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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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이었다고 기억한다. 나는 몹시 심한 몸살을 앓고 있었다. 그건 인근 산으로 나들이를 다녀온 바로 그 다음날부터였다. 그렇다고 딱히 몸에 무슨 증상이 나타난 건 아니었다.
이마가 펄펄 끓었거나 피부에 무슨 반점이 돋아났었다면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 했을 거다. 하지만 그런 증상은 일절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몹시 앓았다. 거의 실신 할 정도로 끙끙 앓았다. 가슴 복판에 불이 번져 손 써 볼 새도 없이 온 몸을 맹렬하게 태울 것만 같았다.
입술도 바짝바짝 말랐고, 목은 물기가 없어 갈라졌다. 손 하나 까딱할 만한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나는 나직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왜 내가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끊임없이 떠오르는 누군가의 얼굴과 목소리. 용의자 사진을 두고 섬세하게 사건을 추리하는 형사처럼 나는 누군가의 미세한 표정까지 되울려 하나씩 연결고리를 짓고 나름대로 의미를 만들어 나갔다.
그러나 그림이 완성되는 단계에 오면 모든 것이 허망하게 느껴졌고, 그것은 곧 충격과 허망함으로 이어졌다.
결국 나는 종이와 볼펜을 챙겨 들고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 떠오르는 기억을 하나하나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간혹 사실과 의미를 두고 실랑이를 벌였지만 최대한 객관적으로 바라보려 애썼다. 그렇게 반 시간을 보냈나 보다. 결론은 너무나 당연했다. 내가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릴 이유는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런데 왜.
어느 정도 마음이 가라앉았다. 이유 없는 짓을 하고 있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제야 시장기가 느껴졌다. 차려놓은 식탁 앞에 앉아 수저를 들었다.
「늘 겪는 일이지만. 난 이렇게 음식 종류가 많은 곳은 싫더라. 뭘 골라야 좋을지 고민하게 만들잖아. 이걸 고르면 저게 마음에 걸리고. 뭐, 그래도 하나는 좋은 게 있어. 네가 이걸 고르고 내가 저걸 고르면 같은 돈 내고도 두 가지 음식을 먹을 수 있으니깐.」
어느 순간 나는 또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부드럽다고 해야 할지 매력적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상냥하다고 해야 할지. 한마디로 얼른 규정짓기가 쉽지 않은 그 웃음.
해맑은 듯도 하지만 그 웃음 끝에 매달려 있는 우수도 놓치기 아까운 멋이었다. 특히 끊어질 듯 이어지는 느릿느릿한 말투는 사람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마력이 있었다.
「병신.」
국물을 뜨다 말고 무심코 내가 뱉은 말이었다. 누구를 향한 욕이었는지 스스로도 판단이 서지 않았다. 전적으로 나를 향한 것도 기억 속의 그 사람을 향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비율을 적용하자면 본인에 더 무거운 수를 주어야 할 것 같은 막연한 느낌뿐이었다.
나들이를 떠나던 전날까지만 해도 나는 특별히 그 사람에 대한 어떤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진 않았던 것 같다. 전세 버스에 올라타고서도 한참이 지나도록 차가 출발하지 않아 그게 좀 불만이었을 뿐이다. 특별히 누군가를 찾고 있지는 않았다.
옆자리에 앉은 사람과 가벼운 농을 주고받으며 차가 출발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에 시동이 걸리고 누군가가 버스에 올라섰을 때도 특별히 그 사람을 주시하진 않았다.
겉모습은 깔끔한 사람이 시간관념은 다소 떨어지는군. 하고 생각했을 따름이다. 평소와 좀 다른 느낌이 들었다면, 평상시엔 좀 장식적인 외모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날 따라 유달리 깔끔해 보였다는 정도. 그 이상 어떤 감정은 없었다.
하차해서 짧은 휴식을 갖은 우리 일행은 서둘러 산길에 발을 들여 놨다. 예정된 계획을 차질 없이 마무리 하려면 다소 무리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출발이 이십 여분 늦은데다가 중간에서 잠깐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또 이십 여분 늦어졌다.
계획표대로 하자면 주차장 근처에 싸온 김밥을 먹고 잠깐 휴식을 취한 다음 산에 올라야 했겠지만 이미 시각은 등산로에 진입하여 어느 정도 발걸음을 떼고 있어야 할 즈음까지 이른 것이다.
내가 그 사람의 보폭에 보조를 맞췄는지 아니면 그 사람과 천상 보폭이 비슷했는지, 얼마쯤 오르던 때부터 그 사람과 나는 줄곧 동행 했다. 그 사람은 천성적으로 말수가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이 쪽에서 질문을 하면 짧게 대답을 할 뿐 그 쪽에서 먼저 말을 거는 적은 없었다.
간간히 길게 말을 할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그게 고맙고 신기해 그 쪽 방향으로 화제를 몰고 가곤 했지만 아쉽게도 그 사람은 어느 선에서 더 이상 흥미를 갖지 않았다. 그런데도 굳이 그 사람을 따돌려 앞지르거나 뒤쳐지거나 하고 싶진 않았다.
중간마다 둘이 함께 걷기엔 폭이 좁은 등산로가 나타나곤 했다. 그럴 때면 나는 늘 그 사람에게 양보하여 몇 걸음 뒤쳐져 걸었다. 남에게 비쳐지는 내 모습에 대해 예민할 만큼 신경을 쓰는 성격에서 비롯된 배려라고 해도 매번 그러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그 사람은 면 소재로 된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다. 검은색 바탕에 흰 세로 줄무늬가 들어간 고급스러워 보이는 운동복이었다. 폭 좁은 등산로가 나오면 나는 늘 뒤쳐져 그 사람의 트레이닝복에 눈을 가져다 댔다.
그 사람은 꽤 키가 컸다. 그러나 너무 마르거나 찌지도 않고 소위 말하는 딱 좋은 몸을 타고 났다. 특히 탄력적으로 비쳐지는 엉덩이선이 아름다웠다. 트레이닝복에 선명한 선을 긋는 속옷 박음질 선 자국은 매력적이기만 했다.
엉덩이가 탐스러운 만큼 허벅지도 실했다. 다년간 운동으로 몸을 굳혔던지 아니면 타고난 몸 자체가 훌륭한 사람이었다. 시원하게 뻗어 있으면서 부담스럽게 굵거나 연약하리만치 가느다랗지도 않은 그 중용의 미덕. 미미한 바람에 실려 오는 그 사람의 체취는 산에 오르는 수고를 느끼게 할 틈도 허락지 않았다.
산 중턱에 이르렀을 때였다. 장시간 비탈길을 오르느라 더웠는지 그 사람은 윗옷을 훌떡 벗어 한 손에 말아 쥐었다. 그 바람에 옷 안에 갇혀 있던 그 사람의 체취가 한꺼번에 풀려나와 사정없이 나를 덮쳤다. 순간 난 아찔했다. 밑으로 내려간 트레이닝복 덕분에 살짝 드러난 속옷의 고무줄 부분은 또 어떤가.
아마도 그 감정은 부러움 이상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다. 그건 부러움이었다. 다만 난 그 사람이 타고난 것에 대해 부러워했을 뿐이다. 별다른 뜻은 없었다.
정상에 올라 그제야 김밥을 먹으면서 그와 나눈 이야기며, 그 사람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화제를 대느라 분주했던 기억들이 그 날 벌어졌던 일 전부다. 역시 그 사람과 함께 하산을 하였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같은 자리에 앉아 왔다.
물론 같은 자리에 앉은 것도 내 의도는 아니었다. 나는 아침에 그랬던 것처럼 내가 앉았던 자리에 앉았고, 얼마 후 그 사람이 조그만 자신의 가방을 들고 와서는 아침 동승하였던 짝꿍에게 양해를 구하고 앉은 거였다. 물론 얼마 후 그 사람은 잠이 들어버렸지만.
그 사람은 내 어깨에 기대 잠이 들었다. 나는 그 사람이 편안히 숙면에 들도록 몸을 낮추었다. 그러다 나도 어느 순간 잠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 날 우리가 달려온 길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이 쪽으로 굽었는지, 저 쪽으로 굽었는지.
그렇다. 다만 그랬을 뿐이다.
그런데, 어쩌면 이건 내 이성이 파놓은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 사람의 걸음걸이, 표정, 옷 모양새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잖은가 지금. 버스가 도착지에 이르러 짧은 휴식을 끝내고 등산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하산하여 다시 차에 오르는 상황까지 내 기억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그림이란 오직 그 사람에 대한 영상뿐이잖은가.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이유 없는 짓거리를 하고 있는 본인에 대해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무기력한 이성적 판단 아래 나 스스로를 기만하는 건 아닐까. 모를 일이다.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의 편린들을 주워다 짜맞추면서 나는 의도적으로 어떤 특정 부위에 더 많은 시간을 집중하고 있다. 유난히 깊숙한 눈과 오똑한 코, 날렵한 턱선은 그렇다 치자.
그보다 나는 특별히 그의 허리띠 아래 부분에서 무릎 위까지의 부분을 집중해서 눈여겨보았음이 틀림없다. 아니면, 기억을 되울리는 지금 이 순간 내 관심의 정도가 거기에 집중되어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사람은 참 아름다운 신체를 지니고 태어났다. 고급스러운 태가 나는 트레이닝복에 드러난 싱싱한 육선. 특히 탐스러운 엉덩이와 실한 허벅지는 분명 춘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더군다나 그 사람의 몸을 덮고 있는 옷과 살갗의 어느 공간에 고여 있다가 움직일 때마다 은은하게 내뿜는 체취는 달콤하다 못해 마음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아니, 그런데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아까 분명 나는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내가 그 사람에 대해 보편적인 탐구 이상으로 지속해서 그리고 집중해서 그릴 이유는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다만, 내가 해야 할 일은 어느 시점부터 보편이 허락한 한계를 벗어나 그 사람을 주시 하고 있었는지 그것만 찾아내면 그만이다.
하긴, 이것 자체도 굳이 실행해야할 이유도 명분도 있지 않다. 그러나 이미 보편적 관점에서 벗어나 그 사람을 생각하고 있는 이 현상마저 거부할 수만은 없다. 어쨌거나 이 일은 매듭을 지어야 하고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 곁길을 밟아 엉뚱한 곳에 떨어진 실수를 어떡해서든 되돌려 놓아야 한다.
이마가 펄펄 끓었거나 피부에 무슨 반점이 돋아났었다면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 했을 거다. 하지만 그런 증상은 일절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몹시 앓았다. 거의 실신 할 정도로 끙끙 앓았다. 가슴 복판에 불이 번져 손 써 볼 새도 없이 온 몸을 맹렬하게 태울 것만 같았다.
입술도 바짝바짝 말랐고, 목은 물기가 없어 갈라졌다. 손 하나 까딱할 만한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나는 나직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왜 내가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끊임없이 떠오르는 누군가의 얼굴과 목소리. 용의자 사진을 두고 섬세하게 사건을 추리하는 형사처럼 나는 누군가의 미세한 표정까지 되울려 하나씩 연결고리를 짓고 나름대로 의미를 만들어 나갔다.
그러나 그림이 완성되는 단계에 오면 모든 것이 허망하게 느껴졌고, 그것은 곧 충격과 허망함으로 이어졌다.
결국 나는 종이와 볼펜을 챙겨 들고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 떠오르는 기억을 하나하나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간혹 사실과 의미를 두고 실랑이를 벌였지만 최대한 객관적으로 바라보려 애썼다. 그렇게 반 시간을 보냈나 보다. 결론은 너무나 당연했다. 내가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릴 이유는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런데 왜.
어느 정도 마음이 가라앉았다. 이유 없는 짓을 하고 있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제야 시장기가 느껴졌다. 차려놓은 식탁 앞에 앉아 수저를 들었다.
「늘 겪는 일이지만. 난 이렇게 음식 종류가 많은 곳은 싫더라. 뭘 골라야 좋을지 고민하게 만들잖아. 이걸 고르면 저게 마음에 걸리고. 뭐, 그래도 하나는 좋은 게 있어. 네가 이걸 고르고 내가 저걸 고르면 같은 돈 내고도 두 가지 음식을 먹을 수 있으니깐.」
어느 순간 나는 또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부드럽다고 해야 할지 매력적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상냥하다고 해야 할지. 한마디로 얼른 규정짓기가 쉽지 않은 그 웃음.
해맑은 듯도 하지만 그 웃음 끝에 매달려 있는 우수도 놓치기 아까운 멋이었다. 특히 끊어질 듯 이어지는 느릿느릿한 말투는 사람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마력이 있었다.
「병신.」
국물을 뜨다 말고 무심코 내가 뱉은 말이었다. 누구를 향한 욕이었는지 스스로도 판단이 서지 않았다. 전적으로 나를 향한 것도 기억 속의 그 사람을 향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비율을 적용하자면 본인에 더 무거운 수를 주어야 할 것 같은 막연한 느낌뿐이었다.
나들이를 떠나던 전날까지만 해도 나는 특별히 그 사람에 대한 어떤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진 않았던 것 같다. 전세 버스에 올라타고서도 한참이 지나도록 차가 출발하지 않아 그게 좀 불만이었을 뿐이다. 특별히 누군가를 찾고 있지는 않았다.
옆자리에 앉은 사람과 가벼운 농을 주고받으며 차가 출발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에 시동이 걸리고 누군가가 버스에 올라섰을 때도 특별히 그 사람을 주시하진 않았다.
겉모습은 깔끔한 사람이 시간관념은 다소 떨어지는군. 하고 생각했을 따름이다. 평소와 좀 다른 느낌이 들었다면, 평상시엔 좀 장식적인 외모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날 따라 유달리 깔끔해 보였다는 정도. 그 이상 어떤 감정은 없었다.
하차해서 짧은 휴식을 갖은 우리 일행은 서둘러 산길에 발을 들여 놨다. 예정된 계획을 차질 없이 마무리 하려면 다소 무리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출발이 이십 여분 늦은데다가 중간에서 잠깐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또 이십 여분 늦어졌다.
계획표대로 하자면 주차장 근처에 싸온 김밥을 먹고 잠깐 휴식을 취한 다음 산에 올라야 했겠지만 이미 시각은 등산로에 진입하여 어느 정도 발걸음을 떼고 있어야 할 즈음까지 이른 것이다.
내가 그 사람의 보폭에 보조를 맞췄는지 아니면 그 사람과 천상 보폭이 비슷했는지, 얼마쯤 오르던 때부터 그 사람과 나는 줄곧 동행 했다. 그 사람은 천성적으로 말수가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이 쪽에서 질문을 하면 짧게 대답을 할 뿐 그 쪽에서 먼저 말을 거는 적은 없었다.
간간히 길게 말을 할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그게 고맙고 신기해 그 쪽 방향으로 화제를 몰고 가곤 했지만 아쉽게도 그 사람은 어느 선에서 더 이상 흥미를 갖지 않았다. 그런데도 굳이 그 사람을 따돌려 앞지르거나 뒤쳐지거나 하고 싶진 않았다.
중간마다 둘이 함께 걷기엔 폭이 좁은 등산로가 나타나곤 했다. 그럴 때면 나는 늘 그 사람에게 양보하여 몇 걸음 뒤쳐져 걸었다. 남에게 비쳐지는 내 모습에 대해 예민할 만큼 신경을 쓰는 성격에서 비롯된 배려라고 해도 매번 그러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그 사람은 면 소재로 된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다. 검은색 바탕에 흰 세로 줄무늬가 들어간 고급스러워 보이는 운동복이었다. 폭 좁은 등산로가 나오면 나는 늘 뒤쳐져 그 사람의 트레이닝복에 눈을 가져다 댔다.
그 사람은 꽤 키가 컸다. 그러나 너무 마르거나 찌지도 않고 소위 말하는 딱 좋은 몸을 타고 났다. 특히 탄력적으로 비쳐지는 엉덩이선이 아름다웠다. 트레이닝복에 선명한 선을 긋는 속옷 박음질 선 자국은 매력적이기만 했다.
엉덩이가 탐스러운 만큼 허벅지도 실했다. 다년간 운동으로 몸을 굳혔던지 아니면 타고난 몸 자체가 훌륭한 사람이었다. 시원하게 뻗어 있으면서 부담스럽게 굵거나 연약하리만치 가느다랗지도 않은 그 중용의 미덕. 미미한 바람에 실려 오는 그 사람의 체취는 산에 오르는 수고를 느끼게 할 틈도 허락지 않았다.
산 중턱에 이르렀을 때였다. 장시간 비탈길을 오르느라 더웠는지 그 사람은 윗옷을 훌떡 벗어 한 손에 말아 쥐었다. 그 바람에 옷 안에 갇혀 있던 그 사람의 체취가 한꺼번에 풀려나와 사정없이 나를 덮쳤다. 순간 난 아찔했다. 밑으로 내려간 트레이닝복 덕분에 살짝 드러난 속옷의 고무줄 부분은 또 어떤가.
아마도 그 감정은 부러움 이상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다. 그건 부러움이었다. 다만 난 그 사람이 타고난 것에 대해 부러워했을 뿐이다. 별다른 뜻은 없었다.
정상에 올라 그제야 김밥을 먹으면서 그와 나눈 이야기며, 그 사람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화제를 대느라 분주했던 기억들이 그 날 벌어졌던 일 전부다. 역시 그 사람과 함께 하산을 하였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같은 자리에 앉아 왔다.
물론 같은 자리에 앉은 것도 내 의도는 아니었다. 나는 아침에 그랬던 것처럼 내가 앉았던 자리에 앉았고, 얼마 후 그 사람이 조그만 자신의 가방을 들고 와서는 아침 동승하였던 짝꿍에게 양해를 구하고 앉은 거였다. 물론 얼마 후 그 사람은 잠이 들어버렸지만.
그 사람은 내 어깨에 기대 잠이 들었다. 나는 그 사람이 편안히 숙면에 들도록 몸을 낮추었다. 그러다 나도 어느 순간 잠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 날 우리가 달려온 길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이 쪽으로 굽었는지, 저 쪽으로 굽었는지.
그렇다. 다만 그랬을 뿐이다.
그런데, 어쩌면 이건 내 이성이 파놓은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 사람의 걸음걸이, 표정, 옷 모양새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잖은가 지금. 버스가 도착지에 이르러 짧은 휴식을 끝내고 등산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하산하여 다시 차에 오르는 상황까지 내 기억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그림이란 오직 그 사람에 대한 영상뿐이잖은가.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이유 없는 짓거리를 하고 있는 본인에 대해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무기력한 이성적 판단 아래 나 스스로를 기만하는 건 아닐까. 모를 일이다.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의 편린들을 주워다 짜맞추면서 나는 의도적으로 어떤 특정 부위에 더 많은 시간을 집중하고 있다. 유난히 깊숙한 눈과 오똑한 코, 날렵한 턱선은 그렇다 치자.
그보다 나는 특별히 그의 허리띠 아래 부분에서 무릎 위까지의 부분을 집중해서 눈여겨보았음이 틀림없다. 아니면, 기억을 되울리는 지금 이 순간 내 관심의 정도가 거기에 집중되어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사람은 참 아름다운 신체를 지니고 태어났다. 고급스러운 태가 나는 트레이닝복에 드러난 싱싱한 육선. 특히 탐스러운 엉덩이와 실한 허벅지는 분명 춘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더군다나 그 사람의 몸을 덮고 있는 옷과 살갗의 어느 공간에 고여 있다가 움직일 때마다 은은하게 내뿜는 체취는 달콤하다 못해 마음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아니, 그런데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아까 분명 나는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내가 그 사람에 대해 보편적인 탐구 이상으로 지속해서 그리고 집중해서 그릴 이유는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다만, 내가 해야 할 일은 어느 시점부터 보편이 허락한 한계를 벗어나 그 사람을 주시 하고 있었는지 그것만 찾아내면 그만이다.
하긴, 이것 자체도 굳이 실행해야할 이유도 명분도 있지 않다. 그러나 이미 보편적 관점에서 벗어나 그 사람을 생각하고 있는 이 현상마저 거부할 수만은 없다. 어쨌거나 이 일은 매듭을 지어야 하고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 곁길을 밟아 엉뚱한 곳에 떨어진 실수를 어떡해서든 되돌려 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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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pa…
- 작성일
아~
나두 이런적 있는데... /
긴장하면서 읽고 또 읽었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나두 이런적 있는데... /
긴장하면서 읽고 또 읽었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