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너머를 달리는 그림자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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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일이와 토요일 밤 늦게 종로3가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뜻밖의 나와의 전화통화 였겠지만, 녀석은 반가운 듯이 전화에 대고 내 이름을 불렀다.
수원에 살고 회사일에 치어 살기에 시간을 내기는 힘들지만 주말에 진지하게 만나고 있는 여친과 종로3가의 맛집에 갈거라고 했다.
뜻하지 않은 종로였지만 그 녀석을 만나기 위해서는 장소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수원에 사는 여친집에 들러서 다시 종로에 도착하려면 시간이 늦어져서 10시나 되어야 할 것 같다고 녀석은 말했다.
맛집과 술집을 들러 종로에 있는 모텔에서 밤을 보낼 거라고 했다.
”사실 여친이 은근히 바라는 것 같아서 말야.“
그렇게 말하고 녀석은 킬킬거렸다.
처음에, 녀석을 찾아보기로 결심하고 혹시나 하는 생각에 고등학교 졸업앨범에 나와있는 녀석의 연락처를 확인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지만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다.
엄마에게 내 졸업앨범에 5만원짜리 몇장을 끼워넣었던 기억이 있다고 슬쩍 말을 건넸다. 혹시 찾으면 알려달라고 했다. 돈되는 일이 아니라면 절대 하시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 꾀를 냈다.
엄마는 아버지가 보관하고 계시던 2년전에 돌아가신 할머니의 유품함까지 찾아보았다고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안에서 나의 졸업앨범을 찾았다고 했다.
“왜 니 앨범이 거기 들어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넋두리를 하듯 한마디 하셨다.
“근데 돈은커녕 돈할아비 그림자도 없었어. 너 때문에 고생만 했잖아. 집안 다 뒤집어 놓고!‘
그렇게 엄마는 나에게 짜증을 냈다.
그 다음에도 녀석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전화번호는 바뀌어 있었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큰 맘 먹고 찾아간 그의 주소는 새로 지은 아파트 단지로 바뀌어 있었다.
헛 웃음을 지으면서 실망만 가득한 채 뒤돌아 서던 나의 머릿속에 문득 고등학교때 취업담당을 맡았던 선생님이 생각이 났다.
일반고이긴 했지만 대학 입학이 힘들고 취업을 희망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외부 기업체들과 연락하여 알맞은 학생을 선발해서 소개해주던 일을 맡곤 했었다.
하지만 취업을 목적으로 하는 전문고 사이에서 그렇게 취업하기에는 대학에 입학하는 것보다 더 어려웠고 그런 혜택을 본 학생은 나를 포함해서 몇 손가락에 꼽히는 정도라고 했다.
졸업을 앞두고 몇 주전 그 선생님이 나를 불렀었다.
나를 눈여겨 보고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의미없는 여러 이야기들, 주변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이 있었다는 것을 졸업할 즈음에야 눈치채게 되었다는 둥, 그만한 일을 겪고도 잘 버텨주었다는 둥, 그런 이야기를 마치 독백하듯이 내 얼굴을 흘끗거리면서 중얼거리고는 내게 이력서 하나를 건네주었다.
꽤 건실한 중견업체에 자신이 특별히 부탁을 했다고 했다.
오랫동안의 설득 후에 간신히 얻어온 취업자리라면서 경력도 없는 고등학교 졸업자로는 들어가기 어려운 사무직이라고 천운이 닿은 것이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리고 취업이 되면 딴 생각 말고 그곳에서 뼈를 묻을 결심으로 직장생활을 하라고 신신당부를 했었다.
가서 열심히 다니면서 힘들었던 학교생활의 보상을 받으라는 말도 덧붙였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학교에 까지 찾아갔었다.
왜 그렇게 까지 해야 했는 지 지금에야 실소가 나올 일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그 녀석을 찾는 것에만 목표를 두고 목을 메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왜 그녀석을 내가 찾고 있는지 이유까지도 잊어버릴 정도였다.
다행히 그 선생은 나를 알아보았다.
특별히 반갑거나 할 일도 없었고 그런 표정도 아니었지만 묘한 웃음을 띄면서 나를 맞아주었다.
한두군데 연락을 해 보면 그 녀석의 연락처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졸업생 중에서 취업이 된 학생들의 자료를 보관하고 있다고 했다. 혹시라도 나중에 재학생 중에서 도움 받을 수도 있을 수도 있는 이유였다.
그리고 조바심을 내던 며칠이 지난 후, 그 선생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를 찾았다고 했다. 그리고 전화로 녀석의 번호를 불러주었다. 회사일을 하던 중이라 문자로 보내주었으면 하고 바랬지만 찬물 더운물 가릴때가 아니었다. 잊지 않고 찾아서 연락준 것이 고마운 일이었다.
아홉시 경에 미리 종로에 도착해서, 갈곳이 없던 나는 여전히 몰리에르를 찾았다.
’이제 아무것도 잃을 것도 없어서 두려울 것도 없다‘라고 당당하게 집에서 출발하던 나의 모습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문 앞에 서서 소심하게 문을 빼끔히 열고 안쪽을 들여다 보았다.
테이블에 마주 앉은 낯선 손님 둘 이외에는 안면이 있는 그 바텐더가 유일한 사람이었다. 문을 밀고 들어가면서 그런 내 자신에게 자괴감이 다시 들기 시작했다.
바의 높은 의자에 걸터 앉는 나를 보고 바텐더가 밝게 미소지어 보였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네. 어쩌다 보니....“
어색해하는 나의 표정을 보고는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일행 있으시면 커피한잔 드릴까요?“
”아녜요.“ 그런 그에게 손사래를 쳤다.
”오늘은 그냥 혼자예요. 그리고 올때마다 신세를 져서야.....“
그가 그런 나를 보고 씨익 웃어보였다.
”그냥, 제일 추천하실만한 걸로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가 고개를 끄덕 해보이고는 나에게 등을 돌렸다.
내 앞에 놓여진 칵테일을 한 모금 맛보았을 때였다.
등 뒤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면 무슨 상관이야. 이 바보같은 자식.” 스스로에게 담담해지라고 책망하면서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렇게 음료수를 내려다 보면서 앉아 있었다.
“어!”
내 옆에서 누군가가 나를 향해서 마치 뜻밖이라는 말투로 툭하고 내뱉었다.
슬며시 고개를 돌려보았다.
“우진이 아냐?”
예전에 승우와 사귈 때 종로에서 오가다가 몇 번 얼굴을 본 녀석이었다.
나보다 나이는 한 두 살 위였을 듯 싶었다. 넉살좋게 처음 본 사람들과도 대화를 아주 찰지게 잘하는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승우가 있던 그 밴드의 회원인듯도 했다.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는 내 옆의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정말로 많이 반갑다는 듯 바 위에 올려진 내 손을 잡고 악수하듯이 흔들었다.
“진짜 오랜만이다.”
그는 이미 술을 꽤 한 듯 붉어진 얼굴에 개기름이 번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승우 본지도 꽤 오래되었는데 말야.”
그의 혀도 조금씩 꼬이는 것이 벌써 소주 두세병은 들이킨 듯 보였다.
그렇게 마치 졸지에 일행이 된 듯이 바텐더에게 칵테일 한잔을 주문하고는 그는 나에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야, 내가 얘기를 안하려고 했는데 말야.”
소주 냄새를 풍기면서 그가 나를 보고는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사람들 참 남의 말을 쉽게 해.”
“......”
“나야 제 삼자로 객관적인 판단을 하려고 했는데 말야.”
그는 말을 멈추고 바텐더로부터 칵테일을 받아 들고 한 모금을 마시고는 내려놓았다.
“너도 뻔히 알거야.”
그가 나를 한번 빤히 바라보았다.“
”예전에 승우 밴드 탈퇴하고 한번 다시 만난 적이 있었거든. 밴드 회원들 다 나오라는 연락이 와서...“
”......“
”뭐, 재호랑 너 얘기 한동안 오가다가, 재호가 자기 입장 설명하고 하다가 먼저 돌아갔거든.“
”.......“
”그러다가 승우가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에 현진이 그 촉새가 그 새를 못참고 또 입방정을 떨었지 뭐냐. 너가 재호한테 찝적거리다가 퇴짜 당한거라고.....“
그의 말에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재호가 반반하게 생겼으니 밴드 안에서도 몇놈이 뒤에서 그런 짓 한거 이미 자기가 다 알고 있다고. 그렇게 까이고 나서 그 놈에게 악의가 남아서 애먼 놈 잡는 거라고. 그래서 일진 프레임 뒤집어 씌운거라고. 흔하고 뻔한 레파토리라고. 안봐도 비디오라고...“
”......“
”그런데 그때 승우가 뒤에서 그 놈 얘기 다 들어버렸거든. ‘다시한번 그 더러운 주둥이 놀려보라’고 눈 흰자위가 완전히 뒤집혀서 현진이 멱살 잡고 내동댕이 치는 걸 다른 애들이 간신히 뜯어 말렸어.“
”......“
”개*끼들 앞으로 죽을 때까지 상종 안한다고 고래고래 악다구니를 쓰고 갔다. 승우가.“
그가 다시 자신의 칵테일 잔을 들고 한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그 담부터 종로바닥에서 승우도 안보이네. 잘 지내는 거지?“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천길 땅속으로 꺼진 느낌이었다.
꼬일 인생은 이렇게 저렇게 노력해도 안되는 듯 싶었다.
화가 난다기보다, 막막하고 답답한 생각에 나도 몰래 눈에서 눈물이 고였다.
오른 손으로 이마를 집고 흘러나오는 눈물을 이를 악물로 참고 있었다. 바보같이 입 밖으로 낮은 신음 소리도 빠져나왔다.
뿌연 내 시야에 박스티슈가 놓어진 것이 들어왔다.
한 장을 뽑아 얼굴을 문지르고 다시 한 장으로 코를 풀었다.
고개를 돌린 나의 눈 앞에 어느 사이에 그는 사라지고 없었다.
간신히 진정한 내 눈앞에 나를 마치 안스럽다는 표정으로 보고있는 바텐더의 얼굴이 보였다.
답답한 마음에 그런 그에게 쪽팔린다는 생각 같은 것이 들어올 여유도 없었다.
”저....“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번에도 그렇고, 들으려고 한 것은 아닌데, 어쩌다 보니....“
그가 다시한번 나의 눈치를 보았다.
”저도 그 재호라는 사람 알아요.“
그의 말에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제가 주중에 일하는 곳이 그래도 강남에서는 알아주는 카센터 거든요.“
그가 씁쓸한 미소를 짓고는 다시 나를 흘끗 보았다.
”재호라는 그 사람하고 친구 두 명하고 같이 몇 번 카센터에 왔었어요.“
”......“
”차만 봐도 최고급 외제차에 부모가 뭐하는 사람들인지는 몰라도 보통 거물은 아닌 것 같고요.“
”거기서 일하는 직원들은 그냥 그 놈들 종이예요. 차 만진 것이 맘에 안든다고 사람들 앞에서 직원 한명을 발로 차고 뺨도 때린 적도 있는데요.“
그의 말에 놀라 입을 딱 벌리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거기 있으면 상상도 못한일도 벌어져요. 사장은 그 직원에게 봉투하나 건네주고 입막음 했어요. 남의 돈 버는 것이 쉽냐면서....“
”......“
”지들끼리 얘기하는 것을 한번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러더라구요. 줄에 묶여있는 개가 자기 보고 짖어대길레 자기 차로 그냥 받아버렸다고.“
”.......“
”그런 얘기를 아주 자랑삼아 하더라구요.“
”......“
”무슨 일이신지는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 재호라는 사람이 손님을 먼저 아는 척 하는 것을 저번에 봤어요. 무슨 말씀을 나누셨는지야 모르지만..“
말을 멈추고 그가 나를 흘끗 보더니 얼음 물한잔을 내 앞에 내 놓았다.
”카센터에서 재호라는 그 사람이 직원들에게 무례한 행동을 하는 걸 본 건 아니지만 유유상종이라고 그런 친구놈들하고 다른 게 뭐가 있겠어요. 다 거기서 거기죠.“
그때 테이블에 앉아 있던 손님이 그를 불렀다. 그리고 그는 나를 한번 흘끗 본 후에 그들이 있는 곳으로 발을 옮겼다.
선일이 그 녀석도 변한 것은 별로 없었다.
나이가 들고 사회물을 먹게 되면서 외모가 학생때보다는 좀 더 성숙해지고 세련되어 진 듯한 느낌이 들 뿐, 다른 것은 그대로 인 듯 싶었다.
그의 여자친구도 외향적이며 말하는 태도가 마치 고딩때 좀 놀았던 티가 나는 듯 보였다.
여자 친구도 있는 자리였고, 또 만나자 마자 어떤 부탁을 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녀석과 두세번 더 만나면서 다시 친해진 후, 녀석에게 하려는 말을 꺼내기로 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훤하게 보이는 야외 테이블에 앉아서 입안에 고기를 씹으면서 어느 한순간 그녀가 투덜댔다.
”종로는 다 좋은데 게이가 너무 많아.“
그렇게 기분 나쁘다는 듯이 투덜대며 말하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손을 잡고 다정하게 걷는 남남커플이 두셋 보였다.
”그것도 얼마 안 남았어.“ 녀석이 그녀를 보고 마치 달래는 듯이 말했다.
”예전에는 이 앞의 도로를 지나갈 때 그 놈들이 포장마차들을 다 점령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안보이잖아.“
선일이의 말에 그녀가 마치 안심이라도 한 듯한 표정으로 웃어보였다.
그때였다.
”야, 이뇬아 오랜만이다.“
크고 간드러지는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려 보았다.
예전에 종로에서 알고 지냈던 한 녀석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녀석은 눈치도 없이 얼굴 가득 웃음을 띄고는 나를 향해 걸어왔다.
”너 서방하고 헤어졌다면서?“
그가 내 앞에 걸음을 멈추고 서서 나를 싱글거리면서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도 피부도 뽀샤시 하고 살도 찐게 살만한가 보네? 아는 척좀 하고 살아라. 이뇬아. 혼자만 잘 먹고 잘 살지 말고....“
뜻밖의 나와의 전화통화 였겠지만, 녀석은 반가운 듯이 전화에 대고 내 이름을 불렀다.
수원에 살고 회사일에 치어 살기에 시간을 내기는 힘들지만 주말에 진지하게 만나고 있는 여친과 종로3가의 맛집에 갈거라고 했다.
뜻하지 않은 종로였지만 그 녀석을 만나기 위해서는 장소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수원에 사는 여친집에 들러서 다시 종로에 도착하려면 시간이 늦어져서 10시나 되어야 할 것 같다고 녀석은 말했다.
맛집과 술집을 들러 종로에 있는 모텔에서 밤을 보낼 거라고 했다.
”사실 여친이 은근히 바라는 것 같아서 말야.“
그렇게 말하고 녀석은 킬킬거렸다.
처음에, 녀석을 찾아보기로 결심하고 혹시나 하는 생각에 고등학교 졸업앨범에 나와있는 녀석의 연락처를 확인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지만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다.
엄마에게 내 졸업앨범에 5만원짜리 몇장을 끼워넣었던 기억이 있다고 슬쩍 말을 건넸다. 혹시 찾으면 알려달라고 했다. 돈되는 일이 아니라면 절대 하시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 꾀를 냈다.
엄마는 아버지가 보관하고 계시던 2년전에 돌아가신 할머니의 유품함까지 찾아보았다고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안에서 나의 졸업앨범을 찾았다고 했다.
“왜 니 앨범이 거기 들어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넋두리를 하듯 한마디 하셨다.
“근데 돈은커녕 돈할아비 그림자도 없었어. 너 때문에 고생만 했잖아. 집안 다 뒤집어 놓고!‘
그렇게 엄마는 나에게 짜증을 냈다.
그 다음에도 녀석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전화번호는 바뀌어 있었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큰 맘 먹고 찾아간 그의 주소는 새로 지은 아파트 단지로 바뀌어 있었다.
헛 웃음을 지으면서 실망만 가득한 채 뒤돌아 서던 나의 머릿속에 문득 고등학교때 취업담당을 맡았던 선생님이 생각이 났다.
일반고이긴 했지만 대학 입학이 힘들고 취업을 희망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외부 기업체들과 연락하여 알맞은 학생을 선발해서 소개해주던 일을 맡곤 했었다.
하지만 취업을 목적으로 하는 전문고 사이에서 그렇게 취업하기에는 대학에 입학하는 것보다 더 어려웠고 그런 혜택을 본 학생은 나를 포함해서 몇 손가락에 꼽히는 정도라고 했다.
졸업을 앞두고 몇 주전 그 선생님이 나를 불렀었다.
나를 눈여겨 보고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의미없는 여러 이야기들, 주변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이 있었다는 것을 졸업할 즈음에야 눈치채게 되었다는 둥, 그만한 일을 겪고도 잘 버텨주었다는 둥, 그런 이야기를 마치 독백하듯이 내 얼굴을 흘끗거리면서 중얼거리고는 내게 이력서 하나를 건네주었다.
꽤 건실한 중견업체에 자신이 특별히 부탁을 했다고 했다.
오랫동안의 설득 후에 간신히 얻어온 취업자리라면서 경력도 없는 고등학교 졸업자로는 들어가기 어려운 사무직이라고 천운이 닿은 것이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리고 취업이 되면 딴 생각 말고 그곳에서 뼈를 묻을 결심으로 직장생활을 하라고 신신당부를 했었다.
가서 열심히 다니면서 힘들었던 학교생활의 보상을 받으라는 말도 덧붙였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학교에 까지 찾아갔었다.
왜 그렇게 까지 해야 했는 지 지금에야 실소가 나올 일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그 녀석을 찾는 것에만 목표를 두고 목을 메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왜 그녀석을 내가 찾고 있는지 이유까지도 잊어버릴 정도였다.
다행히 그 선생은 나를 알아보았다.
특별히 반갑거나 할 일도 없었고 그런 표정도 아니었지만 묘한 웃음을 띄면서 나를 맞아주었다.
한두군데 연락을 해 보면 그 녀석의 연락처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졸업생 중에서 취업이 된 학생들의 자료를 보관하고 있다고 했다. 혹시라도 나중에 재학생 중에서 도움 받을 수도 있을 수도 있는 이유였다.
그리고 조바심을 내던 며칠이 지난 후, 그 선생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를 찾았다고 했다. 그리고 전화로 녀석의 번호를 불러주었다. 회사일을 하던 중이라 문자로 보내주었으면 하고 바랬지만 찬물 더운물 가릴때가 아니었다. 잊지 않고 찾아서 연락준 것이 고마운 일이었다.
아홉시 경에 미리 종로에 도착해서, 갈곳이 없던 나는 여전히 몰리에르를 찾았다.
’이제 아무것도 잃을 것도 없어서 두려울 것도 없다‘라고 당당하게 집에서 출발하던 나의 모습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문 앞에 서서 소심하게 문을 빼끔히 열고 안쪽을 들여다 보았다.
테이블에 마주 앉은 낯선 손님 둘 이외에는 안면이 있는 그 바텐더가 유일한 사람이었다. 문을 밀고 들어가면서 그런 내 자신에게 자괴감이 다시 들기 시작했다.
바의 높은 의자에 걸터 앉는 나를 보고 바텐더가 밝게 미소지어 보였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네. 어쩌다 보니....“
어색해하는 나의 표정을 보고는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일행 있으시면 커피한잔 드릴까요?“
”아녜요.“ 그런 그에게 손사래를 쳤다.
”오늘은 그냥 혼자예요. 그리고 올때마다 신세를 져서야.....“
그가 그런 나를 보고 씨익 웃어보였다.
”그냥, 제일 추천하실만한 걸로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가 고개를 끄덕 해보이고는 나에게 등을 돌렸다.
내 앞에 놓여진 칵테일을 한 모금 맛보았을 때였다.
등 뒤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면 무슨 상관이야. 이 바보같은 자식.” 스스로에게 담담해지라고 책망하면서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렇게 음료수를 내려다 보면서 앉아 있었다.
“어!”
내 옆에서 누군가가 나를 향해서 마치 뜻밖이라는 말투로 툭하고 내뱉었다.
슬며시 고개를 돌려보았다.
“우진이 아냐?”
예전에 승우와 사귈 때 종로에서 오가다가 몇 번 얼굴을 본 녀석이었다.
나보다 나이는 한 두 살 위였을 듯 싶었다. 넉살좋게 처음 본 사람들과도 대화를 아주 찰지게 잘하는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승우가 있던 그 밴드의 회원인듯도 했다.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는 내 옆의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정말로 많이 반갑다는 듯 바 위에 올려진 내 손을 잡고 악수하듯이 흔들었다.
“진짜 오랜만이다.”
그는 이미 술을 꽤 한 듯 붉어진 얼굴에 개기름이 번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승우 본지도 꽤 오래되었는데 말야.”
그의 혀도 조금씩 꼬이는 것이 벌써 소주 두세병은 들이킨 듯 보였다.
그렇게 마치 졸지에 일행이 된 듯이 바텐더에게 칵테일 한잔을 주문하고는 그는 나에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야, 내가 얘기를 안하려고 했는데 말야.”
소주 냄새를 풍기면서 그가 나를 보고는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사람들 참 남의 말을 쉽게 해.”
“......”
“나야 제 삼자로 객관적인 판단을 하려고 했는데 말야.”
그는 말을 멈추고 바텐더로부터 칵테일을 받아 들고 한 모금을 마시고는 내려놓았다.
“너도 뻔히 알거야.”
그가 나를 한번 빤히 바라보았다.“
”예전에 승우 밴드 탈퇴하고 한번 다시 만난 적이 있었거든. 밴드 회원들 다 나오라는 연락이 와서...“
”......“
”뭐, 재호랑 너 얘기 한동안 오가다가, 재호가 자기 입장 설명하고 하다가 먼저 돌아갔거든.“
”.......“
”그러다가 승우가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에 현진이 그 촉새가 그 새를 못참고 또 입방정을 떨었지 뭐냐. 너가 재호한테 찝적거리다가 퇴짜 당한거라고.....“
그의 말에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재호가 반반하게 생겼으니 밴드 안에서도 몇놈이 뒤에서 그런 짓 한거 이미 자기가 다 알고 있다고. 그렇게 까이고 나서 그 놈에게 악의가 남아서 애먼 놈 잡는 거라고. 그래서 일진 프레임 뒤집어 씌운거라고. 흔하고 뻔한 레파토리라고. 안봐도 비디오라고...“
”......“
”그런데 그때 승우가 뒤에서 그 놈 얘기 다 들어버렸거든. ‘다시한번 그 더러운 주둥이 놀려보라’고 눈 흰자위가 완전히 뒤집혀서 현진이 멱살 잡고 내동댕이 치는 걸 다른 애들이 간신히 뜯어 말렸어.“
”......“
”개*끼들 앞으로 죽을 때까지 상종 안한다고 고래고래 악다구니를 쓰고 갔다. 승우가.“
그가 다시 자신의 칵테일 잔을 들고 한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그 담부터 종로바닥에서 승우도 안보이네. 잘 지내는 거지?“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천길 땅속으로 꺼진 느낌이었다.
꼬일 인생은 이렇게 저렇게 노력해도 안되는 듯 싶었다.
화가 난다기보다, 막막하고 답답한 생각에 나도 몰래 눈에서 눈물이 고였다.
오른 손으로 이마를 집고 흘러나오는 눈물을 이를 악물로 참고 있었다. 바보같이 입 밖으로 낮은 신음 소리도 빠져나왔다.
뿌연 내 시야에 박스티슈가 놓어진 것이 들어왔다.
한 장을 뽑아 얼굴을 문지르고 다시 한 장으로 코를 풀었다.
고개를 돌린 나의 눈 앞에 어느 사이에 그는 사라지고 없었다.
간신히 진정한 내 눈앞에 나를 마치 안스럽다는 표정으로 보고있는 바텐더의 얼굴이 보였다.
답답한 마음에 그런 그에게 쪽팔린다는 생각 같은 것이 들어올 여유도 없었다.
”저....“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번에도 그렇고, 들으려고 한 것은 아닌데, 어쩌다 보니....“
그가 다시한번 나의 눈치를 보았다.
”저도 그 재호라는 사람 알아요.“
그의 말에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제가 주중에 일하는 곳이 그래도 강남에서는 알아주는 카센터 거든요.“
그가 씁쓸한 미소를 짓고는 다시 나를 흘끗 보았다.
”재호라는 그 사람하고 친구 두 명하고 같이 몇 번 카센터에 왔었어요.“
”......“
”차만 봐도 최고급 외제차에 부모가 뭐하는 사람들인지는 몰라도 보통 거물은 아닌 것 같고요.“
”거기서 일하는 직원들은 그냥 그 놈들 종이예요. 차 만진 것이 맘에 안든다고 사람들 앞에서 직원 한명을 발로 차고 뺨도 때린 적도 있는데요.“
그의 말에 놀라 입을 딱 벌리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거기 있으면 상상도 못한일도 벌어져요. 사장은 그 직원에게 봉투하나 건네주고 입막음 했어요. 남의 돈 버는 것이 쉽냐면서....“
”......“
”지들끼리 얘기하는 것을 한번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러더라구요. 줄에 묶여있는 개가 자기 보고 짖어대길레 자기 차로 그냥 받아버렸다고.“
”.......“
”그런 얘기를 아주 자랑삼아 하더라구요.“
”......“
”무슨 일이신지는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 재호라는 사람이 손님을 먼저 아는 척 하는 것을 저번에 봤어요. 무슨 말씀을 나누셨는지야 모르지만..“
말을 멈추고 그가 나를 흘끗 보더니 얼음 물한잔을 내 앞에 내 놓았다.
”카센터에서 재호라는 그 사람이 직원들에게 무례한 행동을 하는 걸 본 건 아니지만 유유상종이라고 그런 친구놈들하고 다른 게 뭐가 있겠어요. 다 거기서 거기죠.“
그때 테이블에 앉아 있던 손님이 그를 불렀다. 그리고 그는 나를 한번 흘끗 본 후에 그들이 있는 곳으로 발을 옮겼다.
선일이 그 녀석도 변한 것은 별로 없었다.
나이가 들고 사회물을 먹게 되면서 외모가 학생때보다는 좀 더 성숙해지고 세련되어 진 듯한 느낌이 들 뿐, 다른 것은 그대로 인 듯 싶었다.
그의 여자친구도 외향적이며 말하는 태도가 마치 고딩때 좀 놀았던 티가 나는 듯 보였다.
여자 친구도 있는 자리였고, 또 만나자 마자 어떤 부탁을 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녀석과 두세번 더 만나면서 다시 친해진 후, 녀석에게 하려는 말을 꺼내기로 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훤하게 보이는 야외 테이블에 앉아서 입안에 고기를 씹으면서 어느 한순간 그녀가 투덜댔다.
”종로는 다 좋은데 게이가 너무 많아.“
그렇게 기분 나쁘다는 듯이 투덜대며 말하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손을 잡고 다정하게 걷는 남남커플이 두셋 보였다.
”그것도 얼마 안 남았어.“ 녀석이 그녀를 보고 마치 달래는 듯이 말했다.
”예전에는 이 앞의 도로를 지나갈 때 그 놈들이 포장마차들을 다 점령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안보이잖아.“
선일이의 말에 그녀가 마치 안심이라도 한 듯한 표정으로 웃어보였다.
그때였다.
”야, 이뇬아 오랜만이다.“
크고 간드러지는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려 보았다.
예전에 종로에서 알고 지냈던 한 녀석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녀석은 눈치도 없이 얼굴 가득 웃음을 띄고는 나를 향해 걸어왔다.
”너 서방하고 헤어졌다면서?“
그가 내 앞에 걸음을 멈추고 서서 나를 싱글거리면서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도 피부도 뽀샤시 하고 살도 찐게 살만한가 보네? 아는 척좀 하고 살아라. 이뇬아. 혼자만 잘 먹고 잘 살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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