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해바라기의 노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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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에는 일어나는 이유가 있다.’
내 나이 스물아홉.
어렸을 적부터 나는 그 말을 신념처럼 따르며 자랐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교통사고로 어머니를 잃었다.
중학교 들어가면서 계모의 깔매운 눈초리를 받으며 눈칫밥을 먹으면서 살기 시작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쫓겨나듯 집을 나왔다.
돈 한 푼 없이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발길이 닿은 곳이 부천 소사역 근처 인력사무소.
그곳 소장님 소개로 이삿짐센터에서 보조로 일하면서 그때부터 그래도 어떻게 혼자 힘으로 입에 풀칠은 하면서 살게 되었다.
내 인생이 그렇게 흘러가는 이유가 있을 거라 믿고 살았다.
이 세상은 신이 만들어 놓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커다란 그림판.
그 그림 한쪽 구석의 눈곱만한 틈새를 채우는 것이 나의 역할이다.
그리고 그곳에 정확히 들어맞는 퍼즐 조각의 모양이 되기 위해, 그렇게 내 인생은 사포로 다듬어져야 하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그 틈새를 메우기 위해 태어나 살아가는 것이다.
지호가 내 인생에 들어오기 전까지.
내 인생은 그렇게 생미나리 줄기에 뒤덮여 햇볕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답답하고 좁은 도랑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누리던 그 작은 호사마저도 못마땅했던지 지독한 창조주는 한순간 나를 암흑의 동굴 속에 밀어 넣었다.
퀭하니 들어간 눈두덩과 눈가에 자글자글한 잔주름.
중력을 이기지 못해 아래로 처진 눈살과 볼살.
빛을 잃은 건조한 피부와 그 아래 뚜렷하게 패인 팔자 주름까지.
더욱 황당한 것은, 그런 얼굴의 주위를 덮고 있는 여기저기 새치가 희끗희끗하고 윤기를 잃은 긴 파마머리.
가느다란 목을 촘촘하게 감고 있는 주름.
그 아래로 드러나는 젖가슴.
탄력 잃은 처진 가슴은 손바닥 한가득 들어올 정도로 풍만하다.
한순간 전신에 소름이 쫘악 끼치며 온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물컹한 뱃살 아래로는 더 이상 시선을 내릴 수도 없다.
거울 속에 비치는 이 모습...
환장할 노릇이지만, 이젠 어쩔 수 없이 이것이 내 모습이란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혼자 덩그러니 서 있는 목욕탕의 거울 속에서 나를 바라보는 이 아줌마가 내가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우수에 젖은 슬픈 눈으로 그렇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이 중년 여성.
흔하게 길에서 마주치는 50대 아줌마의 모습이다.
돌아가신 엄마가 지금까지 살아 계셨더라면 바로 이런 모습일 터.
아침마다 목욕탕에서 이 아주머니를 마주한 것도 이제 일주일째.
여전히 터무니없는,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숨조차 쉬기 힘들어져 슬그머니 바닥에 쪼그리고 주저앉았다.
처음엔 나의 눈에 비친 이 모습을 부인했다.
절대 이럴 리 없다고, 꿈이라고. 꾸던 악몽 속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한 것 뿐이라고.
뺨도 시뻘겋게 부어오를 정도로 때려도 보았고, 다시 침대로 돌아가서 잠을 청하기도 했다.
다시 한 숨자고 나면 내 모습으로 돌아와 있을 거라고...
하지만,
그러한 현실 부정의 행동이 끝난 후 여전히 거울 속에서 나를 기다린 사람은 변함없는 이 아줌마였다.
이 아줌마의 몸으로 변한 후, 일주일이 지났다.
이런 모습으로 집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
일주일 동안 칩거하면서 현실만 부정하면서 지냈다.
하지만 결국 이제 인정하기로 했다.
내 두 눈에 똑똑히 보이는 현실을 어떻게 계속 아니라고 할 것인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기이하고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래도 흥분은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레고르 삼사가 되기는 싫었다.
카프카의 ‘변신’이라는 소설 속의 주인공 말이다.
아침에 잠이 깬 후, 제 몸이 거대한 곤충으로 변해있는 것을 알게 된 남자.
작은 방안에 고립되고 단절되어 결국에는 그 좁은 방안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한 비극의 주인공.
그런 흉물스러운 곤충으로 변하지 않은 내 처지는 그보다는 나은 거라고 자위했다.
여튼, 변신이라 해도 같은 인간으로 바뀐 것이니 말이다.
수십 번을 머릿속에 떠올렸던 일.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또다시 기억 속을 헤집고 있다.
마치 이런 몸으로 변하기 전날 어딘가에 숨겨진 단서라도 있진 않은가 하는 생각에.
그걸 찾게 된다면 원래의 몸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에...
평상시대로 출근했다.
오전에 한 집의 상하차를 끝냈다.
오후 4시경에 또 다른 집의 상하차 일을 끝낸 후, 집에 돌아온 것밖에는 없다.
컵라면 한 젓가락 먹은 후, 피곤함이 밀려와 대충 씻는 둥 마는 둥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눈을 붙이기 전, 부산으로 출장 간 지호한테 문자 하나 딱 보낸 것 뿐이었는데...
지호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다투지도 않았고 헤어질 만한 어떤 징후도 없었는데, 일언반구 없이 감쪽같이 사라진 연인.
얼마나 어이없어했을까? 4년여를 사귄 애인이 한순간 흔적도 없이 증발하다니.
버려졌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정식으로 이별을 고할만한 용기도 없어 그냥 도망친 인간 말종 개*새끼로 여기고 있을까?
아니면 혹시 사고가 난 것은 아닐까 하고 경찰에 신고하고 병원을 찾아다니고 있는 건 아닐까?
이틀 전이 사귄 지 4년째 되는 날이었다.
종로에 있는 작은 칵테일 집에 룸 하나를 예약했었다.
친구들과 몇몇 지인들을 불러 딴에는 성대하게 파티하자고 한껏 들떠 있지 않았었나.
그런데, 친구들은 누구?
신나게 놀면서 같이 시간을 보낸 친구들이 있다는 것은 어렴풋하게 기억하지만, 얼굴이나 이름은 전혀 기억에 없다.
정말 이상한 일이지만 사실이다.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단 한 명뿐.
내 애인 ‘강지호’.
냄새나고 잿빛투성이던 내 인생에 생명수처럼 나타난 정말 은인과 같은 사람.
내 존재가 이 세상에서 얼마나 소중한지, 얼마나 반짝반짝한지 알려준 그였다.
내 손안에 허락된 한 줌의 행복에, 얼마나 기쁨에 도취해 있었나.
그 행복이 이렇게 터무니없게 빼앗기게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한유준!”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내 이름.
하지만 그런 내 이름을 부르는 날카로운 이 여성의 목소리는 절대 내 것이 아니다.
내 귀에 울리는 생전 알지도 못하던 어느 아줌마의 목소리에 또다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힘들게 몸을 일으켜 목욕탕 밖으로 나왔다.
무거운 걸음을 옮겨 거실의 한쪽에 있는 소파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창밖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털구름이 느릿느릿 흘러가는 푸른 하늘을 바라보다가 언뜻 고개를 돌려 내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 마디를 두르고 있는 굵은 주름.
오랜 세월의 풍파를 그대로 겪고 살아온 손등과 손바닥.
내 손도 물론 막노동으로 굳은살이 배고 거칠어진 것은 맞지만, 내 기억 속에 있던 내 손은 결코 아니다.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기이한 의구심이 내 머릿속에 스멀거리며 모여들었다.
혹시라도...
정말 만에 하나라도.
이 모습이 진짜 나라면?
거울 속에 비치는 50대 아주머니가 사실 진짜 내 모습이라면?
뒤틀린 욕망으로 인해 이십 대의 남성이 되기를 미친 듯 갈망했던 나이 든 아줌마라면. 그리고, 결국 자신을 허구로 만들어 놓은 남자 캐릭터라고 믿게 된 것이라면.
그래서 지금 내 머릿속에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모든 기억이 실은 모두 조작된 것이라면...
그런 병이 있다고 하지 않은가.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이길 갈망하며 살다 보니 나중엔 그 거짓을 진실이라고 인지하는 정신병이 있다고.
혹시 내가 그런 병을 앓고 있는 환자는 아닐까?
정말로 만에 하나, 혹시라도....
지금 이 모습이 정말 내 자신일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나도 몰래 몸을 일으켜 세웠다.
나는 사실 몹시 불행한 여성이었을지도 모른다.
다른 가족은 아무도 없는 이 아파트에 혼자 살아가는 독거 아줌마였을지도 모른다.
그런 외로움으로 인해 내 멋대로 만들어낸 소설의 내용을 사실이라 믿고 있는지도 모른다.
등장인물들이 생존하는 사람이든 아니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강지호, 한유준, 모두 현실 어딘가에서 내가 만난 사람들일지도 모르니까.
그 커플이 너무도 가슴 시리게 부러웠을지도 모른다.
내 자신이 그들 중 한 명이라고 병적으로 믿고 싶을 만큼.
거실 탁자에 휴대폰이 놓여있었다.
일주일 내내, 바로 그 자리에.
그동안 전화는커녕 문자 한 통 오는 소리 듣지 못했다.
슬그머니 손을 뻗어 빛바랜 빨간색 가죽 커버를 들추었다.
커버 안쪽 카드를 넣어놓는 홈에 종이 한 장이 접힌 채 끼워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끄집어 꺼내 보니 깔끔하게 여섯 자리 숫자가 적혀있다.
967034
휴대폰 비밀번호를 적어 놓은 듯.
아니, 이렇게 대놓고 적어가지고 다닐 거면 비번이 도대체 왜 필요한 거야?
손가락으로 화면을 건드려도 옆의 스위치를 눌러봐도 아무것도 액정에 뜨는 것이 없다.
그렇게 놓인 채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 배터리가 모두 방전된 것일 터.
티비다이의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제야 비로소.
이 집에 갇혀 있던 일주일 동안 꼼짝도 안 하다가, 이제야 이 집 주인이, 아니 내가 누군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세금 고지서가 고무줄로 묶여있다.
‘이미연’
세금을 내야 할 집주인의 이름이다.
아니 그것이 내 이름일 수도 있다.
세 번째 서랍에서 휴대폰 충전기를 찾아냈다.
소파 옆 벽에 붙어있는 콘센트에 충전기를 꽂고 휴대폰을 연결했다.
안방으로 들어갔다.
화장대에 있는 서랍들을 모두 뒤지기 시작했다. 여성들이 쓰는 화장품이 이것저것 들어있다.
어떻게 쓰는지도 모른다. 이것저것 칠하고 문지르다 보면 기억이 나지 않을까.
옷장을 열었다.
내부 서랍 위에 올려져 있는 붉은색 핸드백이 눈에 들어왔다.
낚아채듯 집어 들어 열고 뒤집어 들어 바닥에 내용물을 쏟아냈다.
통장, 도장, 손수건, 접힌 종이쪽지, 그리고 여성용 지갑.
현금 몇만 원, 신용카드 세 장, 그리고 눈에 띄는 주민등록증.
손가락으로 슬며시 뽑아내 손에 들고 들여다보았다.
거울 속에 있던 바로 그 여인과 똑같은 사진이 나를 보고 웃고 있다.
‘이미연’
그리고 그 아래 써 있는 숫자.
680910-22......
아무리 아니라고 발버둥 쳐도 틀림없는 내 모습.
그래, 이것이 정말 내 인생이라면..
내 자신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타인인 척 믿으면서 거짓된 꿈을 꾸며 살아 온 것이라면...
그래, 이제부터 열심히 소중하게 살아주겠다.
외적인 모습이 익숙하지 않은 이런 모습이라면 어떤가?
나에게 주어진 이 삶을 다시 소중하고 보람차게 살아보겠다.
이를 악물고 결심하는 순간이었다.
거실에서 휴대폰 벨 소리가 들려왔다.
크게 숨을 내쉬고 담담히 몸을 일으켜 방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보세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전화를 건 사람에게 입을 열었다.
“이미연 님?”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나의 귓속에 퍼졌다.
“예..에?”
“내원하셔야 할 날짜가 벌써 4일이나 지나서요. 어제도 전화드렸었는데 휴대폰도 꺼져있었고요.”
“누구...신데요?”
“이리 줘 봐!”
바리톤의 깊은 동굴에서 울리는 듯한 남성의 목소리가 상대방 여성의 목소리 뒤쪽에서 들려왔다.
“저 박홍근입니다.”
걸걸한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한 남자.
“이 여사님, 이러시지 않기로 저와 다 얘기 끝내셨잖아요.”
밑도 끝도 없이 마치 짜증을 내듯, 혹은 섭섭하다는 듯, 아니 타이르는 듯한 말투로 남자가 말을 이었다.
“꾸준히 방사선 치료받으면 6개월 이상 사실 수 있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자꾸 이러시면 아까운 수명만 재촉하는 겁니다. 그렇게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생각해서라도....”
순간 눈앞이 하얘졌다.
언뜻, 미로를 헤매다 덫에 걸린 하얀 새끼 늑대가 눈앞에 떠올랐다.
그 늑대의 발을 옥죄고 있던 덫의 체인이 묶여있던 나무가 천천히 땅속으로 꺼져 들어갔다.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치던 새끼늑대의 발목에서 피가 흘러 바닥에 물들기 시작했다.
앞발로 땅바닥을 긁어대며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던 녀석이 점점 어두운 땅속으로 끌려 들어간다.
한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진 어두운 땅 위에 애달픈 울음소리만 메아리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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