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SF] 지구 최후의 날, 그를 만나다 (상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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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그를 처음 본 것은 지하철 분당선에서였다.
선릉역 근처에서 친구들과 만나 술 한잔 마시고 돌아오던 길.
11시 46분에 출발하는 막차를 타기위해 역까지 300미터 정도를 뛰었기에
숨을 헐떡거리며 출입문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은 나.
내 옆에는 역시 막차를 타기위해 서둘렀음이 분명해 보이는 30대 여성이
가뿐 숨을 몰아쉬며 앉아있었다.
지하철에서 옆에 여성이 앉으면 좋은 점은 내 자리에 여유가 생긴다는 것.
빼고 자시고 할것도 없는 유일한 장점이다. 
덩치크고 몸 좋은, 내 식의 남자가 옆에 앉아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숨을 고르고 주위를 둘러보니 오늘은 같은 칸에서 그런 행운이 보이지 않을것 같았다.
몰려오는 피곤함에  잠시 눈을 붙인다는게 어느새 30분이 흘러버렸다.
눈을 부비며 주위를 둘러보다 나도 모르게 헉 하며 숨을 죽였다.
내 맞은편에 팔짱을 낀 채 앉아 스마트폰을 보고 있는 남자에게 내 온 신경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일단 전체적인 인상이 몇가지 단어로 요약되는 남자였다.
힘, 운동, 푸근함, 남자다움. 그리고.... 곰.
얼굴만큼이나 굵은 목을 보니 힘 좀 쓰게 생겼고
통나무처럼 굵은 팔뚝과 내 허리만큼이나 굵어 보이는 허벅지를 보니 쇠질 꽤나 했을게 분명했고
스포츠 스타일로 짧게 자른 머리에 시커먼 눈썹,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이 남자답게 서글서글했고
반바지 아래로 보이는 굵은 종아리와 팔뚝, 그리고 턱 주변에 난 거뭇거뭇한 수염과 털은
한마리 곰을 연상케 했다.
마치 뭐에 홀린 사람처럼 나는 그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물론 최대한 티는 내지 말아야 했기에 일부러 천장을 보다가 시선을 내리며 그의 모습을 한번 슬쩍 훑고
괜히 지하철 노선도를 보며 인상쓰다가 다시 고개를 돌리며 그의 모습을 짧게나마 감상하고,
눈을 잠시 감고 그의 자리를 향해 시선을 조준한 다음 자연스레 눈을 뜨며 그의 모습을 시야에 가두었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피식 웃는 그를 보고 나도 따라서 미소지었고,
진지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린채 집중하는 그를 보며 내 미간도 찌푸려졌다.
그의 모습을 보면 볼수록 나는 마치 헤어나올수 없는 늪에 빠진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왜 이제서야 나타난 걸까? 왜 내 주변에는 저런 사람이 없는걸까? 저 사람은... 대체 뭐하는 사람인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을 억지로 머릿속 한구석으로 밀어낸 채 조심스럽게 그의 모습을 
보고 있는데 쿵쿵대는 내 심장 박동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마침 그의 옆자리가 비었고 잽싸게 그리로 건너가고 싶었지만 
그가 그동안 비좁아서 힘들었던지 너무나도 편안한 표정으로 다리를 벌리는 것을 보고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그의 벌어진 허벅지 사이로 무언가 굵직한 것이 보인 탓도 있었다.
지금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어 본다면 그는 어떻게 반응할까?
왠 미친 놈이? 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나는 왠지몰라도 그를 앞으로 다시는 보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감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그래... 미친놈 소리 한번 듣더라도, 저 곰같은 남자의 목소리라도 한 번 들어보자.
있는 용기 없는 용기 모조리 긁어 모아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그 역시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지? 혹시 저 사내 지금 내 행동에 반응한건가? 나란 존재를 저 사내도 인지하는 건가?
혹시 하는 기대감은 순식간에 실망감으로 변해버렸다.
지하철 스피커에서 다음 내리실 역은 오리역이라는 방송 멘트가 나왔고,
그는 늘 그랬던것 처럼 익숙하게 진행방향 왼쪽 문 앞에 다가가 한 손으로 창문을 기댄 채 섰다.
여기서 내리는구나...
나는 다음역인 죽전 역에서 내리는데...
지하철이 속도를 서서히 줄이다가 마침내 멈추어섰고
문이 열리자 그 사내가 쿵쿵거리며 문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어쩌지? 어쩌지? 너무 궁금한데.... 저 남자와 말이라도 섞어 봤으면 정말 좋겠는데...
문이 닫히기 직전. 나 역시 재빨리 그를 따라 내렸다.
서둘러 개찰구에 교통카드를 댄 후 빠져나와보니 이미 그의 모습은 내 시야에 보이지 않았다.
제기랄... 멀리 가지는 못했을텐데...
나는 최대한 서둘러 가장 가까운 출입구로 달려가 전속력으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분당선 역들이 그러하듯 오리역 역시도 결코 짧지 않은 계단으로 유명하다는 사실을 절감하며
마침내 지상으로 올라온 나는 터질 듯한 심장을 부여잡고 숨을 고르며 최대한 신속하게 주변을 스캔했다.
하늘이 이런 내 노력에 감명했던걸까? 마침 내 전방 30미터 앞에 걷고 있는 남자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앉아 있을땐 잘 몰랐는데 뒷모습을 보니 옆으로 떡 벌어진 어깨와 우람한 상체, 그리고 튼실한 종아리까지...
영락없는 그 사내였다.
처음엔 뛰는 듯한 걸음으로 그와의 거리를 좁혔나갔다.
마침내 7~8미터 정도의 거리로 줄어들자 나는 그와의 보폭을 맞추어 걷기 시작했다.
이제서야 남 눈치 안보고 그의 뒷모습을 내 마음껏 관찰하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태릉 선수촌에서 유도나 레슬링 연습하다가 나온 모양새였다.
키는 175~177 정도로 나와 비슷하거나 조금 큰 듯 해 보였지만
거대한 덩치 만큼은 내 두배는 되어 보였다. 체중이 100kg은 거뜬히 넘어 보였고
검정색 반팔 티셔츠에 수영복 같은 짙은 회색 반바지로는 그의 거대한 몸을 감추기엔 역부족이었다.
특히 굵은 허벅지 위로 잔뜩 힙업된 엉덩이의 윤곽이 고스란히 드러나 보이는 뒷태는
그가 성큼성큼 걸을때마다 씰룩씰룩거리며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와.... 남자 뒷모습이 저렇게 섹시할 수 있다니... 
아까부터 힘이 제법 들어가 있던 내 물건이 빳빳하게 서기 시작했다.
길을 걸으면서 스마트폰을 보는 듯, 그가 고개를 숙였다가 잠시 앞을 봤다가 하면서 걸었다.
저러다가 다른 사람이랑 부딪히겠네... 아니지, 저렇게 덩치가 크니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이 알아서 피하겠지?
이런 걱정 아닌 걱정을 하고 있는 내가 우습게 느껴졌다.
그가 갑자기 왼쪽으로 커브를 틀었다. 그를 내 시야에서 놓칠새라 재빨리 따라 붙었다.
오피스텔 입구로 들어가는 그를 봤다. 이 건물에 살고 있는 모양이네~
현관 번호판에 숫자를 누르자 문이 열렸고 그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헉... 아무래도 입주자 전용 비밀번호가 있는 모양이다.
서둘러 뛰어갔지만 내 눈 앞에서 야속하게 닫히고 마는 출입문.
다행히 그가 엘리베이터에 탑승하고 문이 닫히는 모습을 출입문 건너편에서 볼 수 있다.
1, 2, 3, 4.... 숫자가 계속 바뀌다가 6에서 멈춰섰다. 그가 최소한 이 건물 6층에 산다는 정보는 얻은 셈이다.
건물에서 좀 떨어진 곳으로 가서 6층 라인을 계속 주시했다.
꺼져있는 불빛이 지금 켜진다면 그 곳이 바로 그가 사는 방일 것이다.
하지만 1분이 지나도, 아니 5분이 지나도 6층 라인에 불이 켜지는 방은 없었다.
제기랄... 이 건물이 디귿자(ㄷ) 모양으로 되어 있나보다.
최소한 정문 쪽 라인에 사는건 아니라는 건 알았다. 그럼 이제 두 면만 더 확인하면 되는 셈이네~
대로변으로 돌아가 확인해보니 불이 켜져 있는 방이 12개 중 7개였다.
휴... 반대쪽도 비슷한 상황이면 사실상 6층 전부를 확인해야 하는 셈이네...
갑자기 현타가 왔다. 내가 지금 여기서 도대체 뭐하고 있나라는 현타...
오늘의 설레임은 여기까지인가 보다. 
갑자기 기분이 급 다운되기 시작한 내 눈에 건물 1층의 편의점이 보여서 그 안으로 들어갔다.
우울함에 허기까지 몰려온 나는 컵라면 하나와 김밥 하나를 집어들고 카운터 앞으로 갔다.
"삼천오백원입니다~"
바코드를 찍은 후 가격을 말하는 여자 알바생에게 체크카드를 건넸다.
핸드폰에 뜬 결제 문자를 습관적으로 확인한 후 편의점 전자레인지에 김밥을 넣고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채 3분이 되기 전에 컵라면의 뚜껑을 연 다음 면 한 젓가락을 입에 넣고 김밥 두개를 먹으려던 찰나
편의점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헉...    
곰같은 근육질의 덩치 큰 사내... 그가 편의점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뭐야? 내가 뒤 밟는거 눈치챈거야? 그럴거면 아까 왔어야지...
혼자서 고개를 푹 숙인채 별의별 걱정을 다하고 있는데 그가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붓는게 보였다.
헐... 집이 바로 이 건물인데 편의점에서 굳이 라면을 먹는다고?
이 와중에 그의 행동을 이해하려고 하는 나도 참 웃긴 인간이다.
그가 내 옆으로 걸어오는게 느껴진다.
도둑이 제발 저린다는 게 바로 이런 심정이구나란 걸 깨닫기 시작할 때쯤
그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내 옆에 앉았다. 아무래도 라면이 익기를 기다리는 모양새였다.
혹시 날 알아본 건 아닐까 싶어 옆을 흘끔거리는데 다행히 그의 시선은 아까처럼 스마트폰에 고정되어 있었다.
휴... 이 사내는 나한테 관심이 일도 없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아까부터 미칠듯 뛰던 
내 심장이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는게 느껴졌다.
곁눈으로 또 그를 힐끔 쳐다봤다.
방금 집에서 씻고 나온 듯, 향긋한 비누 냄새가 내 코를 찔렀다.
상의는 어깨 근육이 다 드러나 보이는 민소매 티로 갈아 입었는데
겨드랑이 사이 무성하게 자란 털이 야성적으로 느껴졌다.
운동하는 사람 치고는 햇볕을 싫어하는지 제법 새하얀 피부. 불곰보다는 북극곰 느낌이다.
그가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솥뚜껑같은 손으로 라면을 한움큼 젓가락으로 집어드는데
먹는 모습마저 시원스러웠다.
"괜찮으시면 김밥이랑 같이 드세요. 저는 배가 불러서..."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반 정도 남은 김밥을 그의 앞에 밀어 놓았다.
깜짝 놀란 듯, 그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제서야 제대로 시선을 마주치는 우리 둘 사이에
묘한 긴장감 같은 것이 흐르기 시작했다.
  
"어... 그... 그래도 될까요? 그럼 잘 먹겠습니다~"
난감한 듯한 표정으로 잠시 주저하던 그가 이내 씨익 웃으면서 김밥 두개를 젓가락으로 집어 들었다.
비록 몇 초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에게는 잠시 시간이 정지된 것 같았던 순간이었다.
가까이서 본 그의 얼굴때문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그의 우수에 가득찬 눈빛...
나중에 지인한테 이 얘기를 했다가 정신 좀 차리라고 등짝 스매싱을 당하긴 했었지만 나에겐 영화배우
러셀 크로우의 눈빛이 생각났다. 게다가 덩치큰 사람 특유의 저음의 목소리까지 매력적이었다.
내가 현실에 있으면 좋겠다라고 주변에 노래 부르고 다녔던 바로 그 사내가
지금 내 옆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저 얼마전에 이사왔어요.... 405호로..."
그가 묻지도 않았는데 내 입에서 지어낸 말이 술술 나오기 시작했다.
"아 그러세요? 저는 육층에 삽니다..."
뒤에 뭔가를 더 말해야 하는데 내 의도를 간파한건지 아니면 건성으로 대답하느라 그러는건지
그는 그냥 6층에 산다고만 말했다. 신세계란 영화에서 최민식이 했던 대사가 떠올랐다.
제길... 이러면 나가린데...
뭔가 더 얘기하고 싶은데 의욕을 상실해 버렸다. 
그사이 컵라면과 김밥을 모두 먹어치운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밥 잘 먹었습니다. 혹시 담에 만나면 저도 김밥 한줄 사 드릴게요~"
"그... 그러면 좋죠..."
그가 가볍게 목례를 꾸벅 하고는 미련없이 편의점 문을 나섰다.
그가 떠나가는 모습을 보는데 갑자기 마음 한구석이 아려오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내가 그저 그런 사람...
그날 하루 자신을 스쳐 지나갔던 수많은 사람 중 하나에 불과하겠지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에게는... 그가 어느새 내 전부가, 아니 내 전부보다 더 소중한 존재가 되어 버린 것 같은데...
그의 얼굴을 한번 더 볼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렇게 일방적이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내 마음을 빼앗고 내 심장을 휘젓고 간 그...
신이 있다면 따져 묻고 싶었다.
왜 이렇게 나는 항상 주기만 해야 하냐고... 
나도 가끔은... 받고 싶다고...
그와 헤어지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불과 20분 정도로 그다지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나에게는 천길 만길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2.
그와의 어색한 만남이 있은지 한달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었다.
그에 대한 내 감정은 어느 정도 사그라 들었지만 어디까지나 이성적인 부분에 불과했다.
무의식이 나를 지배하는 시간... 그러니까 꿈을 꿀때면 그가 자주 등장하곤 했으니까.
비록 그의 맨 살을 본 적이 없는 나였지만
꿈속에서 그는 늘 벌거벗고 등장했다.
내 무의식속에서 내가 즐겨 보곤 했던 덩치큰 근육질 사내들의 사진과 동영상이 투영해낸 모습이었겠지만
꿈속에서라도 그를 만날 수 있다는게 나에겐 너무나 큰 위안이었다.
현실에선 불과 몇마디 나누지 못한 우리였지만
꿈속에서만큼은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며 서로를 가늠하고 있었으니까.
그와 비록 몸을 섞는 판타지까지 가보지는 못했지만 벌거벗은 그의 몸을 애무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흥분해버렸고 그럴때마다 잠에서 깨어나면서 내 정액으로 축축해진 팬티를 갈아입어야 했다.
그럴때면 나는 퇴근할때마다 일부러 한 정거장 앞인 오리역에서 내려 그가 살고 있는 오피스텔 1층
편의점에 들러 컵라면을 먹곤 했다. 혹시라도 그가 나타날까봐, 그가 김밥 한줄 사준다는 약속을 믿으며.
편의점 간이 테이블에서 라면 먹는데 30분 이상 머무르는게 이상해 보일게 뻔하기에 때로는 오피스텔 앞
벤치에 앉아 한시간을 기다리기도 했었다.
이런 내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모습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사실, 그 즈음 나를 비롯한 세상사람들의 관심거리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유투브나 SNS 채널을 통해 삽시간에 퍼져나가고 있는 지구 멸망설이었다.
미국의 정부 고위 관계자에게 들었다는 등, 유럽연합 대표 가족들이 소스라는 등 출처는 다양했지만
그 내용은 한결같이 한달이내에 지구가 멸망하리라는 소문이었다.
현재 지구를 향해 지름 30km 정도의 소행성이 날아오고 있는데 현재의 과학 기술과 무기 체계로
이 행성을 마치 영화 딥임팩트나 아마겟돈처럼 폭발시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에
지구상 모든 생물은 즉사하거나 바닷물에 빠져 죽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즉 이제 30일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는데 이 시간을 미친듯 즐기거나 아니면 생존을 위해 대비하는
시간으로 삼으라는게 충고 아닌 충고였다.
나 역시 처음에는 이런 루머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주식을 일단 팔고자 하는 사람들의 심리때문에
주식 시장은 연일 폭락하고 환율도 요동치는 등의 외부 환경이 급속도로 악화되자 평온하던 사람들의
심리도 서서히 공포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결국 이를 보다 못한 정부에서는 계엄령을 선포했고 경찰과 군인들이 곳곳에 깔려 사람들을 통제하고 
범죄를 예방한다는 구실로 밤 12시 통금시간까지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그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오늘 낮 12시
대통령의 특별 담화문 발표가 예정되어 있으니 모든 국민은 TV나 스마트폰을 통해 이를 시청하라는 뉴스가
오전 9시부터 모든 언론과 미디어 매체를 통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이를 두고 전문가들은 70% 정도가 마음의 준비를 하고 마지막을 맞이하라는 쪽이라고 예상했고
나머지 30% 정도의 사람들은 소행성이 다행히 지구를 비껴갔으니 일상으로 돌아가라는 소식을 전할거라는
희망섞인 추측을 내놓았다.
지금까지 늘 그래왔듯이 판교에 위치한 회사에 출근한 후 12시까지 손에 잡히지도 않는 일을 하는둥 마는둥 하다가
12시 정각이 되자 약속이나 한 듯 사람들이 TV앞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침통한 표정의 대통령이 화면에 등장하자 사람들은 이미 발표 내용을 짐작한 듯 숨죽이고 방송 내용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존경하는 국민여러분. 저는 오늘 대한민국 대통령이 아닌 그저 한 인간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그 동안 전세계 지도자들이 비밀리에 모여 국경을 초월하는 협력을 통해 소행성이 지구에 닿기 전
파괴하려고 여러가지 방법을 시도했습니다만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는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이제 저나 여러분들에게 남은 시간은 딱 사흘. 72시간입니다. 
지금까지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맡은 바 책무를 수행해오신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며 
이제라도 여러분들의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들 곁으로 돌아가셔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의미있게
마무리하시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이제 경찰과 군 역시 해산하게 됩니다. 그들 역시 누군가의 가장이자 누군가의 남편과 아내
또 누군가의 자식이니까요. 부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폭력과 증오, 범죄로 낭비하지 마시고
의미있게 보내시길 부탁드립니다. 저 역시 현 시간부로 대통령직을 내려놓고 그저 한 가정의
가장으로 돌아가 남은 시간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저는 대한민국 국민을 믿습니다.
마지막까지... 인간의 자긍심과 존엄, 그리고 명예를 지키는 멋진 국민들로 남아 주실것을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대통령의 충격적 담화문이 발표된 후 잠시동안 세상이 멈춘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침묵의 순간이 이어진다.
그러다가 하나 둘 자리를 뜨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나오더니 마치 썰물 빠지듯...
사람들이 우르르 건물 밖으로 나가기 시작한다. 나 역시 간단한 짐만 챙긴 채 그 행렬에 섞여 회사를 나온다.
처음에는 말 그대로 잘 실감이 나지 않았다. 12시 치곤 길가에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점만 빼면
여느 점심때 판교의 모습과 별반 차이 없기 때문에.
스마트폰으로는 계속해서 실시간 알람이 울리기 시작한다.
일단 대중교통은 오늘까지는 정상적으로 운행이 될것이나 내일부터는 그렇지 않을 거라는 소식과,
시민여러분들의 안전을 위해 가급적 집 밖으로 나오지 말아 달라는 부탁 아닌 부탁까지.
그나마 오늘이 내 인생에서 타보는 마지막 지하철이 될거라는 생각에 발걸음을 서두르게 된다.
나와 같은 심정의 사람들이 많은지 지하철 안은 사람들로 빼곡하다.
다들 스마트폰을 손에 쥔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글쎄... 3일 후면 지구가 멸망한다는데 그것 외에
더 궁금해할 소식이 있나?
갑자기 카톡 소리가 들려 확인해 본다.
내가 게이임을 깨닫고 난후 처음으로 만났었고 아직까지도 가끔 서로 안부를 주고받는 박정우란 동갑 친구이다.
[와... 시벌... 이거 실화냐? 진짜 3일후면 엔드 게임인거야?]
[그렇다네... 대통령까지 나와서 얘기한거 보면...]
[난 그때 자느라 방송 못봤는데 갑자기 카톡 소리가 쏟아져서 깼거든~]
[흐흐... 어젯밤에 또 어떤 놈을 잡수셨길래?]
[ㅋㅋ 내 취향 알잖아? 무조건 나보다 어린 놈~]
[그런 취향의 놈이 난 왜 건드렸대?]
[넌 뭐랄까... 그때 너무 초짜티가 나서 걱정되서 그런거였지. 다른 놈한테 험한 꼴 당할까봐]
[오... 그렇게 사려 깊은줄 몰랐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만날까 우리?]
[미쳤냐? 이시점에 내가 널 왜 만나? 72시간 밖에 없다는데 식되는 사람 만나기도 빠듯하구먼!]
그의 톡에 나는 머리를 한방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말 나에게, 아니 지구상 모든 인간에게 72시간 밖에 주어지지 않는다면, 적어도 그 순간순간만큼은
내가 간절히 원했던것, 해보고 싶었던 것, 만나고 싶었던 사람을 만나는게 이제 곧 한줌의 먼지로 사라질
나라는 존재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가 아닌가싶다.
[고맙네. 덕분에 내가 뭘 하면서 종말을 맞이해야 할지 분명하게 알게 됬어]
[ㅋㅋ 그래. 어차피 이 상황에서 새로운 사람 만나는건 리스크가 크니 지금껏 만나본 놈들중 탑 텐만 추려서
일단 5시간씩만 같이 있어보려고]
[그러면 50시간은 뭐할지 정해졌네? 나머지 22시간은 뭐할려고?]
[뭐하긴, 그 중에서 가장 통했던 놈이랑 다시 만나서 둘이 같이 손잡고 종말을 맞이하는거지]
[나름... 나쁘진 않은 계획이네. 잘 되길 바라마]
[ㅋㅋ 너도 멋진 사람 만나면 톡 보내줘]
손에 쥐고 있던 스마트폰을 주머니속에 넣고 잠시 기다려본다.
눈을 감았을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얼굴... 한달전 내 마음을 송두리째 앗아간 그 사내.
그 사내가 일반이건 게이이건 중요치 않아진다.
내가 그에게 내 솔직한 감정을,  내 진심을 전달하는게 중요하기 때문에.
오리역에서 내린 나는 한달전 그날처럼 미친듯 달려 지상으로 나간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 중 이제 일분일초가 아깝기 때문이다.
그가 지금 이시간에 집에 있으리란 보장도 없고 그가 몇호에 사는지도 모르지만
왠지 오늘 나는 그를 만날 수 있으리란 확신이 든다.
내 인생에서 이렇게 무언가에 대해 확인이 든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그가 사는 오피스텔 현관에 도착한 나.
다행이 지금은 출입문이 열려 있다.
엘리베이터에 도착해 6층을 누른 후 잠시 숨을 골라 본다.
엘리베이터 벽에 비친 내 모습을 한번 점검해 본다.
살짝 이마를 가리는 헤어 스타일. 지적으로 보이는 안경. IT업계 종사자인 티가 날 정도로
자유분방한 패션 스타일까지.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데 하면서 나 자신에게 용기를 불어 넣어 준다.
마침내 6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출입문이 열린다.
심호흡을 크게 한 후 대로변 쪽의 집들부터 훑어 보기로 한다.
내 전략은 심플하다. 문마다 벨을 누르고 상대편 목소리를 듣고 그사람인지 확인해보기.
처음 세 집은 벨을 아무리 눌러도 대답이 없었고 
네번째와 다섯번째 집에서는 여자의 음성이 들렸다.
이제 여섯번째 집앞에 선 나.
벨을 누르고 잠시 기다리자 누구시죠라는 남자의 음성이 들린다.
온몸에 소름이 돋기 시작한다. 내가 기억하는 그 사내의 목소리가 틀림없었기 때문에...
"저... 혹시 기억나실지 모르겠는데 한달 전 쯤에 편의점에서 뵜었습니다. 405호 사는 주민요..."
"......"
그의 대답이 없다. 아무래도 기억이 나지 않는 모양이다. 
허긴, 벌써 한달 전 일이니까라고 나름 위안을 해본다.
사실 나란 존재가 그당시 그에게 특별한 인상을 심어 준게 아니라는게 팩트에 더 가깝겠지만.
"그때 약속하셨던 김밥... 오늘 얻어먹고 싶습니다"
그제서야 삐리릭 전자음 소리를 내며 열리는 현관문.
그리고 현관문 뒤에 짧은 반바지와 흰색 조끼러닝 차림의 퉁퉁한 근육질 사내가 모습을 드러낸다.
"아... 이제 기억나네요. 그런데... 혹시 뉴스 못 들으셨습니까?"
"뉴스... 들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지금 찾아온 거구요..."
그의 얼굴에 호기심이라는 표정 하나가 잠시 머물렀다 스쳐 지나간다. 
"제가 이해가 좀 안되서요.... 지금 이 시점에 김밥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사실 김밥이 중요한건 아닙니다. 저에게 중요한 건... 사실 그쪽이거든요."
헉... 내뱉고야 말았다. 물론 내 마음의 채 10%도 안되는 표현이지만 어쨌든 막상 뱉고나니 
이상하게 떨림도 멈추고 혼란했던 머리속도 말끔하게 정리가 되는 듯하다.
내 고백 아닌 고백을 들은 그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내 얼굴을 쳐다보며 말하기 시작한다.
"그... 그게 무슨 뜻이죠? 제가 그쪽한테 중요하다뇨? 우리는 서로 잘 알지도 모르는 사이인데..."   
"제가 그쪽을... 좋아합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좋아합니다..."
그의 두 눈이 휘둥그래진다.    
 
"뭐... 뭐요? 잘 알지도 못하는 나를 그쪽이 좋아한다니... 이거 혹시... 동성애 뭐 그런 겁니까?"
동성애란 단어 하나로 몇가지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는 완전히 일반이고, 그래서 이런 상황이 처음일테고
외모는 분명 이삼십대로 보이는데 동성애라는 조금 진부한 표현을 쓰는 걸 보면 보수적 스타일이라는 사실.
"뭐... 남자가 남자 좋아하니 사전적으론 동성애... 맞죠. 하지만..."
"저 더이상 할 말 없습니다. 그만 가 주시죠~"
쌀쌀함마저 느껴지는 단호한 말투로 내 말을 끊고 들어오는 그.
하지만 이 정도에 쉽게 물러설 나도 아니다. 
"남자라는거 빼고... 그냥 사람이 사람 좋아한다라고 생각해 줄 순 없나요? 고작 삼일 남았는데 여길 찾아올 만큼?"
내 말에 그가 곤혹스러운 듯 얼굴을 찌푸린다. 
"뭐... 괜찮습니다. 이제 70시간 남짓 남았는데 저한테는 엄청 중요한 일 하나를 어쨌든 마무리한 셈이니까요."
내가 한발 물러서자 그가 한결 부드러워진 말투로 나에게 대답한다.
"제 입장도 생각해 주세요... 저 역시 남은 시간 의미있게 보내고 싶은데... 지금 이 상황은 정말 상상도 못했거든요~"
"그렇겠죠... 저에게 남은 시간이 소중한 만큼 그쪽에게 남은 시간도 소중하니까... 저 때문에 망치면 안되죠..."
"이해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남자가 저에게 고백할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그가 미안한 표정으로 굵은 근육질 팔을 들어올려 머리를 긁적이며 웃는다. 
우뚝 솟은 굵은 이두근,  시커먼 털로 무성한 겨드랑이에 조끼러닝을 뚫고 나올듯 툭 튀어나온 유두 자국까지...
저 섹시한 모습을 이제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 한켠이 너무 아려온다.
"괜찮습니다. 그나마 속시원히 고백한걸로 만족해야죠. 첫눈에 반하는 사랑이 있다는 말... 그쪽 통해서 실감했거든요"
"......"
"그럼... 남은 시간 의미있게 보내세요. 부모님이건 친구건. 사랑하는 사람 곁에 있으면 마지막이 덜 두렵지 않을까요?"
"......"
내 말에 깊은 생각에 잠긴 듯 그가 눈을 감은채 한 손으로 이마를 짚는다.
"저는 백현수라고 합니다. 그쪽 이름이라도 알고 떠나고 싶네요"
"저는 강호웅이라고 합니다. 그럼... 조심히 돌아가세요~"
그가 솥뚜껑같은 손을 먼저 내밀며 악수를 청한다. 내민 그의 손을 살며시 맞잡아본다.
그의 따스한 체온이 전해지며 내 마음도 조금씩 따스해진다.
그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작별인사를 대신한 후 문을 닫는다. 다시 들리는 삐리릭 전자음 소리. 
미련없이 돌아서서 엘리베이터를 향해 걷기 시작한다.
1층에 내려가 있던 엘리베이터가 다시 올라오기 시작한다.
문이 열리고 나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간다.
1층이라고 적힌 버튼을 살며시 누른다.
바로 그때였다. 기적이라는 것이 나에게도 일어난 순간이.  
지진이라도 난 듯, 쿵쿵거리는 바닥 진동이 몇차례 느껴진 후 여전히 조끼러닝에 짧은 반바지 차림의 그가
거친 숨을 내쉬며 나타나 막 닫히려는 엘리베이터 문을 두 손으로 잡으며 말한다.
"헉헉... 저기.... 김밥 아직 안드셨잖아요... 제가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놈이라... 저한테 시간을 좀 주실래요?"
(하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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