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너머를 달리는 그림자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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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한 순간 눈이 떠졌다.

 

눈 앞이 어질어질 했다. 분명 눈을 떴는데도 눈 앞에 아지랑이가 피어 있는 듯 몽롱했다.

몸을 움직여 보려고 했다.

머리가 터질 듯 했다. 뇌는 흔들리고 날카로운 두통이 두 눈동자를 찌르듯이 밀려왔다.

다시 반듯이 누웠다.

아지랑이 사이로 조금씩 보이는 천장의 무늬는 나의 방의 것이 아니었다.

순간 당황해진 나는 간신히 머리를 옆으로 천천히 돌렸다.

생전 처음 보는 방이었다. 작은 책상위에 컴퓨터가 올려져 있었고 책상 아래에는 이것저것 잡다한 기계 부품 같은 것이 흩어져 있었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찌르는 듯한 통증에  양팔로 머리를 감싸고 온 힘을 다해서 눌렀다.

입 밖으로 나도 모르게 신음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렇게 간신히 진정을 한 후, 다시 슬며시 눈을 떴다.

그리고 머리에 통증을 유발하지 않도록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 낯선 방안을 돌아보았다.

 

배꼽 아래를 덮고 있는 이불을 손으로 걷어 냈다.

내 눈에 드러난 몸은 간신히 팬티만 걸친 알몸이었다.

“도대체...”

 

이곳이 어디인지, 내가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된 것인지 도대체 지난밤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삐삐삐삐...”

그런 와중에 현관의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무의식적으로 옆으로 치워 놓았던 이불을 움켜쥐고 아랫도리를 덮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등 뒤로 문을 닫고 신발을 벗던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더니 한번 흘끗 웃어보이고는 들고 있던 비닐봉투를 싱크대 위에 올려놓았다.

“이제 정신이 좀 들어요?”

몰리에르의 바텐더였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그 말에 그가 다시한번 씨익 웃었다.

“기억 안나요?”

“......”

여전히 웃는 얼굴로 고개를 돌리고 그는 비닐 봉투 안에 들어있던 것들을 하나씩 꺼냈다.

“혼자서 그냥 대충 때우고 살다가 숙취가 심할 것 같아서 국 좀 끓이려고 넣을 만한 것 몇가지 사왔어요.”

“근데...제 옷은...”

“아..”

그가 문 옆의 한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지금 건조 중이예요. 아침에 세탁했거든요.”

“......”

“온 몸에 토하셔서 어쩔수 없이....”

“죄송합니다.”

“당장은 그쪽 옆에 있는 거 대충 입고 계세요.” 그가 손가락으로 내 옆에 있는 창문 아래쪽을 가리켰다.

손을 간신히 뻗어 그곳에 놓여있던 반바지와 티셔츠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힘들게 손을 뻗어 셔츠의 구멍 속으로 팔을 집어 넣었다.

“새벽까지 술을 드시고 그냥 그 자리에 쓰러지셨는데, 연락할 수 있는 지인도 모르고 해서요. 술집 문은 닫아야 하고... 해서 그냥 어쩔수 없이 제 방으로 모시고 왔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살다가 그렇게 쪽팔리는 상황도 또 오랜만이었다.

남의 행동에 굴욕을 느낀 것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내 자신의 행동이 유발한 부끄러움은 나의 낯을 뜨겁게 했다. 얼굴을 제대로 들고 그를 볼 수도 없었다.

“예, 정말 어젯밤에 택시로 모시고 오면서 진땀 좀 뺐어요.”

열심히 끓는 국물에 무엇인가를 넣으면서 그가 나를 흘끗 거리면서 피식거렸다.

“생전 처음으로 누군가를 내 등에 업어봤네요.”

“.......”

“그래도 키 작으시고 안무거우셔서 다행이긴 했어요.”

그가 다시한번 피식 하고 웃고는 싱크대 옆에 놓여있던 작은 상을 들고 다리를 펴기 시작했다.

“식사하시고 괜찮으시면 무슨 일로 그렇게 술을 드셨는지 말씀이나 한번 들려주세요.”

“......”

“제가 또 바텐더 생활을 몇 년 하다보니 여기저기에서 주워 들은 것이 좀 있어서요. 혹시 아나요? 제가 또 쓸만한 조언이라도 드릴 수 있을지?”

그가 나를 보고 다시한번 웃어보이고는 수저를 들고 국의 맛을 보기 시작했다.

 

 

 

“이해합니다.”

후식으로 배를 갈아 넣었다는 꿀물이 든 잔을 들고 내 앞에 놓으면서 입을 열었다.

“저도 그랬거든요. 뭐 고등학교때야 그냥 특별한 일 없이 보내긴 했지만, 졸업하고 지금 카센터에 일하게 되면서 별별일 다 보고 또 저도 많이 당하기도 했구요.”

“........”

“왠만하면 그냥 잊어버리세요.”

그가 자신의 커피잔을 들고 한모금 마신 후에 다시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적당한 애인 하나 구하시고 종로하고 인연 끊고 그냥 사세요. 그럼 특별히 마주칠 일도 없을 것 같구요.”

“.....”

“저에 비하면 우진씨는 지금부터는 나은 인생이죠. 전 일 때문에 어쩔수 없이 앞으로도 계속 그 놈들 봐야하거든요.”

“......”

“인생이 다 그런거라고 자위하고 있어요. 더러워도 참고 그냥 버티면서 살아가는 거죠.”

“전 그냥...”

그의 말에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그냥.. 승우에게 내 말이 사실이었다는 것만이라도 증명하고 싶어서요.”

“그게 큰 의미가 있나요?”

그의 말에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 친구분 설득해서 그분에게 설명한다고 해도 그것으로 상대의 마음속의 의혹이 완전히 사라질거라는 생각이 들진 않아서요.”

“......”

“사람은 누구든지 무엇인가 한번 의심을 품게 되면, 옛 사람들이 하던 말처럼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않게 된다’ 고 하잖아요. 어떤 일은 빨리 손에서 놓아 버리고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싶어요.”

말을 마치고 그가 커피잔을 들고 슬며시 일어나서 싱크대 쪽으로 발을 옮겼다. 그리고 수돗물을 틀고는 아주 익숙한 솜씨로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딴이 그에게 할 말이 없어진 나는 상 위에 올려져 있는 물티슈통에서 서너장을 뽑아 방바닥을 훔치기 시작했다.

 

책상쪽을 향해 문지르다가 문득 책상 아래 흩어져 있는 자동차 부품들 같은 것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쪽 구석에 놓여있는 눈에 익숙치 않은 복잡하고 신기해 보이는 장치하나가 눈에 띄었다.

”이건 뭔가요?“

막 설거지를 마치고 손을 씻는 그에게 손가락으로 그 물건을 가리켰다.

”아 그것은 그냥...“

그가 마치 놀란 듯 부지런히 나를 향해 걸어왔다.

”건드리지 마세요.“

그의 당황한듯한 부자연스러운 표정에 얼른 손을 떼고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민감한 기계라서요. 자동차 센서에 들어가는 거라...“

”아..네.. 죄송합니다.“

”별건 아닌데요.“ 그가 나를 돌아보고 겸연쩍은 표정으로 웃어보였다.

”가격이 좀 꽤 나가는거라.....“

멋쩍은 듯한 그를 보고는 슬며시 몸을 돌려 일으켰다.

 

건조기에서 완료음이 들려왔다.

 

 

 

집에 돌아온 후에도 오후내내 나는 침대에 쓰러져서 보냈다.

지난 밤에 얼마나 쪽팔리는 일을 내가 벌이고 겪었으며 앞으로 감당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은 다른 나라의 일처럼 느껴졌다.

당장 내 몸이 죽을 것 같았다.

여전히 골은 흔들리고 뇌는 마비 된 듯 아무것에도 집중할 수 없었다.

그저 그렇게 누워서 나를 찾아오는 잠에 취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방법인 듯 싶었다.

 

 

 

어느 순간 잠결에 휴대폰이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간신히 눈을 떴다.  어느새  깜깜한 밤이 되어있었다.  손을 뻗어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선일이었다.

”야, 미안하다.“

그는 대뜸 나에게 사과부터 건넸다.

”여친이 좀 제멋대로라 내가 비위맞추면서 지낸다.“

그의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너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그래도 나한테는 그만한 여자 없어.“

묻지도 않았는데 녀석은 장황한 설명을 시작했다.

”나보다 두 살 많지만 여친이 꽤 부자야. 괜찮은 회사 팀장이고.... 나한테 과분하지.“

”......“

”난 가진게 불알두쪽 밖엔 없다야. 집에 빚만 산넘어가고...“ 말을 멈추고 녀석이 한숨을 내쉬었다.

”놓칠까봐 눈치 보고 비위맞추면서 후다닥 결혼식 올리려고 계획중이야.“

그렇게 말하는 녀석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냥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녀석이 입을 다물고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우진아.“

녀석이 차분해진 목소리로 짐짓 진지한 투로 나의 이름을 불렀다.

”어?“
”너...."

그렇게 나를 부르고 녀석은 잠시 머뭇거렸다.

”나, 그냥 보고 싶어서 연락한 것은 아니지?“

”.....“

”너가 갑자기 그렇게 힘들게 나를 찾은 이유가 또 따로 있을 것 같아서 말야.“

”그게....“

갑작스러운 그의 그런 말에 내가 할 말을 털어놓을 기회라고 느껴지긴 했지만 막상 그말을 그에게 털어놓자니 하려는 말이 입 밖으로 쉽게 나오지 않았다.

”예전에 재호가 나한테....“

”옛날에 너 고생한거 다 알아. 다 기억해.“

녀석이 마치 내가 그 녀석의 이름을 말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나도 가끔씩 옛날 생각이 힘든 적도 있는데, 장본인이었던 너야 오죽하겠냐.“

”......“

”그래도 너 잘 견뎌내고 이제 잘 살고 있잖아. 이제 과거의 그늘에서 그냥 벗어나서 거리를 두고 살아라.“

”선일아. 그게....“

”너만 그랬던 거 아니야. 우진아.“

”.......“

”나도 고1때는 한철이 그 놈한테 무쟈게 시달렸다.“

”한철이?“

”네가 발로 찬 놈말야. 재호 옆자리에 앉던 놈.“

”.......“

”그 자식은 재호랑 비교도 안됐어. 얼마나 악랄한 놈이었는데.“

녀석이 흥분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 개 새끼는 고등학교때 학교마다 원정 뛰면서 패싸움하고 다녔어. 넌 몰랐지?“

“.......”

“고막이 터진 놈도 있고 팔다리 부러지는 건 예삿일이고, 어떤 놈은 자살한 것 신문방송 한번 못타고 다 묻히고.... 칼 건네주고 자기 보는 눈 앞에서 손목 베라고 협박하고...”

그의 말에 머리카락이 쭈뼛하고 서고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 자식 등쌀에 국내에서는 어디로 숨어도 안되겠다 싶으니까 외국으로 도망간 애들도 내가 아는 것만도 한둘이 아니야.”

“.....”

“그 놈에다 대면 재호는 아무것도 아니지.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수황이하고 윤식이 그 양아치들이 재호 눈치 보느라 네 물건에다가 손 못 댔잖아. 새끼들도 지들하고 급이 다른 것은 알아서 꼬리 내리고.....”

말을 멈추고 그가 피식 하고 웃었다.

“너 조금이라도 위안되라고 한 말인데 막상 하고 나니 별 도움되는 말도 아니긴 하다.”

녀석이 말을 멈추고 큰 소리를 내면서 한 숨을 내쉬었다.

“아...”

녀석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너가 뭐 얘기 하려고 그랬지? 내 얘기만 정신없이 했다.”

“아냐.”

휴대폰에 대고 힘들게 입을 열었다.

“뭘 말하려고 했는지 지금 기억이 안난다. 나중에 얘기 해줄게.”

 

통화를 끝내고 휴대폰을 손에 쥐고는 몸을 돌려 모로 누웠다. 세상이 꺼져내려간다는 느낌은 여전히 남아있는 나의 숙취때문인지 나의 앞에 놓여있는 암담한 미래 때문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슬며시 눈을 감고 그 바닥이 어디 즈음인지 헤아려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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