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사람들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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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준이가 고개를 돌린다. 흘리는 눈물을 보여주고 싶지 않기도했지만, 절절한 부장님의 마음이 뼛속까지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을 맞설수는 없었다.
".. 부장님! 제발요! 이제 그만하세요!
.. 석달도 안남는데, 이런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 이미 충분하니까..제발 이제 일어나세요!"
유부장은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몸을 일으킨다. 아늑한 눈으로 준이를 바라보더니, 손바닥에 반지를 쥐어준다.
"... 석달이라도.. "
그러면서 주머니에서 똑같은 반지를 꺼내서, 자신의 손가락에 끼웠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준이의 뺨을 손등으로 한번 어루만진다.
".. 하자..."
준이는 어렵게 고개를 가로 젓는다. 그러자 유부장이 쓴웃음을 짓는다.
"...그럼..간직하면서.. 서로...가끔...추억하자..."
유부장이 체념한듯 뒤돌아섰다. 준이는 선뜻 반지를 돌려주지 못한다. 그러는 와중에 유부장은 점점 멀어지는데, 준이의 마음은 오묘하기만 했다.
그때 유부장이 뒤돌아본다.
"... 이준이! 어깨펴! 죄지은 사람 마냥..
.. 그리고! 너 미국에서 보낸 시간들..
.. 마냥 허송세월한것만은 아닌거 같더라.."
.............
석달도 채 안 남은시간, 그 시간은 생각보다 아주 빨리 흘렀다. 이제 모두 다 각자의 삶으로 돌아간것이다. 준이는 가끔 후회했고, 가끔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떨땐, 석달이라도 같이 살았으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유부장은 그 이후로는 볼수가 없었다. 준이는 회사를 퇴사했고, 다른 회사를 들어가는건 엄두가 안나서 미국에서 했던 경험을 살려서 식당에 취직을 했다.
갚을돈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왜 장훈이형은 갑자기 돈을 갚지 않아도 된다고 했는지. 하지만 이 상황에 물어 보는것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약아빠진 소리를 듣더라도, 안갚아도 된다면 그냥 묻어두고 싶기도 했다. 게다가 병원비까지 갚아야 했다. 하지만 그것도 비슷한 이유로 잠시 묻어두기로 했다. 어느정도 안정이 되면 병원에 물어볼 참이었다. 현실은 여전히 녹록치 않았지만, 준이는 점점 한국사회에 그렇게 서서히 녹아들어가고 있었다.
준이가 거울을 보면서 옷매무새를 가다듬는다. 회색빛의 정장이 영 어색하다. 넥타이도 꽉 조여맨다. 왁스를 머리에 바르고 깔끔한 모습으로 단장을 마친다. 그러더니 입꼬리를 올려서 웃는 연습을 한다. 몇번 하고나니, 썩 어려운일도 아닌지 미소도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리고 유부장이 준 반지가 끼워진 목걸이를 하고는 셔츠 속으로 숨겼다.
자동차를 타고 네 식구가 간다. 현이는 이미 결혼식장에 가있을것이다. 운전은 영우가 한다. 앞좌석에는 준이 아버지가 앉았고, 뒷자석에는 석이와 엄마 준이가 앉았다. 제법 가족같은 모습이 그럴싸하다. 영우는 중간중간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제대로 수행한다. 영우의 재밌는 한마디에 나머지 세사람이 크게 웃기도 했으니, 성공이라고 할수있겠다.
식장에 도착하자, 준이는 식구들을 먼저 보낸다. 현이의 결혼식장은 2층이다. 준이는 1층 화장실에 가서 다시 한번 거울을 보고 어디 흐트러진데는 없는지 모습을 몇번이고 확인을 한후에, 큰 호흡을 몇번이고 쉬어본다. 그리고 웃는 연습도 빠지지 않고 한다.
드디어, 준비가 되었는지 두손으로 양복 깃을 잡고 쫙 내린후에 식장을 향해서 걷는다. 계단을 올라서, 코너를 돌자 멀리서 신부측 부모님이 보인다. 그런데 준이가 순간 몸을 돌리며 걸음을 멈춘다. 그러더니 다시 좀전의 루틴을 그대로 연습을 몇번하더니, 걸음을 옮긴다.
유부장은 정신없이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다. 깔끔한 곤색 정장이 윤기가 난다. 머리는 다시 흰색으로 점점 물들어 있다. 아무것도 안발랐어도 정갈한 머리스타일. 동그란 무테 속에 눈이 웃을때마다 사라진다. 흰 장갑을 끼고서 일일히 손님들을 접대하면서 안부도 빼놓지 않는다. 중가중간 옆에 선홍빛으로 물들인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있는 아내의 컨디션도 확인을 한다. 유부장은 일반적인 신부측 아버지, 그 또래의 중년남성 같았다. 얼마전 아들뻘의 남자에게 사랑을 고백했던 남자처럼은 도저히 보이지가 않았다.
준이는 반쯤 그곳을 향해 걷다가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춰서 그 모습을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멈춰서있는 자신을 깨닫고, 다시 걸음을 옮겨서 신부측 아버지에게로 갔다.
유부자은 준이를 보며 웃으며 악수를 한다. 전혀 흐트러짐이 없는 유부장과의 그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간다. 준이도 연습한 그대로 그 시간을 맞이했다. 둘의 재회는 석달이 조금 덜 걸렸지만, 만남의 순간은 단 1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석이와 영우, 그리고 효진과 현이는 준이에게 무슨일을 맡겨야 할지 고민이었다. 유부장이라는 단어조차 입밖에 꺼내는것도 금기시 되었기에, 결혼식장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 트려놓아야만 했다. 무언가는 시켜야했다. 결혼식 축의금을 받는일은 신부측 아버지와 너무 가까이 있어서, 영우와 석이에게 부탁했다.
준이는 유부장과 악수를 나누고, 멀찍이 복도끝에 서있는다. 혹시 급하게 축의금만 주고 식사만 하고 가려는 손님에게 식당을 알려주기 위해서다. 때마침 식당가는길이 복잡하기도 했다.
이윽고 결혼식이 시작된다. 모두들 신부와 신랑에게 눈이 가있다. 준이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시선의 끝은 늘 유부장이었다. 하지만 유부장의 시선은 준이에게 머무르는 법이 없었다. 그냥 너무도 자연스럽고, 자상한 신부의 아버지같아 보였다.
식이 어느정도 마무리가 되자, 준이는 재빨리 원래 서있던 복도 끝에 서있는다. 때때로 식당을 못찾는 손님들에게 위치를 알려준다. 한참을 열심히 웃으면서.
포토타임이 되어서야, 신부와 신랑을 기준으로 가족들이 모두 섰다. 영우도 한자리를 차지했다. 준이는 자신도 모르게 유부장을 힐끔 훔쳐봤다. 하지만 유부장은 묵묵하게 미소를 연신 가족들에게 보낼뿐이었다. 이후에 식당에서 밥을 먹을때도, 모든 결혼식 행사가 끝날때까지 유부장은 순식간에라도, 단연코 준이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다만 이상한건 끝까지 흰 장갑을 벗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피로연은 근처 술집을 빌렸다. 이것도 준이가 결혼식에서 맡은 일중에 하나였다. 준이는 미리 그곳에 가서 빠진건 없는지, 준비는 제대로 되고 있는지 확인을 하던 참이었다. 그때 준이의 전화기가 울렸다. 장훈이형이었다. 혹시 돈을 갚으라고, 마음이 변한건 아닌지 내심 걱정이 들었다.
".. 어.. 형.."
".. 어.. 준아.. 잘 지내지?"
일상적인 안부를 시작으로, 장훈은 말도 안되는 소리를 늘어 놓는다. 준이는 한쪽 구석에 안보이게 자리를 잡고 믿기지 않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 말 하지 말라고는 했는데..
.. 그래도 말 해야 할거 같아서.."
".. 뭔데?"
갚아야할 돈은 산더미인데, 준이의 눈동자가 커진다.
".. 니가 나한테 갚아야 할 돈..
.. 그거 사실 최사장님이 갚아줬어.."
".. 어?"
".. 그때 갑자기 상우가 전화가 와서..
... 최사장이 내 전화번호를 물어 본다고..
.. 알려줘도 되냐고 그러더라고.. "
준이는 한글자도 빠짐없이 모조리다 듣고있는 중이었다. 문득 한국에서 최사장에게 처음 연락을 받고 좋았던 때가 떠올랐다. 하지만 상우의 번호만을 물어보고 끊는 최사장이 무척이나 서운했었는데, 그 이유가 이런것이 였다니.
".. 내가 워낙에 최사장을 싫어했잖아..
.. 너 이용해 먹는다고..
.. 난 무슨 일인가 싶어서.. 그러라고 했지.."
장훈이 말을 계속 이었다.
".. 그러고 얼마후에 최사장한테 전화가 왔어..
.. 너희들 일 알고 있다고..
.. 너가 나한테 얼마나 빌린거냐고.. "
준이는 가슴이 메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 자기가 갚아주겠다고..
.. 대신 절대로 준이에게 얘기 하지 말라고..
.. 근데 액수가 또 크기도 하고..
.. 그동안 나도 최사장 뒤에서 욕한게..
... 좀 미안하기도 하고.. 아무튼 맘에 좀 걸려서.."
".. 근데 왜 이제 얘기해!"
준이가 화들짝 소리를 쳤다. 그동안 계속 힘겹게 연락을 무시해왔는데, 어떻게 해야할지 생각이 복잡해졌다.
이제 좀 모든걸 잊고 새로 시작해보려던 참이었는데.
".. 미안하다.. 나도 계속 고민했어..."
그러다, 준이가 어떤 감정이 들었는지 순간 울컥거린다. 그렇게 일단 전화를 끊으려는데, 갑자기 장훈이 다시 입을 연다.
".. 근데 너 소문 들었어? 최사장 이혼한다는거...
.. 이혼하면 완전 빈털털이 되는것 같던데.."
"... 형.. 일단 내가 다시 전화할께.."
준이는 전화를 끊자마자, 곧 바로 최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
그 시각 최사장은 한국에 거의 도착을 하는중이었다. 이제 한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설레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최사장은 애써 남은시간 눈을 붙혔다. 그런데 생각이 애먼 사람을 자꾸 과거로 돌려놓는다.
준이가 미국을 떠나고 와이프는 자주 그런 얘기를 했다.
".. 내가 당신 감정 쓰레기통이야?
.. 요즘 왜그래?
.. 가게 직원들한테도 퍼뜩하면 화내고!"
그러면 축 쳐져있는 나를 보고 얘기했다.
".. 차라리 솔직하게 말해라..
.. 당신 양아들 걱정되서 미치겠다고..
.. 보고 싶어서 죽겠다고... 차라리 갔다와!
..맨날 전화기 붙잡고..전화를 할까 말까..
..안절부절하지말고..보는 내가 답답하다.."
준이의 생일날은 원래부터 집에 일찍 보낼 생각이었다. 생일을 축하해줄 계획이었다. 허락을 맡아뒀기에, 가게 클로징도 와이프에게 부탁한채로 준이를 집으로 데리러 갔었다. 내가 사준 옷을 입고 나오는 준이가 사랑스럽게 빛이 났다. 서 기분이 더 좋았다. 그러나 축 쳐져있는 어깨가 맘에 걸렸다. 그래서 실없는 농담을 더 하면서, 준이의 기분을 맞추었다.
준이는 결국 먼저 술에 취해서 쓰러졌다. 집으로 가는길, 대리 운전기사가 운전하는 차의 뒷자석에서, 준이의 얼굴을 무릎에 앉혀놓고, 가슴을 계속 토닥였다. 미안해서. 축 처져있는 어깨가 꼭 내 어깨와 비슷한거 같아서 우리의 상황이 어떤 면에서는 안타까웠다. 대놓고 물을수는 없었지만, 분명 나를 아버지 이상의 감정으로 좋아하는것을 수없이 느껴왔기 때문이었다.
준이를 침대에 눕히고 돌아서는데, 준이의 잠꼬대에 그만 중심을 잃고는 준이의 몸 위에 엎어졌다. 낯선 살갖들이 옷을 뚫고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밑에 부분이 점점 묵직해짐을 깨닫고는 벌떡 일어났다. 그런데 준이의 청천벽력같은 소리들.
한참을 차에서 고민했다. 그러다 준이의 생일선물을 들고 다시 집으로 들어가서 북엇국을 끓여놓고 나왔다. 속은 푸는데는, 미역국보다 북엇국이 훨씬 나을거 같았다. 그러고 집으로 가는길에는 서글픈 마음에 눈물까지 흘리는 나를 보고, 처음으로 소름이 끼쳤다. 이건 절대 부자지간이 느낄수 없는 감정이구나 싶어서였다.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마지막 월급을 주면서도 준이에게 담담하게 굴었다. 그러고 나자, 준이는 정말 미국을 떠났다. 항상 눈만 두면 있던 자리에 준이가 없으니, 섭섭했다. 그리고 괴로웠다. 괜히 전화기를 바라보는 일이 많아졌다. 그리고 지난날 준이와 나눴던 톡을 보는 일이 많아졌다. 통화버튼을 누르려고 손가락을 많이 가져다 놓기도 했지만, 매번 실패였다.
그러다 듣던 준이의 소식. 미주내 한인사회에서는 소문은 특히나 빠르게 흐른다. 준이가 투자한 식당의 동업자가 잠적을 한것이었다. 나는 준이가 그 식당을 투자하기 위해서 장훈이에게 돈을 빌린걸 알고 있었다. 또 하필 내가 준이를 이용하고 있다고 욕하던 놈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준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공식적인 구실이 생겨서 좋기도 했다. 하지만 대놓고 물어보면, 준이가 눈치를 챌 수도 있을것 같았다. 그래서 장훈이의 번호를 알고 있을만한 사람, 상우를 떠올렸다. 준이에게 전화할 날을 정하고서 얼마나 떨렸는지.
마음과는 다르게 통화를 길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반가워 하면서도, 무언가 모르게 애잔함이 묻은 목소리에, 자세한 이유를 알고 싶지 않아서 그냥 빠르게 상우 전화 번호만 묻고 끊었다. 그러고 얼마나 후회를 했는지.
그러다 듣게된 준이의 술에 취한 목소리. 그리고 암이라는 소리에, 그날 바로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그리고 찾아간 곳에는 웬 중년의 남자가 애잔한 눈빛으로 준이와 함께 서 있었다. 웬지 불길했었다.
그러고 만난 준이. 그 동안의 마음고생이 저절로 씻겨나가는 기적을 맛봤다. 그러나 아파하는 준이를 다른 중년의 남자가 사랑한다는 소리를 식당에서 들었을땐.. 그리고 애가 탔다면서 내옆에 있는 동안,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그 순간에는 사실 쥐구멍이 있다면, 그 곳에 숨고 싶기도 했다.
어찌됐든 준이를 데리고 도망가야 할것 같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가는데, 준이가 그 남자가 한말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것 같았다. 그래서.. 그래서.. 내 핸드폰과 준이의 핸드폰을 던져 버렸다. 그리고 그냥 냅다 달렸다.
많은 생각들과 함께, 어렸을적 한국에서 외롭게 지냈을때 밥까지 자주 챙겨주셨던 바닷가 할매에게 갔다. 할매는 나이를 자셔도, 여전히 지혜가 넘치는 행동을 했고, 그런 소리를 늘어 놓았다.
그러고 준이와 같이 맞은 첫날밤. 심장이 두근댔다. 그럴 나이도 이미 훨씬 지났는데, 어쩌면 이건 독약일수도 있는데. 아픈 애를 두고, 나는 이기적이게 내 감정이 더 걱정이 들었다. 걱정이 들면 들수록, 육체는 정신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몸을 자꾸 준이에게 가져다 댔다. 그러자 더.. , 그때 준이의 침대에서 몸이 포개어 졌을 때처럼, 아래부분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그냥 느끼고 싶기도 했다. 그러고, 눈을 감고 가만히 있는데 입술에 감촉이 느껴졌다.
그러자 욕정이 강하게 들었다. 바로 눈을 뜨고 본능을 따랐다. 내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준이의 입술을 훔쳤다. 달콤하고 쌉싸름했다. 단맛에 어쩐지 쓴맛이 느껴졌다. 그래서 단맛만 느껴지라고 열심히 계속해서 했다. 준이의 그것이 단단해지면서 나의 것과 맞닿자, 나는 만져주고 싶었다. 그래서 키스를 멈추고, 물어 봤지만 준이는 싫다고 했다.
그러더니, 이어지는 한번도 느껴 보지 못한 황홀한 기분이 이어졌다. 다음날 어떻게 만날지 걱정도 들지가 않을만큼...
그런데 다음날, 쓰러진 준이를 보고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을까. 겨우 살아온 준이를 병원에 데려 가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충분 하다는 준이의 미소를 보면서.
웃지만, 실은 웃고 있지 않은 그 미소를 보면서.
용기가 없는, 내 자신이 미웠다. 거기다 어떻게 알고 왔는지 온 와이프에, 병원앞에 기다리던 그 중년의 남자. 모든것은 원래 무너질 예정이였다는 듯이 차례로 무너졌다.
준이가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 날밤, 와이프는 한국의 집에 보내놓고 거기서 잠에 청하는데, 그 중년의 남자가 준이와 속닥거리더니, 병실을 나갔다.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자기 딸이 준이 동생이랑 결혼을 한다는데, 자기가 그 형을 사랑한다니, 분명 정상은 아닐듯 싶어서 따끔한 소리를 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한 마다디도 지지 않은 이 남자.
그때 딱 처음으로 느꼈다. 그의 눈빛을 보고.
정말 다 버릴수 있냐고 묻는 질문을 하는데, 그 중년의 남자는 준이를 위해서라면, 정말 뭐든지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래서 맞는 소리를 해줬는데도, 그 사람은 끄떡없이 보였다. 그러자 화가 났다. 왜 나는 저만큼의 용기가 없는것인가. 먹고 사는 문제보다, 저 따위 나이 먹고서 느끼고 있는, 혼재된 감정에 충실하고 있는 그 중년의 남자가 위대해 보였다.
그리고 전해진 어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소리. 급하게 미리 전화기를 전해준 번호로 문자만 하나 달랑 남기고는 계속 현명했지만, 비겁하게 살았다. 준이의 소식은 석이씨가 가끔 알려줬다. 하지만 증상은 날로 심해졌다. 준이가 보고 싶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서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연락을 하고 싶었지만, 이제 연락을 하려면, 책임을 질 준비가 되어있어야지, 아니면 이제, 더이상, 괜히 더 힘들게 할것만 같았다.
와이프에 잔소리는 준이의 수술이 끝나고 미국에 돌아와서도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다시 시작이 되었다.
어느 한 날을 시작으로, 나는 준이에게 전화를 했다. 이마도 술을 많이 마셨을꺼다. 그러나 받지 않은 전화. 아무리 문자를 보내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그러자 자연스레 나는 무엇을 해야할것이 명확해졌다.
그래서 그밤, 와이프에게 얘기했다. 이혼하자고. 그러자 와이프가 대뜸 그렇게 묻는데, 나는 갑자기 모든 두려움이 다 사라져버렸다. 준이와 함깨 하면, 괜찮을것 같았다.
".. 저희 비행기.. 잠시 후면, 인천! 인천 공항에 도착 합니다..."
최사장은 입국 심사대를 지나자 마자, 준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가고, 이윽고 그토록 고대하던 준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 여보세요?"
...............
피로연에 초대된 사람들은, 정말 가까운 친구이거나, 사이가 좋은 친척들이었다. 특히한것은 유부장이 거기 있었다는 것이었다. 준이는 어느 정도 세팅을 마친 후에는 멀리서 구석진 자리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준이의 핸드폰이 울렸다. 최사장이라는 문구가 뜨자, 준이가 정신없이 핸드폰을 들었다. 그러자 한없이 따뜻할것만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 여보세요?"
".. 야.. 비싸다.. 비싸..
.. 너는 왜 그렇게 연락이 안되노?"
가슴이 뭉쿨해지는건 시간문제다. 절절한 목소리에 모든 힘들었던게 녹아없어 지는것 도 같다. 그러더니 진짜 묻고 싶었던걸 묻는다.
".. 어떻게 아셨어?"
".. 뭘?"
최사장이 정말 놀란 눈치로 되물었다. 목적어가 없었기에 괜히 긴장이 되었던걸까.
".. 장훈이형한테 돈 빌린거.."
".. 아이.. 인간이 말하지 말라고 하니깐.. 그새 그걸 또..
.. 하여간 요즘것들은 입에 자물쇠를 채울줄 몰라.."
".. 어떻게 알았냐고.."
"..인간아..내가 그걸 모르겠나?
미국에서 한국사회가 얼마나 좁노?
다 알지... 내가..."
".. 그래서 그걸 다 갚아주셨어? "
" 그럼 어떡하노? 니가 그래놨는데..
그걸 보고 가만히 있나? 해결을 해줘야지..."
준이는 고개만 푹 숙이고 듣고있다.
" ..다 늦게 한국에 갔는데..
..니가 구하면, 얼마나 좋은 직장을 구하겠노..
..웬만큼 영어는 하지만.. 네이티브 만큼은 아니잖아.... ..분명 혼자서 끙끙대고 앓고 있을건데..
..어떻게 모른척을 하냐고... 우리사이에..."
준이의 마음이 더 울컥거린다.
우리사이라니. 우리가 뭐 얼마나 대단한 사이라고. 미국에서 있던 준이의 시간은 늘 최사장 중심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밥을 먹자고 하면, 밥을 먹었어도 토를 해서 속을 비우면서까지 같이 밥을 먹곤 했었다. 준이는 이상하게 눈물이 난다. 최사장은 단번에 준이의 흐느낌을 단번에 알아챈다.
".. 아이고.. 완전 베이비다.. 베이비..."
".. 갚을게요.. 한푼도 빠짐없이..."
".. 뭘 갚어 인간아.. 이제 같이 있을건데..."
".. 갚을거야.. 무슨 한이 있어도..."
그렇게 말을 해놓고, 준이가 잠시 고장난다. 마지막 최사장의 말이 귓가에 계속 맴돌았기 때문이다.
".. 내가 왜 그동안 모른척 했는지 아나? "
아무말이 없는 준이에게 최사장이 다시 묻는다.
".. 왜그런지 아냐고? "
준이의 귓가에는 최사장의 미약하면서도, 떨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 ..그땐 내가 가정도 있지.. 와이프도 있지...애도 있지..
그리고 인간아 나는 원래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그런 감정이 헤깔릴수밖에 없다고..
.. 그래서... 알면서 모른척 했던거라고...
..확실한 결심이 안서면, 접근하면 안되지..."
"..봐라! .. 내가 니 마음을 알고 접근을 하면..
..어떻게든 책임을 져야 할꺼 아니냐..."
"..남자는 책임질 생각이 없으면, 접근을 하면 안돼...
..나는.. 그렇다고..
..내가 지켜야될 사람이다 아니다
...정확히 구분해서 움직여야 된다고...
... 그게 남자야.. 알았나? "
준이는 어리둥절 모든 얘기를 듣고있었다. 최사장이 무슨 얘길 하는지 머리속으로 정리가 되지 않았다.
".. 여보세요? 듣고있나? "
".. 무슨 소리를 하시는거야?"
".. 이해가 안되는데.. 지금..."
준이가 겨우 말을 내뱉는다. 그러자 최사장이 굵게 목소리를 내며 진심을 전한다.
"..나.. 다 버리고 왔어.. 너랑 같이 살라고..."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들이 쏟아진다. 무너져 내리는 가슴과는 다르게 심장은 자꾸만 빠르게 뛴다. 염치없이 자꾸만 흐르는 눈물. 아무리 닫아도 계속 물이 세는 수도꼭지처럼.
".. 그게... 무슨 소리예요?"
".. 아.. 왜 인간아.. 너가 항상 얘기 했잖아..
... 사장님.. 둘이 오붓하게 있고 싶어요.."
준이가 울음을 멈추고 독사처럼 쏴 붙인다.
"..내가 언제!!??"
"..아.. 인간아 눈에 다 써있는데.."
"..만날때마다 어? 나 좀 사랑해주세요..
... 나 사장님 많이 좋아해요..같이 있고 싶어요...
..사장님꺼 만져보고 싶어요.."
".. 그래서 그 날도 니가 날 유혹한거잖아?"
준이는 웃는지 우는지 그 어디 중간 경계에서 헤메이고 있는것 같았다.
".. 장난이면 당장 멈추고..
.. 장난이 아니어도 당장 멈추세요..."
진지한 준이의 목소리에 몇번, 최사장도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 그래.. 장난인데, 장난이야..
... 그런데 넌 다 늙은 유부남 좋아 했으면서
... 이런거 까지 생각을 안해봤노? "
생각? 그런건 안해봤다. 어차피 남자는 여자를 좋아하니까. 내가 본 남자들은 성별을 불문하고 다 그랬다. 그래서 미처 생각 해본적은 없었다. 그냥 싱상속의 의미없는 사랑일 뿐이었다.
"..그니까... 얻는게 있으면 잃는게 있는거라고..
..지금은 너하고 나만 생각하라고...
...어떻게 다 행복하게 해피엔딩만 있노? "
"... 우리가 살면서 앞으로 갚아 나가야할 빚이라고
...생각하라고... 앞으로 많은 시련이 올거라고..
...그때마다 벌 받는구나.. 생각하면서 살자고..."
"... 이 정도 마음도 안먹고 나를 좋아했노? "
한참을 듣고 있던 준이는 믿기 않는듯 표정이 복잡해 보였다.
".. 언제까지 나 공항에 세워둘래?
.. 너 어디야? 보고싶다..
....내가 지금 거기로 갈게..."
그리고 준이가 어렵게 입을 열려하는데, 그때 최사장과 준이의 핸드폰에 문자 알림이 동시에 울린다. 준이가 놀래서 수화기를 멀리 떨어트려 놓고, 주위를 보는데, 여기저기서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동영상이 전송되었던 것이었다.
유부장을 알고있는 스처 지나가는 사람부터, 친구 회사 동료, 친척 ,사촌, 육촌에 옷깃만 쳐도 어느 이유에서건, 유부장의 전화번호를 가지고 있다면, 그 핸드폰은 여지없이 소리를 냈다. 효진은 기다렸다는 둣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문자를 받은 사람들은 그 동영상을 눌렀다. 준이도, 최사장도..
유부장은 카메라 앞에서 많이 긴장된 모습을 보이더니, 이내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유승만입니다."
승만은 깔끔한 검은색 목티에 정장을 입고서는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자신을 소개한다. 그리고 흐뭇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간다.
".. 갑자기 이런 영상을 찍게 되서..
.. 아마 놀라셨을겁니다.
.. 그렇지만 제가 알려야 될 일이 있습니다."
"..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 가식이 없고.. 어떨때는 서투르기도 하지만..
.. 참 착합니다.. 본인을 희생하면서도..
.. 남들이 행복하다면 괜찮다고 하고요..
.. 본인의 상처는 늘 끙끙 동여메면서.."
유부장은 목소리가 조금 잠기는지,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아마도 바닷가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라서였나보다.
".. 제 눈에는 아주 이쁘고, 사랑스럽습니다.."
해맑게 유부장이 카메라를 보며 웃었다. 아마도 준이에게 보내는 미소리라.
".. 그런데요.. 그 사람이 남자입니다.. "
영상을 보던 많은 사람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손으로 입을 막는 사람, 중간에 영상을 꺼버리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 네..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게이 맞습니다.."
".. 가정도 꾸려서, 자식 결혼까지 시킨 사람이..
.. 다 늙어서 뭐하는 짓이냐고..
.. 불쾌해 하실수도 있겠습니다..
.. 또는 이게 가능한 일이냐
.. 의문을 가지는 분도 계실겁니다.."
".. 저도 이사람을 만나고..
..이게 가능한 일인지 알았습니다.
..보고만 있어도 좋고, 웃음이 납니다."
" ..남자한테.. 이래도 되는건가..
.. 수없이 물어보았습니다.
...다른 감정은 아닌지 매일 확인했습니다.
.. 헤깔려서 그러는건 아닌지...
..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명확해졌습니다.."
"..네.. 확실하게 알았습니다.
.. 그 사람이 없이는 세상이 괴롭겠구나...
.. 살아도 사는게 아니겠구나..."
승만이 차마 뱉지 못했던 숨을 내 몰아 쉬었다. 그 당시 동영상을 찍고 있던 효진도 뭉클함에 같이 가슴을 같이 쓸어 내렸다.
".. 그래서 여러분들께 알려드립니다.
저 유승만은 이제 남자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혹시나 저를 사모하고 계셨던 여성분들에게는
..심심한 위로를 보냅니다. "
위트도 잊지 않았다. 유부장은 전혀 초조한 기
기색이라고는 찾아 볼수 없을만큼 편안해 보였다.
".. 욕하실 분들은 욕하셔도 괜찮습니다.
.. 저를 안보고 싶으신 분들은
.. 번호를 지우셔도 다 괜찮습니다.."
" ..불편하실겁니다.. 아마 대부분은..
.. 다만..너그러우산 분들은..
.. 어디서 저를 만나면 어깨도 다독거려주시고.. .. 어렵사리 낸 용기를...
... 응원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 딸애와 처는..
..저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기로 했습니다.
..정말 고마운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고통받으시는 모든 게이분들..
..힘겨워 하시는 분들...힘 내시길 바랍니다. "
"..아무쪼록 저는 저의 길을 묵묵히 가겠습니다.
..여러분들도 화이팅하시길 바랍니다."
".. 마지막으로.."
유부장이 카메라를 지긋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 이준이..." 그때 삐 소리가 들린다. 사람들은 누구를 부르는지 알지 못했다.
".. 이름 부르면 어떡해?"
효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아.."
유부장이 머쓱해 한다. 그리고 다시 목을 가다듬고는 꼭 준이가 앞에 서있는것처럼 카메라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 그냥 나는 용기를 냈다..
.. 이만큼 용기를 낼수 있었던것도..
.. 다 니 덕분이고..
.. 난 항상 여기 있을테니까..
.. 언제든지 달려온나.."
".. 사랑한데이.."
그렇게 동영상은 끝이 났다. 유부장은 그제서야 흰장갑을 벗는다. 그러자 그의 손에는 준이에게준 똑같은 반지를 끼고 있었다.
준이는 구석에 앉아서, 최사장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리고 때마침 유부장이 피로연에 도착했다.
............
글이 좀 늦었습니다..
갈피를 잡기가 쉽지 않군요..
아무쪼록 인기는 없지만, 끝까지 읽어 주신 분들에게 감사 드리고..
다음화가 마지막회가 될거 같습니다.
시간이 좀 걸릴수도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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