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해바라기의 노래 (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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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또다시 현관문 앞에서 멈춘 나의 두 발.

나의 두 눈은 도어락을 마치 노려보듯 바라보고 있지만 선뜻 손가락이 나가지 않는다.

 

현관벨을 울려야 할까? 안에 누가 있을까?

누가 있었으니까 유언장을 언급하면서 변호사인 듯한 사람이 간 거겠지?

나의 시선은 여전히 진홍색 도어락 커버에 가 있다.

매일 매일을 저 도어락 커버를 올리고 비번을 눌렀었다.

그렇게 난 몇 개월을 그녀로 살았다.

 

익숙함 때문일까?

아니면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이 도어락의 비번이 정말 맞는 것인지 확인하고 싶어서였을까?

벨을 누르는 대신에 어느새 도어락 커버는 올라가 있고 내 검지의 끝은 번호를 하나씩 누르고 있다.

 

68932*

 

잘못 눌렀는지 도어락은 열리지 않고 앙큼하게 앙탈을 부리는 소리를 냈다.

다시 나의 손가락이 도어의 숫자에 접근했다.

 

6893

 

....?”

 

번호를 다 누르기도 전에 내 눈앞에서 벌컥 열린 문.

그 안에서 한 사내의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문밖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한 그의 두 눈이 화등잔만큼 커졌다.

나 역시 갑작스런 그의 모습에 무의식적으로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너가 여긴 어떻게....”

 

놀란 그의 표정과 목소리가 나를 순식간에 과거의 시간 속으로 끌어당겼다.

그땐 분명 나는 이미연이라는 중년 여성이었다.

그리고 그는 내 앞에 있었다. 쓰러지는 나를 품에 안으면서... 그리고..

이제 기억이 났다. 모호한 기억이 내 앞의 그를 바라보는 순간 확실하고 선명하게 돌아왔다.

 

그는 나를 보면서 엄마!” 라고 외쳤다.

쓰러진 나를 품에 안으며 엄마! 제발...!” 이라며 오열했다.

 

...진현?”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내 목소리에 그는 이제 경악을 한 표정이었다.

아무 말도 잇지 못하는 그에게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 이해시킬 방법이 있을까?

지난 몇 개월을 바로 내가 이미연으로, 그의 어머니로서 살았다고 설명할 수 있을까?

그냥, 잘못 찾아왔다고, 말을 더듬으며 돌아가 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 너무나도 궁금했다.

내가 그의 어머니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 때 그는 그녀에게 한 번도 어머니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쓰러지는 순간에서야 겨우 엄마라는 말이 본능적으로 터져 나온 것뿐.

 

그보다 내 가슴을 시리게 하는 건.

왜 그녀가 그렇게 긴 시간을 외롭게 살았는가 하는 것.

그녀로서 살아가던 육 개월여 동안 그녀의 삶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궁금했다.

자신의 배로 낳은 두 자녀는 그녀에게 연락조차 하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아들마저도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르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어떤 잘못을 지었길래 그녀는 그런 모진 냉대를 받아야 했을까?

 

물론 이방인인 내가 그것을 알 권리 따위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런 그녀의 억울함이 여전히 내 마음속에 남아있다는 것.

내가 그녀의 모습으로 변했다는 것은 혹시라도 그녀가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나에게 알리려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기에, 그녀의 상황을 이해하고 온전하게 그녀를 보내주고 싶다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물론 그것은 타인의 눈으로는 쓸데없는 오지랖에 불과하겠지만 말이다.

 

가끔 어머니를 뵈었었어요.”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 입 밖으로 튀어 나왔다.

완전한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거울을 볼 때마다 그녀를 봤으니 말이다.

 

너무 외로워 보이셔서. 친구가 되어 드리고 싶어서.”

 

나의 그 말에 한순간 두 눈이 붉어진 그.

가만히 문을 밀고 언뜻, 나에게 들어오라는 신호를 주었다.

 

 

 

 

어머니는....?”

 

내 말에 그는 고개를 떨구고 대답하지 못했다.

 

그럼...돌아가신 거예요?”

 

나의 눈앞에서 그가 무너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눈에 맺히는 눈물을 감추려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걸음을 옮겨 그에게 등을 돌리고 베란다의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창밖 아래로 어린이 놀이터가 내려다보였다. 얼마 전, 이렇게 서서 바로 똑같은 광경을 내려다보며 차를 마시곤 했었다.

슬프면서 기묘하고 기괴한 느낌마저 엄습하기 시작했다.

무섭고 두려웠다. 그녀의 삶을 알고 싶기도 했고, 이곳에서 빨리 도망치고 싶기도 했다.

 

그런 나의 등 뒤에서 그의 낮은 흐느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참 동안 그는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엄마가....”

 

등 뒤에서 그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살려주셨다. 집에서 쫓겨났을 때.” 뜻 모를 그의 말에 슬며시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스무 살 때 종로에서 그때 사귀던 애하고 키스하는 걸 할아버지 비서한테 들켜 버려서...”

“......”

그때까지는 회사 회장님이시던 할아버지 불호령에다, 극보수적인데다가 물불 안 가리는 다혈질 성격에 고집불통인 아버지도 절대 집에 날 붙어 있게 하지 않았어. 동생들도 나를 벌레보듯 피했고...”

 

손등으로 볼을 문지른 그가 낮게 한숨을 입 밖으로 흘려보냈다.

 

어렸을 때부터 난 공부에 관심이 없어서 집에서는 미운오리새끼였다. 똑똑한 동생들에 비해서 한참 모자라게 보였을 테니, 눈앞에 띄지 않게 날 중학교때 미국으로 보내 버린 거지.”

“......”

, 떠나기 전, 할아버지가 어머니한테 그놈 없는 셈치라고 말하던 거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어조에는 어쩐지 분노는 들어있지 않았다. 그저 고뇌와 자조감만이 깃들어 있을 뿐.

 

군대 가기 위해 다시 한국으로 왔다. 그게 스무 살 때였고, 나는 집이 죽도록 싫어서 밖으로만 나돌아다녔지. 그러다가 나 좋다고 따라다니는 애하고 그렇게 된 거였고...”

혹시 그럼 어머니가 이혼.....”

 

내 입 밖으로 나온 말에 당황해서 급하게 입을 닫았다. 하지만 고개를 떨구고 있는 그의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그래...”

“......”

방학동에 엄마가 작은 방 하나 얻어주셨다. 내가 걱정되셨던 엄마가 자주 왕래하시다가 할아버지 노여움을 사신 거지. 쓰레기 같은 놈 신경 쓰지 말라고. 집안 앞길 막을 놈이라고...”

“......”

절대 안 된다는 이혼, 엄마가 매달리면서 애원했다. ‘우리 진현이 없으면 나 죽는다...”

 

그가 나에게서 뒤통수를 보이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얼굴로 손등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한참을 그렇게 가만히 있었다.

 

이리로 이사 오셨을 때, 어머니는 이미 많이 몸이 약해지신 상태였어. 뇌에 실핏줄이 터져서 병원에 입원도 하신 적 있고, 정신적으로도 많이 힘들어하셨지.”

“......”

곁에서 돌봐드리겠다고 했는데. 한사코 거절하시는 거야. 사는 방향이 다르시다고 어머니는 바람 솔솔부는 산등성이 바위 위에 앉아계셔야 하고 나는 날개 펴고 날아야 하는 새라고... 날더러 같이 있으면 닭장에 갇히는 독수리가 되는 거라고...”

“......”

그래서 그냥 자주 와서 말동무해드리곤 했다. 그리고 그날까지는 괜찮았어.”

......까지요?”

 

뜻 모를 그의 말에 입 밖으로 말이 새어나왔다. 그가 말하는 것을 알 것 같기도 모를 것 같기도 한 복잡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어느 날 어머니가 그러시는 거야. ‘꿈에서 할머니를 뵈었다. 그리고 그러시더래. ‘우리 아가 고생 많았다, ‘소원 있으면 한가지 말해보라, ‘할머니가 그 소원 이루게 해주겠다...”

“......”

처음에야 개꿈이라 치부했지만, 며칠을 계속 같은 꿈을 꾸셨나봐. 어느 날 어머님이 태연하게 나에게 물으시더라고, 내 소원이 뭐냐고.”

“......”

뜬금없는 말씀에 난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던 말을 해 버렸다. 마음에 오랫동안 두고 있던 녀석이 있다고. 혹시라도... 가능하면.. 그 녀석.. 되찾고 싶다고...”

 

그의 말에 그가 예전에 한 말이 기억이 났다. 내가 그의 어머니 모습으로 있던 마지막 날이었다.

에헤이. 이 여사. 무슨 짓을 해서라도, 개 목걸이를 채워서라도 내 앞으로 데리고 오겠다고 하더니, 자신이 없으니까 이제 이렇게 오리발을 내미시네.“

 

 

 

웃으면서 어머니가 약속하셨다. 영혼을 팔아서라도 그 녀석 내 앞으로 반드시 데리고 오겠다고. 기다리기만 하라고. 엄마가 알아서 한다고...“

”......“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한테 치매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외출하셨다가 집을 찾지 못하시더니, 나중에는 급기야 나도 못 알아볼 정도로...“

 

그가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감정을 추스르는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도 멍하니 그대로 서 있었다.

 

어머니 대학 친구 중에 남편이 의사인 분이 계셨어. 그 분에게 갔는데 전문의 한 분을 소개시켜 주셨다. 그러시면서 어머니 종합검진 좀 받자고 하셨지. 건강이 안 좋으신 것 같다고...“

”......“

그때 어머니가 암에 걸리신 걸 알게 되었다. 초기라곤 했지만 고쳐지진 않고 시간이 흐르면서 악화만 되더라. 내가 곁에서 간호하겠다고 했는데, 전문의 선생님이 환자를 24시간 전담하고 간호해줄 수 있는 경력 있는 사람이 훨씬 나을 거라는 말씀에 그렇게 하기로 동의했다.“

”......“

집에 찾아올 때마다 나를 못 알아 보시고 엄마라고 하면 댁 같은 아들 둔 적 없다고 노발대발 하시기에, 그 다음부터 엄마를 이 여사라고 부르기 시작했지.“

 

그렇게 말한 그의 입 밖으로 피식하는 옅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오는 것이 내 귀에 들려왔다.

그런 그를 보며 슬며시 내가 입을 열었다.

 

그럼....그 때문에 이후로 집에 안 찾아오신 거예요?“

아니야.“

 

언뜻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흘끗 바라보았다.

 

육 개월 전 즈음에 갑자기 어머님이 간호사를 내보내셨어. 놀라서 찾아갔는데, 그땐 또 나를 알아보시더라고.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시면서 어머님이 그러시는 거야. ‘할머니가 부르셨다, ‘이제 때가 됐으니 주변 모든 것을 정리하고 남은 시간 동안 내 인생을 자유롭게 살아야겠다, 그리고 절대 걱정하지 말라고...“

”......“

그러셔서 그 다음엔 담당 의사 선생님을 자주 찾아뵈었어. 언제라도 어머니한테 무슨 일 있으면 내가 뛰어오려고... 그런데 뜻밖에 그랬던 어머니를 어느 날 행당역 근처에서 보게 된 거야.“

 

나는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거실 옆 화장실로 향했다.

입구에 들고 있던 쇼핑봉투를 내려놓고 전등을 켠 후, 그 안의 슬리퍼를 신었다.

예전에 느꼈던 것과는 달리 슬리퍼의 사이즈는 발에 꽉 끼었다.

 

거울 속을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머리에서 눈을 지나, 턱으로 그리고 가슴을 따라 그 아래로...

이곳에 서서 거울 속에 비치던 그녀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이미연 여사니임.“

 

이제 더 이상 나의 모습이 아닌 그녀의 이름을 슬며시 불러보았다.

 

정말 나를 이곳으로... 불러온 건가요?“

 

밖에 있는 그가 이미연 여사에게 말했었다.

바보같이 딴 놈에게 그 녀석을 소개시켜줬다고...

그리고 난 여전히 그때를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때의 내 모습도...

 

난 하루형이 좋았다.

종로의 한 술집에서 안면있는 사람들끼리 우연히 만나 어쩌다 합석하게 된 자리.

그곳에서 하루형을 처음 보았다.

서글서글한 눈매, 잘 웃는 얼굴. 웃을 때 한쪽 볼에만 들어가는 보조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타인들의 말에만 귀기울이며 분위기를 맞추던 사람.

그런 그가 조금씩 신경쓰이기 시작하더니 가끔 나도 모르게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더 참을 수 없어 그에게 고백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내 의지와 다르게 나온 엉뚱한 말.

!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 좀 시켜줘.“

그 형은 나와는 사는 세상이 너무 달랐다. 안될 거라는 걸 뻔히 알고 있었다.

알량한 자존심에 그렇게 나왔을 거다.

혹시나 그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면 그럼 난 어때?“ 라는 반응이 올 수도 있겠다 싶었을 거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러겠다였고, 실망과 슬픔과 분노에 얼굴을 뻔뻔하게 들고 꼭 해달라고 덧붙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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