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중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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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첫인상 (2)
남자의 말이 묘하게 재은을 자극했다. 재은이 남자의 두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럼 바로 나가시면 되겠네요. 안녕히 가세요.”
재은이 쌀쌀맞게 말을 내뱉자 조수석에 앉은 여자가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머 어머. 어쩜 쟤 말하는 것 좀 봐. 뭐 이런 데가 다 있어?”
여자가 불쾌한 기색으로 소리쳤지만 남자는 짓궂은 미소만 지을 뿐,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실력 없는 변두리 공업소라고 인정하나 보지?”
남자가 능글맞게 웃었다. 그러자 재은은 참지 못하고 욱하는 마음으로 말했다.
“누가 인정해요? 변두리에 있다고 실력도 없다고 누가 그럽니까?”
재은이 화를 내자 남자는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아, 그러니까 실력은 있다? 그럼 오케이지 뭐. 좀 봐줘.”
남자가 대뜸 재은에게 키를 던졌다.
재은은 엉겁결에 키를 받고 남자를 한참 노려보았다.
하지만 남자는 재은의 눈길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하나를 또 꺼내 물었다.
“공업소 안은 금연입니다. 피우시려면 길가로 나가서 피시죠.”
딱딱하기 그지없는 재은의 말에 남자는 재밌다는 표정을 짓더니 물고 있던 담배를 다시 담뱃갑에 집어넣었다.
재은이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았다. 그러자 조수석에 앉아있던 여자는 오만상을 찌푸리더니 얼른 내렸다. 차 문을 쾅 소리 나게 닫더니 남자 곁에 가서 섰다.
“차에 기름 냄새만 배었다 봐라.”
여자가 재은을 흘겨보며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여자는 수천만 원은 할 듯한 밍크코트를 입고도 추운지 발을 동동 굴렀다.
“어떻게 이상한지 주행을 좀 해야겠는데 타시겠습니까?”
재은의 말에 가시가 돋아 있었다. 재은이 사근사근한 성격은 아니더라도 이 정도로 까칠하지는 않은데 이상하게도 오늘따라 말이 곱게 나오지 않았다.
남자는 재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수석 문을 열고 옆에 탔다.
“내 차가 워낙 민감해서 말이야. 살살 다뤄야 해. 온몸이 성감대라 조금만 잘못 터치해도 서버리거든.”
남자가 재은을 바라보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아, 선다는 말에 오해하지 말아. 차가 선다는 말이니까.”
이 사람, 지금 초면인 나한테 19금 드립을 치는 건가?
재은은 아니꼬운 생각에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잠시 눈으로 핸들과 미션의 위치를 파악한 다음, 곧 익숙한 손길로 후진했다.
남자가 입가에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띠고 손가락으로 차 문을 톡톡 쳤다.
“여자 좀 울려본 솜씨로군. 몇 명이나 울려 봤어?”
“고객님, 업무 외적인 얘기는 삼가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남자의 말에 재은은 화가 나서 후진 중에 가속페달을 밟았다. 갑자기 차가 ‘붕’ 굉음을 내며 뒤로 튀어 나갔다. 차가 예민하기는 했다. 살짝 밟았을 뿐인데 순간 가속도가 대단했다.
차가 갑자기 뒤로 튀어나가자 여자가 놀라서 소리를 꽥 질렀다.
“운전 조심해서 해. 그 차가 얼마짜리인지나 알아? 당신 월급으로는 평생 벌어도 못 갚아.”
정말 제대로 진상이군. 재은은 여자의 말이 듣기 싫어 창문을 올렸다.
“좀 시끄럽기는 하지?”
남자가 동의한다는 듯 조수석 쪽 창문도 같이 올렸다.
그 순간, 언뜻 룸미러에 비친 남자의 모습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듯했다. 오뚝한 콧날에 남자다운 턱선, 장난기와 우수가 한데 섞인 듯한 검은 눈동자.
재은은 자신도 모르게 다시 룸미러 속 남자를 곁눈질했다. 아까 먹은 라면이 체한 건지 가슴이 스멀스멀한 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현기증마저 살짝 나는 듯했다.
재은은 얼른 시선을 돌려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굳은 표정이 더 경직되었다.
재은의 공업소가 위치한 곳은 차량 이동이 많지 않은 작은 도로변인 데다 눈까지 조금씩 흩날리기 시작해서 길가는 무척 한산했다. 재은은 기어를 바꾸며 이삼백 미터 직진했다가 차를 돌려서 다시 정비소를 되돌아왔다.
‘쳐다보지 말자. 쳐다보지 말자.’
운전하는 내내 주문을 외듯 다짐했건만, 마법에 걸린 심장은 그런 재은의 생각을 비웃듯이 재은의 눈길을 다시 룸미러로 이끌었다.
편안하게 좌석 목받이에 머리를 기댄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남자의 얼굴이 옆 창문에 그대로 비쳤다. 패션잡지를 찢고 갓 튀어나온 모델 같았다.
슬그머니 룸미러를 쳐다보던 재은이 그만 남자와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남자가 씩 미소를 지었다. 매력적인 얇은 입술 사이로 가지런하고 하얀 치아가 드러났다.
“내가 좀 잘생기긴 했지?”
재수 없는 자식.
남자의 말에 재은이 급제동을 하고 말았다. 재수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들킨 것이 부끄러워서였다.
차가 정비소 앞에서 ‘끽’ 소리를 내며 급정차했다.
그 소리에 놀라 양 사장과 호식이, 김 양이 한꺼번에 밖으로 튀어나오고, 경찬마저 사무실 안에서 고개를 들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밍크코트를 입은 여자가 팔짱을 낀 채 사나운 표정으로 재은을 노려보았다. 옆에 있는 남자는 무엇이 그렇게 즐거운지 입가에 계속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속도를 내며 주행한 것이 아니기에 두 사람의 몸은 앞으로 가볍게 출렁이기만 했으나 재은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젠장 할. 쪽팔리게 훔쳐보는 걸 들키다니.
이럴 때는 일단 무조건 오리발을 내밀어야 한다.
재은이 어느새 다시 얼음 나라 왕자가 되어 옆자리에 앉은 남자에게 슥 고개를 돌렸다. 움직임이 어찌나 기계적인지 누가 봤다면 로봇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저는 고객님 얼굴이 아니라 교통상황을 봤을 뿐입니다.”
재은의 말에 남자가 창밖을 보며 피식 웃었다.
“교통상황? 무슨 교통상황?”
그 말을 꺼내고 보니 도로변에는 차가 한 대도 없었다. 사실 아까부터 도로가 매우 한적해서 교통상황이라 할 만한 것도 없었다.
젠장, 엿. 됐. 다.
갑자기 머리 위로 펭귄 열 마리가 일렬로 지나갔다. 자신을 마구 비웃으며.
재은은 어색한 상황을 모면하고자 일부러 더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오토미션은 이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점검을 해봐야 알겠지만 그것보다는 출력이 의심스럽군요. 장거리가 아니라면 이 속도로 가시는 것은 문제없을 듯합니다. 여기서 점검해 드릴 수는 있으나 부품을 교체해야 할 수도 있으니 외제차 전문 정비소로 가시는 것을 권해드립니다. 저희는 외제차 부품이 없어서요.”
할 말을 다한 재은이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서 내렸다.
이쯤 얘기하면 알아들었겠지.
그런데 조수석에 앉은 남자는 가타부타 아무 말도 없었다.
정비소 마당에 서 있던 여자가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걸어오더니 남자에게 짜증을 냈다.
“자기야, 추워 죽겠어.”
하지만 남자는 차에서 내리더니 여자의 말에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재은을 불렀다.
“당신이 봐줘. 여기에 맡기겠어.”
남자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재은은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가 이런 허름한 동네 공업소에 외제차를, 그것도 국내에 몇 대 없는 차를 맡기겠는가?
남자의 말에 재은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남자는 여전히 세련되고 거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설마 인제 와서 못하겠다고 발뺌하지는 않겠지?”
재은은 그 순간 남자가 무척 얄미웠으나 자신이 한 말도 있고 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차에 올랐다.
“누가 못한다고 했어요? 무슨 차라 하더라도 원리는 다 똑같습니다, 고. 객. 님.”
재은은 입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는 마지막 단어를 애써 힘주어 말하며 남자를 한차례 노려보았다.
여자는 그 모습에 어이가 없다는 듯 신경질을 내며 소리쳤다.
“어머, 쟤 눈빛 저거 뭐니? 아무리 변두리 정비소라도 그렇지, 뭐 이런 데가 다 있어? 고객 알기를 개떡같이 알아? 사장 나오라고 해. 사장 어딨어?”
여자가 재은의 태도를 문제 삼으며 소리를 질렀다.
모피코트녀가 소리를 지르자 평상시에 소리 지르는 여자를 제일 무서워하는 양 사장이 옆에서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사장인데요?”
여자가 양 사장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말했다.
“이봐요, 내 말 똑똑히 기억해요. 당신 직원이 어쭙잖은 실력으로 차를 만졌다가 이상이라도 생기면 당신에게 곧바로 손해배상 청구할 테니까.”
양 사장이 비굴한 표정으로 손을 비볐다.
“직원이 잘못하면 직원에게 청구하셔야지 왜 저한테…?”
그 말에 여자는 양 사장을 보며 기가 찬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남자 팔에 매달렸다.
“민재씨, 꼭 여기서 해야 해? 다른 데로 가자, 응? 여기는 서비스의 기본 개념도 없잖아. 그리고 나 춥단 말이야. 여기는 앉을 데도 없어.”
하지만 여자의 말은 다시 한번 보기 좋게 무시되었다.
“뭐해? 얼른 시작하지 않고?”
남자가 재은에게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며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그 말에 재은이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차를 리프트 위로 올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양 사장이 깜짝 놀라 재은에게 득달같이 달려갔다.
“재은아, 야 인마, 안된다 안돼. 지금 너네 사장 피 말려 죽일 일 있냐? 그러다가 차에 기스라도 나면 우리 공업소 문 닫아야 한다니께.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 안 된다. 이 자식아!”
양 사장이 손사래를 치며 재은을 뜯어말렸다. 어느새 호식도 양 사장 옆에 서서 양 사장을 거들었다.
“이 차 부품값만 해도 최소 수백에서 수천이야. 재은아, 그냥 못한다고 해.”
하지만 재은은 차에서 내리더니 양 사장과 호식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남자를 한차례 노려보더니 공구를 들고 차 밑으로 들어갔다.
양 사장은 재은을 설득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했는지 이번에는 남자에게 비굴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고객님, 정말 죄송하지만, 이 차는 저희가 정비해 드릴 수 없습니다. 이 차를 정비할 만한 공구나 기계도 없고 저희가 외제차 전문이 아니다 보니 그런 노하우도 쬐끔 부족하구만여. 그러니까 외제차 전문 정비소로 가시는 게―”
“상관없어요. 어차피 저 사람이 할 수 있다고 했으니 저 사람이 책임지겠죠.”
남자의 무심한 목소리가 양 사장의 말을 단박에 잘랐다. 그 말에 양 사장이 다시 재은에게 고개를 돌렸다. 저놈의 자식이 욱하는 성질머리를 못 참고 기어이 일을 내는구나, 일을 내.
재은은 벌써 차 밑으로 기어들어가 있었다. 양 사장은 참새 가슴이 되어 재은에게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야 이노무 새끼야, 너네 사장 심장 약한 거 알아, 몰라? 네놈 땜시 내가 제명에 못 죽겠다. 고까워도 좀 참지, 그걸 못 참고 일을 내냐, 내길. 너 인마, 이 차 얼만 줄이나 알아?”
“4억이라면서요?”
재은은 작업을 하며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4억이 누구 애 이름인 줄 알어? 뭐 하나 잘못 만졌다가는 네 녀석 십 년 치 월급을 다 쏟아부어도 안―”
“작업에 방해됩니다, 사장님. 가시던지 조용히 좀 해주세요.”
양 사장은 주저리주저리 말을 늘어놓으려다가 재은의 말 한마디에 그만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더니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하, 어째서 우리 공업소에 있는 놈들은 하나같이 죄다 고집불통인지 알다가도 모르것어.”
남자는 차 뒤에 서서 작업 중인 재은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양 사장이 다시 남자에게 다가가 가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추운데 사무실로 들어가서 기다리시―”
“괜찮습니다.”
말을 미처 끝내기도 전에 남자가 말을 잘랐다. 머쓱해진 양 사장은 한 번 더 권해볼 엄두가 나지 않아 툴툴거리며 호식의 팔을 붙잡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 고집불통이 또 한 놈 있구먼. 나 원 참. 누구는 고집이 없어서 못 부리나.
여자는 남자가 자신의 말을 계속 무시하자 불같이 화를 내며 콜택시를 부르더니 혼자 타고 가 버리고 말았다.
이삼십 분가량 흘렀을까. 추위 때문에 그보다 서너 배의 시간은 흐른 것 같았다.
양 볼이 꽁꽁 언 재은이 차 밑에서 작업을 끝내고 나오다가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추울 텐데 미동도 하지 않고 한 자리에서 계속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 걸까.
남자와 눈길이 마주치는 순간, 재은은 심장이 멎는 느낌이 들었다. 그 짧은 순간 남자의 짙은 눈동자가 재은을 거칠게 끌어당겼다. 그 상태로 좀 더 있었다면 정말 남자의 눈동자 속으로 흔적도 없이 홀라당 빨려 들어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남자의 시선이 빨갛게 언 자신의 두 뺨에 와 닿자 멎은 줄 알았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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