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는 기차가 없다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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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학기는 다시 용주와 함께 택시를 타고 영주역으로 향했다.
이번 여행의 주된 목적은 용주와 함께 여행을 다녔던 곳을 하나씩 도장 깨기를 하듯 돌아다니며 추억을 더듬는 것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쳐 애초에 계획부터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학기는 중간 과정을 과감히 생략하고 최종 목적지로 향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이른 아침부터 움직였고, 부석사의 일정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으니 숙소에 들러 하룻밤을 보낼 필요도 없이 정동진으로 향하는 기차에 오를 수 있었다. 용주가 등받이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학기도 눈을 감았다.
학기와 용주는 첫 여행을 다녀온 후부터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매일은 아니어도 일주일에 두세 번은 늘 만나서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영화를 보거나 섹스를 했다.
학기가 졸업을 하고, 신입 사원으로 회사에 출근을 하면서부터는 평일에 만나지 못해도 저녁이 되면 전화를 하고, 서로의 일과를 물었다. 그리고 주말이 되면 습관적으로 약속을 하고,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영화를 보거나 섹스를 했다.
봄이 가고, 여름이 왔다. 학기가 직장 생활을 하며 받은 첫 휴가의 이틀을 용주와 함께 보냈다. 기차를 타고 경주로 가서 용주의 안내로 박물관을 비롯한 여러 곳을 다녔다. 대왕암이 보이는 바닷가에서 물놀이를 하며 놀기도 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왔다. 만난 지 일 년이 지나는 즈음에도 저녁이 되면 전화를 해서 서로의 일과에 대해서 물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가끔 빼먹는 경우도 있고, 주말이 되어도 만나지 않고 서로 다른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래도 만나면 반갑다고 뽀뽀를 했고, 섹스가 끝난 뒤에는 서로 사랑한다는 말을 귀에 대고 속삭였다. 처음과 달리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고, 습관적으로 때로는 의무감으로 하는 말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학기가 용주에게 서운함을 느낀 것은 용주의 시선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항상 서로를 바라보거나 같은 곳을 바라봤는데, 날이 갈수록 용주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할 때가 많았다. 용주가 고개를 돌린 곳으로 학기가 시선을 따라가 보면 그곳에는 학기처럼 덩치가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용주의 몸에 멍이 든 모습도 발견이 되었다. 어딘가에 부딪쳐서 생긴 멍이라기에는 그 위치가 성감대 부분이어서 학기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한 번은 그냥 넘어갔으나 유두 옆에 나 있는 멍은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았다. 학기는 애무를 할 때 혀를 날름거리며 자극을 하는 편이라 세게 빨아 당겨야 남는 키스마크는 절대로 학기가 만든 것이 아니었다.
그날 이후로 학기는 저녁이 되어도 먼저 전화를 하지 않았다. 용주에게 전화가 와서 따져 물으면 섭섭함을 토로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용주에게서 전화가 오지 않았다.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갔다. 일주일도 지나 이주일이 넘어섰다. 한 달이 지날 무렵에는 학기도 마음을 접었다.
학기는 일찍 퇴근을 한 날, 오랜만에 극장을 찾았다. 영화도 재미없고 사람들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욕망에 이끌려 처음 극장에 왔던 날처럼 사람들의 시선이 온몸에 달라붙어 있는 것 같아 기분이 더러웠다.
서둘러 극장을 빠져 나와 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같이 걷던 거리를 혼자 걷는 기분도 썩 좋지가 않았다. 학기는 2층에 자리 잡은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용주와 처음 만났을 때 갔던 곳이었다. 용주가 이 집의 커피 맛을 좋아했기 때문에 자주 왔던 탓으로 사장이 물잔과 재떨이를 테이블에 놓으며 아는 체를 했다.
“한 분 더 오시면 주문하실 거죠?”
학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뇨. 안 올 거에요. 커피 주세요.”
학기가 담배 한 대를 다 피웠을 즈음 사장이 다가와 커피잔을 테이블에 놓으며 말했다.
“저 잠시 앉아도 돼요?”
학기는 조금 당황스러웠으나 조각처럼 잘생긴 사장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은 자리에 앉자마자 대뜸 말했다.
“싸웠어요? 아님 헤어졌어요?”
“네?”
“늘 같이 오던 분이랑 싸웠냐구요. 아님 벌써 헤어지셨나.... 좋아보이던데....”
“지금 무슨 말씀을....”
“알면서 왜 모른 척해요? 그런다고 저를 속일 수 있을 거 같아요? 헤어지긴 했는데 아직 미련이 남았나 보죠? 여기 다시 온 거 보면.... 사랑이 아직 식지 않은 건가....”
학기는 사장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사장은 학기의 생각을 모두 꿰뚫고 있었다.
“왜 싸우고, 어떻게 해서 헤어진지는 모르겠는데.... 주제 넘게 얘기해 보면 그거 아무 것도 아닐 수도 있어요. 서로 오해하고 있을 수도 있고.... 제대로 말은 하고 헤어진 거에요? 제가 보기에 그런 거 아닌 거 같은데....”
학기는 답답한 마음을 해소하기 위해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형이 바람 폈어요.... 그 전에도 계속 딴 사람 쳐다보고....”
“그래서 삐졌어요? 우리 솔직해집시다.... 그쪽도 마찬가지잖아요. 헤어진 그분이랑 같이 오면 그쪽도 저 많이 쳐다봤잖아요. 처음 온 날부터.... 지금도.... 사람은 다 똑같아요. 자기가 가진 것보다 다른 게 더 좋아보이니까.... 우리 가게에 그쪽 같은 사람들 제법 와요. 이 동네가 그런 동네니까.... 저도 그런 사람이라 딱 보면 알죠.... 나중에 후회할 일 만들지 말고 화해하세요.”
학기는 하소연이라도 할까 싶었는데 오히려 잔소리만 들은 것 같아 기분이 언짢았다. 그래도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용주에게 다시 연락을 할 마음은 없었다. 마음이 있다손 치더라도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렇게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갔다.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PC통신에 가입을 했다. 삐삐만으로는 불편해서 자취방에 들여놓았던 전화가 애물단지처럼 놓여 있었는데, 새로운 용도를 찾은 것 같아 다행이었다.
이런저런 정보도 찾고, 재미난 글도 읽고, 가끔씩은 영화퀴즈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게이들이 모이는 곳을 자주 찾아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눈치를 살폈다. 이런저런 번개 모임이 있는 것 같았으나 게이 커뮤니티에서만 소심해지는 학기는 도무지 찾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대신 게시판에 올라오는 글들을 보며 다들 비슷하게 살아가는구나 싶어 많은 위안이 되었다.
그러다가 학기는 퀴어방에서 어떤 글 하나를 보게 되었다. 사랑과 이별에 대한 이야기였다. 만남에서 헤어짐으로 가는 과정을 엔트로피 증가로 설명하는 글이었다. 사랑을 한다는 것은 진자 운동과 같아서 맞붙어 있던 쇠구슬에 외부적 자극이 가해져 움직이기 시작하면 서로를 쳐내기만 할 뿐 다시는 맞붙을 수 없다는 식으로 논리를 펴 나갔다.
학기는 전형적인 이과 스타일의 사람이라 확신했다. 물리학의 법칙으로 사랑과 이별을 이야기하는지라 학기의 머릿속에 쏙쏙 들어왔다. 학기도 글을 쓴 사람처럼 똑같은 상황과 심정이었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 학기는 감정을 공유했다.
- 이별을 대하는 스타일은 대체로 두 가지 양상을 나타낸다고 한다. 하나는 망각(忘却)이고 다른 하나는 불망(不忘)이다. 망각의 스타일은 옛날의 애인과 그 모습이 같은 사람을 애써 피해 다니는 사람이고, 불망의 스타일은 애인과 그 모습이 똑같은 사람을 애써 찾아다닌다고 한다. 망각의 경우는 이별이 일종의 단념과 포기의 형식으로 표현된 반면, 불망의 경우는 이별이 일종의 지속과 재생의 형식으로 표현된 것이란다.
나는 불망의 스타일인 것 같다. 내가 눈길이 가는 사람은 모두 옛 애인과 같은 사람이다. 나는 이별을 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연락이 끊어지고 결과적으로 나는 이별을 한 사람이 되어 있다. 그 사람은 아무런 잘못이 없으니 이별의 원인은 나에게 있는 것이 분명한데, 처음에는 그것을 도무지 알 수가 없어 사과를 하지 못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나의 어떤 것이 그 사람에게 상처를 줬는지 알기 위해 고민을 하다 벌써 몇 개월이 지나 버렸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물어보는 것은 그 사람의 상처를 건드리고 나의 무책임함을 드러내는 것이라 용기가 없는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그런 상황이 하루하루가 쌓여 지금에 이르렀다. 만약 우연히라도 그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냥 무조건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싶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어떻게 받아들이든 상관없이 그 사람에게 사과를 하고 그 사람의 처분을 기다릴 것이다. 내가 사랑했던, 어쩌면 지금도 사랑하고 있는 그 사람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우연이라는 것은 나와는 상관없는 단어인 것 같다. 우연히 마주치는 것을 가장하기 위해 그 사람과의 추억이 있는 곳을 배회해도 마주치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깨달은 것이 있다. 그 사람은 나를 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하는 방향으로 일어나는 것이지 가역 반응은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자연계에 존재하는 사람도 자연 법칙을 거스를 수 없으니 이별을 다시 사랑으로 바꿀 수가 없다. 그 사람과 우연히 만나서 다시 사랑을 속삭이는 것은 물리학의 법칙을 어기는 것이라 기적이 일어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사랑과 이별은 물리학이지 문학이 아니다.
결국 옛 애인과의 이별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마음을 이딴 식으로 이야기하는 내가 너무 비겁하고 싫다.
글을 읽고 학기는 마음을 굳혔다. 용주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 지겨운 일상에서 벗어나는 길이라는 판단이 섰다. 이 글을 쓰는 사람은 잘못을 지적했을 때 바로 받아들이고 사과를 할 사람인 것 같아 서로 오해도 없고, 감정보다 이성으로 판단을 할 사람 같았다. 묘한 끌림이 느껴졌다. 관심도 생겼다.
학기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글을 쓴 사람에게 쪽지를 보냈다. 답장이 왔다. 서로가 처한 상황이 비슷해 말이 잘 통했다. 학기가 먼저 만나서 길게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말을 흘렸다. 좋다는 답장이 왔다. 토요일 오후에 만나기로 약속을 정했다.
학기는 퇴근을 하자마자 곧장 약속 장소로 향했다. 집에 갔다가 오기에는 시간이 부족해서였다. 40분 정도 남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 약속 장소에서 가까운 서점에 들어갔다. 용주와 사귀는 1년 동안 생긴 버릇이었다. 3층에서 시작해 한 층씩 내려오며 코너를 둘러보는 용주의 습관을 학기도 자연스레 따라했기에 서점에 들어서자마자 계단을 올라갔다.
그런데 2층에서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학기는 순간 멈칫 했다. 아는 사람을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도 학기처럼 멈칫 했다. 용주였다. 길을 가다 우연히 만나면 쿨하게 인사만 하고 지나쳐 가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우연히 만나게 되니 그렇게 되지 않았다. 걸음이 느려지고 표정 관리도 힘들었다. 느려지던 걸음이 용주의 앞에서는 저절로 멈췄다.
“학기야.... 잘 지내지?”
학기는 잘 못 지냈지만 짐짓 아닌 척 되물었다.
“형도 잘 지내지?”
“으....응. 여긴 어쩐 일이야?”
“친구 만나러 왔다가 시간이 남아서....”
“학교 친구?”
“응.”
학기는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했다. 이미 떠난 사람이었고, 인연이 그쳐 있었기에 그다지 죄책감은 들지 않았다.
“형은?”
“나도 친구 만나러....”
“이쪽?”
학기는 용주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학기는 그럼 그렇지 하는 생각이 들어 그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던 자신의 행동이 잘한 일이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마음이 오히려 편해졌다. 학기는 쿨하게 용주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그럼 잘 지내.”
학기는 다시 걸음을 옮겨 용주로부터 멀어져 갔다. 그리고 3층부터 시작해 2층과 1층을 둘러보다 시간에 맞춰 약속 장소로 향했다. 백화점 정문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서 있었다. 그중에 용주도 끼어 있었다. 학기는 용주와 제법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기다렸다.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도 만나기로 한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서로의 얼굴을 모르니 흰색 반팔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가겠노라고 하는 말에 금방 찾을 수 있을 줄 알았으나 그런 사람이 너무 많았다. 심지어 용주도 그런 옷차림새였다. 학기는 그제야 삐삐번호를 물어보지도 않고, 자신이 뚱뚱하다는 사실을 숨기고 평범하게 생겼다고 말했던 것을 후회했다. 하지만 돌이킬 수가 없는 일이었다. 혹시나 먼저 다가와 PC통신 어쩌구 하면서 말을 걸어주기를 바라며 30분을 더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학기야....”
용주가 곁에 다가와 팔뚝을 툭 치면서 부르는 소리에 학기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친구 안 오는 거 같은데....”
학기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무표정한 얼굴로 용주를 바라봤다.
“나도 바람 맞은 거 같아서 하는 말인데.... 점심 먹었어?”
학기는 고개를 저었다.
“계속 기다릴 거야?”
학기는 또 고개를 저었다.
“그럼.... 나랑 같이 밥 먹을래?”
학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판 싸우고 헤어진 것도 아니고, 한 때 사랑한다고 속삭였던 용주와 점심 한 끼 먹는다고 해서 나쁠 것은 전혀 없었다. 주말이 되면 용주와 만나서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시고 영화를 보거나 섹스를 하는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으니 어쩌면 더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학기와 용주는 자주 가던 식당에 들러 밥을 먹었다. 익숙했지만 오랜만이라 어색했다.
“직장 생활 할 만 해? 이제 1년 넘었으니까 좀 익숙해졌지?”
“뭐 그럭저럭.... 형은 몇 학년 담임이야?”
“1학년. 하나부터 열까지 신경 쓸 게 많아서 귀찮아 죽겠어....”
이것이 대화의 전부였다. 용주는 학기가 말리는 것을 무시하고 밥값을 계산했다.
“커피는 내가 살게.”
학기와 용주는 익숙하게 자주 가는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창가 자리에 앉아 커피를 주문하고 언제나 그랬듯이 담배를 피워 물었다. 어색했다. 학기는 커피를 다 마시면 바로 일어나 계산을 하고 나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미안해.”
예상치 못한 말에 학기가 되물었다.
“뭐가?”
“뭐든 다.... 니가 나 때문에 마음 상한 거 모두 다....”
학기는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커피잔만 만지작거리다 담배를 한 대 피워 물었다. 침묵이 흘렀다. 어색했다. 용주가 어색한 침묵을 깼다.
“시작 사장이 그러더라.... 내가 바람 피우고.... 계속 딴 사람 쳐다본다고.... 너한테 뭐라 할 말이 없어.... 사실이니까.... 진작에 너한테 미안하다고 말해야 했는데.... 그러면 진짜 끝일 거 같아서 말 못했어.... 결과는 마찬가지였는데.... 우연히 너 만난 김에 말해야겠다 싶어서.... 미안해.... 가끔 만나던 사람한테 연락이 오면 끊어냈어야 했는데.... 그러지를 못했어.... 니가 모를 거라 생각했던 내가 바보였어.... 그래도 이것만은 좀 알아줬음 해서.... 나.... 너 만나는 동안 진짜 진심이었어. 딴놈 만나고 너 만나면 역시 나한테는 정학기밖에 없구나 싶었어.... 이런 말이 변명이고 니 마음 더 상하게 한다는 거 알아. 근데.... 진짜 진심이었어.... 미안해....”
용주는 고개를 숙이고 라이터만 만지작댈 뿐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학기도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학기는 어색함을 달래고자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식어 버린 커피는 쓴맛만을 가져다 줬다. 이번에도 용주가 침묵을 깨뜨렸다.
“학기야....”
학기는 대답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용주를 바라봤다. 용주가 약간 뜸을 들였다가 말을 이었다.
“내가 책에서 읽은 건데.... 이별을 대하는 자세에는 두 가지가 있대. 하나는 망각이고 하나는 불망이야....”
학기는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망각은 일부러 헤어진 사람과 정반대의 사람을 찾아나서는 거고, 불망은 헤어진 사람을 잊지 못해서 같은 이미지를 가진 사람을 찾아다니는 거야. 나는 불망 스타일인 거 같애. 너는.... 나 같은 사람 싫지?”
학기는 사실 확인을 위해 커피숍에 들어오고 나서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거 책에서 읽은 게 아니라 누가 게시판에 올린 거 본 거 아냐?”
용주의 표정이 확 변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 요즘 PC통신 하니?”
학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용주가 학기에게 다시 물었다.
“학교 친구 만난다는 거.... 아니지?”
학기도 용주에게 사실 확인을 위해 물었다.
“엔트로피 어쩌구 하는 거 형이 올린 거야?”
용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우리 바람 맞은 거 아니네? 우연히 너 만난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고....”
용주는 얼굴에 미소를 띄우고 말을 이었다.
“내가 쓴 글이 그렇게 가슴을 울렸어? 첫사랑이라서 절대로 잊지 못하겠어?”
용주는 온라인상에서 쪽지로 학기가 한 말들을 그대로 옮기고 있었다.
“사랑 받는다는 느낌을 나를 통해 처음 느꼈어? 내가 그렇게 잘생겼어?”
“씨.발.... 그만해.”
하지만 용주는 계속 학기에게 물었다.
“내 숨소리까지 사랑했어? 니가 나를 많이 사랑하지 않아서 내가 바람피운 거 같아서 나한테 미안했어?”
“씨.발 그만하라구. 진짜 못됐어.”
“알았어. 그만할게.... 너 나한테 미안해 할 필요 없어. 바람피운 내가 잘못이지....”
학기는 부끄럽고 어색해서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때마침 오줌이 마려웠다.
“나 화장실 좀....”
학기가 볼일을 다 봤을 때 허리에 진동이 울렸다. 삐삐 음성메시지였다. 학기가 자리에 돌아와 음성 메시지를 확인하기 위해 테이블에 놓인 전화기를 들었을 때 용주가 말했다.
“나도 화장실 좀....”
학기는 고개를 끄덕이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 학기야.... 너 얼굴 보면서 말을 못할 거 같아서.... 나.... 너랑 다시 시작하고 싶어. 이제 니 처분만 남았어. 10분 뒤에 나갈게. 너 없으면.... 나도 단념할게. 미안해.
학기는 담배를 피워 물고 창밖을 바라봤다. 담배 한 대를 다 피우는 데에는 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담배를 비벼 끄고 테이블에 놓인 계산서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용주는 화장실에서 나와 학기가 없는 자리에 앉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 깊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담배를 다 피우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찰나 허리에서 진동이 울렸다. 삐삐 음성메시지였다.
- 형.... 생각할 시간이 10분은 너무 짧잖아. 형 얼굴 보면 말을 못할 거 같아서.... 다시 시작할 거면 처음부터 제대로 해야지.... 시작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마.
학기는 용주가 인연이라고 생각했다. 학기 역시 이별을 대하는 자세가 불망 스타일이었다. 용주 같이 잘생기고 심심하지 않게 대화를 잘 이끌어가는 사람을 다시 만나고 싶었다. 게시판의 글이 용주의 성향과 다르다고 생각해서 쪽지를 보낸 것이었으나 그것은 단지 학기에게 익숙한 용어가 나와 그것으로 성향을 판단한 것일 뿐, 결국 학기는 용주의 감성에 이끌린 것이었다.
학기는 커피숍 시작 창가자리에 앉았다. 사장이 물잔과 재떨이를 가져다주며 물었다.
“커피 드릴까요?”
“이따가요. 올 사람이 있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용주가 들어섰다. 헐레벌떡 달려온 것이 분명해 보였다. 사장이 커피 두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을 때까지 두 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다. 어색한 침묵은 용주가 먼저 깨 버렸다.
“정학기 또 눈 돌아가는데?”
농담으로 하는 말에 학기도 농담으로 받아쳤다.
“예술작품에 눈 돌아가는 건 당연한 거지. 사장님 아무리 봐도 진짜 잘생겼어.”
“그건 나도 인정해. 학기야....”
학기는 용주의 말을 끊고 단호한 말투로 물었다.
“이것만 대답해. 형은 나를 사랑한 거야 아님.... 내 살을 좋아한 거야?”
“처음에는 니 살을 좋아한 건 맞는데.... 지금은 너를 사랑해. 니가 어떻게 변해도 나는 너를 사랑할 거야. 근데 너.... 살 좀 빠진 거 같다.”
사실 그러했다. 삶이 무료하고 심심해서 먹는 것도 귀찮아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싫어?”
“싫으면 내가 너한테 다시 시작하자고 했겠어? 나 이제 절대로 너 안 놓쳐. 믿든 안 믿든 상관 안 해. 그냥 내가 그럴 거야.”
학기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피어올랐다.
“형.... 오늘 집에 못 간다고 전화해.”
“벌써 했어.”
학기와 용주의 사랑이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커피숍 시작은 사랑이 꽃 피는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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