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혁기의 '청산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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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죽여버리기로 마음 먹었다.
다른 말은 필요없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햇수로 5년여를 동거하며 같이 살았지만, 그놈이 집에 들어오지 않고 외박한 날들이 4년여다.
사랑에 눈이 멀어 평생을 갚아도 끝이 없는 빚더미와 더 이상 달아날 때가 없는 나 자신, 용돈을 주지 않는다고 일삼는 상습적인 폭행, 그리고 집과 회사와 친구들 앞에서 흘려버린 커밍아웃, 외동아들 게이란 말에 충격받아 쓰러진 어머니의 뇌졸중,
눈도 감지 못한 채 그저께 돌아가셨다.
이런 인간말종 쓰레기 같은 놈은 죽여버려야 한다.
그리고 나도 곧장 따라 죽으리라, 후훗!
방금 놈에게 휴대폰을 넣었다.
오늘 역시, 휴대폰으로 들려오는 어떤 계집년의 목소리는 "오빠! 그 호모새끼야? 전세금을 뺐다면 가서 대충 만져주고 용돈이라도 뜯어와라, 우리 스키장 가자! 호호홋!"
언제나 다름없는 그 멋진 몸뚱이와 빤빤한 얼굴로 계집년을 끌어안고 있나보다.
Zigeunerweisen CD를 넣고 오디오 볼륨을 높이며 옷을 몽땅 벗고 의료용 장갑을 손에 끼었다.
,,,,,대형거울과 마주했다.
용돈을 듬뿍 준다고 했으니 아마 지금쯤 콧노래를 부르며 내가 할부로 장만해 준 승용차를 몰고 신나게 달려오리라.
역시나 다름없이 대충대충 만져주며 사랑해주겠지?
화공계열 박사 코스를 밟고 있는 친구에게 시골 고향 내려가는 길에 꿩 잡는데 필요하다고 부탁해서 얻은 작은 병을 열었다.
그리고 투명한 가루를 책상모퉁이에 쏟았다.
조심 조심 손가락에 묻혀 거울을 바라보며 놈의 습관적인 애무방법에 따라 겨드랑이에 문질러 발랐다.
그리고 옆구리,,,,,
후훗! 그러고 보니 놈이 애무랍시고 입술로 핥아 준 곳은 두 곳뿐이다.
키스라고는 해 본적도 없다.
언제나 간단 간단 핥으며 어딘가 쫓기 듯 사정시켜 버리고는, 끝나는 순간 지갑을 열고는 모두 가져가 버렸다.
자신은 사정하지도 않으면서 말이지,
돌이켜보니 너무도 처절했다.
그래, 많이 쳐 먹으렴!
겨드랑이에 듬뿍 발랐다.
가능한 땀이 나지 않도록 노력하며 옆구리에도 잔뜩 발랐다. 아무리 무색 무취라도 표식이 나지 않도록 넓게 고루고루 펴서 발랐다.
아마 놈은 방을 들어서자마자 지갑부터 살펴보며 껴안으리라.
그리고
,,,,,아주 보고 싶었다는 듯 성급하게 겨드랑이부터 핥아주리라
다음은?
,,,,,글쎄?
놈의 식어버린 입술이 옆구리까지 내려갈 시간이 있을까?
틀림없이 겨드랑이를 핥는 순간, 이 청산가리가 놈의 혓바닥을 타고 몸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금방 세포 속으로 침투할 거고, 여러 세포에 존재하는 헤모글로빈과 철 이온이 결합하는 순간, 놈은 세포에 산소가 공급되지 않아 에너지를 생성하지 못하게 될 거고, 단 한 번 고통도 호소해보지 못한 채 하얀 게거품을 내뿜으며 근육이 마비되리라,
그 잘난 육체가 내 품속에서 뻣뻣해지며 질식사하리라 후후!
발가벗겨진 채로 말이지,
잠시 후
나도 놈의 뻣뻣해진 육신을 끌어안고 '지독한 사랑'을 만들어 버리는 거야,
죄와 벌?
사랑? 정체성?
내 탓이라고?
살인과 자살하면 지옥 간다고?
神은 늘 침묵으로 일관하시는 데 저승이 있는지 누가 알아?
내가 한 번 죽여보고, 죽어보고 난 뒤 가르쳐 줄게, 알았지?
나체로 거울을 바라보며 한껏 웃어버렸다.
전화가 계속 울렸으나 받지 않았다.
Zigeunerweisen의 볼륨을 한껏 높였다.
"집에 있는 줄 아는데 왜 전화 안 받냐? 네가 청산가리를 부탁할 때 말이지, 너 얼굴색이 너무도 창백하게 보여 혹시나 해서 내가 청산가리 대신 청산가리와 유사한 페로시아나이드염을 줬거든? 청산가리 독성 성분과 전혀 상관없는 소금에 가까운 식품첨가물이지, 하하! 꿩은 나중에 나랑 같이 잡고 고향 잘 다녀와라, 아참! 네가 사랑했다던 그놈 말이야,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너희집 부근에서 3중 충돌을 일으켜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더라? 영안실에 한 번 가보면 어떨까?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전화 녹음 메시지가 들려오고 있었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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