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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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호는 알람을 끄고 옆에 자고 있는 여자사람친구인 민정이를 흔들어 깨웠다.
“야! 일어나! 벌써 9시야. 거기 늦게 가면 줄서야 한단 말이야. 나 먼저 씻는다.”
테이블에는 금요일 밤의 풀어짐과 밤늦은 수다가 그대로 널브러져 있었다. 민호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 친구를 깨워 먼저 씻게 하고, 서둘러 설거지를 했다. 일기예보에 날씨가 맑을 거라고 했는데 창밖의 하늘이 꾸물꾸물 흐렸다. 그래도 이게 얼마만의 여유인데. 오늘은 하루종일 밖에서 친구와 놀다가 들어오기로 계획을 세워두었다.
나란히 좁은 화장대 앞에 앉아 단장을 하고 있으니 고등학생때 짝궁이였던 민정이에게 무척 서툴지만 진지하게 커밍아웃을 하던 때가 생각났다. 그 이야기로 한참 수다를 떨고나니 11시가 가까워져 서둘러 챙겨서 나왔다.
친구와 동네의 큰 길을 걷고 있는데 7살쯤 되어보이는 아이가 자신들을 앞질러 가면서 이상한 소리를 내는 것을 보았다.
“아..아..가.....갸...”
아이는 코를 훔치면서 종종 걸음과 달리기 사이의 속도로 뛰고 있었는데 옷차림이 날씨에 비해 많이 얇았다. 아마도 그 길에 있는 동네마트에 군것질거리를 사러가나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이는 마트를 그냥 지나쳐 여전히 뛰어가고 있었고 그 때 마트를 나오던 남자가 그것을 보았다.
남자는 모자에 털이 수북히 달린 점퍼를 입고 장우산을 지팡이처럼 짚고 있었다. 뒷머리가 납작하게 눌려있어 방금 일어난 사람처럼 보였다. 남자는 몸을 구부려 아이의 속도와 눈높이에 맞추어 종종 걸음으로 걸었다.
그리고 아이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한참을 그렇게 가다가 남자가 아이의 어깨를 붙잡고 세웠다. 민호는 남자의 인상이 그렇게 좋게 보이지 않아 친구에게 다시 가보자고 했다.
그들이 다가갔을 때 남자는 약간 흥분하면서도 부드럽게 말을 하고 있었다.
“엄마가 때렸어? 엄마가?”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는데 민호는 아이의 얼굴을 본 순간 깜짝 놀랐다. 아이의 왼쪽 눈이 부어있었고 코에서는 코피가 조금씩 흐르고 있었다.
“울지마. 괜찮아.”
남자는 아이를 껴안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민호는 남자의 눈이 빨갛게 충혈이 된채 눈물이 글썽이는 것을 보았다. 남자의 눈이 자신을 바라보자 갑자기 부끄러워져 눈빛을 피했다.
남자는 민호의 친구 민정에게 잠깐 아이를 좀 데리고 있어달라고 하고 조금 떨어진 전봇대 근처로 가서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민호와 친구는 아이의 작고 차가운 손을 꼭 잡았다. 아이는 고개를 떨구고 훌쩍이고 있었다. 민정은 클러치에서 휴지를 꺼내 아이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남자가 돌아오자 민정이가 물었다.
“무슨 일이래요?”
남자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않고 입술에 손가락을 올려 말을 하지 말라는 표시를 했다.
“제가 있을게요. 가보셔도 돼요.”
민호와 친구는 남자의 딱딱한 말투에 약간 민망해져 일어났다. 친구가 민호의 손을 끌어 조금 떨어진 부동산 앞으로 갔다. 그리고 둘은 남자를 지켜보았다.
“저 사람 좀 이상해. 경찰을 불러야 하지 않을까?”
그말이 끝나자마자 남자가 자신의 점퍼를 벗어 아이에게 덮어주는 것을 보았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민호는 웃음을 터뜨렸다. 남자는 점퍼 안쪽에 하늘색 잠옷을 입고 있었는데 하얀색 고래가 촘촘하게 패턴으로 그려져 있었다.
친구도 민호의 등을 때리며 키득키득 웃었다. 그 잠옷 속의 수많은 고래들이 두 사람의 의심을 말끔히 삼켜버린 것 같았다.
얼마후에 경찰차가 도착하고 남자가 경찰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고나서야 두 사람은 가던 길을 재촉했다.
두 사람은 경희궁길에 있는 일본가정식 집에서 어젯밤에 정해놓은 메뉴대로 명란크림우동과 간장새우덮밥을 점심으로 먹고, 황금색으로 변한 경복궁의 커다란 은행나무 아래서 사진을 수십장 찍었다.
서촌의 작은 소품샵에서 엽서를 몇 장 사고, 꼭 필요하진 않지만 왠지 사고 싶은 에코백도 서로에게 선물했다.
저녁에는 시네큐브에서 ‘나, 다니엘 블레이크’라는 영화를 보았다. 영화를 보다가 민호는 몇 번이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눈물이 나올 때마다 낮에 보았던 아이가 생각났고, 무엇보다 남자의 그렁그렁한 눈이 사진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사내자식이 왜 그렇게 울었어? 너 얼굴도 엄청 빨개!”
“너는 안 울었어? 진짜 슬프던데, 막 화도 나고.”
두 사람은 광화문 폴바셋에서 카페라떼를 두잔 시켜서 청계천을 거닐었다. 24시간이 넘게 함께 있다보니 고등학교 때 단짝으로 지내던 그 시절의 느낌이 났다. 그때도 학교 근처 강변을 걸으면서, 벤치에서 햇살을 맞으며 깔깔거리며 수다를 떨었었다.
화기애애하게 요즘 보는 드라마 이야기를 하다가 회사 생활에 대한 한탄으로 이야기가 옮겨가자 둘은 억양이 높아졌다. 짜증나는 상사에 대해 실컷 욕을 해주고, 지난번 소개팅한 남자에게도 욕을 실컷 해주고, 최근 뉴스 이야기와 정부한테도 실컷 욕을 해주었다. 정부 욕을 하다가 ‘나, 다니엘 블레이크’ 영화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었고, 낮에 본 아이의 이야기까지 이어졌다.
“근데, 그 남자 너희 동네에 사는 것 같은데 전에도 본 적 있어?”
“글쎄, 가게 주인들 아니면 동네 사람을 기억하기는 힘들지. 왜?
”아니, 괜찮은 사람 같던데?“
”뭐야, 아까는 이상한 사람 같다며“
”요즘, 그렇게 남의 일에 신경 써 주는 사람이 많지 않잖아. 좀 못생기고 무뚝뚝하기는 해도.“
”못 생긴 건 아닌 것 같던데? 안 씻어서 그렇지“
”벌써 편 드냐? 잘 해봐~“
”뭘 잘해 봐. 됐어. 내 스타일 아니야.“
”아이고, 니 스타일은 이 세상에 없어요. 너 태어나기 전날 죽었어요.“
두 사람은 밤이 깊도록 취향에 대한 이야기와, 서로의 과거 남자친구에 대한 욕과, 다른 친구들의 결혼식 이야기를 하다가 헤어졌다. 돌아가는 길에 가슴으로 스며드는 공기의 냄새가 더 깊게 느껴졌다. 헛헛한 마음을 채울 겸 군것질거리를 사러 마트에 들렸다.
”자 계속해서~ 지금 오신 분들을 위해 떨이~ 고구마가 한봉지 3000원 하던 것을 지금부터 2500원~“
마트의 사장님은 마이크를 차고 쉴새 없이 말을 했는데 매 문장마다 ‘자 계속해서~’라는 말로 시작했다. 아저씨의 말을 따라 민호는 고구마를 담으러 갔다.
그런데 그 곳에 남자가 있었다. 낮에 본 것과 똑같은 차림이었고 그 새 수염이 많이 자란 느낌이었다. 투시 초능력이 생긴듯남자의 점퍼 안의 고래무늬가 보이는 것 같았다.
민호는 자기도 모르게 살금살금 걸어가 남자 곁에 서게 되었는데 남자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키가 컸다. 남자의 바구니에는 호박, 감자, 버섯, 고추, 콩나물, 미역, 김, 쌈채소 등을 가득 담고 있었다.
‘뭐야. 어울리지 않게 베지테리언이야?’
저렇게 몸집이 큰 사람이 채식주의자라니(확실하진 않지만) 남자는 참 반전이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민호는 아까 아이가 어떻게 되었는지 묻고 싶었지만 용기도 나지 않고 어색해서 그냥 고구마만 한봉지 들고 왔다. 남자는 여전히 2500원짜리 고구마를 이것저것 들어서 꼼꼼하게 살펴보고 있었다.
계산을 하고 마트를 나서는데 갑자기 비가 후둑후둑 떨어졌다. 괜히 이 밤에 뭘 또 먹겠다고, 그냥 집에 바로 갈걸.
”우산 없어요? 집 근처까지만 같이 가요.“
민호는 깜짝 놀라 쳐다 보았다. 남자가 덩치만큼이나 큰 우산을 자신의 눈앞으로 확 펼쳤다. 우산이 어찌나 큰지 온 세상이 다 까맣게 가려진 것 같았다.
”아니, 괜찮아요. 가까워요.“
”그니깐 같이 가요.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아까 낮에도 둘이서 의심하면서 날 감시하고 있더구만.“
”아, 감시한 게 아니고...“
”자, 갑시다.“
남자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더니 민호를 마주 보고 눈썹을 으쓱 올렸다 내렸다.
”네, 감사합니다.“
민호는 얼떨결에 우산 속으로 들어갔다. 남자와 민호는 아무말없이 걸었다. 민호는 어색함에 숨이 막힐 것 같아서 그냥 우산을 살걸 후회했다.
”아까 아이는 어떻게 되었어요?“
”아... 애기가 경찰한테 말을 안해서 나도 같이 경찰서에 갔어요. 나한테는 말을 하더라구요.“
하면서 남자는 자랑스러운 듯이 허허 웃었다. 민호는 남자가 덩치가 크고 수염이 난 큰 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고 보니까 전에 놀이터에서 나랑 놀았던 애들중에 한명 이었어요. 나를 기억하고 있더라구요.“
민호의 머릿속에 갑자기 영화 한 편이 떠올랐다. ‘빅’이라는 톰행크스 주연의 옛날 영화였다. 어느 날 남자아이가 어른의 몸을 갖게 되면서 여러 가지 사건에 휘말리는 이야기였다. 영화를 볼 때 꼬마였던 민호는 자기도 빨리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진짜 그런 것들도 부모라고. 내가 똑같이 눈탱이를 때려주고 싶었는데!“
남자가 주먹을 쥐어보였는데 주먹이 민호의 얼굴만 했다.
”내가 데려가서 키우면 맨날 놀아줄 수 있는데, 허허“
”무슨 일 하시는데요?“
”글 써요.“
”작가세요?“
”여기가 저희 집이에요, 나중에 벨 누르세요. 제 책 한권 선물로 드릴게요. 그 때 우산 돌려주시고. 밤길에 데려다주고 싶은데 제가 본인 집을 알게되면 더 무섭잖아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남자는 말을 쏟아내고는 손으로 가린채 비밀번호를 눌렀다. 민호는 또 얼떨결에 감사합니다. 라고 말을 하고선 다시 집을 향해 걸었다.
조금 걷다 보니 비가 갑자기 그쳤다. 가을밤에 소나기라니. 우산을 돌돌 말아 남자처럼 지팡이 삼아 땅을 찍어보았다. 우산이 어찌나 큰지 손잡이가 가슴 밑에 다다랐다. 그러고 보니 동그란 나무 손잡이는 남자의 온기가 담겨있는 듯 따뜻했다.
민호는 집에 오자마자 침대에 철푸덕 몸을 던지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방금 누구 만났는지 알아?“
민호의 방은 한참동안 노란 등이 켜져 있었고, 중간중간 베시시 웃는 소리가 흘러 나왔다.
서울의 밤이 깊어가면서 구름이 점점 걷히고 다른 때보다 많은 별 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달무리를 입고 있었던 보름달도 깨끗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밀려오는 잠에 못 이겨 민호의 방에 불이 꺼질 때, 몇 블록 떨어진 곳에선 창문이 열리고 라이터 불이 켜졌다.
남자는 고래 잠옷을 입고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달을 구경했다. 그러다 갑자기 헤죽 한 번 웃었다. 이내 몸을 부르르 떨면서 창문을 닫았고 얼마 안 있어 남자의 방에도 불이 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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