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제2부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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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일이 있은 후로 시간이 지날수록 양주임과의 사이나, 혹은
다소 미안하고 불편했던 내 마음들도 조금씩 진정이 되어가고 있었다.
새해가 시작되고, 구정이 지난지 얼마되지 않은 날이었다.
여느때처럼 오피스텔로 돌아와 운동을 마치고, 샤워를 한 후 혼자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가보니
약간 술을 마신듯한 양주임이 서있다.
어쩔수 없이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지만, 마음은 불안하고 불쾌하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양주임은 참을수 없는 욕구들을 털어놓고 나를 요구하기 시작했지만,
이미 냉혹하게 식어버린 내 맘은 쉬이 풀리지 않았고,
다소 취해있는 양주임을 돌려보냈다.
많이 미안하기도 했지만, 내 행동은 잘 한 것이었다고 스스로를 위안하고 있었다.
이튿날,
11시쯤, 창고 최대리님이 사무실로 와서 양주임이 결근을 했다고,
연락도 되질 않는다고 통보를 한다.
한번도 그런적이 없는 양주임이었다.
누구보다 성실하고 월차한번 쓴적이 없는 양주임의 예고없는 결근에
맘속에 불안함이 커지기 시작했다.
퇴근시간을 기다려, 급히 양주임의 집으로 차를 몰았다.
낯이 익은 양주임의 아들이 교통사고라며 가까이 W병원의 호실을 일러준다.
병원으로 가며 맘속에 갖가지 불안한 생각들과 상상들이 스치고 있었다.
4층병동 6인실 병실을 들리자, 한쪽 다리에 깁스를 한 양주임이 잠들어 있고,
초쵀해 보이는 양주임의 부인이 나를 맞는다.
내가 생각했던 최악의 경우 - 예를 들자면, 교통사고를 위장한 자해 같은것....-는 아닌것에
안도하며, '이만하길 다행입니다'따위의 인사를 전했다.
곤히 잠들어 있는 양주임의 얼굴도 무척 야위어 보여 일찍 자리를 뜨려는 나를
1층 병원로비까지 따라온 양주임의 부인이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를 하고파하는듯 했다.
"사모님, 혹시 뭐 걱정이라도..."
"아닙니다. 말씀대로 저만하길 다행이고, 그놈의 술이 문제죠뭐.
그나저나, 제가 과장님께 드릴 말씀이있습니다."
순간 죄를지은 사람의 심정만큼이나 가슴이 쿵쾅거렸다.
병원 앞 차운바람이 부는 주차장 입구에서 양주임의 부인은 그야말로
내 뒤통수를 갈라놓을만한 이야기들을 시작했다.
"..... 얼마전에야 알았습니다.
설마설마 했는데, ....
저 양반이 최근 1년간 조용히 지낼 수 있었던건 ... 과장님 이셨던 모양이더군요.
..... 과장님같은 양반도 , 저 양반처럼 이상한 습관이 있으시다는게,
나도 참...
그것도 모르고 전 과장님을 ....."
얼굴이 뜨겁다 못해 터질듯이 달아올랐음은 물론, 더이상 이야기를 들을필요 없이 도망가고싶은심정을 참느라 무진장 애를 썼다.
양주임의 부인은 양주임을 너무 잘 알고 있었고, 그걸 용서하면서 살아간다는 것도 놀라운 사실이었지만, 이후 이어지는 말들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 저사람, 참 외로운 사람입니다.
어떤 여편네도 이런 기분 모를테지만, .... 사실 전 과장님께 고마운 기분이 들 정도로..."
부인의 눈가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저사람, 어제 사고는 ..... 고의였을지 모른다고 생각이 듭니다.
최근들어 갑자기 전처럼 술도 많이 마시고, 또 많이 힘들어 하는 이유가...
.... 과장님 이시더군요.
.......
참 어이없고 어려운 말이긴 해도.
과, 과장님.... 저 양반좀 ....... 좀 봐주시면 안돼겠습니까?"
무어라 얼버무리며 그자리를 피했는지는 아직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만, 돌아오는 길 그 혼돈스런 저녁의 처음보는 듯한 서울거리의 낯선느낌은
아직도 섬뜩할만큼 무섭고 확연하게 뇌리에 남아있다.
실로 오랫동안 느끼지 못했던 나의 실체를 보았다고 하면,
그날 내가느낀 공포를 공감할수 있을까.
그래, 난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미혼의 삼십대 초반 건강하고 깔끔한 외모의 나름대로 철저히 보통사람이었지만,
사실 난 누구에게도 용서받기 힘든 삶에 완전이 녹아 있었던 것이다.
내가 기다리는 사람.
혹은 내가 만나왔던 순간순간 그리고 행위들 속에
얼빠진 사람처럼 그렇게 열중해 있었지만,
사실 나의 모습은 스스로 한번도 정리하지 못한만큼
스스로에게도 낯선, 너무도 낯선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얄팍하게 흐려지는 하늘을 보고, 울어야 했던
절실하게 눈물을 흘려야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내 이야기에 공감해 주리라 믿으며, 그날의 비통하고 비통했던 심정들을
더이상 어설픈 문장들로 풀어보지 말자.
양주임이 회사로 돌아오기까지의 4주일간, 난 다시 병원을 들리지 못했다.
그리고 내 생에 가장 큰 숙제라 생각하며 내생각들을 정리하기에 바빴고, 또 정신을 빼어놓은 사람처럼 부산스러웠다.
양주임이 한결 살이 찐 모습으로 다시 회사에 모습을 보였을때, 난 결심대로
사표를 쓴 후였고, 양주임에게 장문의 편지를 한통 전해줄수 있었다.
오피스텔을 비워두고, 삼척에 있는 큰형님댁에 내려가
두어달을 지냈다.
갑작스러운 나의 방황에 가족들은 모두 궁금해 했지만, 그럴수록 난 점점 말수가 줄어들고 있었다.
결혼을 재촉하는 가족들의 숱한 부탁들도 일축하며 그렇게 형님이 운영하는 횟집의
술들을 축내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왔을때는 5월이 지쳐있었다.
홀홀단신 다시 서울로 올라왔지만,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는 무엇하나 정해진게 없었다.
오피스텔로 돌아가는것도 쉽지 않았다.
구의동의 한 낡은 여관에서 며칠을 보내었다.
낮에는 어린이 대공원을 할일없이 뱅뱅돌기 일쑤였고, 어둠이 내리길 기다려
어떤곳에서든 술을 마셔야하는 날들이 계속되고 있었다.
[강정길]
술자리마다 늘상 난 당연히 혼자였지만, 내 머리속엔 온통 그이름 뿐이었고,
내 머리를 뒤엎고도 남을 만큼 그 이름석자가 술잔에 따뤄지고 목을타고 넘어가고
혹은 비위를 거스르며 변기통으로 토해지기까지....
술이 취하면 스스로의 이름을 부르는 습관이 생기기 시작했다.
"석훈아..."
때로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서쿠나...!"
때로는 사람들이 확 돌아볼만큼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그렇게 또 며칠이 혼돈속에 녹아가고 있었지만,
자고나면 거뭍거뭍하게 자라난 깔끄러운 턱수염들처럼,
그랬다. 나를 흔들고 나를 미치게 하는 "문제의 나"는
결코 그렇게 스스로를 무너트린다고 해결되거나 혹은 정리될만한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내 평생에 가장 무거운 내 짐임을 그때서야 조금씩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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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의 마지막 편인 2부 10번의 글만 남겨놓게 되었네요.
** 그동안 관심을 갖고 방대한 양을 읽어주신 많은 분들께 다시한번 감사드리구요.
** 어줍잖은 이야기의 마지막은 내일쯤에나 올려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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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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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어떻게 진행이 될지
사뭇 궁금해지네요...
저로서는 해피엔딩을 바라지만...
사뭇 궁금해지네요...
저로서는 해피엔딩을 바라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