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해바라기의 노래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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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쾅! 쾅!
광포하고 다급한 느낌의 묵직한 진동이 온몸에 느껴졌다.
쾅! 쾅! 쾅! 쾅! 쾅!
다시 한번 연거푸 들려오는 커다란 굉음이 귓속을 파고 들었다.
동시에 어딘가 광란의 파티라도 하고 있는 듯 사람들의 괴기스런 비명소리도 실려 오고 있다.
무거운 눈을 억지로 떴다.
초점이 맞지 않는 몽롱한 눈동자에 비친 하늘은 사각형과 둥근 모양으로 가득 차 있다.
“한유준씨이!!”
쾅! 쾅! 쾅! 쾅!
누군가 한유준이란 사람을 부르고 있다.
한유준. 한유준. 어딘가 상당히 익숙한 이름이다.
그게 누구의 이름이었지? 그래 강지호.
강지호의 전 애인이었다.
강지호의 말에 따르면 바람 피고 어느 순간 잠적했다던 그 젊은 남자.
그런데 누가 그 남자 이름을 부르는 거지? 그 남자가 이 근처에 있나?
여기는 어디지?
병원일 텐데?
하루와 대화하다가 쓰러진 것이 흐릿하나마 기억이 나는데....
쿠쿵...!
한순간 폭음이 귓속을 울렸다.
곧이어 누군가의 발자국이 내는 진동이 느껴졌다.
쾅!
“한유준씨?”
여전히 몽롱한 시야에 한 남자의 모습이 들어왔다. 이목구비가 자세히 보이지는 않는다. 그저 어두운 실루엣의 모습이 내 눈동자에 비칠 뿐이다.
“아니 무슨 약이 이렇게 많아? 도대체 뭘 얼만큼 먹은 거야, 그래?”
또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한유준씨! 정신 들어요?”
“네에....?”
사내의 목소리는 분명 나를 내려다보고 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날더러 한유준인줄 이 사람들은 지금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병실 문 옆에 환자의 이름을 붙여놓고 있을 것 아닌가?
난 이미연이라고. 간암으로 이제 죽어가는 이미연.
“아! 깨어났으면 좀 일어나봐요! 3일 동안이나 전화도 안 받고 연락이 안 된다고 집주인이 얼마나 놀래서 저한테 전화한 줄 알아요?”
그렇게 말하는 사내의 얼굴이 이제야 조금씩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큰 눈에 짙은 눈썹. 주먹코에 또한 두툼한 입술을 한 사내다. 마흔은 넘어 보였다.
“누구...신데요?”
“아! 누구긴 누구겠어요? 이 건물 관리실 직원이지! 내 얼굴 못 알아보겠어요?”
여전히 멍해 보이는 나의 표정을 읽은 그가 옆에 서 있는 남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야 안 되겠다. 경찰하고 119 불러라. 마약 했는지도 몰라.”
“마약....이라뇨?”
그의 말에 팔꿈치를 침대에 대고 힘들게 몸을 일으켰다.
몽롱한 상태에서도 내 입을 통해 튀어나오는 목소리가 낯설다. 깊은 동굴 먼 안쪽에서 들려오는 승냥이의 비명처럼, 가냘픈 여성의 목소리가 아니라 중성적으로 구슬프다.
“누가 무슨 마약을 해요?”
“여기 이 약들 다....”
“요 앞, 샘물약국에서 다 조제 한 건데요?”
커다란 사내가 말하는 사이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래?”
“네...”
“내가 가슴 통증이 좀 있어서 약을 좀 많이.... 어어어!”
아직도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나는 확실히 감이 잡히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나는 그들에게 가슴 통증 때문에 약을 복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가슴에 손을 얹었고 그 순간 패닉에 빠지고 말았다.
가슴이 없어졌다.
양손으로 더듬어 보아도 내 가슴은 납작하다. 의사나 간호사가 내 브레지어를 풀었을 수 있으니 알몸일 수 있으나 손바닥에 느껴지는 가슴은 그냥... 절벽이다.
“한유준씨 괜찮아요?”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사내가 다시 나의 표정을 살폈다.
복잡한 머릿속에서도 이제야 이 남자들이 한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는 듯 했다.
집주인이 연락이 안 된다고 건물 관리인에게 확인하라고 연락한 거라 했다.
경찰하고 119를 부르라는 건 이곳이 병원이 아니라는 사실.
“예...예..괜찮습니다.”
몸을 일으키려는 나의 팔을 사내가 붙잡았다.
“피곤한데다 감기가 안 떨어져서 좀 약을 독하게 지어달라고 해서 먹었더니...”
머릿속에 떠오르는 핑계를 되는대로 내뱉었다.
“아이고. 그런 것도 모르고 참 내!”
두 발로 일어선 나의 팔을 사내가 놓았다.
“병원 가지 않아도 괜찮으신 거 맞아요?”
옆의 젊은 사내가 물었다.
“아...예. 괜찮습니다. 약기운 때문에 좀 몽롱하지만...금방 괜찮아질 거예요.”
“그럼... 우린 돌아갑니다. 괜찮으시죠?”
“예. 번거롭게 해서 죄송합니다.”
내 말에 사내들이 방 밖으로 발을 옮겼다.
“아휴 십 년 감수했네. 난 송장 치우는 줄 알았잖아.”
문밖으로 나가기 전 나이 든 사내 퉁명스러운 어조로 투덜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창문 옆에 걸려있는 거울을 향했다.
그리고 두근거리는 심장을 억누르며 거울 안을 들여다보았다.
“하아아!”
거울 속에 있는 사람은 분명 젊은 남자다.
이 남자의 기억을 내 머릿속에서 강제로 몰아냈던 흐릿한 기억이 한순간 떠올랐다.
“한유준!”
비명과 같은 남성의 목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럼 이미연은?
뭐가 뭔지 모르게 된 혼돈 속에서 나는 손을 뻗어 창문틀을 잡았다.
그리고 언뜻 내다 본 밖의 풍경은 다시 한번 나를 놀라게 했다.
새하얀 모래사장 너머로 넘실거리고 있는 푸른 바닷물.
패딩으로 몸을 꼭꼭 싸맨 한 가족이 모래사장을 산책하고 있었다.
두 꼬마는 엄마,아빠를 앞서 달리다가 뒤돌아보기를 반복하고, 사내아이는 두 팔을 벌리고 달리다가 모래언덕에 그대로 자빠졌다.
멍하니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벌려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어떻게 내가 지금 이곳에 와 있는 것일까?
이 비현실적인 지금의 감각은 정말 사실일까? 뒤돌아서서 몇 발자국 옮기거나 혹시 다시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면 아줌마인 이미연의 모습으로 또다시 돌아가는 것은 아닐까?
걸음을 옮겨 침대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을 때였다.
침대 옆 작은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저 집주인이예요. 목소리 기억하시죠?”
상냥하게 들리지만 날카로운 음성을 가진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예. 기억합니다.”
그렇게 얼버무렸다.
“큰일 난 줄 알고 깜짝 놀랬잖아요! 괜찮으신거 맞죠?”
“예,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계약이 이번 주 금요일까지 잖아요. 늦지 않게 짐 정리 좀 해달라고 하려고 전화했던 거예요.”
“아! 그렇군요. 예.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야 정말 머릿속이 조금 더 맑아지는 듯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앨리스.
하지만 이번이 처음은 아닌 터.
둘러보는 내 시야에 방 한쪽에 놓여있는 책상 옆에 눕혀진 가방이 들어왔다.
또다시 나를 찾는 여정을 시작하기 위해 나는 천천히 그 가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왜 하필 오늘.
그 수많은 날 중에서 왜 오늘 이곳에 오기로 마음먹었는지 알 수 없다.
한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몰고 오던 바람이 한순간 사라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아침에 면도하던 도중, 언뜻,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에서 그녀의 존재를 느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여튼, 나는 오늘 이곳을 향했다.
아직 재취업을 하기도 전이라 하루하루가 휴일이었으니 어차피 상관없었다.
사거리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온은 영하였지만, 다행히 바람 한 점 없는 화창한 날씨.
맞은편의 하늘에 떠 있는 한겨울의 태양이 제법 강렬한 햇볕을 내리쬐고 있었다.
나의 볼에 닿은 그런 빛줄기가 피부를 기분 좋게 간지럽혔다.
길을 건너 왼쪽으로 돌아 첫 번째 작은 사거리에서 다시 오른쪽으로 100 여 미터 직진하면 내 마음속에 정해놓은 목적지가 나온다.
여전히 빨간색을 발하고 있는 신호등에서 시선을 돌렸다.
신호등 왼쪽으로 십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꽃가게.
예전에도 몇 번 들렀던 곳이지만 그때의 나는 지금 이 모습이 아니었다.
아니 이제는 또다시 그 모습을 나의 삶 속에서 지워야 할 순서가 되었다.
꽃가게의 창 한쪽에 시트지를 예쁘게 디자인해 붙여넣은 장미꽃.
마치, 가까이 오지 말라고 경고하는 듯한 빨간신호등 마냥 붉은 꽃잎을 펼치고 있는 것이 나의 눈을 끌었다.
유난히 빨간색을 좋아했던 그녀.
바뀐 신호등에 발을 옮기면서도 나는 마치 그 꽃가게의 상징마냥 붙여져 있는 장미꽃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입구에서 들어가기 전 아파트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맞은편에 있는 작은 공원과 그 옆의 어린이 놀이터로 시선을 돌렸다.
예전 어느 한순간엔, 눈에 보이는 이 모든 것이 낯설었다.
하지만 다시 찾은 이곳은 오히려 정겨울 만치 익숙한 모습이 되어있다.
참으로 놀랍고도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어디 가서 말도 꺼낼 수 없는 희한한 일.
무엇이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그래도 그녀의 모습으로 거의 6개월을 살았다.
그리고 이제 나의 기억에서 다시 그녀를 보내주기 위해 이렇게 그녀를 찾아왔다.
잘 가라는 작별 인사다.
어떻게 인연이 그런 식으로 꼬였는지는 미스테리지만, 악연이라도 인연은 인연.
모든 일에는 일어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아파트의 입구로 향하지 못하고 나는 그 주위만 어슬렁거리며 배회하고 있다.
입구에 주차되어있는 차들 사이로 걸음을 옮겨서 아파트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또다시 바라보고 있는 아파트의 입구.
저 안으로 걸어 들어가면 또 다른 모습의 나로 변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라도 남아있는 것일까? 쉽게 걸음을 그 속으로 들이지 못하고 여전히 추위 속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서 있다.
그렇게 두 시간은 흘렀을 것이다.
이렇게 사소한 결정도 하지 못할 거면 난 왜 여기까지 와서 이곳에 서 있는 것일까?
손에 쥐어있는 커다란 쇼핑백을 흘끗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다행히 깨어난 것일까? 그래서 치료 중일까? 아니면...
“휴우....”
여전히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낮은 한숨을 쉬고 있을 때였다.
그런 그 깊은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남자의 모습이 나의 눈에 들어왔다.
전화가 왔는지 걸음을 옮기던 그가 발을 멈추고 전화를 귀에 갖다 댔다.
“어. 그래. 방금 얘기 다 끝냈다.”
고급스러운 롱코트와 또 그만큼 럭셔리한 느낌을 주는 구두를 신은 중년 남자.
중후한 멋을 풍기는 그가 언뜻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아들도 자기 어머님 유언장 내용 다 알고 있어.”
나의 귀에 언뜻 들려온 유언장이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두 귀가 쫑긋해졌다.
“그럴 리가 있냐? 애초에 재산 전부 다 사회 환원하자고 한 게 아들이었는데.”
입가에 빙긋 웃음을 띤 사내가 마치 뭔가를 부정하는 듯 슬며시 손을 내저었다.
“우지석 사장이 내친 자식인데 궁금하기나 하겠냐? 됐고. 이제 난 출발한다.”
통화가 끝나자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은 사내가 다른 쪽 주머니에서 작고 검은 물체를 꺼내 허공에 쥐었다.
뽁
신호를 보내며 시동을 걸고 그를 기다리는 차량을 향해 중년 사내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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