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중설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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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화 집착과 광기 (3)
민재는 아까부터 울리는 전화기를 슬쩍 회의실 테이블 밑으로 내렸다. 안 받으면 바쁘겠거니 하고 나중에 걸면 좋으련만 무슨 일인지 휴대폰은 다시 울렸다.
확인을 해보니 또 민아였다. 민아씨가 왜 이 시각에 전화했을까,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 민아 씨, 지금 중요한 회의 중이라 좀 이따 제가 전화 걸게요.
휴대폰을 테이블 밑에 내리고 얼른 문자를 보냈다.
“그럼 우리 미영산업 하민재 상무의 프리젠테이션이 있겠습니다.”
오늘 회의 진행의 사회를 맡은 박 부장의 말이 마이크를 통해 흘러나왔다. 영어 통역사의 유창한 통역이 그 뒤를 따랐다. 오늘 자리는 세나그룹의 소개로 알게 된 미국 바이어 앞에서 미영산업의 제품을 발표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민재는 오늘 영어로 직접 자사의 제품을 소개하고 질문에 답변까지 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하 상무님이 이 일보다 더 바쁜 일이 있는 것 같군요. 어떻게, 발표 가능하시겠어요?”
민재 맞은편에 앉은 검은색 뿔테 안경을 쓴 중년 남자가 기분 나쁜 듯 비아냥거렸다. 남자는 진동이긴 했지만 아까부터 민재의 폰이 울리는 게 마뜩잖았다. 오늘 같은 자리에서는 당연히 미리 폰을 꺼두었어야 했다.
그런데 민재는 폰을 끄기는커녕 오히려 테이블 밑으로 휴대폰을 내려 문자를 보내는 눈치가 아닌가. 세나그룹 건설사 사장을 뭘로 보고 이것들이, 하는 눈빛을 지었다.
아까부터 좌불안석으로 남자의 눈치를 보던 아버지 하 대표는 그 말에 민재를 쳐다보며 눈길로 꾸짖었다. 민재가 일어나 맞은편에 앉은 사람에게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그럼 발표 시작하겠습니다.”
민재가 회의실 앞쪽 스크린이 설치된 곳으로 걸어나갔다. 스크린이 내려오고 프로젝터가 켜졌다. 그때 징, 하는 진동음과 함께 문자 한 통이 민재의 휴대폰으로 들어왔다.
민재는 마침 휴대폰을 끄려고 하던 참이었기에 액정에 뜬 문자를 자연스레 볼 수밖에 없었다.
- 재으ㄴㅣ가 고으ㄴ수에게 납치됐어요!
처음에는 무슨 소린지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타가 심한 걸 보니 뭔가 급박하게 보냈다는 느낌만 있었다.
민재가 단상 앞에 서서 자신의 휴대폰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그제야 무슨 뜻인지 머릿속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다음 순간, 재은이 위험에 빠졌다라는 생각이 들자 일시적으로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자신이 지금 단상 앞에 왜 나왔는지조차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아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회사의 간부들과 외부 인사들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멈춘 듯 세상의 모든 소리가 잠시 사라졌다가 다시 귓가에 회의실 시계의 초침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똑각똑각.
잠시 비틀거리던 민재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마음속이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빨리 재은이에게 가봐야 한다는 생각이 섬광처럼 머릿속을 갈랐다.
“남 사장님, 미스터 존 스미스, 정말 죄송합니다. 급한 사정으로 오늘 발표는 아무래도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자초지종은 차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급하게 말을 내뱉고 민재가 밖으로 뛰쳐나갔다. 회의실 안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놀라서 모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민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세나건설 사장은 바이어 앞인 것도 잊고 화가 나서 삿대질을 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당신들, 이렇게 하고도 이 업계에서 살아남을 줄 알아?”
당황한 부친이 남 사장께 사죄를 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회의실에 있던 사람들의 웅성거림도 들려왔다. 그 모든 소리를 귓전으로 흘려들으며 민재는 재빨리 엘리베이터 앞으로 달려갔다. 급하게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지만 올라오는 속도가 너무 느렸다. 속이 탄 민재는 엘리베이터를 포기하고 계단으로 달려 내려가면서 민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라고요?”
믿을 수가 없는 말이 수화기 저편에서 흘러나왔다.
재은이가 집단 강간을 당하고 있다…! 재은이가…!
민아의 말을 들어보니 은수 그 자식이 재은이를 일부러 유인해낸 것 같다. 민아를 통해서.
주차장으로 내려간 민재가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머릿속이 새하얬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심장이 쪼개질 것처럼 뻐근했다. 운전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가야 한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며 은수가 있을 만한 곳을 생각해 봤다. 은수 아지트! 자신도 얼핏 들어본 것 같다. 은수가 동호회 녀석들과 가끔 광란의 파티를 벌인다는 그곳. 그곳을 찾아야 했다.
민재가 차를 몰며 급히 동욱에게 전화를 했다. 신호는 가는데 동욱이 얼른 받지 않았다.
“제발 받아라. 제발 좀!”
전화 연결이 되지 않자 연달아 두 번이나 걸었지만 녀석은 뭘 하는지 받지 않았다. 은수의 아지트를 알 만한 사람이 또 누가 있을까? 초조하게 머리를 굴리던 민재가 참지 못하고 고은정에게 전화를 하려는 순간, 동욱에게서 전화가 왔다.
“형, 무슨 일이에요?”
“동욱아, 너 은수 아지트 알지? 거기 어디야? 빨리 좀 불러봐. 시간 없어. 얼른.”
“은수 아지트는 왜요? 형?”
동욱이 주저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민재는 우물쭈물하는 동욱의 말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지난번에 나랑 같이 사고 났던 애 기억하지? 은수가 그 애를 납치했어. 빨리 말해. 안 그러면 그 녀석 죽어!”
“은, 은수가요?”
민재의 말에 동욱의 목소리가 커졌다. 주저함과 놀람과 두려움이 한데 뒤섞인 목소리였다.
“그래, 이 새끼야, 빨리 말해. 거기 어디야?”
“아, 은수 새끼. 사고 치지 말라고 그렇게 얘기했더니. 그곳 **동이예요.”
민재는 동욱이 말해 준 곳으로 급히 차를 몰았다. 신호를 몇 번이나 위반했는지 모른다.
이 순간만큼은 지금 몰고 있는 차가 이전의 람보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재은아! 재은아!”
기적같이 밖에서 민재의 목소리가 들렸다.
재은은 ‘형’이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소리는 입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쉿! 가만히 있어.”
선글라스남이 재은의 입을 가로막았다. 민재 목소리가 들리자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잠시 하던 짓을 멈추고 흠칫했다.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해. 오히려 잘됐네. 나 혼자 보는 것도 지루했는데 민재 형하고 같이 봐야겠네. 큭큭큭.”
“은수 이 새끼야. 당장 그만두지 못해!”
민재가 현관문을 두드리며 밖에서 소리쳤다. 닫힌 대문은 담을 넘어 뛰어 들어왔지만 현관문이 잠겨있자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집을 한 바퀴 돌며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을 찾았지만 모든 문이 다 잠겨있어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다급해진 민재가 거실 유리문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통유리로 된 거실 유리문은 워낙 튼튼하여 한두 번으로는 깨지지 않았으나 민재가 계속 내리치자 결국에는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와장창, 소리를 내며 깨져나갔다. 깨진 유리가 민재의 손을 파고들어 시뻘건 피가 금세 손을 타고 흘렀다. 하지만 민재는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안으로 들어온 민재가 방문을 일일이 열며 확인하기 시작했다.
“재은아!”
“이런, 성가시게 됐네.”
은수가 두 손으로 얼굴을 한번 쓸더니 던져놓았던 회칼을 집어 들었다. 그 모습을 본 재은이 다시 발악하기 시작했다.
“형! 오지-”
“조용히 해. 씨벌 년아.”
짝!
선글라스 남이 재은의 얼굴을 사정없이 내리치며 말을 하지 못하게 입을 손으로 막았다.
터졌던 입술이 또 터지면서 남자의 손바닥에 붉은 피가 묻었다.
하지만 그 소란 때문인지 민재가 재은이 있는 방의 문을 벌컥 열었다.
“재은아!”
재은의 처참한 몰골을 본 민재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이 새끼들아, 당장 그만두지 못해!”
민재가 두 눈을 이글거리며 소리 질렀다.
그 순간이 재밌다는 듯이 큭큭 거리던 은수가 기다렸다는 듯이 재은의 머리채를 잡고 뒤로 젖히며 회칼을 목에 갖다 댔다.
“큰소리칠 입장이 아닐 텐데?”
“은수아, 너 미쳤어? 왜 이러는 거야? 정신 차려, 이 새끼야!”
민재가 방 안으로 성큼 한 걸음 내딛었다.
“거기서 멈추는 게 좋을 거야. 한 발이라도 더 움직인다면 이 녀석의 예쁜 목은 더 이상 볼 수 없을 테니 말이야.”
민재가 주춤했다.
“은수야, 말로 하자. 칼 내려놔.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야, 대체?”
“몰라서 물어?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이번에는 은수가 소리쳤다. 흥분한 은수가 소리를 지르면서 칼을 든 손을 움직였는지 재은의 목에 가느다란 혈선이 생겼다.
“형이 내 마음 무시했잖아? 내가 그토록 애걸했는데도 형이 나를 쳐다도 보지 않았잖아? 그럼 어떡해? 이 방법밖에 더 있어? 응?”
은수는 정신이 나간 것만 같았다. 광기 어린 눈의 흰자위가 번뜩였다.
민재는 재은을 구하러 달려왔지만 정작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함이 답답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은수야, 하지만 이건 아니잖아. 다시 얘기해보자. 이번에는 내가 잘 들어줄게. 응?”
“jot 까는 소리 하네. 이번에는 잘 들어줘? 큭큭큭. 그래. 이번에는 형이 얼마나 잘 들어주는지 한번 볼게.”
은수가 민재를 향해 씩 웃었다.
“한번 벗어봐.”
“뭐?”
“옷 벗으라고. 한국어 몰라? 이번에는 내 말 잘 들어준다며?”
은수가 여전히 재은의 목에 칼을 대고 민재에게 명령했다.
“그렇게 행동이 굼떠서야 이 녀석이 목이 남아날까?”
은수가 재은의 목에 난 상처를 입술로 핥았다.
“큭큭큭. 얼굴이 예쁜 녀석이라 피 맛도 단 느낌이야.”
재은이 놀라서 움찔거렸다. 피를 핥는 녀석의 표정이 정말 흡혈귀 같았다.
민재가 벌떡 일어나 서둘러 옷을 벗었다. 속옷과 양말까지 모두 벗어 던지고는 다시 엉거주춤 앉았다.
은수가 민재의 단단한 몸을 음미하듯 한참 쳐다보더니 선글라스 남자 중 한 명에게 턱짓을 했다.
“묶어. 오늘 아주 쌍으로 한번 놀아보자고.”
은수의 얘기에 오싹한 전율이 민재의 몸을 꿰뚫듯 지나갔다.
민재가 부들부들 떨며 재은을 쳐다보았다. 재은의 모습은 끔찍했다. 소담스럽던 연한 갈색빛의 머리는 땀으로 젖어 아무렇게나 들러붙어 있었고, 백설기처럼 뽀얗던 얼굴과 몸 여기저기에는 보라색 멍 자국과 붉은 키스 자국이 수두룩했다.
입술은 터져 피가 났고, 입 주위와 가슴에는 사내가 싸질러 놓은 정액이 흥건했다. 그리고 수치심을 유발하기 위해 벌려놓은 두 다리 사이로는 세 놈이 돌아가며 박아대기라도 한 듯, 허연 정액이 질척거리며 흘러내렸다.
너무도 참혹한 모습에 민재는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재은이 저렇게 끔찍한 고통을 당하는 동안 자신은 뭘 했던 걸까. 아니, 재은을 구하려고 이렇게 달려왔지만 왜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걸까.
참을 수 없는 고통과 자괴감과 무력감에 눈물이 차올랐다.
역시 자신이 욕심을 냈기 때문인 걸까. 멀쩡히 잘살고 있던 녀석을 자신이 괜히 들쑤신 탓일까? 그래서 하늘이 자신과 재은에게 이 고통을 안겨주는 걸까.
“재은아….”
민재의 몸이 가느다랗게 떨렸다. 민재가 참지 못하고 기어이 눈물을 떨구고 말았다. 두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앙다문 입술을 타고 턱밑으로 뚝뚝 떨어졌다.
“형…”
민재가 우는 모습을 본 재은이 민재를 불렀다. 민재가 흐느끼며 재은과 눈을 맞추었다.
“재은아!”
“큭큭큭. 애처롭네, 정말 애처로워.”
민재도 무릎을 꿇은 자세로 손과 발이 모두 묶이자, 은수가 칼을 빙빙 돌리며 민재에게 다가왔다.
“민재 형. 내가 형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르지?”
은수가 민재의 뺨을 쓰다듬었다. 민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은수를 바라보았다.
“형이 나한테 눈길만 줬어도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거야. 그런데 나를 거부했던 형이 저 녀석에게 빠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땐 정말 돌아버릴 것만 같았어.”
은수가 재은의 눈앞에서 보란 듯이 민재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민재는 은수의 입을 피하지 않았다. 섣불리 피했다가 은수를 더 자극하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한참 동안 민재의 입술을 탐하던 은수가 숨이 찬지 입을 떼며 ‘후-’하고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재은을 바라보았다.
“기분이 어때? 네가 당하던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지? 아니면 아직 별로 감흥이 없으려나?”
은수가 입술을 민재의 가슴으로 가져갔다. 단단한 가슴근육 가운데 자리 잡은 적갈색 유두를 혓바닥으로 한 번 훑어 올렸다. 강렬한 자극에 민재의 몸이 움찔했다.
“큭큭큭. 이번에는 좀 어때? 형은 좀 느끼는 것 같은데 말이야.”
은수가 다시 재은에게 눈길을 던졌다. 재은이 흠칫 몸을 떨며 눈물 자국이 말라붙은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되나. 눈을 떠. 떠서 제대로 보라고.”
은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선글라스남이 재은의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재은은 ‘헉’ 소리를 내며 다시 눈을 떴다. 민재가 그런 모습을 애잔한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정작 자신의 몸을 애무하고 있는 은수에게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작정이라도 한 듯 은수의 입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재은은 머리채가 붙잡혀 눈을 감지도 못하고 그 모습을 부들부들 떨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은수의 회칼에 낭자 당하는 듯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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