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목소리가 들려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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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이야기는 개인적인 경험을 구체화한 픽션이며, 등장하는 인물이나 단체, 사건은 실존하는 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0. 사계
나에겐 겨울만 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만남은 짧고 기다림은 길었던 인연이었다. 살을 에는 듯한 찬바람이 휘몰아치던 날, 따스함이 감도는 헌책방에서, 그를 처음 보았다.
그는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옷을 입고 나타나 같은 책을 읽다가 떠났다. 미대 진학을 목표로 하고 계산대에서 그림을 그리던 나는 언제부턴가 그를 기다리게 됐다.
“오늘도 오셨네요.”
한 번은 그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그는 잠시 나를 쳐다보았다. 검은 모자에 검은 마스크를 즐겨 쓰던 그였기에 얼굴이 정확히 보이진 않았으나, 당황했다는 것만은 정말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가 즐겨 읽는 책은 무라카미 오츠타케의 『당신이 즐겁다면』이라는 책이었다. 200페이지가 채 넘지 않는 얇은 책이었지만, 그는 매일 그 책을 읽었다.
그러다 한 번은 그가 먼저 말을 걸었다.
“저기.”
쑥스러운 듯이, 주뼛주뼛한 걸음으로 다가와 입을 연 그는 책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아, 그 책이라면…….”
그림을 그리고 있던 나는 손에 쥔 연필을 놓고 도서 목록을 살폈다.
“누가 그 책에 커피를 쏟는 바람에 못 읽게 됐어요, 그래서…….”
“그렇군요.”
아쉬워하는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실망감이 감도는 그의 매끈한 눈을 보며 잠시 생각했다.
“그래도 여분은 있을 거예요. 제가 찾아보고 연락드릴게요.”
“그래 주시겠어요?”
먹구름이 잔뜩 끼었던 그의 얼굴에 환한 빛이 들이쳤다.
그 후로, 그는 매일 책방을 찾아왔다. 원래는 자주 오지 않았는데, 책을 찾아주겠다고 한 뒤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찾아왔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자연스레 친해졌고, 나도 그를 기다렸고, 그도 나의 연락을 기다렸다.
하지만 겨울이 끝나고 봄이 찾아왔을 때, 그는 떠나갔다. 눈이 펑펑 내리던 날에도, 기온이 영하 15도를 넘어도 찾아오던 그는 거리에 쌓인 눈이 녹으면서 함께 사라졌다.
“무슨 일이 있겠지. 너무 신경 쓰지 마.”
엄마는 그를 잊으라 했다. 사실, 잊고 말고 할 게 없었다. 그를 좋아하거나 사랑한 것도 아니었기에.
하지만 왜인지, 자꾸만 그가 생각났다. 해외를 돌아다니며 그 책의 초판을 구했고, 그에게 연락했지만 없는 번호라는 말만 돌아왔다.
시간이 흘러, 나는 고등학생이 됐다. 본격적으로 미대 진학을 위해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공부에 몰두했다. 그러면서 책방을 찾는 일이 드물어졌다.
“어제 말한 것처럼, 인물을 그려보는 거야. 어떻게 그리든 상관없으니까, 시작해보자고.”
선생님의 박수와 함께, 학생들은 각자 준비해 온 사진을 꺼내 이젤에 있는 나무판에 붙였다.
나는 연필을 잡고 한참을 생각했다. 선생님은 사진이 없는 나를 보고 물었다.
“준비 안 했어?”
“그게……. 기억 속에만 있어요.”
“그럼 기억나는 대로 그려봐. 보고 그리면 아무래도 똑같이 그리려는 압박감도 있을 테니까.”
그 말에 용기를 얻은 나는, 눈을 감고 차분히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검은 모자에 검은 마스크를 쓴 사람이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에 관해 아는 거라곤 쌍꺼풀이 없는 매끈한 눈매였다.
“자, 다 그린 사람 먼저 제출하는 거로 하자. 평가는 내일 할 거야. 이번 평가가 중요한 건 다들 알고 있지?”
다음 날이 되었다.
평가는 예정대로 진행됐다. 학원 선생님들과 졸업생들이 그림을 보고 점수를 매겼다. 다들 긴장한 표정으로 그림을 둘러보았는데, 사람들은 유독 한 그림에 모여 있었다.
“이거,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
“되게 오묘해요. 사람이긴 사람인데, 다 안개처럼 보여요.”
“눈만 그린 거도 진짜 특이하네. 이름이 뭐지?”
[이름: 정이든]
[학년: 고1]
부분적인 기억으로 그린 그림이 월말 평가에서 1등을 해버렸다. 그 그림은 학원 입구에 게시됐고, 인터넷에서도 크게 화제가 됐다.
모처럼 기분 좋은 소식을 가지고 책방에 들렀을 때였다.
“어, 마침 왔네.”
엄마가 나를 맞이했다.
“무슨 일 있어?”
그에게 물었다.
“이거, 그 사람이 전해주라고 하더라.”
“그 사람?”
엄마는 사진 한 장과 엽서를 건넸다. 내 이름 앞으로 온 편지였다.
[안녕하세요.]
평범하게 시작한 편지는 바로 그 사람이 보낸 거였다.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책을 읽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갑작스럽게 사라져서 정말 미안해요. 급한 일이 좀 있었거든요. 지금은 아버지를 따라서 미국에 와 있어요.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생각보다 일이 빨리 마무리돼서 곧 있으면 한국으로 돌아갈 듯해요.]
그때 처음으로, 그가 마스크를 쓰지 않은 얼굴을 보게 됐다.
엽서를 읽고 있던 도중에 전화가 걸려 왔다.
모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아, 맞는구나.]
그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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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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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호기심을 자극하는
멋진 어프로치..
다음편이 기다려집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