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중설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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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화 시련 (1)
아버지가 다녀가신 그 날 오후에는 민재 형 부모님이 찾아왔다. 나는 얼마나 긴장을 했던지 입안이 바싹 마르고 식은땀마저 살짝 배어날 정도였다.
아침에 아버지가 오셨을 때 민재 형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민재 형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고는 하지만 갑자기 나타나 자기 아들 병실 한쪽을 떡 하니 차지하고 누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일어나서 인사라도 드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혼자서는 아직 움직일 수 없는 바람에 누운 채 인사를 드려야 해서 그것도 무척 죄송했다.
민재 형 아버지는 기업 CEO에 교회 장로답게 근엄하고 말이 없으셨다. 형이 나를 소개해 드렸을 때도 한번 쳐다보기만 했을 뿐이다. 민재 형 아버지는 예전에 사진에서 봤던 것보다 지금이 훨씬 더 나아 보였다.
민재 형 어머니는 전형적인 단아한 사모님 스타일이었다. 인사를 드렸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고생 많아요’하고 받아주셨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나에 대해서 모르실 테니 관심이 없는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그렇다고 내가 민재 형 애인입니다, 이런 소릴 할 수는 없으니까.
아무튼 두 분 모두 다가가기 조금 어려운 느낌이 들었다. 그런 내 기분을 눈치챘는지 민재 형이 부모님께 자꾸 내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조금이라도 더 부모님이 나를 봐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참, 은정이가 한 달 뒤에 들어온다는구나.”
민재 형 어머니가 민재 형의 말을 자르더니 고은정 얘기를 꺼냈다. 듣지 않는 척했지만 민재 형 어머니가 하는 말에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어제 얘기한 대로 결혼식은 우리가 알아서 착착 준비할 테니 너는 그렇게 알고 있거라.”
결혼이라니…!
뜻밖의 소리에 놀라 나도 모르게 그만 ‘헉’ 소리를 내고 말았다.
“어머니, 어제 제가 분명히 말씀드렸잖아요. 은정이랑 결혼하지 않겠다고요.”
어머니의 말이 끝나자마자 민재 형이 화가 난 목소리로 어머니께 대들었다.
“언제 정신을 차릴 것이냐? 이게 자주 오는 기회인 줄 알아?”
병실 안에 들어오신 후 말씀 한마디 없던 민재 형 아버지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남들은 연을 맺지 못해서 안달인 세나 그룹이다. 그 집과 사돈을 맺게 되면 우리 회사는 물론이고 네 앞길도 앞으로 탄탄대로인데 왜 그걸 몰라? 그 집에 아들이라고는 은정이 동생뿐인데 그놈은 그 집에서 내 논 자식으로 취급한다고 하더라. 이번에도 뺑소니 사고나 일으키고…, 흠흠. 아무튼 고놈은 고 회장님의 신망을 잃은 지 오래야. 이럴 때 네가 회장님 옆에서 입안의 혀처럼 굴며 신망을 얻으면 얼마나 좋아?”
민재 형 아버지가 홧김에 말을 하시다가 말끝을 얼버무렸다. 고은수가 뺑소니 사고를 치건 말건 나는 그런 건 관심 없다. 하지만 민재 형 부모님이 형과 고은정의 결혼을 저토록 강하게 밀어붙이실 줄은 몰랐다. 그동안 저 압력을 형은 어떻게 참고 견뎠나 싶었다. 요즘 늘 내 앞에서 애가 되는 형을 보며 철없다는 생각만 했지 형이 집에서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는 전혀 몰랐다.
“싫습니다, 아버지.”
이번에도 단호한 거부의 말이 나왔다.
“뭐야? 다시 한번 말해 보거라.”
민재 형 아버지의 목소리에 노여움이 가득했다. 분위기가 험악하게 흘러가자 옆 침대에 누운 나는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은정이와 결혼하지 않겠습니다.”
민재 형의 말이 끝나는 순간, ‘짝’하고 손찌검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리지 못하는 나는 그 소리에 질끈 두 눈을 감아버렸다.
“못난 놈. 이날 이때껏 내가 회사를 일구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뻔히 아는 놈이 그런 소리를 해? 지난번에도 보지 않았느냐? 우리 같은 중소기업은 아무리 노력해도 대기업 콧바람 한 번에 모든 게 날아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런데 지금 네게 그 대기업의 제일 꼭대기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이 열리려고 하는데 왜 그걸 마다하는 게야, 왜?”
민재 형 아버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놀라 나는 몸을 움찔하며 병원 이불을 꽉 움켜잡았다.
“왜냐하면, 그 길은 제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분노에도 민재 형은 단호했다. 내 앞에서 보이던 그 철부지 같은 모습이 아니었다. 듬직하기도 하면서도 걱정이 되었다. 저렇게 아버지와 계속 맞서도 될까?
형은 효자이다. 미국에서 유학할 때 민재 형 아버지가 쓰러지자 그토록 하고 싶어 하던 영화 공부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회사 일을 보기 시작했다. 형은 언젠가,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바로 아버지라고 이야기했었다. 가진 것 없이 혼자 힘으로 이렇게 번듯한 회사를 일구어내신 아버지가 정말 자랑스럽다며.
그런데 형은 지금 자신이 그토록 존경하는 아버지에게 맞서고 있다. 그 이유에는 아마 나도 관련되어 있는 것 같다.
문득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상처 입었을 형의 마음이 안타까웠다.
“못난 놈.”
민재 형 아버지가 형을 잠시 노려보았다.
“아이고, 그 이야기는 이따가 하세요. 여기 다른 사람도 있는데….”
민재 형 어머니가 내 눈치를 슬쩍 보셨다. 나는 아무 말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됐어. 얘기고 뭐고 필요 없어. 은정이가 귀국하는 대로 날짜 잡기로 했으니 그렇게 알거라.”
민재 형 아버지가 병실 문을 쾅 닫고 밖으로 나가버리셨다.
“아이고, 이 녀석. 어쩌자고 자꾸 그렇게 아버지와 맞서는 게야? 네 아버지 심장 안 좋은 거 너도 잘 알잖니? 또 쓰러지시면 어쩌려고 그래?”
민재 형 어머니가 아버지의 건강 문제로 민재 형을 압박했다. 아들을 아예 불효자로 몰고 가실 생각이신 것 같았다. 민재 형의 약한 부분을 잘 알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속옷 좀 챙겨왔다. 여기 두고 가마.”
어머니가 들고 온 가방을 두고 일어나셨다. 어머니가 나가는 데도 민재 형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철커덕. 문이 닫히고 나서야 나는 겨우 용기를 내었다.
“형, 괜찮아?”
내가 무슨 소리를 하든 금방 답을 하던 형이 말이 없었다.
할 수만 있으면 지금 형을 꼭 안아주고 싶은데 아무것도 못 하고 이렇게 병실에 누워있어야만 하는 나 자신이 그 순간 정말 싫었다.
“후-”
형의 입에서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병실 공기가 갑자기 너무 무거워진 느낌이었다.
****
한 달이 지나서 형과 나는 나란히 퇴원했다. 당분간 과격한 운동은 조심해야 하지만 그것만 빼면 일상생활은 별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우리 둘 다 한 달이나 업무에서 빠져 있었기에 쌓인 일들이 많았다.
한 달 만에 공업소에 첫 출근을 하자 양 사장님, 호식이 형, 김 양이 고생했다며 박수를 쳐 주었다. 사무실 유리문에 “축, 퇴원. 설재은”이 프린트된 A4지가 붙어있었다. 순정만화 주인공을 연상시키는 꽃 그림은 김 양의 솜씨이지 싶었다.
“재은아 고생했다. 네가 없으니까 단골이 확 줄었어. 아주머니들이 다들 와서 어찌나 너만 찾던지….”
양 사장님이 엄살을 부렸다.
“야, 너 한 달간 햇빛 안 봤다고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더 하얘졌다? 병원 밥이 좋았냐?”
“에이, 그럴 리가 있겠어요? 저는 형이 끓여주는 라면이 제일 먹고 싶었어요.”
“아, 그래? 라면 하면 또 나지. 당장 오늘 점심때 끓여 주마.”
“네. 기대할게요.”
양 사장님, 호식이 형, 김 양 모두 와서 이것저것 물어보며 말을 거는데 유독 경찬이 형은 관심도 없다는 듯이 신문만 보고 있었다.
“경찬아, 우리 막둥이가 한 달 만에 왔는데 넌 어찌 인사 한마디가 없냐? 인정머리 없게스리.”
양 사장님의 채근에 경찬이 형이 나를 보는 둥 마는 둥 신문에서 고개만 살짝 들었다.
“왔냐?”
그 말뿐이었다.
사실 내가 퇴원하면 제일 기뻐하고 반겨줄 사람이 경찬 형이라는 사실을 잘 안다.
병원에 실려 간 그다음 날, 경찬이 형이 혼비백산하며 왔던 때가 기억났다. 그때 형은 내 사고를 자기 일처럼 흥분했었다. 그리고 돌아갈 때는 지은이에게 음료수와 과일을 사라며 10만 원이나 주고 갔다고 한다. 나는 돈을 받았다고 지은이를 나무랐지만, 지은이가 받지 않으려고 했어도 경찬 형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주고 갔을 것이다.
그런데 경찬 형은 내가 민재 형 병실로 옮겼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로는 한 번도 병문안을 오지 않았다. 심지어 호식이 형도 두 번이나 다녀갔는데….
나 때문에 민재 형이랑 사이가 껄끄럽다는 것쯤은 나도 눈치채고 있었지만 둘 사이에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둘 다 내가 좋아하는 형들이니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는데….
갑갑하던 병실을 벗어나 다시 활동을 하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낮에는 그동안 밀린 공업소 일을 정신없이 따라가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면 장 봐서 지은이 도시락도 싸주고 아버지 밥상도 차려드리기 시작했다. 이제야 생활이 다시 제대로 굴러가는 느낌이다.
민재 형도 한동안 많이 바쁜 듯했다. 고은정과의 결혼 얘기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했으나 형이 말을 안 해주어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 내가 먼저 묻기도 좀 그렇고. 그냥 형을 믿으니까 형에게 맡기기로 했다.
바쁜 일정 속에서도 우리는 일주일에 최소한 한 번은 꼭 만나 데이트를 했다. 그때마다 짧은 시간을 가장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 데이트 방법을 찾아 둘이 머리를 맞대었다.
퇴원하고 나면 둘 다 쓰러질 만큼 실컷 하자(!)고 했지만 우리 모두 그럴 시간을 낼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그 약속은 계속 미루어지기만 했다. 스킨십하기에는 역시 병실만 한데가 없는 것 같다.
****
재은은 영화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오늘따라 영화 보는 내내 민재 손이 가만히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때 영화감독을 꿈꾸었다는 사람이 요즘은 극장에만 오면 영화는 뒷전이고 늘 손을 꼼지락거리며 스킨십을 시도한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영화관 불이 꺼지자마자 형과 나 사이에 있는 팔걸이를 올리더니 그 아래로 손을 늘어뜨려 내 손을 가져가 계속 만지작거렸다. 그러다가 슬쩍 무릎도 한번 만지고 화면이 좀 어두워진다 싶으면 과감하게 허벅지 안쪽으로 손길이 들어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형을 째려보며 작작 좀 하라는 눈빛을 쏘아 보내지만 그럴 때는 또 귀신같이 알고 스크린에 눈길을 박은 채 영화에 집중하는 척한다.
오늘따라 하도 심하기에 영화가 끝나고 나오면서 재은이 살짝 짜증을 냈다.
“영화가 무슨 내용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누구 때문에.”
“아, 그래? 내가 알려줄게. 이 영화는 말이야 세계적인 스릴러물의 거장….”
“흥. 됐거든요?”
“재은아.”
형이 불러놓고 한참 동안 말이 없다.
“왜?”
“우리 안 한 지… 너무 오래됐어.”
형이 시무룩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이럴 때는 영판 토라진 커다란 강아지다.
“퇴원하면 실컷 하기로 했잖아. 너, 약속도 안 지키고.”
“아, 진짜 누가 아저씨 아니랄까 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재은도 아까부터 몸이 달아오른 상태였다.
맞아, 안 한 지 오래되긴 했지.
“형, 그럼 우리도 그거 한번 해 볼까?”
“뭐?”
“그거 있잖아. 대….”
말을 꺼내기는 했지만 부끄러워 차마 단어를 끝까지 뱉어내지를 못하겠다.
“대?”
민재가 세상 순진한 눈빛으로 재은을 쳐다봤다.
“대 뭐?”
이럴 때 보면 민재는 정말 눈치 없다. 재은이 민재를 잠깐 째려보다가 얼굴을 붉히며 결국은 제 입으로 말을 꺼냈다.
“대… 실.”
“대실? 헉! 그 대실?”
자신도 모르게 큰소리를 낸 민재가 당황해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혹시 누가 듣기라도 했을까 봐.
이럴 때는 차라리 재은이 좀 더 추진력이 있다.
“마음먹은 김에 오늘 한번 가보자. 이 동네 모텔 많은 곳 알고 있어.”
재은이 민재 손을 잡고 먼저 이끌었다. 정말 극장 뒤편 골목길로 접어들자 모텔이 즐비했다. 그중에서 제일 깨끗해 보이는 모텔 하나를 골랐다.
그런데 막상 들어가려고 하니 두 사람 모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한참을 망설였다.
재은도 ‘확 저질러 버리지 뭐’, 하는 심정으로 오긴 왔지만 막상 들어가려니 이건 또 다른 문제였다. 이래서 사람들이 모텔 갈 때는 꼭 썬팅이 진한 차를 타고 가나 보다. 일요일이라 길이 너무 혼잡할까 봐 차를 두고 오라고 한 건 치명적인 실수였다.
재은이 모텔 앞에서 쭈뼛거리자 이번에는 민재가 결심한 듯 과감하게 앞장서서 들어갔다.
“내가 가서 방 달라고 할게.”
이럴 때 보면 또 나이가 좀 더 많은 민재가 확실히 형 노릇을 했다. 아니면 얼굴이 좀 더 두껍든가.
그렇게 두 사람은 오래간만에 오붓한 시간을 보낼 꿈을 꾸며 옥신각신하느라, 지은의 남자 친구 성한이가 휴대폰을 들고 자신들을 몰래 뒤따라오는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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