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너머를 달리는 그림자 1
작성자 정보
- 작성
- 작성일
본문
모든 일은 아주 사소한 행동으로부터 시작된다.
그저 소복이 쌓인 눈이 좋아서 아무 생각없이 한 움큼을 뭉쳐 ‘툭’하고 산 아래쪽으로 굴려버렸다.
하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시야에 벗어난 그 한줌의 눈이 커다란 눈 덩어리가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나는 모르고 있다.
그렇게 커져버린 눈 덩어리는 어느 한순간 산 아래쪽 어딘가의 도로를 지나가던 가족이 탄 차량을 덮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냥 단순한 실수이다.
누군가를 해치겠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나의 그런 부주의함이 하필 그 시간, 그 장소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어느 타인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을 안길 수도 있는 것이다.
정말 오랜만에 나간 종로였다.
만날 사람은커녕 연락해볼 만한 사람도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타인들의 존재가 필요했다. 사람들의 속에 섞여 있고 싶었다. 그냥 그랬다. 그래서 용기를 냈다.
적당히 취기가 오를 즈음에 옆 테이블에 옹기종기 앉아있던 녀석들의 대화가 언뜻언뜻 들려왔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서 그들을 흘끗 바라보았다. 그 중의 한 두명은 안면이 있는 듯도 싶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들 중 누군가의 입에서 그 녀석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그의 말에 일행중 한 녀석이 나를 슬며시 돌아보았다. 그리고 뒤이어 다른 녀석들도 고개를 돌려 나를 흘끔거렸다.
그리고 그들의 낮은 숙덕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무슨 사이였어?”
아무것도 모르는 녀석들끼리 모여서 저렇게 뒷담화를 할테고 그 중에 한 놈은 마치 알고 있다는 듯 적당한 이야기를 입 밖으로 뱉어낼 것이다.
녀석들이 지금 입안에서 씹고 있는 술안주 보다 백배는 더 씹는 맛이 있을 그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실이 되어버릴 것이다.
녀석들의 사이에서는 말이다.
어짜피 그 놈은 죽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되었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 놈이 최소한 나에게는, 혹은 내가 모르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인간이 아니고 짐승이었던 것처럼, 그 자식이 그렇게 사라진 것에 양심에 거리낄 것은 없다.
역시 세상은 인과응보가 정확히 맞아가는 살만한 곳이다.
네가 나에게 10 을 주었으면 너도 나에게서 그 만큼의 10 을 받아가야지.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나 취기에 비틀거리면서 카운터를 향했다.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알바생에게 카드를 내민다.
“영수증은 버려주세요.”
묻지도 않는 그에게 부정확한 발음으로 툭하고 내 뱉고는 다시 카드를 받아들고 지갑에 넣는다. 그리고 나를 흘끔거리는 녀석들 사이를 유유히 빠져나간다.
만족과 희열이 나의 몸을 감싼다.
그래, 이제 종로는 내가 접수한다.
고딩때의 악연으로 충분했다.
그때 나는 그자식의 빵셔틀이었고 장난감이었다.
참을 수 없는 모욕과 굴욕을 간신히 참아가면서 정말 죽지 못해 버텼다.
아니, 사실 나는 죽어있었다.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녀석이 괴롭히는 나의 신체는 이미 생명이 빠져버린 껍질 뿐이라고 혼자 되뇌었다.
그렇게 나는 숨만 쉬는 시체였다.
‘학교만 졸업하면...’ 이라고 내 자신에게 희망을 불어넣었다.
그 녀석과 내가 살아가는 세계가 다르기에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평생 다시 볼 일이 없을 것으로 여겨졌다.
해가 바뀌고 20대 후반으로 넘어가면서 상처도 저 깊은 속으로 꺼져 들어가고 아물어 간 듯 보였다.
종로에서 적당한 남자도 만나 애인으로 만들었다.
이제 그럭저럭 평범한 인생의 나른한 터널을 느긋하게 걷고 있다고 여겼다.
애인이 가끔 나가던 밴드에 덩달아 나도 가입을 한 후, 첫 오프라인 모임에 참석했던 날이었다.
겉보기보다 널찍한 홀의 한 쪽에 애인과 함께 자리를 잡고 화장실에서 볼일을 본 후 화장실 밖으로 막 나왔을 때였다.
좁은 통로에서 그 녀석과 정면으로 딱 마주쳤다.
녀석의 얼굴을 보고 누구인지 뇌 속에서 확인이 되는 순간 소스라쳐 놀라 말 그대로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버렸다.
뇌가 서늘해지고 머리털은 몽땅 쭈뼛 서 버렸다. 등골은 오싹해지고 숨이 턱 막혀 버렸다.
입의 근육은 경련을 일으키고 혀는 마비가 되어 버렸다.
이제는 혹시라도 마주치게 된다면 당당하게 행동할 것이라는, 예전의 내가 아니라는 그런 허황된 생각은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고 순간적인 공포가 나를 뒤덮었다.
여전히 나에겐 그 놈은 그런 존재였다. 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녀석의 시선이 나의 얼굴에 한 순간 머물렀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지나쳐서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 버렸다.
그 놈의 모습이 나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리자, 그제서야 나는 잃어버렸던 숨을 되찾아 쉬기 시작했다.
얼어붙어 있던 다리에 힘이 빠져 한순간 그 자리에 쓰러져 버릴 듯 싶었다.
간신히 그런 휘청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바보 같은 나의 사지는 마치 사시나무 떨 듯 떨기 시작했고,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그 자식이 있는 그 건물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 놈의 시야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애인이 저 홀 안의 한쪽에 앉아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따위는 이미 나의 의식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
손바닥으로 벽을 짚고 간신히 1층으로 통하는 계단을 간신히 기어내려왔다.
그리고 문을 열고는 건물의 밖으로 여전히 말을 듣지 않는 다리를 질질 끌어 옮겼다.
택시의 뒷 좌석에 쪼그리고 앉아, 여전히 온몸을 지배하고 있는 공포에 짓눌려 있던 나의 손에 쥐어져 있던 휴대폰이 울렸다.
“아니 화장실에 간다더니 어디로 사라진거야?” 승우의 황당하다는 목소리가 귓 속에서 울렸다.
“아...미안...” 간신히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이 정말 나의 목소리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갑자기 몸이 안좋아져서....”
“그럼 얘기를 먼저 해야지.” 짜증섞인 말투로 그가 말했다.
“.......”
“많이 안좋아?” 많이 누그러진 목소리가 그가 물었다.
“저녁 먹은게 문제인가봐.”
“그럼, 같이 가자고 하지. 그냥 그렇게 혼자 가버리면 어떻게 해?”
“미안해.”
“나도 회장에게 얘기하고 지금 갈게.”
“아냐. 안그래도 돼.”
나의 말에 그의 어이없다는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너 없이 나 혼자 여기서 뭐하라고...”
“.......”
“나도 금방 갈테니까 집에서 기다려. 약좀 찾아서 챙겨먹고.”
생각하지 않으려는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계속 그 놈의 얼굴이 눈 앞에 떠올랐다.
‘어떻게 예상치도 못했던 그 놈이 게이였을까’ 하는 생각 따윈 머릿속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침대에 모로 누워서 이제야 원래의 기능을 되찾은 듯한 사지를 느끼면서 여전히 그 놈의 공포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내 자신에 대한 증오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것도 순간이었다.
이미 예전에 녀석의 손아귀에서 비굴함과 복종에 익숙해져 있던 나는 그렇게 그 곳에서 여전히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와 마주쳤을때의 그 놈의 표정이 다시 떠올랐다.
마치 아무 감정도 없이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나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딩때에 비해서는 이제 스물여덟이 되어버린 나의 외모는 어떤식으로든 바뀌었을 터였다.
그리고 당한 피해자는 결코 잊지 못할 과거 때문에 상대를 또렷하게 기억하는 것이지만 가해자는 쉬운일로 치부해 버리고 잊게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마 나의 존재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그의 기억속에서 사라져 버렸을 듯 했다.
나만 모른 척 하면 그리고 그 놈을 다시 만날 기회를 만들지만 않는다면 아무일도 생기지 않고 모든 일에 다시 문제가 없을 듯 싶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다 덮어버리고 싶었다.
“그 밴드 모임말야.”
며칠이 지난 후, 승우와 저녁식사 도중에 슬며시 입을 열었다.
“키 좀 크고 내 또래 나이인 애 있지?”
내 말에 열심히 음식물을 씹고 있던 입을 멈추고 승우가 빤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꿀꺽 삼켰다.
“그런애가 한둘이야?”
“......”
피식하고 웃던 그가 고개를 들어 다시 나를 보았다.
“혹시 걔 말하는거야?”
“.......”
“얼굴 꽤 반반하게 잘 생겼고 의대 졸업하고 인턴인지 레지던트인지 뭐 그런 과정 밟고 있다는...”
“.......”
“뭐 나랑 친하지 않으니 이름까지는 모르겠고.”
그의 말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승우가 말하는 그 놈이 틀림없어 보였다.
그 자식은 고딩때에도 가식으로 쩔어있던 그런 놈이었다.
전교 1등은 도맡아 했었고 어느 수업에선가 꿈을 묻는 선생의 질문에 ‘생명을 중시하고 존중하기 때문에 반드시 의사가 되고 싶다’ 는 그런 개가 개뼉다귀 물어뜯는 가증스러운 헛소리를 지껄였었다.
여튼, 친하지 않다는 그의 말에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승우를 그 밴드에서 탈퇴하도록 하기만 하면 모든 일이 원위치가 되는 듯 싶었다. 그리고 다시는 과거의 나와 그 놈이 얽히게 되는 일은 없이 앞으로 살아갈 수 있을 듯 했다.
“근데 걔는 왜?”
“아.... 아무것도 아냐.”
그를 보고 겸연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에게 나의 비참하고 참혹했던 과거를 끄집어내어 밝힐 일은 없었다. 굴욕적인 경험은 과거에 묻어 두는 것이 최선인 듯 싶었다.
“너, 혹시 그애랑 무슨일 있었던거야?”
승우가 호기심이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일은 무슨 일?” 겸연쩍은 표정으로 그를 마주보았다.
“난, 걔 알지도 못하는데?”
거짓말과 함께 서러운 한숨이 밀려나왔다.
‘그 새끼가 고딩때 일진이었다.’ 라고 ‘나를 죽도록 괴롭혀서 죽으려는 생각도 여러번 했다.’ 라고 말하고 싶었다.
아군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가 나를 품안에 안아주길 바랬다. 그리고 ‘이제 괜찮다.’ 라고, ‘내가 널 지켜줄게’, ’그 자식, 내가 밟아줄게.‘ 라는 그의 위안의 말을 듣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사귄지 겨우 6개월 남짓, 여전히 나는 승우를 완전하게 알지 못했다. 아직은 그에게 좋은 모습, 플러스가 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지금의 그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최소한 당당한 모습으로 내 인생을 살아온 것처럼 보여주고 싶었다.
짓눌려진 가슴을 손으로 슬며시 누르고 나는 가만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왜 갑자기 밴드는 그만두라고 하는 거야?”
“........”
대답없이 창 밖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멍하니 시선을 주었다.
“이제 겨우 밴드 사람들하고 친해졌는데....” 그의 목소리에 아쉬움이 한가득 들어있었다.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나라는 인간은 정말 아무 대책이 없는 인간이었다. 그에게 어떤 그럴듯한 구실이라도 미리 준비하고 내세워서 밴드를 탈퇴하라고 해야할 것 아닌가. 아무 이유도 만들어 놓지 않고 문득 말부터 툭 하고 꺼내다니 정말 한심한 일이었다.
“알았어.”
뜻밖의 간단한 그의 대답에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네가 그렇게 못마땅하면 탈퇴해야지, 뭐 어쩌겠어.”
시무룩하지만 얼굴 한편으로는 옅은 미소를 띄면서 그가 나를 보고는 피식 하고 웃었다.
관련자료
-
이전
-
다음
댓글 1
<span class="sv_wrap"> <a href="https://ivancity.com/bbs/profile.php?mb_id=choijeyeon" data-toggle="dropdown" title="유안진우사랑해 자기소개" target="_blank" rel="nofollow" onclick="return false;"> 유안진우사랑해</a> <ul class="sv dropdown-menu" role="menu"> <li님의 댓글
- <spa…
- 작성일
방금 완결까지 읽었는데요.
이글 진짜 장난아닌 글입니다.
무조건 읽어보세요.
진짜 .
이런 작가님의 글이 이런 조회수라니요.
무조건 한번 읽어보세요. 하 진짜..;;
진짜 스피디한 전개에 심리묘사에 각자 인물의 배치까지.
정말 끝까지 한번만 읽어보시면
와.. 이런글도 다 있구나.... 라는 생각들 드실거에요,
그리고
이런글은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읽어야 된다구 생각하구요.
암튼간에.. 작가님. 진짜 대단합니다.
이런글 너무나 좋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