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바다... 그리고 두 사내 (4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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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휴게소 뒤편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니 나즈막한 언덕이 나온다.

한두번 와 본게 아닌 듯,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걷는 그의 옆에 내가 나란히 걷고 있다.

마치 한쌍의 연인이 어깨동무를 한 채로 산책하는 모습처럼.

다만 그 연인 둘 모두 덩치가 산만하고 우락부락한 남자라는게 좀 이상하게 보일 순 있겠지.


"여기 경치 좋네요~"


그가 멈춰선 곳에서 주변을 둘러보니 아름답게 펼쳐진 골짜기와 능선들이 내 눈안에 가득 담긴다.

그가 날 바라보며 한번 씨익 웃더니 주머니에서 담배 한개피를 꺼내 입에 문다.

담배를 무느라 살짝 찡그리는 그의 표정에 내 심장 박동이 한번 더 빨라진다.

내 옆에 서 있는 이 사내의 행동 하나하나, 표정 하나하나가 날 미치게 만든다

극도의 인내심을 발휘해 내색을 하지 않고는 있지만, 내 방어막은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다.  


그가 담배연기 한모금을 길게 내뿜으며 말하기 시작한다.


"이게 내 코스야. 그녀를 추모하는 나만의 방식이자 의식이지."


보채지 않고 담담히 그의 다음 얘기를 기다린다.

 
"그녀가 워낙 유명했던 사람이라 사람들이 많은 곳은 일부러 피해 다녔거든. 특히 그녀는 공항을 싫어했어"

"그래서 일부러 자동차 데이트를 많이 하셨나보네요?"

"그래. 우리가 결혼하기 전, 그녀가 바닷바람 쐬고 싶다고 해서 함께 갔던 곳이 울진에서도 좀 떨어진

바로 그 해변이야"

"......"

"지웅이 너랑 내가 처음 만났던 바로 그 벤치에 나란히 앉아서 그녀에게 프로포즈를 했었지"

"벌써 20년 가까이 지난 일이네요..."


내가 날짜를 정확히 알고 있는 것에 놀랐던지 그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진다.


"하긴... 지웅이라면 잘 알수도 있겠네... 내 팬이었다고 하니까... 진짜 팬 맞네... 우리 지웅이..."


나를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의 표정에 나는 또 헷갈리기 시작한다.

지금 그가 짓고 있는 표정은 누군가를 정말 좋아하거나 아끼는 때에만 지을 수 있는 표정인데,

지금 그가 그런 표정으로 나를 바라봐주고 있다.

혹시 내가 정말... 그의 마음속에 조금이라도 자리를 하고 있는건 아닐까?


"매해 결혼 기념일마다 거길 찾아가는게 우리 둘만의 무언의 약속이었지. 같이 갈때도 있었고, 서로 바쁘면

각자 따로 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한번도 그날 다른 곳에 있었던 적은 없었어."


기억의 늪에 빠진 듯, 그가 지그시 눈을 감고 있다. 덤덤하기만 하던 그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리고 있다.


"그만큼 우리에겐 각별하고 소중한 장소였는데... 하필 거기서... 왜 하필 거기서..."

"철호선배..."


미처 말을 잇지 못하는 그의 눈가에 눈물 한줄기가 흐른다.

이성이란게 끼어들 겨를도 없이 나는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등 뒤에서 부드럽게 그의 어깨를 감싸안는다.

그의 넓찍한 등이 내 두툼한 가슴에 맞닿는다.

내 품에 안긴 그의 어깨가 조금씩 들썩이는게 느껴진다.


"괜찮아요 선배... 모든게 다 괜찮아 질 거에요..."


비록 어정쩡한 백허그 자세지만 그가 무너지지 않도록, 나는 그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누가 보면 우리 둘이 사귀는 줄 알겄다...헤헤..."


어느덧 감정을 추스린 그가 멋적게 웃으며 말한다.

정신이 번쩍 든 나는 그의 어깨를 감싼 팔을 풀고 한걸음 떨어진다.


"죄... 죄송해요 선배... 저도 모르게 그냥..."

"아냐~ 오히려 내가 고맙지... 창피한 얘기긴 한데 아까 지웅이 없었으면..."


차마 그 뒷 얘기는 하기가 부끄러웠던지 그가 또다시 담배를 꺼내 입에 문다.


"그나저나 지웅아... 나 부탁이 하나 있는데..."

"뭐든 말씀하세요 선배..."


진지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쳐다보던 그가 담배 연기 한모금을 내 뿜으며 말한다.


"선배라는 호칭... 이제 그만하면 안되겠냐?"


그가 뭘 원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척,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한다.


"그럼... 앞으로 뭐라고 불러요?"


그가 웃으며 담배를 짓이겨 끈 후 내 머리를 가볍게 헝클며 말한다.


"뭐긴 뭐야? 형이라고 불러야지~"


그가 몸을 돌린다. 그리고 우리가 올라왔던 길로 성큼성큼 걸어 내려간다.

지금 내 얼굴에 새겨진 감출 수 없는 행복한 표정.

그가 이런 내 표정을 보지 못하는게 참 다행이다.

 
10.


"오늘 덕분에 안 심심하게 서울 잘 올라왔어!"


두시간 동안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보니 어느덧 우리는 서울에 도착했고
 
내가 사는 오피스텔 건물 앞에 차를 세운 그가 나에게 손을 흔든다.


"아니에요. 철호형 덕분에 제가 편하게 온거죠~ 대신 다음에 제가 밥 한번 살게요~"

"헤헤... 그거 좋지! 약속 꼭 지켜라~"

"네~ 연락 드릴게요 형~"


대답 대신 나를 향해 한쪽 눈을 찡그려 윙크를 날린 그가 선글라스를 끼고 운전대를 잡는다.

잠시 후 우렁찬 엔진 소리와 함께 멀어져 가는 레인지로버.

그가 멀어져 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한다.

어제와 오늘... 그와 함께 했던 순간들을 곱씹어 본다.

행복한 꿈을 꾼다는게 아마도 이런 기분이겠지?


하지만 잠시 후 마치 내 가슴에 구멍이 난 듯, 쓸쓸한 공허함이 물밀듯 밀려온다.

그가 떠나면서 내 심장의 일부를 함께 가져간 모양이다.

이제 그 빈 틈을 매우는게 나에게 남은 숙제이다.

오롯이 나 혼자 풀어 내야만 하는 고통스러운 숙제...

오늘밤은 폴 영의 everytime you go away를 들으며 위로를 구해야겠다.

철호 형은 알기나 할까?

그와 헤어질 때마다 내 일부를 그가 가져간다는 사실을...




집에 들어가 급하게 옷만 갈아 입은 후 지하철을 타고 동서울 터미널로 향한다.

울진으로 가는 시외버스 막차에 간신히 탑승해 맨 뒷자리 좌석에 앉는다.

서둘러 뛰어 오느라 가빠진 호흡을 고르다 보니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온다.

데자뷰가 이런 건가?

어제 울진으로 가는 버스에 서둘러 오르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내가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인지...


갑자기 현타라는 것이 온다.


어제 말고 오늘 울진에 갔더라면

아니, 울진 남쪽 말고 북쪽으로 갔더라면...

그때 그 벤치에 앉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모든게 달라져 있겠지?


고요한 바다 같았던 내 삶에서 맞닥뜨린 박철호라는 거대한 태풍.
 
그 엄청난 위력에 나는 저항 한번 못해보고 속수무책으로 끌려가고 있다.

이미 내 세상은 그를 중심으로 돌기 시작했으니까...


핸드폰에 저장된 철호형의 전화번호를 누르고 싶다.

그의 목소리만이라도 듣고 싶다.
 

헤어진지 얼마 되었다고 벌써부터 그가 보고 싶어 미칠것 같다.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약자가 될 수 밖에 없는 사랑이라는 게임에서

나는 어쩔 수 없는 약자인 것이다.

아이팟을 켜고 귀에 이어폰을 꽂고 플레이 버튼을 누른다.

폴 영이 모든 약자들의 마음을 대신해 외치고 있다.

"everytime you go away, you take a piece of me with you..."
당신이 날 떠날때마다, 당신은 내 일부를 가져가버리네요

(다음편에 게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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