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이야기] 그 날, 그 부대에서 - 01

작성자 정보

  •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 00.


- 삑

버튼이 빨간 색으로 빛나며 무기질적인 소리가 났다.
버스는 그에 따라서 속도를 점점 낮추며 멈춰섰다.

드르륵 열리는 문소리.
영락없는 그때의 그 버스라서 어쩔수가 없이 웃게됐다.

내가 왜 여기 왔는지 모르겠다.
저 만치 보이는 위병소.
분명 한참 지났을 일인데, 아직도 내가 저기서 걸었던 것이 선하다.
그 옆에는 누군가가 항상 함께 있었지.

"오랜만이네……"

낯부끄러움을 느낄 새도 없이,
감상평이 저절로 입에서 나왔다.
이미 전역한지도 한참인데, 나는 여기 와서 뭘 느끼고 싶었던 걸까.

"무슨 용무로 오셨습니까?"

내가 부대 안을 한참동안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이 이상했던지,
근무를 서고 있던 위병소 병사가 나한테 넌지시 물어왔다.

"아 아니에요. 저 여기 전역자라 잠깐 옛날 생각나서……"

이상한 사람이라는 듯한 표정으로 병사가 쳐다봤다.
황당하겠지.

"신경 안쓰셔도 됩니다."
"아…… 예……"

머쓱한 표정으로 돌아가는 병사.
위병소 안에서 대충 전화를 하는것이 아마도 상황실에 보고를 하는 모양새다.


정말 바쁜 날들이었다.
숨도 쉴 사이도 없이 시곗바늘이 움직이고,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술을 먹고, 이야기하고, 토론하고,

그러다가 문득.
엄청나게 예전의 일이 생각났다.

"뭐? 오늘 안나온다고?"
"개인사정이 있어서……"
"허…… 보현씨가 말할 정도라면야……"

밤에 맥주 한 캔을 따면서 떠올린 그 생각은
한 번도 쉰적이 없는 회사에 개인사정이라며 핑계를 대곤
나를 여기로 이끌었다.

한 치도 다름이 없는 그때와 같은 풍경속에서
나는 우두커니,
그 사람을 떠올렸다.
내 인생을 만들어주고, 그리고 누구보다도 가까이에서 나를 보고
나를 믿어줬던 사람.

해성이 형.



- 01.



2011년 봄.
막 벚꽃이 흐드러지게 필 무렵이었다.

"에취!"

나는 만성적인 봄철 꽃가루 알러지 때문에 재채기를 해대고있었다.
다행히도 옆에 있던 동기는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이미 하차했다.
덩그러니 빈자리만 남아있을 뿐.

- 저희 KTX는 조치원 역에 도착하였습니다. 잊으신 물건 없으신지 잘 확인하시고……

무미건조한 안내방송이 기차가 조치원에 도착함을 알렸다.

"배치부대 XX사단인 인원 여기서 다 하차한다! 의류대 잘챙기고 쓰레기 다 챙기고."

이젠 너무 들어버려서 익숙해진 굵은 목소리.
인솔해주시던 조금 다른 군복 - 아마도 TMO 군복이겠지? - 을 입고있던 간부가 독촉을 한다.
그러고보니 내가 배정받은 부대가…… 여기였나?
잘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들었던 배치부대를 간신히 떠올리고 짐을 끌고 나왔다.

많은 일들이 있었다.
너무나도 하기 싫었던 입대. 특히 내가 게이라는 것에서 더더욱 위축감이 들었다.
사실 그럴 이유는 하나도 없었지만, 그냥 내가 남들과 다른데 내가 같이 생활을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에서였다. 

하지만 입대하고 나서는 정말 그런 문제는 문제가 되지도 않았다.
훈련소에서 굴려지고 굴려지고 자고 일어나고 불침번 몇 번 서고나니 눈 깜짝할 사이에 자대배치가 되어서 이 기차에 올라탄 것이다.
내 스스로에 대해서 뭔가 생각할 시간조차도 없었다.

그리고 대기를 며칠 하고 나서는 그나마도 얼마 남지않은 동기들과 하나둘씩 헤어지고,
결국 혼자 남고나서야 어떤 사람들이 날 데리러 왔다.

"과장님 얘 인가 봅니다. 너 이름이….. 김보현?"
"이병 김 보 현! 그렇습니다!"

갑자기 들이닥친 병장 한 명과 장교 한 명.
장교님은 나를 지긋이 쳐다보면서 슬슬 웃으면서 얘기했다.

"군기가 팍 잡혔네. 좀 편하게 해 ㅋㅋ"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예하부대로 배치되는 차에 타고 있었다.
내가 탄 회색빛 미니버스 안에는 퀴퀴한 군복냄새가 그대로 배어있었다.
정처없이 지나가는 논밭이 풍경사이로 20분 정도 지나갔을까,
나는 드디어 자대에 내리게 됐다.

인사과장님 손에 이끌려 나는 막사로 들어갔다.
군화가 딱딱한 바닥에 부딪히며 울리는 소리가 복도를 메웠다.
몇 개인가의 문을 지나쳐 나는 인사과라는 팻말이 걸린 사무실에 들어가게 되었다.

"상인아 신병왔다"

그렇게 한마디 툭 던지고는 인사과장님은 자리에 앉았다.
왼쪽 책상에서 컴퓨터로 사무를 보던 사람이 쓱 하고 의자를 돌려 센터에 있는 테이블로 앉으라고 톡톡 쳤다.

"이름이 뭐야? 보현이?"

분명히 내 이름은 군복에 새겨져있지만…… 다들 물어보는게 일반적인듯 하다.

"이병 김보현! 그렇습니다!"
"말투가 약간 경상도 말툰데? 경상도에서 왔어?"
"예! 창원에서 훈련받고 왔습니다"
"캬 먼데서 왔네. 나도 부산사람이야. 인사계원이고."

엄청나게 친근하게 대해주는 이 사람의 이름은…… 박상인 상병님인듯 하다.
전투복에는 검은색 작대기 세 개와 함께 박상인이라는 이름이 박음질 되어 있었다.

간단히 내 소개와 함께 여러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을 했다.
주로 대부분 적성검사? 인것같았는데, 컴퓨터로도 인성검사 비슷한걸 했다.
대체 이 인성검사라는건 왜 하는지 모르겠다. 신체검사 할때도 하고, 신교대 들어가서도 하고, 지금도 하지만 뭣하러 이렇게 자주하는건지…….

"너 혹시 컴퓨터 잘해?"

컴퓨터로 뭔가 작업을 하던 인사과장님이 갑자기 내쪽으로 눈길을 주며 얘기했다.
옆에서 내가 인성검사 페이지를 채워가는걸 도와주던 박상인 상병님도 의아한 눈빛으로 인사과장님을 쳐다봤다.

"과장님 얘 기관총 특기입니다."
"알아는 봐야지 급하다니까. 그래서, 좀 하는 편이야?"

박상인 상병님 말을 뚝 끊고는, 그대로 나한테 질문을 해오는 과장님.
생각해보면 집에서 틀어박혀서 한거라고는 컴퓨터밖에 없어서 잘 할 수 밖에 없는 것 중 하나였다.

"예 좀 합니다."
"게임 말고, 막 문서 작성이나 그런거. 피피티랑."
"그것도 하기는 합니다. 자격증도 있습니다."
"오. 괜찮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컴퓨터활용자격증을 따놓은 적이 있었다.
후에 생각해보면 그냥 차라리 못한다고 할 걸.
그때 어쩐지 책꽂이가 좀 흔들린다 싶더니……. 평행 세계의 내가 모스부호라도 보내고 있었나보다. Stay……

갑자기 인사과 측면에 있던 문이 벌컥 하고 열렸다.
사실 그 문이 열리지 않았다면 나는 그게 문인지 몰랐을것이다…...
캐비넷 사이로 절묘하게 가려진 그 틈사이로 뭔가가 열리더니 사람이 불쑥 튀어나왔다.

"충성! 병장 김민현 인사과에 용무있어 왔습니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경례를 하는 김민현 병장님을 인사과장님은 귀찮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얘기했다.

"왜."
"서류 결재받으러 왔습니다. 어제 말씀드린거 그거."
"아 그거 우리 아직 안 봤는데."

인사과장님이 택도 안된다는 제스쳐를 취했지만,
김민현 병장님은 아랑곳도 하지 않고 인사과장님을 다그쳤다.

"연대에서 그거 오늘 오후까지 내놓으라고 연락왔던데 보셨습니까?"
"알게뭐냐. 신병와서 바쁘니까 나중에 줄게."

신병이라는 단어에 귀가 쫑긋하더니 김민현 병장님은 나한테 시선을 돌렸다.

"오 딱봐도 컴좀 하게 생겼는데 제 부사숩니까?"
"기관총 특기라는데? 이번에도 중대인원이여."
"아 진짜…… 지환이가 또 선수쳤네 하……"

김민현 병장님은 한숨을 쉬면서 얘기를 이어갔다.

"인사과장님 저 곧 말차나갑니다."
"뭐야 너 전역 언젠데?"
"14일? 남았습니다. 부사수를 안주셔가지고 덕분에 인수인계도 안하고 가게 생겼습니다."
"내가 안주는거냐? 위에서 안주는걸 나보고 어떡하라고"

티격태격 대고있는 두 사람.
생각해보면 말차…… 말년휴가인거겠지?
방금 전입온 입장에서 들어보면 굉장히 비현실적인 얘기긴 하다.
곧 전역할 사람이라는 뜻이고…… 순간적으로 너무 부럽다는 생각을 해버렸다.

갑자기 박상인 상병님이 옆에서 끼어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신병 앞에서 말차얘기는 쫌……"
"뭐 상관없잖아. 어차피 내 부사수도 아닌데."

넌지시 핀잔을 주는 박상인 상병님한테 어림도 없다는 투로 코웃음을 치면서 김민현 병장님은 복도쪽 문으로 걸어 나갔다.
아니, 나가려고 했다.
하필이면 어떤 사람이 들어오려고 한 탓에 문이 저절로 안쪽으로 열렸던 것이다.
그리고 돌연 갑자기 나타난 그 사람은 김민현 병장의 귀를 잡아올리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거의 뜯을 기세잖아?

"뭐야 민현이 너 또 이런데서 놀고있냐? 인사랑?"
"ㄱ...그게 아니고… 아!!!! 아야!!!! 귀는 아픕니다 ㅠㅠㅠㅠㅠ"

인사과장님이 갑자기 정자세로 일어나 가볍게 경례를 한다.
그렇군……. 이 사람은 김민현 병장님의 상사 되시는 작전과장님이라는 듯 하다.

"인사야 순찰가야되는데 너도 같이가야겠다."
"예 알겠습니다 과장님."
"뭐야 신병왔나?"

이젠 귀가 닳아버릴 정도로 듣는 '신병' 이라는 단어에 나는 척수반사로 관등성명을 댔다.

"이병 김보현!"
"몇 살이야?"
"스물 두 살 입니다."
"학교는?"
"XX 대학교 다니다 왔습니다."
"오 괜찮네. 얘 우리 줘라 인사야. 요놈 곧 도망간다는데?"

작전과장님은 속사포로 인사과장님한테 얘기했고,
인사과장님은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그…… 특기번호 기관총으로 받고 온 인원이라……"
"언제부터 특기번호 따져서 사람넣었냐. 전에도 중대로 인원 다줬잖아. 작전이 공석이면 부대가 어떻게 돌아가냐?"
"......일단 대대장님께 보고 올리고 여쭤보겠습니다."
"으휴…… 너 알아서 해라. 일단 순찰가게. 나와."

그렇게 번개처럼 작전과장님과 김민현 병장님은 사라져버렸다.
김민현 병장님은 거의 끌려가다시피 과장님을 따라갔고, 그 뒤를 후다닥 인사과장님이 따라서 가버렸다.

그렇게 덩그러니 박상인 상병님과 나만 텅빈 인사과에 남아버렸다.
폭풍이 휘잉- 하고 휘몰아치다가 갑자기 잠잠해져버린 느낌.

"너 운 좋으면 본부로 올 지도 모르겠네 ㅎㅎ"

그렇게 박상인 상병님은 나한테 넌지시 얘기했다.
뭐가 뭔지 잘 알 수 없던 나는 그냥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 02.


그렇게 대대장님께 전입신고를 하고 밥을 먹고,
나는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 손에 이끌려서 생활관 침상에 앉혀졌다.
다들 한 포스 할 것 같은 전투중대원들이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대부분 다 일이등병들이었지만, 그래도 다 나보다 선임이겠지……
뭘 어떡해야 할지 모르는 눈으로 불안하게 여러사람을 지켜보고 있자니,

"어이 거기 신병."
"ㅇ…..이병 김보현!"

낮지만 날카로운 목소리가 척수를 찌르듯이 날아들었다.
나는 등이 쫙 펴지는 느낌을 받으면서 관등성명을 댔다.

"뭐냐 왤케 멍때리고 있냐. 졸려?"
"ㅇ….아닙니다."

소리의 근원지는 생활관 구석에서 티비를 보고 있던 사람이었다.
일병? 작대기 두개니까 아마도 그런 것 같다.
지금 보니까……. 생활관에 있는 모든 일이등병들은 이 사람 눈치를 보고있었다.

"인혁이."
"이병 한인혁!"

인혁이라고 불렸던 이등병은 막 방금 물병에 물을 떠와서 생활관 가운데에 내려놓고 있었다.

"신병 짐 정리 마저 해주고, 너 하는 일 잘 가르쳐 줘라."
"예! 알겠습니다!"

순식간에 한인혁 이병님은 내 손을 잡고 생활관 문을 나섰다.
어안이 벙벙해진 느낌 그대로 나는 한인혁 이병님을 쫄래쫄래 따라다닐 수 밖에 없었다.
전화도 하고, 사지방도 좀 갔다가 오니까 시간이 금방 지나가고, 청소할 시간이 되었다.

청소시간이 돼서야 나는 한인혁 이병님한테 아까 그 일병님이 누군지 물어볼 수 있었다.

"아, 정해성 일병님?"
"그 분 이름이 정해성 일병님입니까?"
"우리 분대 실세셔. 혼 안나려면 똑바로 하는게 좋아. 뭐든 쉽게 넘어가는 법이 없으셔서."
"알겠습니다……."

걸.레를 열심히 빨면서 대답하는 한인혁 이병님.
정해성 일병님에 대한 설명은 그게 끝이었다.
덕분에 정해성 일병님에 대한 내 선입견은 무서운 실세로 그렇게 못박혀 버렸다.
실제로도 몇 없는 상병장들도 일병인 그를 전혀 터치하지 않았고,
일이등병에게 명령을 내리는 사람도 정해성 일병님밖엔 보이지 않았다.
다소 이해하기 힘든 분위기였지만 어찌되었든 생활관은 그 사람 하나에 의해서 좌지우지되고 있었다…….

청소를 다 하고 나서야 나는 생활관에서 드디어 초록견장과 마주할 수 있었다.
커다란 가방을 정리해 넣고 있었는데, 방금 어디선가 나갔다가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니가 보현이구나. 해성이한테 얘기 들었어. 파견 나갔다 오느라 못챙겨줬네."

정해성 일병님과는 다르게 무척 따뜻한 말투였다.
덕분에 너무너무 적응이 안된다…… 갑자기 달라진 분위기에 또 멍을 때리고 있자니 뒤쪽 쯤에서 이상한 한기서린 눈빛이 째릿- 하고 날아든다.
정해성 일병님이 멀리서 눈치를 주고 있는데, 도대체 뭘 어떡해야할지 모르겠다.
목덜미에 싸한 식은땀이 등까지 타고 내려가는게 느껴진다……

"내 이름은 박상욱이고, 너네 분대장이야 ㅋㅋㅋ 무서운 사람 아니니까 너무 긴장하지 말고."

그…… 저기……. 사실은 무서운 사람은 따로 있는데요……
지켜보다 보면 왜 정해성 일병님이 저렇게 무서운 지 알 법도 하다.
이 분대장…… 사람이 좋아도 너무 좋은 인상이다.

"박상욱 병장님."
"어 왜?"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넌지시 박상욱 병장님을 부르는 소리가 났다.
표정이 잔뜩 굳은채로 이쪽으로 걸어오면서 정해성 일병님은 얘기를 이어갔다.

"애들 데리고 점호 준비좀 시키겠습니다."
"그래그래. 보현이 너도 해성이 잘 따라다니면서 일 잘 배우고."
"알겠습니다."

왠지 제발로 호랑이 굴로 들어가는 기분이 들어 슬펐다…..
그걸로 박상욱 병장님은 티비로 시선을 고정했고, 내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들이닥쳤다.
반고개 정도 키가 큰……. 정해성 일병님이었다.

"곧 점호인데 뭐해. 인혁이랑 생활관 마지막 점검해."
"ㅇ…...알겠습니다!"

되게 기묘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많이 낮지도 않았지만, 확실하게 낮은 목소리로 저렇게 사람을 압도하다니.
저런 사람이 확실히 이상형이긴 하지만…… 지금은 얼굴을 자세히 보는 것 조차도 못할만큼 무서운 사람이었다.

청소를 마무리하고 한인혁 이병님이랑 같이 나란히 앉았다.
조금 기다리니 점호시간이었고, 당직사령님이 들어오셨다.
엄청난 거구…… 벌크업이 엄청나게 된 이 사람은…… 3중대장님. 즉 우리 중대장님이였다.

"그러니까, 신병이 왔지?"
"이병 김! 보! 현!"
"어유, 목소리 또랑또랑하고 귀엽네 ㅋㅋ 아무튼 왔으니까 3소대 인원들 잘 챙겨주고. 특히. 분대장."

중대장님이 무심한듯 분대장인 박상욱 병장님을 불렀고, 장난스러운 관등성명이 튀어나왔다.

"병장 박상욱, 알겠습니다 ㅋㅋ"
"저 놈 갈때 다됐다고 능글맞은거봐라…… 해성이 니가 고생좀 해야겠다. 저 놈 이미 글러먹었어."
"일병 정해성. 알겠습니다."

박상욱 병장님에 대해서 장난투로 말한건 중대장님이었지만, 그걸 한 마디도 반박안하고 알겠다고 미묘하게 디스를 날리는 정해성 일병님.
심지어 1초도 머뭇거리지 않았던 칼답이라서, 박상욱 병장님은 좀 언짢은 표정으로 정해성 일병님을 쳐다봤지만, 그 뿐이었다.
애초에 이거…… 이렇게 된게 하루이틀일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러더니 중대장님은 다시 나를 쳐다봤다.

"아 그리고 보현이."
"이병 김보현!"
"점호 끝나고 상황실로 와라."
"알겠습니다!"

상황실? 왜지? 왜 나만 이렇게 불려나가는거지? 보통 신병들은 다 이정도로 불려나가는게 맞나?
그런 의문을 가질 새도 없이 중대장님은 점호경례를 받고 나갔고, 점호가 끝나버렸다.
대체 난 뭘 잘못한거지…...ㅠㅠ

점호가 끝난 뒤 박상욱 병장님에게 상황실에 다녀오겠다는 말을 하고,
왜 인지 모르겠지만 또 전투복을 입고 있는 정해성 일병님한테 상황실에 들어갈 때의 주의사항을 들었다.
후에 알게됐지만 정해성 일병님은 불침번 초번이었다.

“가서 얼타지 마라. 묻는 말에 대답 잘 하고.”

그 말을 끝으로 정해성 일병님은 날 상황실 문 앞에 데려다놓고는 휙 하고 사라져버렸다.
그…… 뭐였더라? 용무있어 왔습니다 였나…..? 
아무튼 너무 길어서 입에도 잘 붙지 않는 긴 경례를 계속 머릿속으로 암기하면서 조심스럽게 상황실 문을 두드리고 들어갔다.

“충성! 이병 김보현 상황실에 용무 있어 왔습니다!”
“오 그래 거기 앞에 앉아.”

상황실에 들어가니 자욱한 담배연기가 천장에 계속 머물러있었다.
그 아래로 거대한 ㄷ자 회의용 테이블, 중앙에는 당직사령 견장을 차고 있는 중대장님.
그 오른쪽으로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작전과장님이 담배를 쥐고 나한테 앉으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커다란 상황실 뒤편으로 붙은 유리창으로 김민현 병장님과 이등병 하나가 뭔가 분주하게 자르고 붙이는 모습이 보였다. 바쁜 모양이다.

거대한 취조실 분위기인 상황실에서 나는 엉거주춤하게 바로 문 앞 자리에 앉았다.

“사회에서 뭐하다 왔어? 아 학교 다닌댔지?”
“예 그렇습니다.”
“사무실 업무는 해 본 적 없고?”
“예 없습니다.”
“근데 컴퓨터는 언제 배운거야.”
“별로 그렇게 어려운 거는 아니라서 자격증 딸 때 공부 좀 해뒀습니다.”

대답 잘 하라는 정해성 일병님의 말이 생각나서 재깍재깍 말에 대답했다.
작전과장님이 연달아 물어오다가 호오, 하고 잠시 말을 쉬었다.

“너 작전병 할래?”

갑자기 뜬금없이, 과장님은 그렇게 말씀하셨다.
뜻밖의 제안이긴 했지만, 아까 들은 것도 있어서 대충 짐작이 가기는 했다.
사실 나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고…….

“컴퓨터 좀 다룰 줄 알면 금방 배워. 딱 봐도 잘 할 것 같아서 얘기하는 거야.”
“.......”

섣불리 얘기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사실 몸쓰는 것에는 영 젬병인 내가 듣기에 사무실 업무는 그나마 괜찮아 보였다.

“싫으면 그냥 중대 남아도 되긴 하는데 이런 기회 잘 없다?”

그런 내 얇은 귀를 작전과장님은 계속해서 부추기고 있었다.
TV를 보면서 이쪽 이야기를 듣던 중대장님이 중간에 갑자기 들어왔다.

“과장님, 얘 온지도 얼마 안됐으니 일단 저희 중대서 데리고 있어 보겠습니다.”
“아니 지금 작전과에 사람 준다고 한지가 언젠데 지금 있는 애 전역이 코앞이잖어. 정말 급하면 너네 사무실 애 데리고 간다? 앙?”

작전과장님이 언짢은 표정으로 대꾸하자 중대장님은 한숨을 푹 쉬고는 다시 TV로 시선을 돌렸다.
정말 어지간히도 신병을 안 줬나 보다…… 이렇게 나 하나 가지고 공방이 오갈 정도면.

작전과장님의 담배연기가 또 한번 상황실을 뿌옇게 덮었다.

“아무튼…… 보현이 너가 하고싶으면 하는거고. 너네 2주대긴가 그거 하지? 그 동안 잘 생각해보고. 그때 다시 물어 볼 테니까 그때는 확실하게 생각해놔야 한다.”
“알겠습니다!”
“그래. 일단 여기 전입온거 축하하고.”

그리고 작전과장님은 중대장님을 바라보고는 얘기했다.

“3중대장 뭐 먹을래?”
“괜찮습니다. 늦었는데 얼른 퇴근하십쇼 과장님.”
“간만에 당직 서길래 뭐 좀 사줄랬더니만……. 나중에 두 말 마라? 민현이 너는 내가 시킨거 마무리 지어서 책상 올려놓고.”

상황실 창문 너머로 알겠습니다- 하고 의욕없이 대답하는 김민현 병장님의 목소리.
그리고 그 길로 작전과장님은 퇴근했다.
중대장님이 작전과장님의 차량이 CCTV로 위병소를 통과하는 것을 지켜보고 나서 한숨을 또 길게 내쉬면서 내게 말을 걸어왔다.

“보현아.”
“이병 김보현!”
“과장님 말 대로 찬찬히 생각해보고. 나중에라도 작전과 가고싶으면 나한테 얘기해라. 아까 들은건 크게 신경쓰지 말고.”
“알겠습니다.”

그리고 중대장님은 맞은편에서 야근하느라 정신이 없는 김민현 병장님을 가리키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쟤가 지금 대대에 남아있는 유일한 작전병이니까 작전병에 대해서 궁금하면 쟤한테 물어보면 된다. 원체 일이 많아서 야근도 자주 하더라고.”

자기 이름이 불려서 무슨 일인가 하고 이쪽을 넘겨보다가 나를 보고는 씨익 웃는 김민현 병장님.
그러고는 손을 흔들어 준다. 무슨 의밀까……

“알겠습니다.”
“그럼 수고했고, 들어가서 자.”

중대장님은 그걸로 티비에 다시 시선을 고정시켰다.
나는 야근조와 당직조를 뒤로 하고 상황실에서 천천히 나왔다.

일자형의 긴 막사복도에는 중앙 현관을 제외하고는 전혀 불이 켜져있지 않았다.
상황실에서 나와서 생활관을 걷는 동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의 연속.
그러다가 나는 옆에서 턱- 하고 내 어깨를 치는 무언가 때문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보현이냐?”

낮은 목소리. 잘 못 들을리도 없는 정해성 일병님의 목소리였다.
돌아보니 단독군장으로 서있는 얼굴도 잘 안보이는 사람이 서 있었다.

“이병 김보……”
“지금은 관등성명 됐고. 소리 낮춰라.”

내가 급하게 관등성명을 대려고 하자, 정해성 일병님은 그런 날 제지했다.

“그래서, 대답 잘 했냐? 들어가서?”
“그렇습니다.”
“뭐라고 대답했는데.”

무언가 초조한 모양인지, 정해성 일병님은 연신 군화로 바닥을 차고 있었다.
하지만 난 그런 건 신경 쓸 겨를도 없었고, 상황실에서 했던 이야기를 대략적으로 설명했다.

“작전병을 해보지 않겠냐고 하셔서……”
“그래서? 하려고?”
“아직 대답은 안 드렸고 2주뒤에 다시 물어 봐 주신다고 그때 대답한다고 했습니다.”
“음……”

내 대답에 오묘한 표정을 짓는 정해성 일병님.

“일단 알았다. 들어가서 자.”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정해성 일병님은 중앙현관쪽으로 몸을 돌렸다.
내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고 다른 불침번 한 명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하룻동안에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낯선 생활관에서 매트리스 위에서 잠을 청하려니 뭔가 복잡미묘한 생각이 들었다.
내 군생활은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벌써부터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

파일럿 느낌으로 일단 1편 수정한 부분을 올렸습니다.
과거에 썼던 글에서 묘사부분이 통째로 설정 부분과 함께 바뀐부분이 많으니
가급적이면 새 연재분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글은 절반 정도 실화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제가 겪었던 일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그래서 좀 천천히 템포를 가져갈 까 합니다.

여태 기다려주신 분들이 많다는 사실에 아직도 놀라고 있습니다.
일과 병행하느라 수정이 좀 늦어질 수 있지만, 늦더라도 완결은 꼭 하겠습니다.
그간 정말 감사했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관련자료

댓글 1

<span class="sv_wrap"> <a href="https://ivancity.com/bbs/profile.php?mb_id=totalman" data-toggle="dropdown" title="하이클 자기소개" target="_blank" rel="nofollow" onclick="return false;"><img src="https://ivancity.com/data/member/to/totalman.gif?v=170님의 댓글

  • <spa…
  • 작성일
예전에 감명깊게 읽으면서 실화이길 바랬었는데..ㅎㅎ
건필 바랍니다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