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바다... 그리고 두 사내 (7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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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내 충격적인 고백 이후 철호 형은 말없이 운전만 하고 있다.

내 패는 이미 형에게 다 보여줬고 이제 그의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는 나...

그가 갑자기 차를 세운다. 창밖을 보니 시외버스 터미널 앞이다.

더이상 나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그저 앞만 바라보며 운전하던 철호 형.

그가 결심한 듯 마침내 입을 연다.

과연 철호 형이 어떤 처분을 내릴지...


"지웅아... 원래 너랑 같이 서울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왠지 그러면 안 될 것 같다..."

"괜찮아요 형... 올때도 저 혼자 씩씩하게 왔는데요 뭘..."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다.

억지로 그를 향해 웃어 보이고는 백팩을 챙겨 차에서 내린다.


"저기... 지웅아..."


그가 무슨 말이든 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애잔하다.

그의 처분이 내려진 마당에 나는 쿨하게 그를 떠나보내기로 결심한다.


"마침 차 시간이 다되서 저 먼저 갈게요. 운전 조심하세요 철호형~"


나는 쿨하니까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를 챙겨주는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그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버스 터미널로 뛰어간다.

이런 내 모습을 형이 끝까지 지켜보고 있다가 나에게 달려 올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런 일말의 가능성을 기대하는 내 바램을 철저히 비웃어 주고 싶었던 걸까...

굉음 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니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가는 형의 레인지로버 뒷꽁무니가 보인다.


하아... 며칠 전 형이 썼던 표현이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른다.

똥 밟았네...

지금 형은 똥 밟은 심정으로 나에게서 멀어져 가고 있겠지?

결혼까지 했었던 일반에게 고백한 대가 치고는 그리 나쁘지 않다고 스스로를 위로해본다.

적어도 뺨싸대기를 맞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으니까...

내 눈앞에서 꺼져 이 호모새끼야 같은 말을 들은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어떤 아픔들은 실제 겪지 않았음에도 마치 겪은 것처럼 생생할 때도 있나보다.

지금 내 가슴이 마치 날카로운 칼에 베인 듯, 저릿하게 아려오는 것을 보면 말이다.



16.

 
아마도 타임머신은 앞으로 80년 안에는 개발되지 않은게 확실하다.

만약 미래에 타임머신이 있다면 나는 주저없이 철호형이 나에게 자신을 좋아하냐고 묻는 순간으로 돌아갔을거다.

그리고 형이 원하는 대답을 정확히 들려 주었을테지. 형 좋아한다고, 형이랑 같이 있는게 좋다고.

하지만 내 현실은 전혀 달라진게 없다.  이게 바로 타임머신이 미래에도 없다는 증거이다.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 맨 뒷자리에서 앉은 나.


차창에 머리를 기댄 채 아까 상황을 계속해서 곱씹어 보고 있다.

무한반복 리와인드 되는 영상속에서 특히 괴로운 장면이 있다.

내가 형 사랑한다고 말했을때... 바로 그 때 형이 지은 표정이다.

망치로 맞은 듯, 영혼이 빠져 나간 멍한 표정.

내 입에서 그런 얘길 듣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표정...

그 표정을 본 뒤 나는 형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사실 안봐도 비디오다.

처음엔 실감이 안났겠지만 차츰 호모한테 낚였다는 혐오감이 그의 머릿속을 지배했을 터...

그런 혐오감으로 가득찬 얼굴을 보지 않은게 차라리 다행인지도 모른다.

형의 그런 반응이 당연하다고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억울한 생각도 든다.

남자간에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또 그런 말을 듣는게 그렇게도 충격받을 일인가?

만난 시간은 짧았지만 그 짧은 시간 내가 그에게 보여준 행동들에서 조금의 힌트도 못 얻었단 말인가?

내 진심이... 내 사랑이 그렇게 하찮고 가볍게 취급받았단 말인가?


"시발... 진짜 개.... 조ㅊ 같네..."


비참하다...

일반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고백하면 어떻게 된다는 걸 이쪽 사이트 후기를 통해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한 인간의 자존감이 이정도로 비참하고 초라하게 나락으로 떨어질줄이야...


차창 밖이 흐릿하게 변한다.

이런 내 맘을 아는지 하늘에선 비가 쏟아지고

내 눈에선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17.

 
버스가 동서울 터미널에 도착한 시간은 한밤중.

하늘에선 여전히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다.

비록 내 눈물은 말라 버렸지만 상처받은 내 영혼을 위로받기 위해 택시를 타고 종로로 간다.

예전부터 종종 들렀던 게이바에 앉아 킵해두었던 조니워커 블루라벨을 꺼내 달라고 한다.

남아 있던 술을 다 마시는 동안 내 옆자리에 서너명의 남자들이 접근했다.

한명은 몸은 좋은데 외모가 내 스타일이 아니라서

다른 한명은 외모는 마음에 드는데 몸이 내 스타일이 아니라서

또다른 한명은 둘다 내 스타일이 아니라서...

그러다가 또다시 현타가 온다.

나는 이곳에서 조차 철호형 같은 사람을 찾고 있구나... 나 아직 정신 못 차렸구나...

조니워커 맛이 점점 쓰라리게 느껴질 때 즈음...

그나마 내가 선호하는 이미지에 가까운 마지막 덩치큰 남자가 내 옆자리에 앉는다.

아니... 철호형 이미지와 그나마 비슷한 거겠지...

 
"술 잘 드시나 봐요?"

"필요한 때만요..."

바텐더가 새로 잔 하나를 내주었고 나는 그 잔에 술을 따라 옆자리 덩치남에게 건넨다.


"비오는 밤 낭만을 위해~"


그가 어줍잖은 말과 함께 잔을 부딪혀 온다.

낭만이라고? 나도 모르게 새어나오는 헛웃음.


"왜요? 비오면 낭만적이지 않나요? 저는 비오는날 좋아하는데~ 특히 비오는날 섹스가 최고죠~"

"저랑 그거 하고 싶으세요?"

"그건 그쪽 하기 달려있죠~ 근데 보통은 여기 오면 다 그거 생각하고 오는거 아닌가?"

"제가 그렇게 굶주린 놈처럼 보입니까?"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딱히 이 덩치남에게 잘못이 있는건 아니지만

그가 내 분노 유발 버튼을 누른 건 확실하다.


"누가 댁이 그렇대요?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거지..."


씩씩거리며 남아 있던 술을 입에 털어 넣을때 덩치남이 결정타를 날린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까칠해요? 혹시 바보처럼 실연당하고 나한테 화풀이하는 거에요?"

"쾅!"


내가 들고 있던 술잔이 깨질 정도로 힘을 실어 강하게 테이블에 내려 놓는다.

그 소리에 깜짝 놀란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된다.

이런 내 모습에 위협을 느꼈던지 덩치남이 그만 진정하라는 듯 두 손을 올린채 자리를 떠난다.


"저기... 손님 손에 피 나요~"


바텐더가 응급상자를 가져와 내 손에 박힌 유리조각을 빼고 거즈를 붙힌후 붕대를 감아준다.


"죄송합니다. 오늘 제가 기분이 좀 그래서..."

"괜찮아요~ 이일 하다보면 별의별 손님 다 만나는데 손님 정도면 양호한 편이에요~"


내 손을 부드럽게 잡은채 그가 웃는다.

그를 따라 나도 모르게 피식 하고 웃게 된다.
 
그의 위로 같지 않은 위로조차도 나에게 위로가 되는 순간이다.    


18.


오늘 촬영으로 받은 돈봉투를 바텐더에게 건네 주고 집으로 가는 택시에 오른 나.

종로에서 송파까지 가는 동안 한숨 푹 자려고 했지만 그조차도 쉽지 않다.

술기운 때문이었을거야. 평소 나 답지 않게 돌발적인 행동들을 계속 하는걸 보면...

그런데 과연 나다운 모습이 뭘까라는 고민에 휩싸인다.

왠만하면 참고, 고민하고 또 조심하면서 사는게 나다운 걸까?

나는 평생 그렇게 살아야 할 운명인가?

그래... 그럴지도 모른다.

오늘 평소의 나 답지 않게 내 감정에 솔직한 말과 행동들을 할때마다

이렇게 혹독한 댓가를 치루어야 한다면...

그냥 지금껏 살아온 대로 사는게 나을지도...

이런 저런 상념에 빠져 있다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한 택시.

백팩을 우산 대신 머리위에 올리고 현관으로 빠르게 걸어가는 내 눈에 익숙한 형체가 보인다.

산을 올려놓은 듯 떡 벌어진 어깨, 곰처럼 두툼하고 우람한 몸집.

그리고 비에 흠쩍 젖어 있지만 아까 보았던 흰색 티셔츠를 그대로 입고 있는 남자...


"처... 철호형!"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서 있는 그가 사내답게 잘 생긴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이게 꿈인가? 내가 지금 술에 취해 헛것을 보고 있는가?

갑자기 그가 나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온다.

내 바로 앞에 멈춰 선 철호형.

멍하니 서 있는 나를 향해 두 팔을 벌린 그.

잠시 후 내 가슴 위로 그의 두툼한 근육질 가슴이 겹쳐진다.

쿵쾅거리는 심장박동 소리... 그의 것인지 내 것인지 모호해진다.

내 등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그의 두 팔...

그의 체온이 고스란히 나에게 전해진다.

그제서야 이게 꿈이 아니라 현실임을 깨닫게 된 나...

바로 그때.... 기적이라는 것이 일어난다.

그의 입에서 절대로 들어 볼 수 없으리라 생각한 말.


"지웅아... 형이 많이 생각해 봤는데... 형도... 형도  너 사랑하는가보다..."


한 손에 들려 있던 백팩이 툭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진다.


(다음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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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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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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