려 물 위로 올려져서 펄떡거리는 물고기가 된 심정이었다.
“그때는 너한테 솔직하게 말할 수가 없어서 그랬던 거야.”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도 자존심이란게 있잖아. 너한테 괜찮은 놈이라는 인상을 계속 주고 싶었다구. 너에게 멋진 놈은 아니더라도 덜떨어진 녀석으로 비춰보이기는 싫었어. 어떻게 내가 같은 반 놈한테 빵셔틀에 폭행이나 당하고 분풀이 상대 였다는 그런 말을 쉽게 할 수가 있었겠어.”
나도 모르게 뺨에 흐르는 눈물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나의 뿌연 시야에 비치는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그 순간 나의 마음속에 투영된 그는 내가 꿈꾸던 연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상대에 대한 공감과 믿음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대리석 같은 차가운 눈빛만이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침대에 누웠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를 잠식했다.
그 자식이 나를 괴롭혔다는 사실보다, 그리고 뻔뻔하게도 자신의 그런 악랄한 과거를 덮고 오리발을 내밀면서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그 개*식보다, 나를 대하던 승우의 무감각한 표정이 나를 더 괴롭혔다.
그는 더 이상 내 곁에 있어주는 아군이 아니었다.
저만치 멀찍이 물러나서 무신경하게 떨어져 있는 타인이었다.
그리고 더 이상 우리가 같은 공간을 공유하면서 같이 살아야 할 이유가 사라졌다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승우를 향한 나의 마음도 그렇게 식어버리는 듯 했다.
“혹시 지금 빼놓고 가는 게 있으면 나중에 택배로 보내줘.”
대충 짐을 정리한 후에 여전히 무표정하게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노트북의 화면만 응시하고 있는 승우를 돌아보며 태연한 척 말을 걸었다.
“착불로 해줘. 그것도 귀찮으면 그냥 버리던지....”
“......”
“이번 달 내가 낼 월세는 이번 주말안에 이체시켜줄게.”
“어디로... 가려구?”
여전히 시선은 모니터에 두고 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겁고 지친 말투였다. 나 때문에 힘든 것인지 아니면 나와 헤어지는 것에서 나온 아픔 때문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아마도 전자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 살던 개봉역 근처 원룸으로 갈거야. 아침에 전에 있던 곳의 주인하고 통화해놨어. 빈방 있다고....”
“......”
“우리 너무 일찍 같이 살기 시작했나봐.”
마치 후회라도 된다는 듯 가방을 집어들면서 그를 보고는 어이없는 듯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이렇게 쉽게 끝이 올 줄도 모르고...”
“나, 너랑 있으면서...” 나의 말에 나지막히 그가 입을 열었다.
“행복했어. 그래서 같이 살자고 한 거고...”
그가 나를 한번 흘끗 보고는 다시 나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래.”
그런 그의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나는 아무 말 없이 발을 옮겨 현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조용히 문을 열고 나와 일부러 그의 모습을 돌아보지 않고 조용히 현관문을 닫았다.
그렇게 다시 혼자가 되었다.
덩그러니 텅 빈 원룸의 벽에 기대어 앉아 창을 통해 들어오고 있는 햇볕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짐이라도 풀어야 하지만 아무 의욕도 없었다. 모든일이 귀찮았다.
그 놈과는 처음부터 상대가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재호, 그 자식을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봤자 고통받는 것은 나 혼자였다.
그냥, 기억속에서 지워버리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짜피 그 길밖에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그래도 나는 꿋꿋하게 살아갈 것이다.
겨우 10대였던, 어렸던 그때에도 그런 굴욕속에서도 살아남았던 나였다.
다시는 그런 삶을 살지는 않을 것이다. 싸워 이길 수 없다면 도망칠 것이다.
그리고 다시 시작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나의 마음속에 그 당시에 나의 옆자리에 앉았던 그 친한 녀석이 떠올랐다.
그 녀석 이름이 뭐였더라? 그래 선일이었다. 정선일.
2학년이 되면서 사회성 부족한 내가 쭈뼛거릴 때 나에게 말을 걸고 장난을 걸던 녀석이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녀석은 나의 성정체성을 눈치채고도 그냥 웃어넘겼던 그런 친구였다.
학교 근처에 피시방 하나가 새로 오픈하면서 기존에 있던 피시방과 경쟁이 붙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그 피시방의 알바생이 학교 앞 큰길에서 지나가는 학생들에게 두 시간 무료이용쿠폰을 나눠 준 적이 있었다.
새로 오픈한 곳의 시설이 너무 좋기도 했고 또 다른 이용 혜택도 많았기 때문에 그렇게 공짜쿠폰을 뿌려댔지만 그다지 손님을 끌지는 못했다.
그래도 녀석과 나는 그 무료쿠폰을 들고 삼월말이었는지 사월초였는지 그 즈음에 같이 그 피시방을 들어갔었다.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정신없이 총질을 해대는 녀석의 눈치를 보면서 호기심과 욕구를 이기지 못하고 나는 슬그머니 나체의 남자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이트를 몰래 찾아들어갔다.
그리고 모니터에 크게 윈도우 첫 화면을 띄어 놓은 채 한쪽 모서리에 작은 화면을 띄워놓고는 사타구니 사이의 큰 물건과 잘 발달한 근육을 자랑하는 남자들을 눈치껏 훔쳐보고 있었다.
그렇게 어느 한 순간 넋을 놓고 있던 중에 게임이 끝난 녀석이 손을 뻗어 마우스를 잡고 가려진 화면을 클릭해 버렸다.
녀석의 잽싼 마우스 위의 손놀림에 손바닥만 했던 그 사이트의 화면이 한순간 모니터 전체에 펼쳐져 버렸고 그렇게 화면 가득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근육을 자랑하는 나체의 남자들의 사진들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당황한 나는 놀라서 녀석의 손에서 마우스를 빼앗아 황급이 그 사이트의 화면을 없애버렸다.
등에 식은땀을 흘리면서 핑계를 찾던 나를 한번 흘끗 보고는 그 녀석은 이해할 수 없는 묘한 표정을 한번 지어보이고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아무말 없이 자신의 화면에 로딩이 완료된 게임에 시선을 돌리고는 곧 다시 적군을 상대로 총질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후에도 나를 대하는 녀석의 표정이나 행동에도 그 전의 평상시와 다를바가 없었다.
그는 그런 녀석이었다.
갑자기 그가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졌다.
그 녀석을 찾을 수 있다면 녀석이 나를 위해서 진실을 말해줄 수 있을 듯 싶었다.
재호, 그 자식을 마주하진 않는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승우에게 나의 말이 전부 사실이었음을, 그의 마음속에 나에 대한 의구심이 있다면 속 시원하게 증명해주고 싶었다.
나는 손을 뻗어 방바닥에 놓여있던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엄마에게 전화해서 내 고등학교 졸업앨범을 어디에 두었는지 물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끝나버린 사이지만 그렇게 말끔하게 의혹을 해소 시켜줘야만 나의 새로운 시작도 그것의 의미가 있을 듯 싶었다.
휴대폰의 연락처에서 ‘엄마’를 찾아 나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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