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해바라기의 노래 (4)
작성자 정보
- 작성
- 작성일
본문
한 달이 훌쩍 지나버렸다.
한두 주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일이 내 생각대로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이 아니었고 절차 또한 복잡했다.
근린생활시설인지 확인하고 정화조용량까지 확인했다.
식품위생교육을 받고 보건증도 발급받았다.
내가 암으로 치료받는 게 문제가 될까 싶었지만, 다행히 전염성 피부질환이나 결핵, 장티푸스와 같이 손님에게 옮길 수 있는 질병이 있는지 확인하는 검사였다.
영업신고증과 사업자 등록증을 발급받고 나서 인테리어 공사를 시작했다.
매장이 너무 작아 배달 음식 전문점 정도를 할 것으로 생각했던 인테리어업자.
심야식당이라는 예전 드라마를 언급하면서 그대로 해달라니까 눈꼬리를 치켜올렸다.
“장사하려면 그래도 손님들이 서로 마주 보고 앉아서 식사할 테이블 한두 개 정도는 있어야 할 겁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종류의 업소 인테리어 수십 년의 경험자라는 말을 빼먹지 않았다.
‘오지랖은 넣어두시고 시키는 대로 좀 하셈.’이라는 표정을 지어 보이지만 눈치 없는 업자는 한술 더 뜬다.
“간판도 그냥 [김밥천국]이라고 해야 사람들 부담 없이 들와요. 간단한 한식 몇 가지 하신다면서 [쓰레쉬 앤 애쉬] 는 또 뭔가요?
”걍 냅둬어. 알아서 하시겄지.“
뒤쪽에서 바쁘게 손을 움직이던 나이 든 분이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그를 말렸다.
업소가 빨리 망한다고 해서 그들이 손해 볼 일은 없다.
오히려, 테이블 회전율이 높아야 가게 매출이 오르는 것처럼, 업소 회전율이 높아야 그들의 사업도 번창하지 않을까?
그런 그들을 보며 나는 그냥 맘씨 좋은 아줌마 웃음을 흘려보냈다.
마침내 문 가의 처마에 쓰레쉬와 애쉬의 디자인이 그려 넣어진 간판이 걸렸다.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나의 얼굴에도 의도치 않은 웃음이 자꾸 입꼬리에 걸렸다.
펑퍼짐한 아줌마인 내 겉모습과 다르게 머릿속 한쪽에 숨겨진 기억 속.
강지호와 한유준이 서로 바짝 달라붙어 토닥거리며 게임을 한 장면이 눈앞을 스쳐 흘러갔기 때문이었다.
실제가 아니라 내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라면 또 어떠랴.
행복한 아줌마로 남은 시간 살다 가면 그뿐.
메뉴판도 내 기억 속에 강지호가 좋아했던 것으로 채웠다.
감자라면
김치찌개
된장찌개
순두부찌개
콥샐러드
퀴노아 샐러드
그리고 술안주로 내놓을 해물파전.
구수한 한식에 생뚱맞은 샐러드라니.
벽에 걸려있는, 뭔가 조금 어울리지 않는 메뉴판을 보는 나의 얼굴에 피식 웃음이 흘렀다.
하지만, 지호만을 위한 음식점을 개업하면서 남의 시선 따위는 필요 없는 일.
마침내 가게를 오픈했다.
거창한 개업식도 없었다.
어차피 주위에 아는 사람 한 명도 없는 이채로운 인생.
그래도 주변에서 가게 하는 사장들하고는 잘 지내고 싶어 떡은 돌렸다.
어딜가나 주변 사람들 눈에 나면 이래저래 괴로워지는 건 사실이니까.
주변에 부동산 하는 놈팡이 서넛 모여 자주 들를 거라기에 일없다 했다.
사모님들 연락해서 여자들끼리 숨기는 것 없이 남들 불륜 얘기나 뒷담화하는 것이 사업 목표라니 끌끌 혀를 찬다.
개업 첫날.
카운터 뒤에 느긋하게 앉아서 창밖을 내다보다 보니 사뭇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쩐지 마음속은 기쁨으로만 가득한 건 아니다.
어떻게 하다가 이렇게까지 하게 된 건지.
그래도 어차피 모두 다 벌려버린 일.
남은 인생 재미있고 행복하게 살다 가련다.
카운터 위를 훔치던 행주를 빨아 놓으려고 몸을 돌릴 때였다.
드르르르륵
가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가게 안에 발을 들이는 원치 않는 손님을 넌지시 바라보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한 젊은 커플.
좁은 홀 안을 한번 둘러본 후, 눈을 가늘게 뜨고 메뉴판을 빤히 바라보던 여자가 남자에게 물었다.
“자기 뭐 먹을 거야?‘
”나는, 음... 된장찌개.“
”그럼 난, 콥샐러드.“
카운터 뒤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내가 끼어들었다.
”저, 손님들 미안해서 어쩌죠? 오늘은 재료가 다 떨어졌는데...“
영업 개시일, 첫 손님에게 재료가 다 떨어졌다는 말 이라니...
겸연쩍은 표정으로 미소를 띠며 바라보는 나를 여자가 새초롬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그럼 지금 되는 건 뭐예요?“
”재료가 출발은 했다고 전화는 왔는데 아직 안 와서 지금 당장은...“
”그럼 되는 게 하나도 없어요?“
”...네에.“
’하아...!”
어이없단 듯 살짝 벌린 입 밖으로 하고 한숨을 내쉰 그녀.
”가자!“
멀대같이 키가 큰 남자가 여자의 팔꿈치를 슬며시 잡았다.
”아니, 그럼, 왜 문은 열어놓고 있는 거야? 재료 도착해서 손님 맞을 준비되면 그때 열어야 하는 거 아냐?“
마치 기분이 상했다는 투로 여자가 짜증을 냈다.
”죄송합니다아. 다음에 찾아주시면 잘 해드릴게요오.“
미닫이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그들의 등 뒤로 나긋나긋한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내가 원하는 손님 아니면 일부러 들여서 서비스해주느라 공연히 힘 뺄 일 없다.
가뜩이나 좁은 식당 안.
큰맘 먹고 들인 손님들로 자리가 차는 바람에 혹시라도 지호가 들어왔다가 그냥 돌아갈 수도 있을 터.
언뜻 고개를 돌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한 시가 다 되어간다.
”뭐라도 맹글어서 입에 넣어야겠네.“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아침에 들어온 나물을 꺼내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싱싱한 이파리에서 번져 나온 향긋한 내음이 코끝에 번진다.
끝이 누렇게 바랜 잎을 떼어내고 마른 흙이 붙어 있는 뿌리를 손톱으로 톡 꺾는다.
”그건 그렇고 그깟 찌라시 몇 장 만들어 주는 게 뭐 이리 오래 걸려?“
손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으면서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럼 그렇지...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젊은 사내의 그림자가 반투명한 유리문을 통해 비쳐졌다.
-드르르르르륵
”사장님, 안녕하세요.“
”네에, 어서 오세요.“
알쏭달쏭한 표정을 얼굴에 담은 남자가 손에 쥐고 있던 황토색 서류 봉투를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B5 전단지 하고 가게 명함 각각 30부씩 대령입니다.“
”고마워요. 대금 결제 지금 할게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사장님.“
몸을 돌려 행주로 손바닥을 문지르는 나를 그가 낮은 목소리로 가만히 불렀다.
그런 그의 손은 봉투 안에 들려있던 전단지를 내가 잘 볼 수 있도록 카운터 위에 돌려놓고 있다.
”네?“
”첫 주문이라서 이렇게 소량이라도 해드렸는데, 다음번엔 기본 100부 맞춰 주시면...“
”네. 알았어요.“
전단지를 주문하려고 근처의 광고 전문 가게를 찾았을 때, 사장은 없고 혼자 자리를 지키던 지금 내 눈앞의 젊은 사내가 나를 맞았었다.
소량은 안된다는 걸 사정사정하면서 억지로 맡겼더니 나중에 사장에게 한 소리 들은 듯한 표정이다.
하지만 단 한 곳에만 붙여놓을 전단지를 과하게 만들어 낭비할 수는 없는 일.
대신 일반 아트지가 아닌 고급지에, 작업하기 쉬운 도안으로 부탁했는데도 핀잔은 피할 수 없었던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대신 현금으로 결재할게요. 그리고 나중에 사장님 우리 가게 찾아오시면 제가 맛난 음식 한번 대접한다고 하세요.“
”저는요?“
”네?“
현금을 받아 든 젊은 사내가 입 주위에 희미한 웃음을 머금고 나를 바라본다.
넉살 좋은 놈이네.
그래. 피곤한 사회생활 덜 스트레스 받고 살아가려면 그렇게 유들유들한 면도 필요하겠지.
”아무 때나 와요. 이렇게 신경 많이 써서 예쁘게 만들어 줬는데, 그깟 식사 한 끼 대접 못할까?“
”감사합니다.“
그렇게 대답하는 그의 시선이 내가 다듬고 있던 산나물에 계속 머물러 있다.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표정에서 언뜻 허기를 읽어냈다.
”그럼, 기왕 온 김에 비빔밥이나 한 그릇 하고 갈래요? 나도 이제 점심 먹으려고 준비 중이었는데.“
”네....“
기다렸다는 듯이 눈꼬리에 주름이 질 정도로 눈웃음을 치면서 녀석이 입을 헤- 벌리고 의자를 밖으로 끌어내 카운터 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전단지 한 장과 명함을 쥐고 가게 맞은편 언덕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나도 몰래 심장이 두근두근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내려다본 발 주변 아스팔트 길바닥이 너무나도 익숙하다.
대여섯 발자국 올라간 언덕길 왼쪽 벽에 붙어있다시피한 전봇대 옆 표면에 긁힌 자국.
그 아래 흐릿하게 남아있는 진하♡유은 이란 낙서도 기억 속에 생생하다.
전봇대 대각선으로 1미터 떨어진 곳의 길바닥에 파여있는 작은 홈.
빈 야쿠르트 한 개가 콕 박혀있던 그 작은 구덩이를 일부러 밟고 지나가던 지호의 장난스러운 표정.
이제는 비어있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그 작은 홈을 들여다보면서 내 마음 한구석이 시큰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갑자기 뛰어 올라가던 지호를 따라 재빠르게 뒤를 달리던 기억이 선명하건만.
지금 언덕을 천천히 오르는 나의 다리는 휘청거리고 이마에서는 땀이 흐르고 있다.
심지어, 길지도 않은 그 언덕을 반쯤 오르던 호흡을 고르느라 걸음을 멈춰야 했다.
허리를 펴고 두 손바닥을 등허리에 짚고 주무른다.
”휴우....“
입 밖으로 새어 나오는 중년여성의 목소리.
나의 몸이 나에게 보내는 모든 이런 신호.
내 머릿속의 기억은 결코 사실일 수 없다고. 절대로 불가한 일이니 꿈 깨라며 나의 등을 떠민다.
낡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복도를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마치 익숙하다는 듯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린 곳.
406호
이제 겨우 오후 4시.
집안에는 아무도 없을 터.
굳게 닫혀있는 낡은 베이지색 현관문
하지만, 어쩐 일인지 이 현관문 너머의 모습도 내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작은 현관에는 회색 크록스 신발 한 켤레.
안쪽의 주방에는 벽걸이 선반이 거실 창문까지 이어진다.
벽걸이 선반의 옆면에는 현관에서 볼 수 있도록 영국 밴드 ‘콜드플레이’의 화보가 걸려있다.
주방의 맞은편에는 작은 사각형 테이블이 놓여있을 테고...
덜컥
넋 놓고 있던 나의 눈앞 문이 갑자기 벌컥 열렸다.
그 안에서 나온 낯선 남자의 큼지막한 모습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누구세요?“
미간을 찌푸린 젊은 남자의 질문에 겸연쩍은 얼굴로 나는 언뜻 손에 쥐고 있던 전단지를 내밀었다.
”요 아래 식당을 새로 오픈했거든요. 한번 식사하러 오시라고요.“
내가 건네는 전단지를 얼떨결에 받아 든 젊은 남자가 마치 ‘도대체 이게 무슨 시츄에이션이지?’ 하는 어이없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게서 고개를 돌리는 짧은 순간에 내 시선은 그의 등 뒤를 향하고 있었다.
어깨너머로 삐죽이 보이는 콜드플레이 보컬, 크리스 마틴의 웃는 미소가 나의 눈에 들어왔다.
”꼭 오세요. 잘해드릴께.“
나를 여전히 빤히 바라보는 남자를 뻘쭘한 미소로 답하고 몸을 돌렸다.
그리곤 짐짓 여유롭게 등 뒤에 꽂히는 젊은 남자의 시선을 느끼며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떻게 이렇게 내가 자세히 알고 있는지는 여전히 미스테리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지호가 그곳에 살고 있다는 것.
그렇다면 그 남자는 누굴까? 나의 기억 속에 있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설마!“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1층으로 내려가는 도중에 갑작스럽게 내 입 밖으로 놀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저 남자가 지금까지 나라고 생각했던 한유준?“
어떻게 엘리베이터에서 걸어 나왔는지, 어떻게 언덕을 내려왔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순간 나는 다시 가게 안에 있었다.
뻔히 사실이 아니건만, 그저 남의 삶을 염탐하고 내 것이라 믿어왔을 것이 틀림없건만.
이해되지 않는, 뜻 모를 상처로 멍든 가슴을 그러쥔 채 카운터 뒤에 앉아있는 나의 두 눈에 나도 모르게 멍청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관련자료
-
이전
-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