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바다... 그리고 두 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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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남자를 처음 봤을때, 연도별 스포츠 신문 헤드라인을 도배했던 제목들이 떠올랐다.


[외모까지 갖춘 아이돌급 장사 탄생] 2000년

[한국 씨름계의 신성 박철호, 체중 늘려 도전한 한라급에서도 정상 차지] 2002년

[한국판 미녀와 야수 탄생! 한라장사 박철호와 탑 여배우 백수지 비밀 결혼] 2004년

[박철호 장사! 백두급 도전 실패후 전격 은퇴 발표! 아내 백수지 내조에만 전념키로...] 2005년

[연예계 대표 잉꼬부부 백수지와 전 한라장사 박철호! 왜 2세 계획은 없는지?] 2015년

[영화배우 백수지. 비극적 자살이유는 남편의 바람기 때문??] 2017년






울진 버스터미널에서 남쪽으로 10km 정도 떨어진 덕산해변가.

소나무가 우거진 모래사장 아래 벤치에 어깨가 떡 벌어진 덩치큰 사내가 앉아 있다.

초점없는 흐릿한 눈으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사내...


근처 편의점에서 원 플러스 원에 파는 시원한 캔 커피를 들고 해변을 거닐던 나는

뒷모습만 봐도 내 이상형에 가까울게 분명한 그 사내를 발견한 후 어깨에 걸린

카메라를 고쳐잡고 그의 뒷모습을 한 컷 찍은 후 백팩에 카메라를 집어 넣는다.

그리고 마치 자석의 반대극에 이끌리듯 그 사내가 앉아 있는 벤치로 다가가

약간의 거리를 두고 나란히 앉는다.


옆자리에 내가 앉은 것도 모르는 듯. 그 사내는 그저 먼 바다만 응시하고 있을 뿐.

일부러 탁 소리를 내며 한 손에 들고 있던 캔커피 뚜껑을 따자 그제서야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 그 사내의 얼굴을 본 나는 한눈에 그 사내가 그 사람인 것을 알아본다.

멋대로 자란 수염투성이 얼굴에 전성기때보다 훨씬 푸근해진 인상이었지만

내가 그를 못알아본다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내색하지는 않는다. 그가 관심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아니라 관심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은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캔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나는 하나 남은 캔커피를 그 사람 옆자리에 조심스레 놓는다.


"날씨가 많이 덥죠? 마침 편의점에서 원플러스원으로 산거라..."


그 사내는 별 말 없이 내가 건넨 캔커피를 들고 뚜껑을 딴 후 한모금 마신다.


나는 그 사내가 옆에 있는게 전혀 신경쓰이지 않는 듯 무심하게 백팩에서 아이팟을 꺼내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듣기 시작한다.


내 음악소리가 새어 나갔던 걸까? 그 사내가 몸을 돌려 나를 향한다..


"뭐 듣는지 물어봐도 되나?"


음악을 듣는 척 했지만 내 온 신경이 그를 향해 곤두서 있었기에 그의 관심이 반갑다.

하지만 나는 자연스럽게 잘 못 들은 척, 이어폰을 귀에서 뺀 후 그를 향해 말했다.


"방금 뭐라고 하셨죠?"


넋을 잃은채 무표정하게 있던 그의 얼굴에 표정이란게 생긴다. 약간의 호기심을 담은...


"음악 뭐 듣는지 물어본 겁니다."

"4 non blondes 의 what's up 인데요... 혹시 이 노래..."

"희미하게 들려서 긴가민가 했는데 맞았네...  그 노래... 젊었을때 참 좋아했었는데..."


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지어진다.  

나는 이어폰 줄을 아이팟에 말아서 그의 손 위에 올려 놓는다.


"이 노래 좋아하시는 분 만나니 반갑네요. 저는 언제든 다시 들을 수 있으니까..."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귀에 이어폰을 꽂으며 그 사내는 눈을 감는다.

나 역시도 이어폰에서 희미하게 새어나오는 음악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다.


눈을 지그시 감은채 음악에 몰두한 그 사내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 본다.

아무리 살이 쪄도 기본적으로 사내답게 잘 생긴 이목구비는 가려지지 않는다.

백킬로그램은 훌쩍 넘어 보이는 굵은 몸에는 여전히 덩어리 큰 근육들이

넓은 가슴과 통나무같은 팔에 자리잡고 거대한 벌크를 뽐내고 있다.  

나의 학창시절 우상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면 그는 깜짝 놀라겠지?



2.


지금은 프리랜서 사진작가로 일하지만 학창시절 나는 씨름 선수였다.

중3때  175cm에 100kg 에 육박했기에 왠만하면 힘으로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었고 철없던 그시절, 나는 그저 내가 씨름 천재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비슷한 덩치에 기술까지 뛰어난 선수들과 상대하며

내가 씨름에 재능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고 고3때 진로를 바꿔 대학교 사진학과에

간신히 입학하게 되었다.

그나마 내가 사진을 잘 찍게 된 이유가 바로 박철호 그 사람 때문이었다.

씨름선수였기에 씨름장에 선배들 경기를 응원하러 갈 때가 많았고

아이돌처럼 잘 생긴 박철호 선수를 같은 씨름 선수로서 동경하는게

하나도 이상할 게 없는 일이었다.

나중에 체중을 불려 백두급에 도전했을때 많은 여성 팬들이 아저씨처럼 변한

그의 외모에 실망하고 떨어져 나갔지만 오히려 나는 나처럼 덩치가 커지고

얼굴도 퉁퉁해진 그의 모습에 더 빠져들었다.

그의 백두급 선수로서 마지막 경기날...

경기에서 지고 모래판에 무릎을 꿇은채 미동도 하지 않고 눈을 감은채

조용히 흐느끼고 있던 그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으며 나도 따라 울었다.

내 우상은 그렇게 모래판에서 비참하게 떠나갔고 더이상 그를 모래판에서

볼 수 없었던 나는, 그동안 찍어 놓은 그의 사진들을 모두 인화해서

내 방안에 펼쳐 두고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의 벌거벗은 몸을 바라보는데 말로는 표현이 안되는 야릇한 기분에

천천히 잠식당하던 나는 무의식중에 자위를 시작했고 그 어느때보다

격정적인 쾌감을 느끼며 내 몸안에 쌓여있던 것들을 뿜어 내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내가 이쪽이라는 걸 처음으로 경험하게 된 순간이

바로 이때였던 것 같다.


3.


그 사내처럼 나도 옛 추억에 흠뻑 빠져 들었다가 잠시 눈을 떠 그를 바라 본다.

그는 눈을 감은 채 여전히 음악에 푹 빠져 있다.

노래는 클라이막스를 지나 후반부로 접어들기 시작한다.

바로 그때,  그 사내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한다.

그가 입술을 꽉 깨문다. 눈물을 쏟지 않으려고 버티는 그의 모습이 안쓰럽다.

나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그의 감정이 가라앉기를 기다려준다.

음악은 벌써 끝이 났고 한참 동안 감정과 씨름하던 그가 서서히 눈을 뜬다.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는 내가 고마운 듯,

퉁명하기만 하던 그의 목소리가 처음보다 많이 누그러져 있다.


"좋은 노래 잘 들었어요... 덕분에... 옛날 생각 많이 나네..."


그가 건넨 아이팟을 받아 들어 백팩에 다시 넣는다.

잠시 고민에 빠진다. 그에게 말을 계속 붙여야 할지, 아니면....

나는 다른 길을 선택하기로 한다.


"좋은 노래 알아봐 주시는 분 만나서 좋았습니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세요..."


나는 미련없이 벤치에서 일어선다. 백팩을 등에 메고 발걸음을 떼려는 순간

그의 부드러운 음성이 내 발길을 붙잡는다.


"혹시 시간 괜찮으면 나랑 술 한잔 할라우?"


4.


해변 근처 작은 선술집으로 자리를 옮긴 그와 나.

이곳 단골인듯, 주인 아주머니는 아무 말 없이 소주 잔 2개와

소주 두병을 그가 앉은 자리 앞에 올려 놓고 간다.

원래 1인용 자리인듯... 그와 나 사이에 놓인 탁자가 무척 좁게 느껴진다.

덕분에 그와 나 사이의 거리도 서로 손만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깝다.

언젠가는... 그와 나 사이의 관계도 지금 이 물리적인 거리 만큼이나

가까워 지는 순간이 오겠지?


"내가 안주를 안먹어서..."


덩치 큰 사람 특유의 저음의 굵은 목소리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든다.


"괜찮습니다. 저도 가끔 깡소주 즐깁니다."


그가 소주를 내 잔과 자기잔에 가득 채운 후 각자의 앞에 놓는다.

그리고 자기 앞에 놓인 잔을 단숨에 들이킨다. 나 역시 아무 말 없이

내 앞에 놓인 잔을 들이킨 후 그의 빈 술잔을 채워준다.

그렇게 몇번 서로의 잔을 채워 주다 보니 순식간에 소주 2병이 바닥났다.


"아주머니.... 여기 소주 두병만 더."


평소와는 좀 다른 모습에 의외라는 듯. 아주머니가 소두 두병을 새로 내오며

시키지도 않았는데 작은 파전 한접시를 구워서 가져온다.
 

"감사합니다. 파전이 참 맛있어 보이네요~"


대답없는 그 대신 내가 아주머니에게 감사의 인사를 한다.


아주머니는 별일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젓고는 주방으로 들어간다.

 
그런 내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그가 말한다.


"그나저나... 그쪽 이름이..."


드디어 나에게 관심이 생겼나보다. 나는 처음으로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한다.


"장지웅이라고 합니다. 나이는 서른 둘이구요."


묻지도 않은 나이까지 밝혔다. 반말과 존대 사이를 왔다갔다하며 서열을

가늠하는 그에게 확신을 심어주고 싶다.


"나보다 한참 동생이네. 말 놓아도 되지?"


질문보다는 통보에 가까운 그의 말투에 내 심장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한다.

처음 만났을때보다는 훨씬 가까워진 우리 사이의 거리 때문이겠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내 모습을 보며 그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역시 말이 많아진 건 아니다.


또다시 서로의 잔을 채워주며 소주 두병을 다 마셔갈 때 즘...


제법 불콰해진 그가 내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하기 시작한다.


"지웅이는 원래 그렇게 말이 없나?"


"......."


내 대답이 없자 그가 처음으로 웃는다.

"허긴... 지금 나한테는 딱 지웅이같은 사람이 필요하지...

아무 말없이 그냥 곁에 있어주는 사람이..."


그 순간이었다.

그의 입에서 나같은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을 듣는 바로 그 순간

나는 그 사내의 포로가 되어버렸다. 한때 우상이자 내 성적 판타지의

대상이었던 그 사내는 이제 완벽하게 내 세상 속으로 들어왔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내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할 것이다.

이 불공정한 게임에서 내가 주도권을 잡을 확율은 얼마나 될까?

아니... 애초에 주도권이라는게 나한테 있기나 할까?


"혹시 지웅이 나 누군지 몰라?"


그의 바리톤 음색의 굵은 목소리에 다시 한번 정신이 번쩍 든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처음과는 많이 달라져 있다.

호기심이 가득한 그의 눈빛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내가 해야할 말들을

신중하게 골랐다. 이런 때는 가식보다는 정직한게 최고의 대응이다.


"저... 씨름 했었습니다.... 고2때까지요..."


내 대답은 하나였지만 그는 여러가지 궁금증을 해결한 모양이다.


"운동 후배네... 어쩐지..."


그가 갑자기 팔을 뻗어서 내 어깨와 이두박근을 지그시 만져본다.


"고2때 그만 둔 것 치곤 아직 몸 좋네..."


그의 갑작스런 스킨쉽에 심장이 멎을 듯 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말한다.


"몸 관리 차원에서 역기는 꾸준히 들고 있습니다. 안그러면..."


"돼지 되는거 순식간이지.... 나처럼..."


그가 다 안다는 듯 호탕하게 웃는다. 나도 그를 따라 웃는다.

흐뭇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보던 그의 시선이 잠시 내 앞섶에 머무른 채 고정되어 있다.

아까 내 몸을 그가 갑자기 만졌을 때부터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 내 앞섶...


일순간 그의 얼굴에 알 수 없는 표정 하나가 스치고 지나간다.

마치 도둑질하다 들킨 아이처럼...

내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한다.


(다음편에 계속됩니다)


<작가의 글>


안녕하세요. 맥스럽입니다.

혹시 저 아시는 분들께서 궁금해 하실까봐...

아직 저 살아 있습니다. 그간 먹고사는 문제에 매진하다보니 글 연재는 못했었지만

꾸준히 다른 분들 소설도 읽어가며 지내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니 거의 2년전에 쓴 글이 마지막이었네요.

사실 글 쓰는게 생각보다 시간과 에너지를 많이 잡아먹는 일이라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그저 부담없이, 여유있을때 쓰면 되지 않을까 하는 심정으로

편하게 다시 시작해보려 합니다. 쉬는동안 감도 많이 떨어졌을테니까요.

그래서 긴 글 보다는 우선 단편으로 이렇게 복귀 신고합니다.

글쓰는 감이 어느정도 돌아오면 기존에 연재 중단된 글들 마무리도 고민해 보겠습니다.

새로 시작하는 이 글도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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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span class="sv_wrap"> <a href="https://ivancity.com/bbs/profile.php?mb_id=goddd11" data-toggle="dropdown" title="dhgwidn 자기소개" target="_blank" rel="nofollow" onclick="return false;"> dhgwidn</a> <ul class="sv dropdown-menu" role="menu"> <li><a님의 댓글

  • <spa…
  • 작성일
오랜만에 돌아오셧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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