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그가 노리는 그 -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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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가 노리는 그」 



01.


안하느니만 못 한 것들이 있다. 이를테면 처음 만난 사람에게 베푸는 과잉친절, 불투명하고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 사과 그리고 친구와의 원나잇.


그 일이 있은 후로 사나흘은 평범하다 못해 지루하게 느껴질 만큼 잔잔히 흘러갔다. 보름째에는 의구심이 들었으나 그럴 수도 있다 여겼던 그였다. 한 달이 된 오늘, 그는 방에 틀어박혀 아껴뒀던 위스키를 연거푸 세 잔 째 마시며 전화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중이다.


먹먹히 추적거리는 빗소리가 귀를 파고들기 시작하자 그가 창문을 바라본다. 땅거미 내릴 즈음 시작된 안개비는 어느덧 거센 장대비로 갈음했다. 닫혀있던 창문을 한 틈 열고, 식탁으로 건너 가 위스키를 병째 들고 그는 다시 소파로 향한다. 유리병에 담긴 위스키가 내딛는 걸음에 맞추어 가볍게 일렁거린다. 


녀석이 의도적으로 연락을 회피하는 게 분명하다, 자리에 앉으며 그는 생각했다. 녀석과 친구가 된 이후로 이렇게 오랫동안 연락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잘 지내느냐고, 왜 이리 감감무소식이냐 먼저 물어볼까 했던 적이 여러 번이었지만 그는 애써 노력하지 않았다. 알량하지만  자존심이 상할뿐더러 연락치 않는 이유가 납득 되었던 탓이다. 상념에 주억거리던 그가 잔에 남은 위스키를 털어 삼키었다. 달큰한 향과 함께 알코올의 쌉싸름한 맛이 혀에 감돌았다. 투두둑거리는 밤비 소리가 아늑하기는커녕 낯설게, 불안하다. 



‘원하는 게 대체 뭐야?’ 그는 나지막이 욕을 뇌까렸다.



-



“언제쯤 올 건데?”


“한 오 분, 십 분?”


“그렇게 말하고 삼십 분 뒤에 오는 거 안 지겹냐?” 


“너 어떻게 하고 사는지 빤해서 요리 해주려고 장 보는 중이니까 그렇잖아, 새꺄.”


“말이라도 안 하면. 우리 집이 술집이냐? 그냥 밖에서 만나자니까.”


“아, 싫어. 브래지어 갑갑해서 풀고 싶단 말이야.”


“미쳤냐. 그럴 거면 집 가서 혼자 마시지 왜 네 집 놔두고.”


“혼자 마시면 재미없단 말이야!”


“언제 끝낼까 서로 재고 있다더니 결국 차였나봐?”


“씨, 한이준! 내가 찼거든?”


“빨리 와라, 서미혜. 삼십 분 넘으면 문 안 열어준다.” 



어깃장 부리며 전화를 끊었지만 이준의 입가엔 말과는 달리 웃음이 설핏 서려있었다. 사람 냄새가 그립던 찰나였다. 마침 금요일 저녁이기도 했고. 프리랜서이지만 가능하면 주말에는 다른 직장인들처럼 일 하지 말자는 것이 그가 정한 규칙 중 하나였다. 일과 일상의 구분이 없어지기 쉬운 직업일수록 내키는 대로 살기 쉬우니까. 하지만 지난 몇 주간 그는 자신과의 규칙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했다. ‘녀석’ 탓이었다. 일을 하려다가도 녀석이 머리에서 떠올라 여간 작업에 집중하지 못하기 일쑤였다. 


한 달 하고도 보름이 흐르도록 둘은 서로 연락 하지 않았다. ‘그게 이렇게까지 될 일인가?’ 이준은 속으로 되물으며 부엌으로 가 냄비를 꺼내 하이라이트에 올려놓는다. 미혜가 저 사는 꼴이 안 봐도 비디오라며 장을 봐온다 했지만 이준은 그녀가 미역국을 해준답시고 국간장 대신 진간장을 우르르 부어넣던 꼴을 생생히 기억한다. 미혜는 장은커녕 술만 잔뜩 사올 것이다. 이준은 냉장고에서 바지락을 꺼내 해감하기 시작했다.



-



“어쭈. 비밀번호를 바꾸셨다?”


“언제까지 겁도 없이 남자 혼자 사는 집에 불쑥 들어오려고?”


“웃기지도 않어. 너 나랑 잘 수 있어?” 미혜의 말에 이준이 구토하는 척을 하자 그녀가 ‘저거 봐. 저러고 무슨 자기가 남자 해보겠다고.’ 이기죽거리며 집안으로 들어섰다.


“냄새 좋네? 뭔데? 내가 밥 해준대도?” 


“밥장사 시작했냐? 웬 장을…. 바지락 술찜. 넌 얼마나 대단한 요리를 해주게?” 두 손 가득 장바구니를 현관에 내려놓는 미혜를 보고 이준이 토끼눈이 되어 묻는다.


“미역국!” 그녀가 말린 미역이 한가득 들어있는 팩을 흔들어 보인다. ‘또 미역국이라니.’ 자기가 예전에 망친 요리가 미역국이었던 걸 기억이나 할까. 이준이 마뜩찮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미역국 간 맞출 때 무슨 간장 넣는지 알아 몰라?”


“간장?” 미혜가 봉투에서 간장을 꺼내들며 한없이 순수한 눈으로 이준을 바라본다. 


“설마 집에 간장 한 통 없을까봐 그걸 사왔어?”


“놔두면 먹어치우겠지 뭐.” 


“간장이 과자처럼 먹어 치우는 거냐? 음식 할 때 넣는 거지.”


“아, 됐어! 말이 많아 새끼가. 가져가 이거.” 이준의 눈으로 진간장 라벨이 눈에 들어온다. 쭈그리고 앉아 국에 넣을 거랍시고 진간장을 사와 흔드는 미혜 폼이 가관이라 사진으로 남겨도 될 정도였다.


“때려치자, 그냥. 바지락 술찜이나 먹어. 미역국은 다음에 하고.”


“그러지 뭐.” 답하며 미혜가 다른 봉투를 어그적어그적 힘겹게 끌고 와 식탁에 올린다. 봉투 한 가득 들어있는 소주와 맥주에 이준이 벙 찐 표정으로 미혜를 바라본다.


“이걸 우리 둘이서 다 마시자고?”


“새삼스럽긴. 평소 먹던 대로구만.”


“평소? 이십 대 초반 때나 얘기지, 인마.”


“몰라, 대충 처먹자 새끼야. 나 차였다고 시발….” 키득거리던 미혜의 눈에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한다. 그럼 그렇지. 입으로는 험한 말을 쏘아대지만 속마음은 물러터진 그녀였다. 손으로 우그러뜨리면 속절없이 으스러지는 오렌지 같은, 그런 성정. 금세 어깨를 후들거리며 눈물바람이 된 그녀를 이준은 아무 말 없이 끌어안았다. 사실 미혜의 결별 소식은 새삼 놀랄 것 없는 일이었지만 순순히 차였다고 말하는 게 가여워 이준도 자기연민적인 양식으로 미혜를 위로하기 시작한다, 일종의 연대의식이랄까.



“나는 먹히고 버림당한 것 같아.” 이준의 허리를 끼고 훌쩍거리던 미혜는 이준의 말에 그를 더 꽉 껴안더니 마치 천지 고아가 된 양 통곡하기 시작했다. 


“엉엉… 어쩌다가… 잘난 척은 혼자 다 하고 살더니… 엉엉. 결국 첫 경험이 먹버냐… 엉엉.” 차인 와중에도 자기 할 말은 다 하는 미혜에 이준은 꽉 더 안아주는 것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마시고 죽는거다, 오늘.” 이준의 말에 미혜가 고개를 힘차게 끄덕거렸다. 남자친구가 시도 때도 없이 바뀌면서 그 때마다 세상 다 잃은 듯 울고, 죽을 듯 술 마시고 이틀을 앓고 삼일 째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남자와 채팅을 시작하고, 일주일 뒤 남자와 밤을 보낸 뒤 그가 내 인생의 진짜 마지막 남자라고 선언하는 서미혜. 어쩜 그렇게 천진스레 끝도 없이 사랑에 빠지는지 이준은 사이사이 그녀가 부러웠다.



-



“그래서?” 미혜가 절반은 풀린 눈으로 이준에게 되묻었다.


“뭐가.”


“문자 해봤어? 전화나.”


“아니.”


“왜?!” 안했다는 이준의 대답에 미혜의 풀린 눈이 커졌다.


“굳이 왜.” 이준이 말하고 눈썹을 치켜세우며 어깨를 으쓱거리자 미혜가 이준을 못마땅한 듯 바라본다.


“이거 등신 아냐? 등신 중에서도 상등신이네.”


“8등신은 맞는데.”


“별….” 미혜가 한껏 더 매서운 눈으로 이준을 쏘아보자, 이준이 ‘아, 왜 인마.’ 하며 미간을 있는 대로 구겼다.


“됐고, 등신아. 일단 정리해보자. 아 닥쳐, 누나가 정리할거니까. 넌 그냥 처듣기만 해. 하나, 한이준이 드디어 섹스를 했다. 그것도 원나잇. 맞아?”


“…어.”


“둘, 그 남자는 한이준의 절친이다. 맞아?” 미혜의 물음에 이준이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내가 모르는 네 절친도 있냐? 좀 섭섭한데에에.” 말끝을 늘이며 섭섭하다던 미혜가 보상이 필요했는지 술을 털어 넣으며 괜히 속 빈 바지락 껍질을 뒤적거려 본다.


“이 쪽 친구니까.”


“이쪽저쪽 존나 나누네.” 미혜가 쭝얼대기 시작했다. ‘택시 타고 뒤에서 이 쪽 가주세요, 저 쪽 가주세요 해보지 왜. 기사한테 욕 한바가지 얻어먹을 거다. 뒤에서 이쪽저쪽이라 하면 앞에서 무슨 방향인지 어떻게 아냐고.’ 얼토당토않게 야료부리는 미혜에 이준이 혀를 찼다.


“등신아, 걔가 자기 게이인 거 안 밝히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하냐?”


“음, 인정.” 이준의 말에 미혜가 뒤적거리던 젓가락질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거린다.


“정리 안 할 거야?”


“아, 맞다. 셋, 한이준은 원나잇을 하고나니 갑자기 절친이 자기가 꿈에 그리던 근육질에 존나 잘 생긴 백마 탄 왕자님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언제 또 만나서 떡 치자고 할까 재보며 눈치게임 하고 있었는데 왕자님이 말 타고 튀었다.”


“시발, 내가 언제!” 이준이 볼멘소리로 말하자 미혜가 더 신이 난 표정이다.


“아니라고?!”


“아니라고 인마.”


“고민이 뭐야 그러면. 친구한테 먹히고 버림당한 게 슬픈 거야 아니면 걔랑 또 자고 싶은데 연락이 안와서 답답하다는 거야.”


“둘 다 아냐.”


“그럼 심란할 이유가 없지?”


“누가 심란하댔냐.” 이준의 대답에 미혜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안 심란해? 먹버당했는데.”


“…별로. 됐어.” 이준이 잠시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미혜가 그런 이준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뭐, 왜.” 이준의 물음에,


“너 걔한테 사랑 같은 감정 느끼냐?”



미혜의 질문에 이준이 무어라 대답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사랑?’ 알고 지낸 지 올해로 꼬박 팔년 째. 어렸을 적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겁 없이 만나 다음엔 네 친구 데려와라, 다음엔 네가 네 친구 좀 데려와 봐라 가지치기 해 그게 어느새 열댓 명이 되어 종로, 이태원 골목골목을 우르르 몰려다녔고 싸워서, 사는 게 바빠서 라는 갖은 이유로 다 뿔뿔이 흩어질 때에도 만나며 연락 주고받던 게 그 녀석이었다. 녀석의 애인만 족히 예닐곱은 만났었고 그 때마다 녀석이 부족한 게 많아도 잘 봐 달라 주제넘게 부탁하며 사회성 있는 인간인 척 하기도 여러 번. 어디 이준만 그랬을까. 녀석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준이 헤어질 때면 밖으로 숫제 불러내 죽어라 술 마셔주고 취해 담배를 뻑뻑 피며 이준의 등을 두드려주다 그의 토악질에 저도 같이 한 녀석이었다. ‘어지간히 볼꼴 못 볼꼴 다 본 사이인데 사랑? 말이 되나.’ 이준의 입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개소리야. 사랑은 무슨.”


“그치? 원나잇한 상대한테 사랑 느끼는 거 하수들이나 하는 짓인 거 알지?” 미혜의 말에 이준이 ‘너나 안 그러고 다녀라.’ 응수해주고 싶었지만 꾹 참고,


“게이이고 말고를 떠나서 걔랑 나랑은 불알친구야.” 대답하자,



“그러니까. 그 불알을 진짜 빨아버렸으니 사랑은 고사하고 친구가 더는 되겠냐고.” 미혜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하며 맥주잔에 맥주와 소주를 콸콸 부어댔다. 퉁퉁거리는 소리만 잘하는 줄 알았던 미혜가 영민하게 정곡을 찌르자 이준은 술이 다 깨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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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몇 달 동안 바쁜 일이 많아져서 이전 소설을 놓아버렸네요... 새로운 글은 근래에 틈이 생겨 많이 써놓았어요. 모쪼록 재밌게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


- 마테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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