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옷소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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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환이 다섯 살 때였다.
집 근처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놀던 녀석의 귀에 어디선가 멋진 음악이 들려왔다.
마치 피리부는 사나이가 부르는 연주에 홀려 사라진 아이들 중 하나처럼 녀석도 자신도 모르게 그 음악이 들려오는 방향으로 발을 옮겼다.
길을 건너고 코너를 돌았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여있는 광장에 발을 멈추고 너댓명이 연주하는 아름다운 선율에 빠져 넋을 놓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꽤 오랫동안 계속되던 연주가 끝난 후, 자리를 떠나는 사람들 속에서 녀석도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자신이 낯선 곳에서 길을 잃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두려움이 녀석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눈에 익숙한 집 주변에서 그렇게 멀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길을 물어보고 싶었지만, 녀석을 지나치는 사람들의 시선은 너무 높았고 아무도 녀석에게 관심을 보여주지 않았다.
기억을 더듬으면서 녀석은 걸음을 옮겼다.
코너를 돌고 사람들을 따라 파란불에 횡단보도를 건넜다.
어느 새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화가 난 아빠의 얼굴과 울고있는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조급함과 초조함에 녀석은 계속 사방을 둘러보았다.
집 근처에 있는 커다란 목욕탕 굴뚝만 눈에 띄면 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멀리에 서 있는 그 굴뚝이 녀석의 눈에 들어왔다.
‘길만 건너면, 그리고 왼쪽 길로 가다가 다시 코너만 돌면.....’ 녀석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꽤 넓은 도로에 흐릿한 자국만 남아있는 횡단보도에는 신호등이 없었다.
녀석의 도로 앞쪽을 달려 지나가는 거대한 금속 덩어리들은 그런 녀석을 아랑곳하지 않고 탱크처럼 밀고 지나갔다.
이따금씩 그의 옆으로 어른들이 한 둘씩 그런 차들을 피해서 부지런히 길을 건넜다.
고개를 하늘로 향하고 녀석은 자신의 옆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길을 건너는 것을 도와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하지만 녀석이 취하려는 행동에 비해서 사람들은 너무 빨리 자신들의 길을 가 버렸다.
걱정과 두려움에 녀석은 이제 울쌍이 되었다.
산더미 같은 공포스러운 기계덩어리들은 그런 녀석에게 으름장이라도 놓듯 굉음을 내며 지나갔다.
눈망울을 가득채운 눈물을 가녀린 손가락으로 문지르면서 고개를 돌리는 순간, 녀석의 옆에 푸른 옷소매가 보였다.
그것은 마치 신호등의 파란색 처럼 녀석에게 구원의 손길과 같이 다가왔다.
손을 뻗어 녀석은 슬며시 그 옷소매를 붙잡았다.
그리고 앞으로 전진하는 그 옷소매에 마치 매달리듯 녀석은 도로 위로 발을 내딛었다.
순간 그 푸른 옷소매의 주인이 발을 멈췄다.
그리고 손을 펴고 녀석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녀석의 걸음에 맞추어 그 푸른 옷소매의 주인의 보폭이 느려졌다.
그리고 마침내 반대편의 인도에 도착한 후, 그가 슬며시 녀석을 잡았던 손을 놓았다.
녀석은 고개를 들고 그를 올려다 보았다.
몰려오는 어두움 때문이었는지, 녀석을 엄습하고 있던 두려움 때문이었는지, 집으로 빨리 가야한다는 조급함 때문인지는 몰라도 녀석에게 그의 얼굴이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자신을 보고 미소를 짓고 있었다는 것만은 느낄 수 있었다.
몸을 돌려 녀석은 있는 힘껏 달렸다.
그리고 코너를 돌기 전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바로 그 자리에 그 푸른 옷소매의 남자가 서 있었다. 마치 무섭고 공포스러운 그 도로를 용기를 내어 잘 건넌 것을 칭찬이라도 하는 듯, 녀석을 도와주게 되어서 기뻤다는 듯, 그리고 남은 길도 잘 찾아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라는 듯...
아주 작은 규모로 나 혼자서 창업을 하고 일을 시작했다.
그래도 어떻게 먹고 살아 보라고 하늘이 도왔는 지, 일감은 끊기지 않고 들어왔고, 해가 바뀌면서 혼자서 감당하기 힘들만큼 일이 많아졌다.
한두다리 건너서 만나게 되어 몇 번 안면이 있던 지환이 녀석이 떠올랐다.
얌전하고 건실해 보이던 녀석이었다.
잠시동안 고심을 했지만 아무래도 나의 개인적인 성향과 삶을 내보여도 상관이 없고 편할것이라는 생각에, 졸업 후 아직 취업 전이던 녀석에게 같이 일해보지 않겠냐고 슬며시 제안을 했다.
그렇게 해서 녀석은 나와 아주 작은 한 배를 같이 타게 되었다.
밀린 일을 마무리 하느라 오후 늦게까지 야근을 한 토요일 밤에 나는 녀석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러 식당에 들렀다.
토요일에 출근한 것에도 그리고 내 마음대로 골라 찾아온 식당에서도 녀석은 아무 불평없이 넉넉한 마음에 밝은 얼굴로 나와 마주 앉았다.
“여기 음식이 그럭저럭 깔끔하고 먹을 만 해. 아주 까다로운 입맛만 아니면 만족할거야.”
“전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패딩을 벗어서 자신의 옆에 가지런히 개켜 놓으면서 그가 웃었다.
“아, 그건 그렇고....”
이제 조금씩 끓고 있는 찌개 위에 라면 사리를 올려놓고 국자로 끓는 국물을 슬며시 그 사리위에 붓고 있는 지환을 보면서 내가 슬며시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나와 같이 일을 시작한지도 이제 3개월이 지나가는데 너에 대해서 내가 아는 게 별로 없네?”
내 말에 지환이 고개를 들어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내 얼굴을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 보였다.
“사실......” 그런 그의 눈치를 보면서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전에 우리 회사에 한 두 번 놀러왔던 동생 있지? 장현이라고......”
나의 말에 그가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녀석이 너에게 조금 마음이 있는 듯 해서, 혹시라도 네가 지금 사귀는 사람이 없고, 너도 그 녀석이 괜찮다면......”
말을 슬며시 멈추고 다시한번 그 녀석의 표정을 살펴 보았다.
눈치가 없고 사람 속을 파악하는 것에 젬병인 나 같은 사람은 역시 누군가의 중간에서 다리를 놓아 준다는 것은 능력 밖의 일이었다.
그의 얼굴에 나타나는 희미한 미소는 여전히 나의 말에 긍정의 의미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알 수 없었다. 나이가 들면서 요즈음 젊은 사람들의 세상은 나의 이십대 때와는 사뭇 달라지고 사고방식도 현저하게 차이가 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알지 못하는 앱이 잔뜩 깔려 있는 최신 휴대폰을 손에 쥐고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쩔쩔매는 듯한 ‘나이든 아저씨’ 의 모습이 내 처지인 듯 느껴졌다.
그렇게 나이가 들어가는 나는 뒤에 내버려두고 세상은 갈수록 이해하기 힘들어지고 복잡해지는 듯 느껴졌다.
“그 분에게 별 다른 감정은 느껴지진 않지만.......” 끓고 있는 찌개를 바라보면서 지환이 입을 열었다.
“뭐, 궁금하신 것 있으시면 물어보세요.”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고는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좋아하는 스타일이 어떻게 돼?”
그렇게 물어 놓고 그 질문에 내가 당황스러워지고 쑥스러워졌다. 내 자신이 녀석을 마음에 품고 묻는 것이 아니고 아는 동생을 위해서 다리를 놓아주려고 하는 것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내 입에서 나온 그 말은 내 귀에 터무니 없이 들렸다.
낯이 뜨거워졌다.
역시 다 늙어서 남의 인연을 이어주겠다는 것은 터무니없고 쪽팔리는 일이었다.
“아니면... 전에 사귀었던 사람은 어떤 스타일이라던가......”
얼른 질문을 고치고 녀석을 흘끗 보고는 헛기침을 한두번 해 보였다.
“아직까지 사귄 사람은......”
나의 질문에 쑥스러운 웃음을 머금고는 지환이 입을 열었다.
“없었어요.”
“왜?”
그의 대답이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귀여운 얼굴에 맑고 또랑또랑한 눈망울을 가진 녀석이었다. 좋다는 것들이 여럿 있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전혀 다른 그의 말이었다.
“그냥.....사느라고 바빠서요.”
그의 말에 나는 그저 슬며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도 마음속으로 네가 좋아했던 사람은 있지 않았을까?"
은근한 나의 질문에 그가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물론, 제가 좋아했던 사람은........”
지환이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접시에 크게 건더기 한 국자를 떠서 자신의 앞에 놓으려는 내 손을 바라보고는 사양을 하는 손짓을 해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를 무시하고 그의 앞에 들고 있던 푸짐한 접시를 내려놓았다.
“괜찮아. 말해 봐. 궁금하다.”
내 손에 들려있던 국자를 빼앗아 내 접시에 두부와 라면 사리를 담고 있는 녀석을 보면서 계속해서 물었다.
“네가 어떤 사람을 좋아했는지 궁금해서 그래. 천천히 저녁을 먹으면서 네 그 첫사랑 얘기나 오늘 좀 들어보자.”
내 앞에 접시를 내려 놓고는, 그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한번 웃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뭐, 별것 아니지만, 궁금하시다면....”
그렇게 입을 여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슬며시 나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제가 중3 때 였어요.”그의 입꼬리가 올라가고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번졌다.
“그때, 전 뭐, 학교에서 아주 평범한 애였어요. 그런 애들 있잖아요.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못하는 것도 아니고, 뚜렷하게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고, 그렇다고 문제아도 아니고.....그래서 있는지 없는지 잘 보이지 않는, 존재감 없는 애들요.”
말을 멈추고 그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1학기 중간고사 끝나고 그래도 꽤 친했던, 바로 뒤에 앉은 녀석의 집에 놀러 간 적이 있었는데, 우리집하고는 완전히 다른 엄청난 부자였어요. 집안일 봐 주는 아주머니도 계시고 우리집에는 없던 컴퓨터도 그 녀석 방엔 최고급으로 두 대나 있었고.....”
그가 고개를 돌려 나의 얼굴을 한번 보고는 슬쩍 쓴 웃음을 지었다.
“여튼, 그 녀석하고 한참 그때 유행했던 스타를 하고 있었는데 과외 선생님이 오신거예요. 녀석이 공부를 별로 좀 좋아하질 않았거든요. 저도 그랬긴 했지만....”
“넘겨짚긴 싫지만 혹시 그 과외선생님이?”
내가 슬며시 웃으면서 지환의 표정을 살핀 후 물었다. 대답 대신 녀석이 희미한 미소를 띠면서 고개를 슬며시 끄덕거렸다.
“그 녀석, 자기 과외 있는 날인지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다가 선생님이 오셔서 좀 당황했는데, 대학생이었던 그 선생님은 정말 잘 생겼더라구요.”
얼굴에 홍조를 띤 녀석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뻘쭘하게 뒤에 서 있는 저를 보더니 ‘너도 와서 그냥 수업 들어봐.’ 라고 하셔서 그냥 모르는 척 슬며시 저도 탁자 끝으로 가서 앉았어요.”
녀석의 입가에 다시한번 미소가 번졌다.
“그때까지 가수나 영화배우 보면서 잘생겼다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그 선생님은 정말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잘생겼었어요. 사실 뭐 제눈에 안경이긴 하겠지만요.”
말을 멈추고 녀석이 피식하고 웃었다.
“한시간 반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수업이 끝나고 문을 열고 나가시는 선생님의 뒷 모습이 얼마나 안타깝고 아쉽던지...”
그가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는 젓가락 끝을 내려다 보았다.
“그 다음부터 그 친구한테 의도적으로 특히 잘 해줬어요. 학교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물어볼 때 그 녀석이 모르는 게 있으면 노트에 슬며시 적어서 제 등뒤에 서 있는 녀석이 보이게 슬며시 들어서 보여주기도 하고, 스타를 할 때에는 일부러 져 주기도 하고, 너 정도면 잘생기고 괜찮다고 입바른 칭찬도 좀 해주기도 했구요. 그러면서 슬며시 그 선생님 과외하는 요일 물어보고 그 날이 되면 공연히 걔네 집에 놀러가고 그랬어요.”
그렇게 말하는 그 녀석의 말과 표정이 귀여워서 피식 하고 웃음이 나왔다.
겸연쩍은 표정을 하고는 한번 고개를 으쓱해 보이더니 다시 녀석은 입을 열었다.
“친구 녀석도 혼자 과외하는 것보다 저랑 같이 하는 것을 좋아해서 그렇게 그 친구 녀석이 과외하는 날 놀러가서 같이 과외 수업도 받고 그랬는데, 그 선생님은 전혀 싫은 내색을 보이지 않으셨어요. 또, 가끔은 일부러 친구 비위 맞춰주느라고 그 놈이 공부하기 너무 싫어하는 표정이면 ‘선생님도 혹시 스타 할 줄 아세요?’ 하고 물어보기도 하고 ‘선생님 혹시 애인 있어요?’ 하고 농담 삼아서 제가 궁금한 걸 물어보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래서, 대답이 뭐였어? 애인이 있대?”
빙긋 웃으면서 내가 물었다.
“아뇨.” 지환이 고개를 슬며시 저었다.
녀석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녀석의 시선은 나에게 도달하지 않았다. 그저 녀석과 나의 사이 어딘가에 있는 허공에 맺혀 있었다.
“그 선생님, 저에게 정말 잘 해 주셨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수업에 저도 올 줄 아시고 프린트물은 항상 두 개를 준비하셔서 저에게 주셨고요. 과외비 내지 않는 학생이었는데도 전혀 그런 눈치 주신적이 없었어요.”
그가 말을 멈추고 낮은 기침을 한번 했다.
“그때 어린 마음에 집에 가서 엄마한테 나도 과외 받고 싶다고 말했다가 공부도 못하면서 숙제로 제대로 안하는 주제에, 집안 어려운 것 뻔히 알면서 말도 안되는 얘기 한다고 혼나고...” 그가 나를 흘끗 보고는 씩 웃었다.
"과외가 끝나고 선생님이 나오실 때 저도 집에 가야겠다고 친구집에서 나와 선생님 따라서 버스 정류장까지 걷기도 했어요.“
녀석이 고개를 들어 나를 한번 보고는 다시 슬며시 시선을 앞의 찌개에 두었다.
“가끔씩 선생님이 저와 거리를 두시고 담벼락 끝에서 담배를 피실 때에는 저를 흘끗 보시고는 미안하고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시더라구요. 그리고 담배 연기를 뱉으실 때에는 저에게서 고개를 돌리셨어요.
말을 잇는 그의 표정에 얇은 웃음이 계속해서 번졌다.
"그러다가 담뱃불을 끄시고 발을 옮기시면 전 부지런히 선생님이 담배 피우던 곳으로 가서 숨을 들이마시고 그랬어요. '이 담배 냄새가 나는 공기가 방금전에 선생님의 폐 속이 있던 바로 그 공기구나' 하고 생각하면서요."
지환이 말을 멈추고 나를 보고는 배시시 웃었다.
“그러다가 친구 녀석 집에 공사를 할 때에 선생님이 자기 집으로 오라시면서 집 주소를 알려 주시더라구요. 작전동에 있던 원룸 이었는데, 전 수업 시작하기 한참 전에 먼저 도착해서 그 선생님이 살고 있던 동네를 수없이 맴돌았었어요.”
녀석이 설레는 가슴으로 대학생 과외 선생의 집 주변을 어슬렁 거리면서 배회하는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라 나도 모르게 피식하는 웃음이 나왔다.
“그러다가 외출에서 돌아오시던 선생님과 마주쳐서 본의 아니게 일찍 선생님의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어요.” 마치 방금 그런 일을 당한 듯 녀석의 얼굴이 붉게 상기 되었다.
“간식 좀 사오신다고 잠시 기다리라고 하시고는 선생님이 마트에 가셨을 때였어요. 그러면 안되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방안에 있던 컴퓨터를 켜 보았어요....혹시 게임 같은 것이 있으면 그 동안 놀아야겠다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러면서 여기 저기 뒤져보다가.... 어려운 영어 이름이 있는 폴더 안에 들어 갔는데, 그 안에 또 다시 새 폴더가 있고, 또 그 안에 폴더가....“
”혹시....“
그의 말을 듣고 있다가 내가 은근히 물었다.
“그렇게 찾아 들어갔더니 혹시 야동이라도 있던거야?”
크게 웃으면서 물어보는 나와는 달리 오히려 그렇게 말하던 녀석의 표정은 어두워져 있었다.
“아뇨, 야동은 없었는데....” 그가 말끝을 흐렸다.
“야동은 없었는데? 근데?” 그런 그의 얼굴을 나는 빤히 바라보았다.
“그 안에....선생님의 낙서 같은 것이 있었어요.”
고개를 들고 지환이 나를 한번 본 후에 다시 시선을 돌렸다.
“믿었던 사람에게 아웃팅을 당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모욕을 받고 괴로워하면서 쓴 글이었어요.
그때 전 아웃팅이란 것이 무엇인지 몰랐어요. 그러다가 글을 읽으면서 조금씩 이해가 되었어요. 그런 선생님이 많이 힘드시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그러면서도, 내가 좋아하는 그 선생님이 같은 게이라는 사실에 공연히 심장이 마구 뛰어서....”
그렇게 희미하게 웃으면서 말하는 그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뭐 어쩌겠어요. 전 겨우 중3 인데다가 상대는 대학생이면서 선생님인데...... 그냥 그렇게 가슴앓이를 계속 하다가 말았어요.”
“저런....”
“고등학교를 서로 다른 데로 진학하게 되면서 그 후로는 그 친구하고 연락도 흐지부지 되고, 그 다음엔 그 선생님도 만나지 못했어요.”
“그 전에, 전화번호라도 물어보지 그랬어?” 내가 슬며시 물었다.
나의 말에 그가 다시 쓴 웃음을 지어보였다.
“무슨요. 뭐라고 하면서 물어봐요. 정식 학생도 아니었고..... 또 집안 사정도 안 좋은데 과외할 것도 아니고.... 또 전화번호 안다고 해도 전화 해서 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가 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고는 한번 씁쓸하게 웃어보였다.
“대학교 들어가서 1학년 때 우연히 종로에 있는 대형 서점에 갔었어요. 그때 그 근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때였는데 시간이 좀 남아서 그냥 잠시 서서 책이라도 좀 읽다가 가자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기지개를 켜면서 한번 주위를 둘러보다가 그 선생님을 보게 되었어요.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후광이 비치는 걸 딱 보고는 한눈에 그 선생님인 줄 알아보았어요."
“반가웠겠네? 아는 척 하지 그랬어?” 그의 말에 내가 기쁜듯한 말투로 그를 보고 물었다.
“네, 그런데 처음에는 중학교때 꼬맹이일때 절 보셨다가 대학생이 된 절 보고 한눈에 알아보시진 못하셨어요. 그러다가 제 설명을 들으시고 그때 알아보셨어요. 그러면서 환하게 웃으시면서 그러셨어요. ‘너 정말 나 만나서 반가운가보다. 눈물까지 글썽거리네?’ 하셨어요.
간단하게 햄버거라도 먹으면서 얘기하자고 그러시는데, 제 아르바이트 시간이 다 되어서 그럴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그때 선생님한테 핸드폰 번호 알려달라고 그랬어요. 나중에 전화 드리겠다고요.”
“드디어 전화번호 딴 거네?”
“네.” 지환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때 학비에 보태느라고 아르바이트를 두 개 했었어요. 그래서 좀처럼 시간이 나질 않더라구요. 그러다가 입영통지서 나오고 나서 어느 토요일에 그 선생님에게 전화했어요.”
귀를 쫑긋 세우고 이야기를 듣는 나를 보고는 그는 다시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사실, 별 기대하지 않았어요. 잘 생기고 잘 나가는 선생님이 뭐가 아쉬워서 황금 같은 토요일에 저 같은 걸 만나겠냐 싶기도 했고, 마음에 없는 사람 인사 치레로 전화번호 준 것인데 공연히 전화로 부담만 주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고요. 제가 뭐 정식 학생이었던 것도 아니고, 사실 그 선생님 한테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잖아요.”
그가 슬며시 나를 한번 보고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그냥 그때에는 산다는 게 힘들기도 하고, 누구한테 위로라도 받고 싶기도 하고, 또 그 선생님이 너무나도 보고 싶어서 전화를 했어요. 근데 너무 반갑게 전화를 받으시더라구요. 연락 잘했다고요. 기다렸다시면서.... 역삼동 근처에서 선생님을 만났어요. 선생님의 표정에서 인사치레가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정말 반가워 하시더라구요.
저 사실 그날 고백하려고 나간 거였어요. 선생님에게 꼭 고백하고 싶었어요. 선생님 처음 본 날부터 선생님 너무너무 좋아했다구요. 이제 저도 대학생이니 제 감정 솔직하게 표현하고 싶다고요.”
녀석이 말을 멈추고 피식하고 웃었다.
“선생님하고 저녁먹고 술도 한잔 하면서 같이 보내는 시간 내내 마음속으로 계속 갈등하고 긴장하고 고백할 타이밍을 찾고 있었어요. 선생님은 저에게 대학생활이나, 꿈이라던가, 어떻게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할 것인가, 또는 좋은 직장 얻으려면 어떻게 스펙을 쌓을 것인가 라던지 하는 그런 말을 하셨는데 제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어요."
녀석이 말을 멈추고 무의식 적으로 비어있는 물잔을 손에 움켜 쥐었다.
“선생님과 같이 있는 내내 긴장되고 조마조마하고 등에서는 식은 땀이 나고...... 여전히 용기 없던 저는 기회를 잡지 못하고 그냥.....”
녀석이 자신의 손안에 쥐어져 있는 잔을 내려다 보았다.
“나중에 헤어지는 자리에서 선생님이 제 손을 잡으시고 아무 때나 편안하게 전화하거나 이메일 보내라고 그러셨어요. 휴대폰 문자로 이메일 주소 찍어주시구요. 그리고 웃으시면서 손을 흔드시고 뒤돌아서 걸어가셨어요.“
“그 다음엔 어떻게 됐어? 연락 안한 거야?”
“군대에 있을 때 메일을 받았어요. 내용이 난해하고 이해하기 어려웠어요. 그냥 선생님도 사람이구나. 상처받고 슬프고 힘들고 좌절하는구나. 처음에 선생님의 메일을 읽었을 때에는 그냥 그런 뉘앙스만 받았어요. 그러다가 휴가를 나와서 휴대폰으로 전화를 했는데 없는 전화번호라고 자꾸 그러는 거예요. 이상하다 싶어서 선생님이 알려준 주소로 찾아가 봤어요. 가면서도 지금도 선생님이 날 반갑게 맞아주시면 기필코 고백하겠다고 다짐했었어요. 결과야 어떻든 제 감정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랬는데.....”
“그랬는데?”
지환의 어두워진 표정을 보면서 슬며시 나도 긴장이 되었다.
“그해 4월 1일 만우절에, 정말 거짓말 처럼, 그가 세상을 떠나버린 거예요. 교통사고 였대요. 선생님이 몰던 승용차가 고속도로에서 난간을 들이받고 밖으로 굴러나갔대요.”
“아, 저런!” 그의 말에 나의 머릿속이 멍해져 버렸다.
“모두 다 사고라고 그랬지만, 그때서야 전 알게되었어요. 그건 선생님이 결정한 것이라구요. 그렇게 힘들었던 삶을 끝내는 것은 선생님의 의도였어요. 그제서야 전 깨달았어요. 선생님이 보내준 메일의 내용의 의미를.....”
말을 끝내지 못하고 지환은 고개를 떨구었다. 슬며시 그의 양쪽 눈꼬리에서 눈물이 번져나와 두 볼을 타고 흐르는 것이 보였다.
“저런.... 내가 공연한 것을 물었다. 미안하다.” 그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어쩔줄을 몰라 녀석에서 사과를 했다.
“아니예요.” 그가 손가락 끝으로 눈물을 훔치고는 다시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살아가면서, 조금씩 그 선생님에 대해서 이해가 되기 시작했어요. 너무 늦어 버렸지만...”
나는 손을 뻗어 녀석의 손을 슬며시 쥐었다.
“그냥...”
말을 잇지 못하고 지환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닭똥같은 눈물이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고백할걸 그랬어요. 미친척 하고 고백해 버릴 걸. 사랑한다고... 선생님이 미치도록 좋다고 고백할걸 그랬어요. 그랬더라면 이 차가운 세상에서 그렇게 혼자 남겨진 것처럼 생각하다가 그렇게 힘들고 외롭게 가지는 않았을텐데..... 어짜피 결과가 똑같다고 하더라도.. 내 마음 알고 갔더라면... 그랬더라면 선생님이 덜 외롭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냉혹한 세상에서 최소한 혼자가 아니라는 것만이라도, 내가 그를 그리워한다는 것만이라도 알고 갔더라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지환의 어깨가 슬며시 떨리기 시작했다.
주위 사람들이 그를 흘끗흘끗 곁눈질로 바라보았지만, 아무것도 그의 터진 감정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그는 고개를 떨구고 어깨를 들썩이면서 때 늦은 고백을 타인에게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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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되는 글솜씨인데도 화자와 지환이 한 인물처럼 느껴지네요.. 작품에 너무 개입하여 죄송합니다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