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해바라기의 노래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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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수요일인데, 내일도 출근해야 하는 거 아냐?”

 

술잔을 기울이는 하루를 보면서 넌지시 물었다.

벽에 걸려있는 시계는 열한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슬슬 정리하고 들어가야 할 때였고, 조금씩 피곤함이 몰려오고 있었다.

 

그런데도 문 닫아야 하니 이제 가라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 건, 녀석과 함께 있으면 나도 몰래 느껴지는 편안함 때문일 것이다.

 

 

다른 녀석 셋은 먼저 돌아갔다.

열한 시가 거의 다 되어서였다.

두 녀석은 비슷한 방향이라 택시를 같이 타고 간다고 했고, 한 놈은 지하철이 끊기기 전에 후다닥 타겠다고 했다.

 

그런데 하루는 미적지근한 표정으로 뒤에 남았다.

나에게 할 말이 있을 리는 없고 이 근처에서 누군가와 만나기로 약속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녀석이 모두 보낸 후 녀석은 여전히 자리에 앉아 혼자 소주잔을 기울였다.

마시지는 않고 그냥 한잔 받아만 놓겠다고 했더니 술이 아깝다면서 녀석은 나에게 사이다 한잔을 따라 건넸다.

 

 

하루는 처음 나를 본 날부터 나를 아주 살갑게 대했다.

 

다른 녀석들과 술을 기울이다가도 내가 지루해 보이거나 대화에서 밀려나면 슬그머니 다가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시시콜콜한 회사 일부터 어디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메뉴가 괜찮았다는 둥, 새로운 음식을 한번 비슷하게 개발해 보라고 추천도 했다.

다정한 녀석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녀석이 좋아하는 놈은 도대체 어떻게 생긴 놈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니 년일 수도 있겠지. 여튼 어느 쪽이더라도.

 

가야죠. 이제 이 여사님도 들어가시고.”

 

그러면서 막상 몸은 일으키지 않는다.

술기운이 돌 터인데도 오히려 말똥말똥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눈웃음을 치고 있다.

 

이 여사님은 사는 거 재밌어요?”

. 요새는 사는 거 재미있네.”

 

그렇게 대답하는 나를 보며 녀석이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다행이네요.”

? 하루는 사는 거 재미없어?”

아뇨. 저도 재미있어요. 저 지금까지 살아가면서 요새가 가장 재미있는데요.”

다행이네.”

 

녀석의 입가에 다시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이 여사, 행복한가요?”

 

녀석이 또다시 뜻 모를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행복하지 그럼. 하루가 이 시간까지 나 찾아와주고 이렇게 말동무까지 해주는데...”

이 여사가 행복하면.... 그럼 저도... 행복해요.”

 

녀석의 말투가 미묘하게 변해있었다.

술에 취한 티가 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도, 아무리 취했어도 쓸데없는 말은 한마디 하지 않는 녀석이었는데, 회사에 안 좋은 일이 있다거나 울적한 날이 틀림없었다.

왜 우리 모두 그런 날이 있지 않은가? 그냥 타인에게 위로받고 싶은 날.

너 잘 살고 있어라고,

눈앞의 괴로움은 순간일 뿐야. 곧 행복 찾아와. 내 말 믿어.’라고.

그래서 녀석에게 넌지시 물었다.

 

?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은요. 아무 일 없어요.”

진짜?”

그럼요.”

 

희미한 웃음이 번진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래도 한 마디 더 해야했다.

 

무슨 일 있더라도 금방 행복 찾아와. 내 말 믿어. 내가 약속해.”

 

나의 그 말에 녀석이 빙그레 웃었다.

그리곤 마치 개구쟁이같은 표정으로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뭐예요? 이 여사. 예전 약속도 못 지키셨으면서.”

 

그의 말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하루에게 무슨 약속을 한 것이 있던가? 무슨 색다른 요리를 해준다고 하고 잊었던가?“

 

머리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긴 나를 보던 그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에헤이! 이 여사님. 전혀 기억 못하시네.“

”.......“

 

두 눈을 찡그리고 웃음 짓던 녀석이 다시 입을 열었다.

 

, 무슨 짓을 해서라도, 개 목걸이를 채워서라도 내 앞으로 데리고 오겠다고 하더니. 에헤이! 이 여사. 자신이 없으니까 이제 이렇게 오리발을 내미시네.“

그게 무슨 말이야? 누구를?“
누구는요. 내가 좋아하는 놈 말이죠.“

”......“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기억을 더듬는 나를 바라보면서 녀석이 빙글빙글 웃었다.

 

아이고. 농담이예요. 이 여사. 그걸 또 기억해내려고 노력하시네. 차암!“

 

녀석의 그 말에 그제야 안심하고 손바닥으로 녀석의 어깨를 후려쳤다.

 

으이그! 다 늙은 노인네 가지고 장난치니 좋아?“
아야! 노인네 손 치고는 넘 매운데요?“

 

넉살좋게 웃는 녀석을 바라보며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내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뭐야? 짝사랑이었어? 전에 다른 애들한테 들어보니 벌써 몇 년째 사귀는 모양으로 알고 있는 거 같던데.“

 

내 말에 그가 슬며시 고개를 저었다.

 

다른 녀석한테 갔어요.“

아니 어쩌다가?“

 

내 말에 녀석이 손을 들어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내가 바보같이 딴 놈한테 걔를 소개해 줬거든요.“

뭐어? 아니 왜 그랬어?”

 

내 말에 녀석의 입 주위에 씁쓸한 웃음이 번졌다.

 

그러게요, 후회막급하지만 어쩌겠어요. 내가 모자라니까 그랬죠. 그때 잡았어야 하는 건데.”

“......”

자신도 없었어요. 그때는 내 눈앞에 산적해 있던 문제가 한둘이었어야 말이죠. 회사 입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정신없는 데다가 집안일도 복잡하고... , 녀석을 만나게 되면... 그땐 내가 뒷바라지를 해줘야 하는 사람도 있었던 땐데 소홀히 하게 될 것 같아서 말예요.“

어차피 그럴 거면 마음 팍 접는 거지. 사내가 말야. 이 세상에 남자가 그 놈밖에 없는 것도 아니고...“

그러게요?“

 

내 말에 피식 웃던 녀석이 술병을 들고 잔을 채웠다.

손끝으로 잔의 윗부분을 슬며시 문지르던 녀석이 창백한 웃음을 지으며 한 번에 입에 털어 넣었다.

 

그런데 그 놈 밖에 안 보이네요.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그렇게 말하면서 녀석이 배시시 웃었다.

그런 녀석을 보면서 낮은 한숨이 슬며시 내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

 

그래, 사랑. 그거 죽일 놈이다.

실체도 없는 것이 주변에 알짱대면서 사람을 바보로도 만들고 미치게도 만든다.

그 망할 놈의 사랑 때문에 내가 이곳까지 흘러들어온 것 아닌가.

터무니없는 그놈의 사랑이라는 감정 때문에...

 

근데 이 여사는 죽기 전에 바닷가에 살아보는 게 소원 아니었나? 아침에 파도 소리 들으면서 잠 깨는 게 로망이라더니 어떻게 여기에 계속 붙들려있어요?“

 

뜻밖의 생뚱맞은 그의 말에 고개를 돌려 녀석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니예요? 난 분명히 그렇게 알고 있는데.“

그건 또 어디서 들은 거야? 난 그렇게 말한 적이 없는 거 같은데. 내가 언제 그랬어?“

.....!“

 

녀석의 얼굴이 한순간 굳어지는 듯 하더니, 다시 겸연쩍은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다시 미운 일곱 살의 얼굴로 능글거리며 입을 열었다.

 

왜 이러실까? 난 분명 들은 기억이 있는데. 예전에 하늘이하고 서로 말하는 거.“

그래?“

그럼요.“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렇게 말한 기억이 있는 듯도 싶었다.

술을 입에 대지 않으려고 했지만 어쩌다가 분위기에 취해 녀석들이 권하는 술을 한두 잔 한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리고 그 중, 내가 녀석들과 나눈 대화를 나중에 기억하지 못한 경우도 꽤 있었다.

 

아마 그랬으리라.

흐릿하고 모호한 기억 속에 남아있는 아련한 바닷가의 정경과 파도 소리.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분명 바닷가에 살았거나 혹은 놀러 갔던 바닷가에 아주 좋았던 경험이 있던 것이 틀림없다.

 

, 그럼 그랬나 보지.“

 

그렇게 대답하고 나니, 녀석이 좀 전에 말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그가 마음에 품고 있는 녀석을 내가 어떻게든 녀석의 앞으로 데려다주겠다고 했다는 말. 그 약속.

술김에 내뱉은 약속이 틀림없다.

하지만 어떻게?

지금 내 앞에서 소주잔을 들고 나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미소 짓는 녀석의 애인이 누구인지 어디에 사는 놈인지도 모르는데.

 

머리가 갑자기 띵하는 느낌에 손가락을 들고 관자놀이를 눌렀다.

 

이 여사. 괜찮아요?“

괜찮아. 괜찮아.“

 

순간 굳은 얼굴로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는 그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잠깐 어지러웠던 것 뿐이야. 내 나이 돼봐. 다 그래.“

 

그제야 녀석의 굳었던 표정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병원은 빼놓지 않고 잘 다니는 거예요?“

....?“

 

내가 또 병원에 다니고 있다는 걸 이 녀석은 또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아 맞다.

며칠 전 녀석들이 한꺼번에 몰려왔을 때 이번 주말까지만 가게를 열고 그만둘 거라 했다.

 

녀석 중에 한 놈이 이유를 물었고 건강상 쉬려고 한다고 했으니 병원에 다니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겠지.

 

병원은 뭐....난 아주 건강....“

 

갑자기 눈앞이 아득해졌다.

순간 숨쉬기가 힘들어지더니 가슴에 격통이 느껴졌다. 아니 무엇인가 나를 찍어누르는 듯 정신을 차리고 있기가 힘들었다. 나도 모르게 가슴을 두 손으로 쥐었다.

 

이 여사님! 이 여사님!“

 

놀란 하루의 얼굴이 내 눈 가득 들어왔다.

그런 그를 멍하니 바라보며 나는 의자 뒤로 무너져내렸다.

그가 날 듯이 카운터를 타고 뛰어넘었다. 나를 끌어 앉는 그의 팔에 힘이 느껴지는 듯했다.

 

엄마! 눈 떠봐! 엄마! 제발... 엄마!“

 

사내의 비명 같은 외침이 멀리서 아득하게 들려오는 듯했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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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완결입니다.

하루에 10화 이상 업로드가 되지 않아서 10화까지 올렸는데, 하단부분이 잘려나갔습니다.
11화를 올리려는 것이 아니라 10화의 하단부분을 붙이기 위해 (수정) 버튼을 누르는데도 하루 10화 이상 올리지 못한다는 경고문구가 떠서 10화를 삭제했습니다.

남은 2화는 내일 마저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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