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그가 노리는 그 - 08

작성자 정보

  •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그와 그가 노리는 그」



08.



샤워를 끝내고 몸을 닦자마자 상혁이 침대에 누웠다. 자지가 얼얼했다. 이준과의 섹스를 상상하다 다시 한 번 더 자위한 탓이었다. 겨우 몸을 일으켜 옷을 입고 냉장고로 가 맥주 한 캔을 집어 발코니로 향한다. 이준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그는 응답하지 않는다. ‘잠들었나.’ 상혁이 의자에 앉아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이준을 상상하며 절정에 이르렀던 성욕이 잦아들자, 다시 궁금해진다. 이준의 ‘그 새끼.’ 가 누구인지. 


판도라의 상자. 모르는 게 약이란 말이 무색하게 인간은 때로 알고 있는 사실 아래 감춰진 진실을 캐내려는 지악스러운 면모가 있었다. 후에 알지 않는 편이 나았다고 후회할지언정.


미혜에 전화하다 소리치던 이준이 떠오른다. 그 새끼로부터 아직 벗어나지 못한 건가. 때문에 그 새끼 이름만 들어도 경기 일으키는 어린아이처럼 구는 걸까. 대체 누굴까 그 새끼는. 알아서 뭐 할 것인가, 어차피 지금은 남일 텐데. 생각이 모여 번뇌가 되자 떨쳐내려 그가 다시 맥주 한 모금을 삼키었다. 


평소 느긋한 성격을 지우고 조바심을 내게 만드는 이준이, 상혁은 문득 두려워진다.




생전 처음 보는 여자한테 단박에 ‘개'새끼’ 소리를 들은 것이 꽤 충격이었던지 채욱이 뭐라 한 마디 말도 못 꺼낸 채 넋 나간 얼굴로 미혜만 보았다. 그녀는 그런 그를 보고 피식거리며 봉지를 질질 끌어 식탁 앞으로 가져온다. 그녀가 이준더러 ‘쟤 맞지?’ 입모양으로 뻥끗거렸다.


채욱이 봉지를 식탁으로 올리는 그녀를 도우려 하자, “됐어, 이 정돈 껌이야.” 한다. 왠지 풀죽은 목소리가 된 그가 ‘…아, 네.’ 하고 괜히 짧은 뒷머리만 긁적였다. 이 말 같지도 않은 상황에 이준은 갑자기 웃음이 터질 것 같아 싱크대 앞으로 향했다.


“덩치는 산만 해가지구 왜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니? 안 잡아먹을 테니 앉어.” 이준이 고개만 힐끔 돌려 식탁을 보자 얼빠진 표정의 덩치가 산만 한 채욱이 정말 주인 말을 잘 듣는 새끼 강아지처럼 꾸물대며 앉는다. ‘술 취해 비틀거릴 때가 호시절이었지?’ 혼잣말하며 웃음이 자꾸 새어 나와 이준이 괜히 이로 아랫입술을 씹었다.


“키가 몇이야?”


“배, 백팔십 오…요.”


“훤칠하네. 이름이 뭐야? 난 서미혜.”


“이채욱입니다….”


“이준이랑 동갑?”


“…네.”


“나도야.”


“어?! 그럼 우리 말 놓을….”


“너 하는 거 봐서.” 미혜의 대답에 그 덩치는 산만하다는 채욱이 우물쭈물 못하고 ‘아….’ 따위의 감탄사만 내뱉는다.


“부친께서는 뭘 하시….”


“그만 하지? 서미혜?!” 채욱이 왠지 불쌍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당하는 꼴이 고소하기도 한 이준이 입술을 말아 웃음을 삼키며 잔을 채욱과 혜미 앞에 하나씩 놓고 돌아섰다.


“너두 앉어봐, 한이준. 그럴 때가 아니거든?” 미혜가 이준의 등에 대고 얘기하자,


“과일 씻을 거야. 갑자기 먹고 싶어졌어.” 웃음을 참으려 이준이 부러 냉장고를 열어 자두와 복숭아를 꺼낸다.


“그래 그럼. 그래서. 무슨 일 하구 살어? 이준이처럼 프리랜서야?”


“아니…요. 회사 다녀…요. 플랜트 설계 쪽…. 최근에 해외 출장 갔다 왔어…요.” 해외 출장이라는 말에 과일을 씻던 이준의 눈이 커졌다 다시 작아졌다. 그래서 두 달 동안 만나자는 말 한마디도 없었나 싶었지만 그럴 리 만무 했다. 로밍도 했을 테고, 요즘 세상에 연락하려면 얼마든지 방법은 많은데. 그가 다시 말 없이 과일을 씻기 시작했다.


“와. 출장? 어디.”


“…중동 쪽….”


“넌 글러먹었다. 중동을 갔다 왔으면 대추야자 한 상자는 갖고 오는 게 미덕 아냐?” 미혜가 어디서 알았는지 생전 먹어보고 싶다는 소리 한 번 안 하던 대추야자를 운운했다. 평소에 단 건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아, 집에 있어요…. 다음에 한 상자 가져 올게…요.”


“약속했다? 좋아, 우리 말 놓자.” 미혜가 새끼손가락을 들어 그에게 내밀자 채욱이 곧 자신도 새끼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에 걸었다. 그녀가 씩 웃었다.


“이준이랑 친해?”


“알고 지낸 지 몇 년 됐지.”


“한이준 별 재미없는 성격인데.” 미혜의 말에 채욱이 웃었다.


“맞아, 별로 재밌는 성격은 아니지.”


“세상 고상한 척은 혼자 다 하고.” 채욱이 더 크게 웃었다.


여차하면 잡아먹을 듯 굴더니 갑자기 대놓고 저 흉보는 미혜나, 냄비바닥에 눌러 붙은 당면처럼 미혜의 말에 쪼그라들던 채욱이나 서로 언제 봤다고 오래 된 친구 마냥 떠들어대기 시작하는 지 이준이 기가 찬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한이준처럼 내숭 안 떨어 좋다.” 그녀가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심통이나 이준이 과도로 도마를 탕탕 치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너 되게 잘 생겼다, 코도 높고 오똑하고. 남자는 코가 잘 생겨야해 역시. 얼굴에 균형이 잘 잡혀 보이잖아. 잘 생겼단 말 많이 듣지?”


“안 들었을 리 없게 생겼지.”


“아니 안 들어 봤을 것 같이 생겼어.” 이준이 슬쩍 대화에 끼어든다. 채욱이 그의 말에 ‘치사하게 굴지마, 인마.’ 말한다. 미혜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세간으로부터 자지가 크다는 평도 많이 듣는 편이니?” 물으며 소주를 콸콸 따라 냅다 마신다. 예상치 못한 말에 채욱이 순간 켁켁거렸다. 그럼 그렇지, 사람 기함하게 하는 데에 도가 튼 그녀 말을 듣자마자 이준이 놀란 얼굴로 돌아서 “야! 서미혜!” 소리를 질렀다.


“…아. 그건 이준이한테 물어봐도 되는 거였나.” 


“누구한테도 안 물어 보는 게 정상이거든?” 이준이 일갈하자 미혜가 ‘언젠 내가 정상인으로 살았니.“ 가볍게 응수한다. 이준이 지겹다는 뜻으로 ’어휴.‘ 하며 한숨을 말로 그렸다.


“미혜 너 놀랠까봐 내가 바지 안 까는 거야.” 이준과는 반대로 미혜의 성격이 점점 파악되는지 채욱이 한 술 더 뜬다.


“오. 그럼 두 손으로 쥘 수 있….”


“그만해라, 서미혜.”


“아 저 새끼는 뭔 말을 못하게 해! 야, 채욱아. 너 다음 생엔 게이말구 스트레잇으로 태어나라. 나랑 한 번 만나게.”


“서미혜,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이제 그만 해, 응? 이채욱 너두 됐어. 쟤가 하는 말에 반은 분리수거도 안 되는 말인데 뭘 또 동참을….”


“미혜 네가 게이로 태어나는 건? 게이로 사는 거 그렇게 좃같진 않거든.” 채욱의 대답에 그녀가 씩 웃었다.


“너 애가 씩씩하구나. 맘에 들어.”


“쓸데없는 소리 그만해 둘 다. 서미혜 너 쟤 맘에 들면 데리고 네 집에 가는 건 어때. 나는 쉬고 싶거든.” 이준이 식탁을 향해 말하며 썰어 놓은 과일을 접시에 담기 시작했다.


집에 가기가 싫었던 지 미혜가 이준에 대답은 않고 식탁 위로 손을 뻗어 채욱 앞에 있던 잔을 집으려했다. 채욱이 잔을 덥석 집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의 잔에 소주를 부어주고 돌려주며 ‘나 한 잔 더 하자.’ 자신의 잔을 내밀었다. 채욱이 소주를 따라주자 그녀가 한 번에 입에 털어 넣고 바로 다시 채웠다.


“키도 크고 자지도 크고 되게 잘 생긴 채욱아. 이준이한테 쭉 좋은 친구로 남아주라. 저 히키코모리 같은 애 나 하나로 감당이 안 되거든.” 미혜가 말을 마치자마자 다시 술을 단숨에 입에 털어 넣었다. 저질스러운 말과 욕을 서슴없이 하고 남친이랑 헤어져도, 부탁하지 않아도 스스로 방패가 되어 이준이 겪을 낙심을 먼저 막아주는 미혜. 되묻지 않아도 그녀가 채욱에게 그리 말하는 까닭을 짐작 할 수 있었다. 


지금이 친구로 돌아 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상처만 남을 두 사람이니. 백년해로는 구한말 단발령처럼 옛말이 된 지 오래였고 사랑은 만개한 지 보름 만에 낙하하는 벚꽃처럼 시들어버리는 게 요즘 세상이었다. 변질 되고 부패 할 지라도 사랑을 꼭 해야겠다면 원나잇 한 번으로 두어 달 내내 서로 말 한마디 안하다 겨우 이제 연락해 입 뗀 친우보다 이준에게 관심 쏟기 시작한 새로운 남자가 여러모로 깔끔했다. 더군다나 이준도 그가 싫지 않은 듯 데이트하기 시작했으니. 여러 모로 순리 상 채욱이 친구로 남는 편이 나았다.


채욱이 그녀의 말에 한참 뜸을 들이다 말없이 소주를 비우고, 다시 채우고, 비우고, 다시 채우고 비웠다. 미혜는 그런 채욱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 자른 복숭아와 자두를 접시에 담아내기까지 했지만 뒤돌아 식탁으로 가져갈 엄두가 나지 않던 이준은 과도로 과일 껍질만 그저 힘없이 쿡쿡 찔러댔다.




테라스에 앉아 맥주를 마시던 상혁이 휴대폰 울리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이준인가.’ 발신자를 보고 이내 씁쓸한 표정이 된 그가 잠시 고민하다 전화를 받았다.


“응.”


“오늘 시간 정말 안 돼?”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에 취기가 묻어있다.


“아까 말 했잖아.” 알아들으라는 뜻으로 상혁이 느릿느릿 말했다.


“어. 알긴 아는데….”


“내일 출근도 해야 하고. 이미 맥주 마시는 중이야.”


“너네 집으로 갈까 아니면? 하고싶은 얘기도 있고.”


“…무슨 얘기?”


“만나서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다음에 보면 안 돼?” 평소와 달리 오늘따라 유난히 끈적하게 구는 지 알 수 없어 상혁이 날이 선 목소리로 대답하자 그가 조용해졌다. 


“…알았어. 시간 되면 연락 줘.”


“…응.” 전화를 끊고 상혁이 지겹다는 표정을 지었다. 집착 당하는 느낌에 괜히 신경질이 났다, 모순적이게도 이준의 그 새끼에 집착하기 시작한 자신이었음에도. 상혁은 가스가 다 떨어져 더 이상 불이 나오지 않는 라이터를 계속 켰다. 부싯돌에 의해 마찰되는 작은 소음이 이유 없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진짜 낙타를 타봤단 말이야?” 미혜가 낄낄대며 봉지 째 뜯어놓은 감자칩에 손을 가져갔다. 채욱이 소주를 마시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진짜 탔대두? 낙타 진짜 생각보다 존나 커. 그리고 타잖아? 엉덩이 존나 개 아파. 너 타면 죽을걸?” 채욱이 미혜처럼 낄낄댔다. 둘을 보고 있는 이준은 거의 포기한 표정이다.


“그리고 속눈썹도 엄청 길구. 그러고 보니까 너 낙타 닮은 것 같다, 서미혜.” 채욱이 미혜를 놀리자 그녀가 ‘어, 그래? 개'새끼 오늘 너 죽고 나 죽자.’ 하며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너 뒤졌어. 오늘. 너랑 나랑 둘 중에 누가 더 닮았는지 해보자고, 엉?” 미혜가 채욱의 얼굴을 잡고 뷰러와 마스카라를 들이밀자 채욱이 까무러치며 얼굴을 좌우로 피하기 시작했다.


“야! 안 돼! 이 씨, 저리 가!” 채욱이 저항했지만 그녀를 막을 수 없었다. 미혜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좌우지간 어디에도 없으니. 포기한 그가 그녀에 결국 자신의 속눈썹을 내어주고 만다.


“너희 집에 안 갈 거야?” 음료수를 홀짝이던 이준이 고갤 저었다. 미혜는 그렇다 쳐도 채욱은 뭐가 저렇게 신이 났는지, 속도 없는 새끼. 아까 까지만 해도 미혜 앞에서 쪽도 못 쓰고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낑낑대더니 지금은 누가 보면 둘이 연인이라 여겨도 이상할 것 없이 지지고 볶아 댄다. ‘철이 없어선지 아니면 사람을 너무 좋아 해 저러는 건지.’


“악!”


“어머….”


뷰러에 살이 집혀 아파 죽을 것 같다며 채욱이 덩치 값도 못하고 미혜에게 칭얼대고 있었다. 두 번 다시 못 볼 장관이었다.




잠이 오지 않아 한참을 뒤척이던 상혁이 휴대폰을 열었다. 


「화요일 저녁에 시간 날 것 같은데.」


「응. 시간 돼.」


읽자마자 답장이 오는 것을 본 상혁이 휴대폰을 끄고 옆으로 누웠다.




욕을 충분히 다 못 한 것 같다고 전 남친한테 한풀이 하고 오겠다고 전화를 걸며 이준의 방에 들어갔던 미혜가 한참 지나도 오지 않는다. 상혁이 조용한 방을 들여다보니 어느샌가 침대에 뻗어 자는 그녀가 보인다. 


“미혜 잔다.” 속삭이듯 말하며 채욱이 방문을 조심스럽게 닫으며 식탁으로 걸어왔다.


“어쩐지 술 과하게 마신다 했다. 쟤 자면 누가 업어 가도 몰라. 그렇게 조용히 얘기 안 해도 돼.”


“그렇냐.”


“너도 이제 집에 가지? 내일 출근 한다며.”


“조금만 더 있다가.”


“피곤해 나. 취기도 있고. 너도 꽤 취했어.” 이준이 일어서며 빈 접시를 들고 싱크대로 나르기 시작했다. 채욱이 마지막 남은 맥주병을 오픈했다. 그 소리에 이준이 그를 향해 돌아봤다.


“내일 출근 어떡하려고 그래.”


“괜찮아. 나 체력 좋잖아.” 의미 없는 말이었지만 이준의 귀가 왠지 모르게 달아올랐다. 채욱이 술을 따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나, 여기서 자고 갈까.” 그 말에 이준이 몸을 틀었다.


“옷은 어떡하고.”


“아침 일찍 나서면 되지.”


“그럴 정신 있으면 지금 집에 가, 응?” 이준이 식탁으로 다가와 빈 감자칩 봉지를 구기며 말했다. 그 때, 채욱이 이준의 팔목을 덥석 잡았다. 이준의 굳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한이준.” 물기 젖은 채욱의 목소리가 왠지 떨리는 것 같았다. 이준이 애써 회피하려 손목을 틀었지만 그는 놔주지 않았다.


“한이준 너…. 나랑 친구 다시 할 수 있어, 정말로?” 채욱이 이준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이준은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채욱이 이준의 옆모습을 가만히 보았다. 두 달 전 그 날처럼 말간 얼굴로 이준이 뺨을 붉히고 있었다. 


이준이 대답 없이 식탁만 본다. 채욱의 심장이 죄일 듯 뻐근해졌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이 이준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미혜의 말에 긍정했었다. 친구로 남는 편이 서로에게 슬픈 역사가 되지 않을 최선임을 스스로도 알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준을 보며 채욱은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과 제대로 마주한다. 친구라는 미명아래 숨죽이고 있던 마음이었을까. 섹스가 도화선이었던 걸까. 라이터를 켜기 위해 부싯돌을 마찰시켜야 하듯, 섹스는 채욱이 이준을 향해 느껴왔던 감정의 부싯돌이었던 걸까.


몸을 섞은 뒤 욕구가 식어빠질 때 몸 섞지 말았어야했다 후회했고, 이지러지는 마음을 모른 척 하려 두 달 동안 연락하지 않은 것은 감정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탓이었다. 시간을 보내며 연락 않던 그가 미워 부러 더 내버려 두기도 하였지만, 어찌 그리 무심한 지 화가 나기도 했지만, 태석이 앞으로 이준과 어떻게 할 거냐는 물음에도 모르겠다 답했지만 이준의 집 앞으로 왔던 것은.


눈앞에 서 있는 이준에 채욱은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안고 싶었고, 입을 맞추고 싶었고, 품에 가둬두고 가만히 잠들고 싶었다. 일어나 밥을 먹고, 어깨를 기대고 티비를 보며, 살을 어루만지고도 싶었다. 늦게 깨달은 거짓말 같은 사실에, 아무 말도 않는 녀석의 묵묵부답에 마음이 시려 자리에 있기가 힘들어진다. 친구로 지낼 수 있다는 말을 할까 겁이 나고 반대로 친구로 지낼 수 없을 것 같단 말이 나올까봐도 겁이 났다. 미혜 말대로 예전과 같이 항상성으로 친구로 지내는 게 좋은 것을 알면서도. 채욱이 이준의 손목에 잡았던 자신의 손을 풀고 가만히 일어나 등을 돌렸다.


“…네가 후회 했잖아. 나랑 하고 난 후에.” 채욱이 등 뒤로 떨리는 목소리가 된 이준의 음성이 들렸다. 채욱이 등을 돌렸다. 후회. 거짓이라고 말 할 수 없었다. 사실이었기에. 정욕이 사그라지면 이성이 찾아드는 법이었다.


“네가 담배 피면서… 한숨 쉬던 거… 내가 못 들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너.” 이준이 목이 메는 듯 말했다. 


“…했어.” 말하며 채욱이 한 걸음 다가서자 이준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했는데. 후회했던 그 순간이 후회 되려고 한다 지금.” 굳은 표정으로 채욱이 대답하였다. 이준은 천당에서 지상으로 툭 떨어지는 기분이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짐작 되지 않았다. 아니, 알아서 좋을 게 없었다, 판도라의 상자처럼. 연을 끊어버릴 거라고 다짐했던 이전의 마음과는 달리, 막상 이준은 목전의 채욱을 보며 그를 잃을 자신이 없었다. 친구로 남아 예전처럼 사는 중간 중간 그가 자신의 삶에 안착해 우정으로 서로를 인치하는 사이가 최선이라고, 미혜의 말처럼, 우리가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가장 타당한 방향이라고, 그리 여겼다.


“우리 그냥….”


“나 요즘 만나는 사람 맘에 들어.” 인연 끊고 살자는 말이 나올까 두려워 이준이 그의 말을 막았다. 눈을 마주칠 자신이 없어 그저 바닥만 쳐다보며. 다가오던 채욱이 걸음을 멈추었다. 더 이상 다가갈 수 없는 그의 말에 채욱이 천장을 올려보며 한숨 쉬었다.


“그니까, 미혜 말처럼 하자, 우리.” 아무 일 없던 것처럼. 그 날 밤은 만취해, 외로워, 일차원적으로 서로를 얽어댄 실타래 같은 거라고. 얽힌 실타래는 푸는 것이 순리였다. 실타래를 풀 듯 둘 사이에 있었던 일은 그저 스쳐 지나간 더 이상 기억 하지 않아야했고, 기억나지도 않아야 하는게 옳았다. 이편에서 저편으로, 옷깃만 스치고 지나치는 횡단보도 위 안면부지의 두 사람처럼, 그렇게, 아무 일 없이, 잊어야 하는.


“…알았어.” 침묵으로 일관하던 채욱이 마침내 짧게 대답했다. 그 말에 이준이 눈을 들었다.


“나 갑자기 너무 피곤하다. 소파에서 조금만 자도 되지? 친구 집인데.” 등을 보인 채욱이 소파로 무심하게 걸어갔다.




눈을 떴다. 어슴푸레한 바깥이 아침이라고 말해주었다. 맥주 때문인지 평소보다 머리가 무거워 십 분이라도 더 자려던 상혁이 문득 머리맡에 둔 휴대폰을 열었다.


「어젠 잘 들어갔어요?」


이준이었다. 상혁이 맥주로 무거운 머리를 털고 설핏 웃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었다. 이준은 뜬 눈으로 식탁에 앉아 밤을 새다 새벽녘이 되자 국을 한소끔 끓였다. 녀석은 소파에 누운 이후로 숨소리 하나 없이 조용했다. 국을 끓이던 이준은 자신이 상혁에게 아무런 메시지 하나 보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휴대폰을 여니 채욱으로부터 온 부재중 전화 알림만 여러 개였다. ‘언제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애써 무시하고 상혁에게 문자 하나를 보냈다. 


더 늦으면 출근에 지장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이준이 채욱을 깨우러 거실로 향했다. 새근새근 숨을 쉬며 자는 채욱이 이준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 때 그가 가늘게 눈을 떴다. 이준이 몸을 움찔했다.


“나 때문에 깼어?”


“아니. 조금 됐어.”


“부엌 소리 때문에 깼구나. 너 가기 전에 밥 먹고 가라고.”


“…편의점에서 때워도 …돼.” 목이 메는 듯 채욱이 이준을 올려다보며 드문드문 말했다.


“자취해서 맨날 그런 거만 먹잖아 너. 술도 마셨는데 제대로 먹어야지.” 이준의 말에 채욱이 가만히 그를 응시한다. 바닥만 보던 이준이 그의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눈을 돌렸다.


“집에도 들러야지 할 거구. 옷 갈아입고 출근해야잖어. 빨리 차려줄게.” 그 때 채욱이 몸을 틀려던 이준의 팔목을 잡아 끌어당겼다. 순간 중심을 잃으며 이준이 채욱의 위로 엎어졌다.


“야, 이채욱….” 채욱의 위에서 버둥대던 이준이 말을 멈추었다. 이준의 허리를 꼭 안고 그의 머리를 채욱이 자신의 가슴께에 묻은 탓이었다.


“한번만. 한번만 해볼게 이준아. 오늘부터 우리 다시 친구해야하니까. 지금 이 순간만 친구 아닌 것처럼, 오 분만. 앞으로 이럴 일 없을 테니까….”


채욱이 자신의 얼굴을 이준의 머리칼에 파묻은 채 속삭였다. 물기 젖은 그의 목소리가, 그의 울대가 떨리고 있었다. 이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가 하는 대로 자신을 내버려두었다.




저녁이 되어, 침대를 벽 삼아 바닥에 우두커니 두 다리를 모은 채 앉아있던 이준에 미혜가 동영상을 보내왔다. 미혜가 칠한 마스카라를 하고 해맑게 웃으며 대추야자 한 상자를 다음에 꼭 가져오겠다고 약속하는 녀석이 담겨있었다. 마스카라가 떡져 세상 다시 없이 웃긴 그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던 이준이 재생 버튼을 한 번 더 누르던 손을 눈가로 가져갔다. 눈물을 훔치고, 훔쳐냈다. 그럼에도 눈물이 자꾸 흘러 뺨을 적시자 얼굴을 팔에 묻었다. 옷소매에서 채욱의 살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

8화를 두 가지 버전으로 써놓고 고민을 조금 했습니다. 고르지 못하고 내버려둔 채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다, 주말임에도 일찍 귀가했습니다. 이 버전을 선택한 것은 집에 돌아오며 내내 들었던 노래가 조금 우울했던 탓일지도 모릅니다. 후반부로 가기 위한 잔잔한 화 정도로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마테오

관련자료

댓글 1

<span class="sv_wrap"> <a href="https://ivancity.com/bbs/profile.php?mb_id=tjwjdrb" data-toggle="dropdown" title="이제뭐할꼬 자기소개" target="_blank" rel="nofollow" onclick="return false;"> 이제뭐할꼬</a> <ul class="sv dropdown-menu" role="menu"> <li><a hre님의 댓글

  • <spa…
  • 작성일
생각을 하면서 읽어야 하는글 인듯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