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중설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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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화 시련 (2)
성한은 아까부터 긴가민가했다.
암만 봐도 재은이 형이 분명한데…. 그런데 재은이 형 옆의 남자는 누구지? 두 사람, 설마 지금 영화관에서 나온 거야? 남자 둘이서? 헐.
성한은 모처럼 중학교 동창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멀티플렉스 상영관이 있는 번화가에서 재은을 본 것이다. 처음에는 반가운 마음에 소리쳐 재은을 부르려고 했었다.
그런데 재은 바로 옆에 있는 남자가 영 좀 껄끄러웠다. 지나치게 친한 척해야 한다고 해야 하나? 재은을 바라보는 그 사람의 눈길이 심상치 않다. 느끼하기도 하고.
남자가 남자 쳐다보는데 왜 저런 눈길이 나와? 게다가 재은이 형 표정은 또 왜 저런지. 약간 상기된 표정이다.
그리고 지금 보니 두 사람 이상하게 자꾸만 손을 잡는다거나 어깨에 손을 올린다거나 뭔가 신체 접촉이 많은 행동을 하고 있다. 자신이라면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저렇게 다정하게 손을 잡거나 어깨동무를 한다면 닭살이 돋아 뒤통수를 내려쳤으리라.
게다가 남자 둘이서 영화관이라니, 자기 머리로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게이도 아니고….
한 번 의심이 들기 시작하자 모든 게 다 수상해 보였다. 일단 증거를 확보한 다음, 지은이에게 보여주기로 했다.
가만, 그런데 지금 저 두 사람 왜 영화관 뒤편으로 가지? 거긴 모텔밖에 없는데?
헉! 설마 모텔에? 이 대낮에?
성한이 고등학생이긴 했지만 성인이나 다름없는 고3이고, 보통 고등학교 남학생들이 그렇듯 각종 야동을 두루 섭렵했기에 대낮에 두 사람이 모텔에 들어가는 게 무슨 의미인지 너무 잘 알았다.
이건 완전 특종감이다. 성한은 휴대폰을 무음으로 해놓고 두 사람의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특히 그중 한 장은 두 사람이 손을 잡은 모습이 고스란히 찍혔다. 그냥 봐도 분위기가 수상한데 마침 두 사람 뒤로 모텔 이름이 배경처럼 선명하게 찍혔다. 두 사람이 하려는 행위가 무엇인지를 암시하듯이….
****
성한이 보내준 카톡 사진을 보던 지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무리 봐도 이건 오빠가 분명하다. 자신에게 오빠가 둘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옆에 있는 사람은 오빠 병실에 같이 입원해있던 민재 아저씨였다. 성한이 보내준 사진은 여러 장이었다. 두 사람의 표정이 샐쭉하거나 뾰루퉁한 것도 있고, 활짝 웃는 것도 있지만 그냥 보통 친구끼리 짓는 표정은 분명히 아니었다.
두 사람 모두 행복해 보인다, 연인처럼.
그리고 성한이 가장 마지막에 보내준 사진을 보는 순간, 지은은 아니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자신의 오빠가 이럴 리가 없다고. 우리 오빠는 이런 사람이 아니라고.
까똑, 하는 소리와 함께 성한이 다시 메세지를 보냈다.
- 야, 네 오빠 게이인 거 알고 있었냐?
지은은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성한은 자신이 사진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읽음 표시가 되니까.
- 내가 끝까지 지켜봤는데 두 사람 결국 모텔로 들어가더라. 우와. 나 진심 소름 돋았다.
지은은 성한이가 보낸 문자를 노려보기만 했다.
- 이제 너 데리러 가지도 못하겠다. 네 오빠한테 붙잡혀 따먹힐까 봐 겁나서. 생각만 해도 오싹하다.
성한이가 보낸 문자를 씹어먹을 듯이 노려보던 지은이 휴대폰을 집어 던져 버렸다.
“지은아, 집에 있었어?”
밖에서 재은이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빨리 들어왔네. 학원 안 갔었어?”
재은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며 지은에게 물었다. 지은은 대답하지 않고 자신의 휴대폰을 노려보기만 했다. 재은은 아무것도 모른 채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장 봐왔어. 네가 그렇게 먹고 싶어 하던 한우 꽃등심 사 왔다. 아버지 오시면 구워 먹자. 아 맞다. 오늘 아버지 야간 근무시지? 깜박했네. 아버지는 내일 구워 드리고 우리끼리 먼저 먹자. 많이 사 왔으니까 실컷 먹어.”
그토록 노래를 부르던 한우 꽃등심을 사 왔다는 소리에도 지은은 아무런 대꾸조차 없다.
그제야 재은이 고개를 들어 지은을 바라보았다.
“지은이 너 무슨 일 있어? 표정이 왜 그래?”
지은이 여전히 입을 꽉 다물고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휴대폰만 바라보고 있다. 재은이 지은의 시선 따라 눈을 돌렸다.
“저런! 휴대폰 액정이 나갔네. 이거 서비스받아야겠다.”
재은이 지은의 휴대폰을 들고 액정을 터치하는 순간, 성한이가 보낸 문자가 주르르 화면에 떴다. 오늘 갔던 모텔을 배경으로 찍은 제 사진과 함께.
액정에 뜬 메시지를 확인하는 재은의 동공이 평소의 1.5배는 더 커졌다. 시간이 정지된 듯 모든 움직임이 사라진 느낌이 들었다. 심지어 집 안의 공기마저도 그 자리에 얼어붙은 느낌이다. 그 와중에도 움직이는 것은 벌벌 떨리는 재은의 손뿐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자꾸만 목이 말라 침을 삼키고 싶었지만 입안은 까슬한 모래처럼 물기 한 점 없었다.
“오빠 남자 좋아해?”
온기 없는 지은의 말이 충격으로 비틀거리는 재은의 마음을 쇠꼬챙이처럼 찔렀다.
“오빠, 민재 아저씨랑 그렇고 그런 사이였던 거야? 지난번 여행도 그래서 갔다 온 거고?”
“지, 지은아….”
“지난번에 병실 옮긴 것도 그래서였던 거야?”
지은이 연이어 내뱉는 물음이 기어이 재은의 가슴을 난도질하며 헤저었다.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머릿속만 새하얬다. 심장 뛰는 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오빤 왜 그렇게 이기적이야? 자기만 좋으면 다야? 아버지 생각은 안 해? 고생하는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되실 것 같아? 나는 어떨 것 같아? 앞으로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녀?”
“지, 지은아….”
재은의 눈에서 기어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변명이라도 하고 싶은데, 자신은 이기적이지 않다고 소리치고 싶은데, 이미 상처받았을 지은의 마음을 생각하니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한우 꽃등심 따위 오빠나 실컷 먹어.”
지은이 겉옷도 챙기지 않고 그대로 밖으로 뛰쳐나갔다.
“지은아!”
재은이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
밤 12시가 지났다. 저녁때 집을 뛰쳐나간 지은이가 아직도 들어오지 않았다. 재은은 벌써 두 시간째 온 동네를 쏘다니며 지은을 찾는 중이었다.
지은이 고3인데. 이러고 다니면 안 되는데…. 혹시라도 나쁜 녀석들에게 걸려 해코지라도 당하면 어떡하나 마음이 너무 불안했다.
오빠가 잘못했어.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나 보다. 좀 더 참을걸. 욕심내지 말걸. 내 행복 따위, 사실 진작에 포기하고 있었는데…. 눈물이 앞을 가렸다.
“지은아! 지은아!”
재은이 눈물을 흘리며 지은의 이름을 부르자 사람들이 쳐다보며 수군거렸다. 하지만 재은은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지은이만 무사히 돌아와 준다면.
나만 참으면 됐었는데. 그랬다면 우리 가족 모두 아무 일 없이 지낼 수 있었을 텐데. 지은이도 지금쯤 그 녀석이 좋아하는 한우 꽃등심을 먹으며 즐거워하고 있을 텐데.
밤공기가 꽤 쌀쌀했다. 저녁도 못 먹고 혼자 떨고 있을 동생을 생각하니 자꾸만 눈물이 났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자신은 왜 태어난 걸까….
재은이 버스 정류장 벤치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눈물만 흘리던 재은이 갑자기 벌벌 떨리는 손길로 폰을 꺼냈다.
띠리리링. 띠리리링.
신호음이 두 번 정도 가고 나서 경찬이 전화를 받았다. 경찬이 전화를 받자마자 재은이 울먹이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형, 지은이가 없어졌어요. 이 녀석이 집을 나갔어요. 저 때문에…, 못난 저 때문에…. 흑흑흑. 지은이 좀 찾아주세요, 형….”
“뭐야? 너 지금 어디냐?”
“우리 동네 버스 정류장요.”
“거기 꼼짝 말고 있어. 딴 데 가지 말고. 금방 가마.”
전화를 끊고도 재은은 한참을 울었다. 경찬 말고는 아무도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과 민재 때문에 이 사달이 났는데 민재를 부를 수는 없었다.
요즘 자신에게 쌀쌀맞게 대하는 경찬이었지만 지은이 없어졌다는 말에, 아니 자신의 흐느끼는 소리에 단숨에 차를 타고 달려왔다.
“어떻게 된 거야? 지은이가 왜 집을 나가?”
경찬의 말에 재은이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지은이가 집을 나간 이유를 얘기하자면 경찬에게도 커밍아웃을 해야 한다. 두려움이 엄습했다. 하지만 지금은 지은이가 제일 중요하니까 다른 생각은 말자. 재은이 눈을 질끈 감았다.
“제가, 제, 제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아 버렸어요.”
전직 격투기 선수였던 경찬은 남자답지 못한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다.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알며 역겨워하며 그대로 얼굴에 주먹을 날릴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니, 차라리 누가 자신을 좀 때려주면 좋겠다. 정신이 번쩍 들도록.
“하민재, 그 새끼랑 얽힌 일이냐?”
경찬이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물었다. 재은이 말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내 그럴 줄 알았다. 그 새끼는 네 인생에 도움이 안 된다고 내가 진작에 얘기하지 않았냐. 당장 그놈과의 관계부터 정리해. 알겠어?”
경찬이 재은을 바라보며 물었다.
안다. 자신도 안다. 민재 형과 자신의 관계는 누구에게도 용납받지 못하리라는 것을.
아무리 자신이 민재를 좋아해도, 민재 형이 아무리 자신을 아껴주어도, 동생과 아버지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까지 민재를 붙잡을 자신이 없었다.
“알아들었어?”
재은이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번 일이 터지면서 민재와 자신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재은은 자포자기한 심정이었다.
“네.”
경찬이 재은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잘 생각했다. 가자. 나는 이쪽을 찾아볼 테니 너는 저쪽을 다시 찾아봐. 찾으면 바로 전화하고.”
말을 마친 경찬이 재은과 반대방향으로 달려가더니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시계는 벌써 새벽 한 시가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
민재는 재은과 헤어지고 나서 집으로 돌아온 뒤 재은에게 평소처럼 잘 도착했냐는 문자를 보냈다. 평소라면 귀여운 웃음 이모티콘과 함께 금방 도착했다는 답장을 주었을 재은이 오늘은 아무런 답이 없었다. 읽었다는 확인 표시도 뜨지 않았다.
바쁜가? 오늘 저녁은 동생이 좋아하는 고기 사 간다고 하더니 고기 굽느라고 정신이 없나 보다. 바로 답을 받지 못해 아쉬웠지만 그런 것쯤 얼마든지 기다려줄 수 있다.
하지만 오늘은 뭔가 이상했다. 저녁 시간이 한참 지나서도 답이 없다. 문자 확인을 왜 안 하느냐는 문자를 두세 번 더 보냈지만 역시나 확인을 하지 않았다. 불안해진 민재가 전화를 했지만 전화도 받지 않았다.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아니면 휴대폰을 분실하기라도 한 건가? 혹시 분실한 것이라면 주운 사람이 전화를 받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민재는 계속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은 여전히 가는데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걱정이 된 민재가 결국 차를 끌고 재은의 동네까지 왔다. 재은의 집 앞까지 차를 타고 들어가려고 신호를 기다리는 순간, 뜻밖에 버스가 모두 끊긴 버스 정류소 벤치에 경찬과 나란히 앉아있는 재은의 모습을 보았다. 경찬이 재은의 등을 쓰다듬고 있었다.
“저 자식이!”
두 사람의 모습을 본 민재는 누군가 등 뒤에 얼음물을 부은 것만 같았다.
이 시각에 왜 재은이 경찬과 함께 있을까? 그리고 지금 두 사람의 모습, 유난히 친밀해 보인다.
경찬이 재은에게 뭐라고 얘기를 하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재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민재가 초조한 듯 핸들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이상하게 오늘따라 신호가 유난히 길었다. 신호등을 힐끗 쳐다본 민재가 다시 재은에게 눈길을 던진 순간, 재은의 손에 잡힌 낯익은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재은의 휴대폰이었다.
그걸 본 민재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얼음 칼로 심장을 저미는 듯 아릿한 통증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민재가 신호를 무시하고 불법 유턴을 하더니 그대로 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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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의 지루함을 파괴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