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re Black Christmas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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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상상들이 뇌리를 파고들었고 나는 실성한 사람처럼 2층으로 내달렸다. 2층 복도에 도달했을 때쯤 아래층에서 아내와 아버지가 문을 열고 급히 나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의 별장이 전체적인 규모 면에서 볼 때 그리 큰 편에 속하지는 않지만 텅 빈 2층 복
도가 유난히 길게만 보였다. 순간적으로 무시무시한 드라큐라 성에 와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민구의 낮은 비명소리가 다시 한번 울렸고 그것에 반응하듯 나는 지체없이 아이들의 방문
앞까지 뛰어갔다.
문을 열고 제일 먼저 본 것은 활짝 열려진 창문과 휘날리는 하얀 커튼이었다.
창을 통해 굵은 함박눈들이 방안으로 연신 침투해 들었고 세찬 바람결에 커다란 커튼은 살
아있는 생물체 마냥 제 멋대로 넘실거렸다.
창가 한 가운데에 민구의 조그마한 체구가 오도카니 서서 하염없이 날리는 눈발을 바라보고
있었다. 민구는 창틀에 두 손을 짚고 서 있었다. 흡사 금방이라도 2층 아래로 뛰어 내릴 듯
한 기세였다. 그것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아빠……!"
먼저 내 품속을 파고든 것은 민지였다. 민지는 잔뜩 겁에 질린 채 이제부터라도 신나게 울
것만 같았다.
나는 말없이 민지의 등을 토닥거리며 천천히 민구를 향해 다가갔다. 내가 움직이는 사이에
도 민지는 내 오른 손을 꼭 잡고 매달리다 시피 했다.
나는 살며시 민구의 어깨 옆으로 다가섰다. 민구의 표정을 먼저 살피기 위해서였다.
예상했던 데로 민구는 떨고 있었다. 공포심으로 가득한 민구의 동공은 끔찍한 형상의 무언
가를 목격한 듯했다. 나는 안구가 튀어나올 정도로 동그랗게 뜬 민구의 두 눈이 가리키는
시선을 좇아가 보았다.
먼저 어둠 속에서 오밀조밀 꿈틀대는 듯한 새하얀 눈의 향연이 펼쳐졌다. 한 밤중에 하염없
이 내리는 눈을 보고 있노라니 문득 그것들이 컴컴한 어둠에 잠식당해 금방이라도 시커멓게
변색해 버릴 것만 같았다. 온 누리에 뿌려지는 시커먼 눈발이라… 생각만 해도 소름끼쳤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눈발 속에서 특별한 무언가를 찾을 수 없었다. 정원에 높게 솟아 오른
사철나무들과 앙상한 가지들이 전부인 듯싶었다.
"민구야……."
조심스레 아들의 어깨에 손을 올려보았다. 우선은 아이의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는 것이 급
선무였다. 민구의 어깨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민구야. 왜 그러고 서 있는 거니? 응?"
최대한 부드러운 음성으로 얘기했다. 그러나 좀처럼 민구의 입술이 열리지 않았다. 파랗게
질린 그의 얼굴은 무서운 악령과 대면이라도 한 듯 지독한 전율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윽고 아내와 아버지, 그리고 은주가 요란하게 뛰어들어왔다.
"민구야? 민구야 괜찮니? 응? 어디 다친데 없지?"
아내는 멍한 자태의 민구를 보자마자 와락 끌어안아 버렸다. 아버지와 은주는 영문을 모르
겠다는 당혹스런 표정으로 방안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나는 아이들이 무사했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누구에게라도 감사하고픈 심정이었
다. 민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 손으론 민지를 품에 안았다.
문득 바라본 민구의 얼굴엔 아직까지 두려움과 공포로 가득했다. 그 애는 그때까지 창 밖
어딘가만 끊임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2>
자정을 30분 남겨둔 시각. 우리들은 다시 거실 소파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민구는 금방 데운 코코아를 벌써 두 그릇 째 마시며 안정을 되찾아갔다. 커피포트에 물이
끓자 은주는 준비해 두었던 커피를 타서 우리에게 내 놓았다. 은은한 모카향이 기분 좋게
번졌다.
민지는 그새 엄마 품에 안겨서 잠이 들어 있었다.
나는 민구의 마음이 좀더 진정되기만을 기다리며 커피를 몇 모금 마셨다. 따뜻한 느낌이 몸
전체로 퍼져나가자 흥분되었던 신경이 천천히 가라앉는 듯했다. 사실 우리 모두 다 놀란 가
슴을 차분히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은주는 우리에게 뭐 더 필요한 것이 없는지를 주시하며 동그란 쟁반을 가슴에 안은 채 소파
뒤에 서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크게 들썩이는 것이 그녀 역시 적잖게 놀랬음을 충
분히 짐작하게 했다.
한참 만에야 입을 연 민구는 그 때 당시의 상황을 재현이라도 하듯 자신이 처했던 공포담을
피력해냈다.
아홉 시쯤 민구와 민지는 유선에게 이끌려 2층 객실로 향했다. 유선은 민구와 민지를 따뜻
한 물로 씻긴 후 자리에 뉘였다. 유선은 나가면서 아이들 방의 불을 끈 후 민구와 민지의
잠자리를 다시 한번 확인한 후 그곳에서 나왔다.
유선이 나간 후 민구와 민지는 침대에 누운 채로 여러 가지 얘기들을 나누었다. 만화 영화
이야기에서부터 학교 이야기, 그리고 마침내는 귀신이야기로까지 이어졌다.
한참 후 민구는 민지가 언제부턴가 깊이 잠들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자신도 그만 자려고
했다. 하지만 갑작스레 갈증을 느껴 하는 수 없이 일어나야만 했다. 2층에도 작은 주방이 있
음을 아는 민구는 그곳으로 가기 위해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런데 문득 바라본 창 밖의 풍
경에 민구는 잠시 넋을 잃고 빠져버렸다. 눈발이 훨씬 더 굵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굵은
눈발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이었다.
민구는 웅장한 설경을 좀더 자세히 감상하기 위해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양옆으로 완전히
열어 제쳤다.
쏟아지는 함박눈에 마음을 완전 뺏겨버린 민구는 목이 마르다는 사실조차 잠시 잊고 창문에
얼굴을 맞대다시피 했다. 마치 하늘에서 대량의 솜뭉치를 내리 붓는 듯했다.
민구가 시선을 정원에서 돌려 다른 곳으로 향할 때였다.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으로 반짝이
는 교회의 건물과 십자가를 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시선이 교회에 미처 닿기 전에 그는
무언가를 보았다.
오싹한 기운이 먼저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육감이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한 박자 빨리 포
착해 낸 것이었다.
처음엔 그것이 무엇인지 잘 알 없었다. 휘날리는 눈발 사이로 언뜻 언뜻 보이는 것이 정확
히 무엇인지를 간파하기가 힘들었다.
한참 후에야 민구는 그것이 미세하게 새어 나오는 불빛임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정육점을 연상케 하는 희미한 붉은 빛이었다.
짙은 어둠과 굵은 눈발에 가려 자세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디선가 희미한 붉은 빛이 새
어 나옴을 민구는 분명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민구는 어깨를 죽 펴고 눈에 힘을 줘 가면서 눈대중을 해보았다. 약 10여 미터 남짓한 거리
였다. 10 미터 밖에서 뭔가 붉은 빛이 아른거리는 것이다.
호기심이 발동한 민구는 창문을 아예 열어버렸다. 차가운 공기가 방안으로 밀려 왔다. 볼이
금새 발갛게 달아올랐다.
민구는 한기를 느끼면서도 아른거리는 붉은 빛의 정체를 밝혀내고자 동공을 최대한 크게 하
고 살폈다. 어둠과 폭설 속에서 서서히 그것의 윤곽이 드러났다.
다시 한번 섬뜩한 기운이 머리카락을 쭈뼛 서게 했다. 민구는 오금이 저리고 치아가 다다닥,
부딪힘을 느꼈다.
그것은 거대한 양옥집이었다. 3층 높이의 커다란 양옥집.
마치 괴기 영화에서 본 적이 있는 흡혈귀 백작의 성 같았다. 어찌보면 집 전체가 시커먼 색
깔로 뒤덮여 있어서 그 자체로 어둠 속에 몸을 숨긴 거대한 괴물 같아 보였다.
붉은 빛은 그 집의 한 가운데에서 새어 나온 것이었다.
빛이라곤 하나 없이 죽은 듯이 침묵하고 있는 그 집에서 유일하게 새어 나오는 빛이 바로
그 붉은 빛이었다.
민구는 눈에 힘을 더 주었다. 더욱 세심하게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아까부터 자신을 불안하
게 만드는 원인 모를 공포감의 답을 찾고자 함이었다. 두려웠지만 눈덩이처럼 커져버린 궁금증을 그냥 묻어버리기엔 석연치 못한 찜찜함이 계속해서 자신을 괴롭힐 것만 같았기에.
두 손으로 창틀을 집고 고개를 밖으로 완전히 내민 채 강렬한 눈빛으로 붉은 빛을 주시해보
았다. 양옆에서 하얀 커튼이 귀신 옷자락처럼 너풀너풀 춤추고 있었다.
붉은 빛이 새어 나는 창가. 그곳엔 누군가가 있었다.
정확히 민구를 노려보고 있는 눈이 있었다.
희미한 붉은 전등 빛 아래 우두커니 서서 민구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더욱 끔찍했던
것은 그는 도저히 정상적인 인간이라 할 수가 없었다. 툭 튀어나온 이마 아래로 분명 눈동
자가 하나밖에 없었다. 입은 귀밑까지 찢어져 있었고 머리카락은 듬성듬성 빠져나가 있었다.
그것은 정말로 괴물이나 악귀를 연상케 하는 흉측스런 몰골이었다. 그는 검은 외투를 뒤집
어 쓴 채 아까부터 계속해서 민구를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구는 그만 공포의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공포에 질려있는 민구를 여전히 노려보고 있었다. 하나 밖에 없는 큼직한 눈동
자로.
어째서인지 괴물은 민구를 향해 매서운 노기를 띠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허공 속을 훨훨 날
아와 스윽 하고 민구를 잡아먹을 듯한 기세였다.
민구로선 알 수 없었다. 어째서 그 괴물이 자신에게 그토록 화가 나 있는지를.
민구가 두 번째 비명을 질렀을 무렵 그 괴물 같은 자의 방에 불이 꺼졌다. 희미하게 새어
나오던 붉은 빛이 사라지자 그곳은 어둠과 완전한 하나를 이루었다.
이윽고 나와 아내가 민구에게 도착했지만 민구는 여전히 붉은 빛이 새어 나오던 방에서 시
선을 뗄 수가 없었다. 어둠 속이지만 계속해서 그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을 것만 같았기에.
자신이 잠들기만을 기다리며 계속해서…….
이야기를 마친 민구는 아직도 그 흉측한 얼굴이 떠오르는지 가볍게 몸서리를 쳤다.
민구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후 나는 잠깐 상상을 해 보았다.
어둠 저 멀리에서 눈이 하나 밖에 없는 자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면……!
만약 그런 상황이라면 아무리 귀신이나 미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 해도 등골이 오싹할 것
이다.
아내는 평소에 공포영화를 무척 좋아하는 민구가 헛것을 보거나 착각을 한 것이라고만 믿었
다. 그러면서 애가 몸이 허해서 그런 거니 보약이라도 지어 먹여야겠다고 부산을 떨었다.
나는 조용히 아버지의 표정을 살폈다. 특별한 반응은 보이지 않았지만 아버지 역시 어린 손
자가 많이 걱정되는 모양이셨다.
여러 가지 의문점들이 많았지만 일단 덮어두기로 했다. 날이 밝으면 차근차근 여유있게 접
근해 나가보기로 하고 우선은 격앙된 감정들을 추스르며 한밤중의 소동을 일단락 짓기로 했
다. 이미 시간은 자정 넘어 새벽으로 가고 있었기에.
하는 수 없이 아이들은 아내와 함께 재우기로 했다. 민구는 이제는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
았는지 한결 밝은 얼굴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잠자리를 봐드린 후 그때까지 남아서 뒷정리를 하고 있던 은주에게도 그만
들어가라고 했다.
다시 혼자 남은 나는 거실의 모든 불을 소등하고 집안 곳곳의 관건상태를 다시 한번 점검했다.
아내와 아이들이 정신없이 골아 떨어졌음을 확인한 후 나는 2층으로 발길을 옮겼다.
왼쪽으로 난 첫 번째 방이 은주의 방이었다. 잠깐 문에 귀를 기울여 보니 아직 잠이 든 것
같지는 않았다. 미세하게 말소리가 들려오는 것으로 볼 때 누군가와 전화통화를 하고 있는
듯했다. 그녀와 절친한 친구는 아랫마을 다방에서 일하는 미스 김과 미스 최 였다. 내가 아
는 한 은주에게 그녀들 외에 아는 친구는 없었다. 아마도 오늘 있었던 밤의 소동을 이야기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시선을 돌려 조금 전까지 아이들이 묵었던 방으로 향했다. 복도의 오른 쪽 끝 방이었
다. 웬지 그 방이, 나를 끌어당기고 있다는 미묘한 느낌이 들었다.
천천히 복도를 걷고 있자니 마치 내가 공포 영화 속의 주인공이라도 된 듯한 착각에 휩싸였
다. 상황이 너무나도 흡사했다. 외딴 별장, 폭설, 귀신을 보았다는 아이, 그리고 그것을 확인
하기 위해 사건의 중심으로 접근해 들어가는 주인공.
복도 끝으로 난 큼직한 반원 모양의 창문 밖으론 여전히 굵은 눈발이 휘날렸다.
복도 끝에 도달한 나는 조용히 문고리를 돌렸다. 문은 부드럽게 열렸다.
불과 몇 시간 전의 상황들이 떠올랐다.
활짝 열려진 창문, 휘날리는 눈발, 넘실거리는 하얀 커튼, 무엇에 경악한 듯한 민구의 표정.
지금은 그저 고요할 따름이었다. 침대는 잘 정돈되어 있었고 창문도 굳게 닫혀 있었다. 나는 민구가 서 있었던 그 자리로 가서 커튼을 열었다.
눈앞으로 창 밖의 설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졌다.
천지가 온통 구름처럼 하얗게 뒤덮여 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이런 속도로 눈이 계속 내리다
간 차로 언덕을 내려 갈 수 없는 불상사가 생길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나는 민구가 그랬듯이 창문에 얼굴을 맞대다시피 하고 밖을 살폈다.
과연 12미터 거리쯤에 거대한 집채가 보였다. 시커먼 외관을 하고는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
었다. 언뜻 보기에도 정말 마귀나 귀신이 매일 파티를 열 것만 같은 으스스함이 뿜어져 나
왔다. 그 자체로 음습한 불길함을 가득 내포하는 거대한 블랙홀을 연상시켰다.
나의 시선이 본능적으로 뭔가와 반응했다.
질식할 것만 같은 공포가 숨통을 조여왔다.
정말로 붉은 빛의 창이 보였고 그곳엔 누군가가 서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분명히 민구의
말대로 그 얼굴엔 눈동자가 하나 밖에 없었다.
이마엔 주먹만한 크기의 혹이 툭 튀어 나와 있었고 그 아래로 큼직한 눈동자 하나가 정 중
앙에 자리잡고 있었다. 입은 비정상적으로 뒤틀려 귀밑까지 길게 찢어져 있었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은 지독한 전율에 휩싸였다.
그 괴물 같은 녀석은 내가 미처 그의 존재를 인식하기도 훨씬 전부터 나를 뚫어져라 응시하
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 큼직한 눈동자엔 사악한 노여움이 가득했다.
이윽고 그의 검은 외투 자락이 펄럭인다 싶더니 붉은 빛이 꺼져 버렸다. 외눈 같이 반짝이
던 붉은 빛이 사라지자 집은 다시 깊은 어둠의 물결 속으로 잠들었다.
어느 듯 전신에 소름이 잔뜩 돋아나 있었다. 이런 두려움은 정말 처음이었다. 30대 중반을
넘긴 내가 어린애들처럼 귀신의 두려움을 느끼게 되다니……!
나는 얼른 커튼을 치고 강박증에 걸린 사람 마냥 창문의 관건상태를 확인했다.
어쩐지 그 괴물 같은 자가 이 곳을 향해 오고 있는 것만 같았다. 말도 안돼는 소리라고 스
스로를 타일러보지만 불쾌한 공포는 계속 증폭되었다.
무엇 때문 인진 몰라도 정말로 그 괴물은 나에게 저주 어린 증오를 퍼붓는 것만 같아 보였
다. 덩그렇게 치켜 뜬 외 눈동자에는 매서운 복수심이 훨훨 타오르고 있었다.
불꺼진 방안을 불안하게 서성이며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겉잡을 수 없는 초조함에 목이
바싹 바싹 타들었다.
어째서 이런 긴장을 하는지 논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했다.
내 마음속을 온통 지배하고 있는 것은 그 괴물이 이제 곧 이 별장으로 성큼 다가 올 것이라
는 불길한 상상뿐이었다.
꺼림칙한 영상 하나가 제 멋대로 그려졌다.
검은 외투를 뒤집어 쓴 그 괴물이 폭설을 헤치고 묵묵히 다가오고 있다. 아니 그는 마치 귀
신처럼 눈밭 위를 스믈 스믈 날아서 온다. 12미터 거리라면 시간상으로 10여분이면 충분하
다. 지금쯤이면 이미 별장 앞까지 도달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지금 내가 확인 차 창문을 열
고 대문 밖을 내려다보면 분명 그 놈의 하나 뿐인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칠 것이다. 내가
아직 잠자지 않고 있음을 확인한 그는 곧장 2층 창문까지 두둥실 부양해서 올라올 것이다.
헛된 상념들을 떨쳐내기 위해 머리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었다. 더 이상 미치광이 같은 상상
은 하기 싫었다. 그런 일 따윈 상식적으로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임을 잘 알고 있다. 그 상식
의 범위를 넘어서는 망상 따윈 하지 말자.
그렇게 생각을 다잡고 그 방을 나섰다.
하지만 계단을 내려와서 무의식적으로 다시 손목시계를 확인해 보았다. 10여분은 충분히 지
난 상태였다.
손으로 가슴을 매만지며 두근거리는 심장을 달랬다.
그 와중에도 머릿속에서는 논리적인 이성과 비논리적인 감성이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문 밖에 그가 와 있다! 눈동자가 하나 밖에 없는 그가……!
다섯 발자국 전… 네 발자국 전… 세 발자국 전… 두 발자국 전…
그리고, 한 발자국 전……!
현관문이 와락 열리고 흉측한 그의 얼굴이 내 눈앞까지 확 와 닿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모든 것은 상상일 뿐이었다.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상상.
나는 긴 한숨을 내쉬며 거실을 가로질렀다. 빨리 아내와 아이들이 따스한 온기가 감도는 그
곳으로 가고 싶었다.
어둠뿐인 거실 바닥이 마치 늪처럼 내 발목을 잡아끄는 듯했다. 금방이라도 뭔가가 스윽 하
고 나의 등을 어루만질 것만 같아 나의 발걸음은 더욱 빨라졌다.
바로 그 순간 거짓말같이 초인종이 울렸다.
아버지의 별장이 전체적인 규모 면에서 볼 때 그리 큰 편에 속하지는 않지만 텅 빈 2층 복
도가 유난히 길게만 보였다. 순간적으로 무시무시한 드라큐라 성에 와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민구의 낮은 비명소리가 다시 한번 울렸고 그것에 반응하듯 나는 지체없이 아이들의 방문
앞까지 뛰어갔다.
문을 열고 제일 먼저 본 것은 활짝 열려진 창문과 휘날리는 하얀 커튼이었다.
창을 통해 굵은 함박눈들이 방안으로 연신 침투해 들었고 세찬 바람결에 커다란 커튼은 살
아있는 생물체 마냥 제 멋대로 넘실거렸다.
창가 한 가운데에 민구의 조그마한 체구가 오도카니 서서 하염없이 날리는 눈발을 바라보고
있었다. 민구는 창틀에 두 손을 짚고 서 있었다. 흡사 금방이라도 2층 아래로 뛰어 내릴 듯
한 기세였다. 그것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아빠……!"
먼저 내 품속을 파고든 것은 민지였다. 민지는 잔뜩 겁에 질린 채 이제부터라도 신나게 울
것만 같았다.
나는 말없이 민지의 등을 토닥거리며 천천히 민구를 향해 다가갔다. 내가 움직이는 사이에
도 민지는 내 오른 손을 꼭 잡고 매달리다 시피 했다.
나는 살며시 민구의 어깨 옆으로 다가섰다. 민구의 표정을 먼저 살피기 위해서였다.
예상했던 데로 민구는 떨고 있었다. 공포심으로 가득한 민구의 동공은 끔찍한 형상의 무언
가를 목격한 듯했다. 나는 안구가 튀어나올 정도로 동그랗게 뜬 민구의 두 눈이 가리키는
시선을 좇아가 보았다.
먼저 어둠 속에서 오밀조밀 꿈틀대는 듯한 새하얀 눈의 향연이 펼쳐졌다. 한 밤중에 하염없
이 내리는 눈을 보고 있노라니 문득 그것들이 컴컴한 어둠에 잠식당해 금방이라도 시커멓게
변색해 버릴 것만 같았다. 온 누리에 뿌려지는 시커먼 눈발이라… 생각만 해도 소름끼쳤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눈발 속에서 특별한 무언가를 찾을 수 없었다. 정원에 높게 솟아 오른
사철나무들과 앙상한 가지들이 전부인 듯싶었다.
"민구야……."
조심스레 아들의 어깨에 손을 올려보았다. 우선은 아이의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는 것이 급
선무였다. 민구의 어깨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민구야. 왜 그러고 서 있는 거니? 응?"
최대한 부드러운 음성으로 얘기했다. 그러나 좀처럼 민구의 입술이 열리지 않았다. 파랗게
질린 그의 얼굴은 무서운 악령과 대면이라도 한 듯 지독한 전율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윽고 아내와 아버지, 그리고 은주가 요란하게 뛰어들어왔다.
"민구야? 민구야 괜찮니? 응? 어디 다친데 없지?"
아내는 멍한 자태의 민구를 보자마자 와락 끌어안아 버렸다. 아버지와 은주는 영문을 모르
겠다는 당혹스런 표정으로 방안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나는 아이들이 무사했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누구에게라도 감사하고픈 심정이었
다. 민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 손으론 민지를 품에 안았다.
문득 바라본 민구의 얼굴엔 아직까지 두려움과 공포로 가득했다. 그 애는 그때까지 창 밖
어딘가만 끊임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2>
자정을 30분 남겨둔 시각. 우리들은 다시 거실 소파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민구는 금방 데운 코코아를 벌써 두 그릇 째 마시며 안정을 되찾아갔다. 커피포트에 물이
끓자 은주는 준비해 두었던 커피를 타서 우리에게 내 놓았다. 은은한 모카향이 기분 좋게
번졌다.
민지는 그새 엄마 품에 안겨서 잠이 들어 있었다.
나는 민구의 마음이 좀더 진정되기만을 기다리며 커피를 몇 모금 마셨다. 따뜻한 느낌이 몸
전체로 퍼져나가자 흥분되었던 신경이 천천히 가라앉는 듯했다. 사실 우리 모두 다 놀란 가
슴을 차분히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은주는 우리에게 뭐 더 필요한 것이 없는지를 주시하며 동그란 쟁반을 가슴에 안은 채 소파
뒤에 서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크게 들썩이는 것이 그녀 역시 적잖게 놀랬음을 충
분히 짐작하게 했다.
한참 만에야 입을 연 민구는 그 때 당시의 상황을 재현이라도 하듯 자신이 처했던 공포담을
피력해냈다.
아홉 시쯤 민구와 민지는 유선에게 이끌려 2층 객실로 향했다. 유선은 민구와 민지를 따뜻
한 물로 씻긴 후 자리에 뉘였다. 유선은 나가면서 아이들 방의 불을 끈 후 민구와 민지의
잠자리를 다시 한번 확인한 후 그곳에서 나왔다.
유선이 나간 후 민구와 민지는 침대에 누운 채로 여러 가지 얘기들을 나누었다. 만화 영화
이야기에서부터 학교 이야기, 그리고 마침내는 귀신이야기로까지 이어졌다.
한참 후 민구는 민지가 언제부턴가 깊이 잠들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자신도 그만 자려고
했다. 하지만 갑작스레 갈증을 느껴 하는 수 없이 일어나야만 했다. 2층에도 작은 주방이 있
음을 아는 민구는 그곳으로 가기 위해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런데 문득 바라본 창 밖의 풍
경에 민구는 잠시 넋을 잃고 빠져버렸다. 눈발이 훨씬 더 굵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굵은
눈발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이었다.
민구는 웅장한 설경을 좀더 자세히 감상하기 위해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양옆으로 완전히
열어 제쳤다.
쏟아지는 함박눈에 마음을 완전 뺏겨버린 민구는 목이 마르다는 사실조차 잠시 잊고 창문에
얼굴을 맞대다시피 했다. 마치 하늘에서 대량의 솜뭉치를 내리 붓는 듯했다.
민구가 시선을 정원에서 돌려 다른 곳으로 향할 때였다.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으로 반짝이
는 교회의 건물과 십자가를 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시선이 교회에 미처 닿기 전에 그는
무언가를 보았다.
오싹한 기운이 먼저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육감이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한 박자 빨리 포
착해 낸 것이었다.
처음엔 그것이 무엇인지 잘 알 없었다. 휘날리는 눈발 사이로 언뜻 언뜻 보이는 것이 정확
히 무엇인지를 간파하기가 힘들었다.
한참 후에야 민구는 그것이 미세하게 새어 나오는 불빛임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정육점을 연상케 하는 희미한 붉은 빛이었다.
짙은 어둠과 굵은 눈발에 가려 자세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디선가 희미한 붉은 빛이 새
어 나옴을 민구는 분명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민구는 어깨를 죽 펴고 눈에 힘을 줘 가면서 눈대중을 해보았다. 약 10여 미터 남짓한 거리
였다. 10 미터 밖에서 뭔가 붉은 빛이 아른거리는 것이다.
호기심이 발동한 민구는 창문을 아예 열어버렸다. 차가운 공기가 방안으로 밀려 왔다. 볼이
금새 발갛게 달아올랐다.
민구는 한기를 느끼면서도 아른거리는 붉은 빛의 정체를 밝혀내고자 동공을 최대한 크게 하
고 살폈다. 어둠과 폭설 속에서 서서히 그것의 윤곽이 드러났다.
다시 한번 섬뜩한 기운이 머리카락을 쭈뼛 서게 했다. 민구는 오금이 저리고 치아가 다다닥,
부딪힘을 느꼈다.
그것은 거대한 양옥집이었다. 3층 높이의 커다란 양옥집.
마치 괴기 영화에서 본 적이 있는 흡혈귀 백작의 성 같았다. 어찌보면 집 전체가 시커먼 색
깔로 뒤덮여 있어서 그 자체로 어둠 속에 몸을 숨긴 거대한 괴물 같아 보였다.
붉은 빛은 그 집의 한 가운데에서 새어 나온 것이었다.
빛이라곤 하나 없이 죽은 듯이 침묵하고 있는 그 집에서 유일하게 새어 나오는 빛이 바로
그 붉은 빛이었다.
민구는 눈에 힘을 더 주었다. 더욱 세심하게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아까부터 자신을 불안하
게 만드는 원인 모를 공포감의 답을 찾고자 함이었다. 두려웠지만 눈덩이처럼 커져버린 궁금증을 그냥 묻어버리기엔 석연치 못한 찜찜함이 계속해서 자신을 괴롭힐 것만 같았기에.
두 손으로 창틀을 집고 고개를 밖으로 완전히 내민 채 강렬한 눈빛으로 붉은 빛을 주시해보
았다. 양옆에서 하얀 커튼이 귀신 옷자락처럼 너풀너풀 춤추고 있었다.
붉은 빛이 새어 나는 창가. 그곳엔 누군가가 있었다.
정확히 민구를 노려보고 있는 눈이 있었다.
희미한 붉은 전등 빛 아래 우두커니 서서 민구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더욱 끔찍했던
것은 그는 도저히 정상적인 인간이라 할 수가 없었다. 툭 튀어나온 이마 아래로 분명 눈동
자가 하나밖에 없었다. 입은 귀밑까지 찢어져 있었고 머리카락은 듬성듬성 빠져나가 있었다.
그것은 정말로 괴물이나 악귀를 연상케 하는 흉측스런 몰골이었다. 그는 검은 외투를 뒤집
어 쓴 채 아까부터 계속해서 민구를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구는 그만 공포의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공포에 질려있는 민구를 여전히 노려보고 있었다. 하나 밖에 없는 큼직한 눈동
자로.
어째서인지 괴물은 민구를 향해 매서운 노기를 띠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허공 속을 훨훨 날
아와 스윽 하고 민구를 잡아먹을 듯한 기세였다.
민구로선 알 수 없었다. 어째서 그 괴물이 자신에게 그토록 화가 나 있는지를.
민구가 두 번째 비명을 질렀을 무렵 그 괴물 같은 자의 방에 불이 꺼졌다. 희미하게 새어
나오던 붉은 빛이 사라지자 그곳은 어둠과 완전한 하나를 이루었다.
이윽고 나와 아내가 민구에게 도착했지만 민구는 여전히 붉은 빛이 새어 나오던 방에서 시
선을 뗄 수가 없었다. 어둠 속이지만 계속해서 그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을 것만 같았기에.
자신이 잠들기만을 기다리며 계속해서…….
이야기를 마친 민구는 아직도 그 흉측한 얼굴이 떠오르는지 가볍게 몸서리를 쳤다.
민구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후 나는 잠깐 상상을 해 보았다.
어둠 저 멀리에서 눈이 하나 밖에 없는 자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면……!
만약 그런 상황이라면 아무리 귀신이나 미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 해도 등골이 오싹할 것
이다.
아내는 평소에 공포영화를 무척 좋아하는 민구가 헛것을 보거나 착각을 한 것이라고만 믿었
다. 그러면서 애가 몸이 허해서 그런 거니 보약이라도 지어 먹여야겠다고 부산을 떨었다.
나는 조용히 아버지의 표정을 살폈다. 특별한 반응은 보이지 않았지만 아버지 역시 어린 손
자가 많이 걱정되는 모양이셨다.
여러 가지 의문점들이 많았지만 일단 덮어두기로 했다. 날이 밝으면 차근차근 여유있게 접
근해 나가보기로 하고 우선은 격앙된 감정들을 추스르며 한밤중의 소동을 일단락 짓기로 했
다. 이미 시간은 자정 넘어 새벽으로 가고 있었기에.
하는 수 없이 아이들은 아내와 함께 재우기로 했다. 민구는 이제는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
았는지 한결 밝은 얼굴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잠자리를 봐드린 후 그때까지 남아서 뒷정리를 하고 있던 은주에게도 그만
들어가라고 했다.
다시 혼자 남은 나는 거실의 모든 불을 소등하고 집안 곳곳의 관건상태를 다시 한번 점검했다.
아내와 아이들이 정신없이 골아 떨어졌음을 확인한 후 나는 2층으로 발길을 옮겼다.
왼쪽으로 난 첫 번째 방이 은주의 방이었다. 잠깐 문에 귀를 기울여 보니 아직 잠이 든 것
같지는 않았다. 미세하게 말소리가 들려오는 것으로 볼 때 누군가와 전화통화를 하고 있는
듯했다. 그녀와 절친한 친구는 아랫마을 다방에서 일하는 미스 김과 미스 최 였다. 내가 아
는 한 은주에게 그녀들 외에 아는 친구는 없었다. 아마도 오늘 있었던 밤의 소동을 이야기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시선을 돌려 조금 전까지 아이들이 묵었던 방으로 향했다. 복도의 오른 쪽 끝 방이었
다. 웬지 그 방이, 나를 끌어당기고 있다는 미묘한 느낌이 들었다.
천천히 복도를 걷고 있자니 마치 내가 공포 영화 속의 주인공이라도 된 듯한 착각에 휩싸였
다. 상황이 너무나도 흡사했다. 외딴 별장, 폭설, 귀신을 보았다는 아이, 그리고 그것을 확인
하기 위해 사건의 중심으로 접근해 들어가는 주인공.
복도 끝으로 난 큼직한 반원 모양의 창문 밖으론 여전히 굵은 눈발이 휘날렸다.
복도 끝에 도달한 나는 조용히 문고리를 돌렸다. 문은 부드럽게 열렸다.
불과 몇 시간 전의 상황들이 떠올랐다.
활짝 열려진 창문, 휘날리는 눈발, 넘실거리는 하얀 커튼, 무엇에 경악한 듯한 민구의 표정.
지금은 그저 고요할 따름이었다. 침대는 잘 정돈되어 있었고 창문도 굳게 닫혀 있었다. 나는 민구가 서 있었던 그 자리로 가서 커튼을 열었다.
눈앞으로 창 밖의 설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졌다.
천지가 온통 구름처럼 하얗게 뒤덮여 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이런 속도로 눈이 계속 내리다
간 차로 언덕을 내려 갈 수 없는 불상사가 생길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나는 민구가 그랬듯이 창문에 얼굴을 맞대다시피 하고 밖을 살폈다.
과연 12미터 거리쯤에 거대한 집채가 보였다. 시커먼 외관을 하고는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
었다. 언뜻 보기에도 정말 마귀나 귀신이 매일 파티를 열 것만 같은 으스스함이 뿜어져 나
왔다. 그 자체로 음습한 불길함을 가득 내포하는 거대한 블랙홀을 연상시켰다.
나의 시선이 본능적으로 뭔가와 반응했다.
질식할 것만 같은 공포가 숨통을 조여왔다.
정말로 붉은 빛의 창이 보였고 그곳엔 누군가가 서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분명히 민구의
말대로 그 얼굴엔 눈동자가 하나 밖에 없었다.
이마엔 주먹만한 크기의 혹이 툭 튀어 나와 있었고 그 아래로 큼직한 눈동자 하나가 정 중
앙에 자리잡고 있었다. 입은 비정상적으로 뒤틀려 귀밑까지 길게 찢어져 있었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은 지독한 전율에 휩싸였다.
그 괴물 같은 녀석은 내가 미처 그의 존재를 인식하기도 훨씬 전부터 나를 뚫어져라 응시하
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 큼직한 눈동자엔 사악한 노여움이 가득했다.
이윽고 그의 검은 외투 자락이 펄럭인다 싶더니 붉은 빛이 꺼져 버렸다. 외눈 같이 반짝이
던 붉은 빛이 사라지자 집은 다시 깊은 어둠의 물결 속으로 잠들었다.
어느 듯 전신에 소름이 잔뜩 돋아나 있었다. 이런 두려움은 정말 처음이었다. 30대 중반을
넘긴 내가 어린애들처럼 귀신의 두려움을 느끼게 되다니……!
나는 얼른 커튼을 치고 강박증에 걸린 사람 마냥 창문의 관건상태를 확인했다.
어쩐지 그 괴물 같은 자가 이 곳을 향해 오고 있는 것만 같았다. 말도 안돼는 소리라고 스
스로를 타일러보지만 불쾌한 공포는 계속 증폭되었다.
무엇 때문 인진 몰라도 정말로 그 괴물은 나에게 저주 어린 증오를 퍼붓는 것만 같아 보였
다. 덩그렇게 치켜 뜬 외 눈동자에는 매서운 복수심이 훨훨 타오르고 있었다.
불꺼진 방안을 불안하게 서성이며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겉잡을 수 없는 초조함에 목이
바싹 바싹 타들었다.
어째서 이런 긴장을 하는지 논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했다.
내 마음속을 온통 지배하고 있는 것은 그 괴물이 이제 곧 이 별장으로 성큼 다가 올 것이라
는 불길한 상상뿐이었다.
꺼림칙한 영상 하나가 제 멋대로 그려졌다.
검은 외투를 뒤집어 쓴 그 괴물이 폭설을 헤치고 묵묵히 다가오고 있다. 아니 그는 마치 귀
신처럼 눈밭 위를 스믈 스믈 날아서 온다. 12미터 거리라면 시간상으로 10여분이면 충분하
다. 지금쯤이면 이미 별장 앞까지 도달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지금 내가 확인 차 창문을 열
고 대문 밖을 내려다보면 분명 그 놈의 하나 뿐인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칠 것이다. 내가
아직 잠자지 않고 있음을 확인한 그는 곧장 2층 창문까지 두둥실 부양해서 올라올 것이다.
헛된 상념들을 떨쳐내기 위해 머리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었다. 더 이상 미치광이 같은 상상
은 하기 싫었다. 그런 일 따윈 상식적으로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임을 잘 알고 있다. 그 상식
의 범위를 넘어서는 망상 따윈 하지 말자.
그렇게 생각을 다잡고 그 방을 나섰다.
하지만 계단을 내려와서 무의식적으로 다시 손목시계를 확인해 보았다. 10여분은 충분히 지
난 상태였다.
손으로 가슴을 매만지며 두근거리는 심장을 달랬다.
그 와중에도 머릿속에서는 논리적인 이성과 비논리적인 감성이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문 밖에 그가 와 있다! 눈동자가 하나 밖에 없는 그가……!
다섯 발자국 전… 네 발자국 전… 세 발자국 전… 두 발자국 전…
그리고, 한 발자국 전……!
현관문이 와락 열리고 흉측한 그의 얼굴이 내 눈앞까지 확 와 닿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모든 것은 상상일 뿐이었다.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상상.
나는 긴 한숨을 내쉬며 거실을 가로질렀다. 빨리 아내와 아이들이 따스한 온기가 감도는 그
곳으로 가고 싶었다.
어둠뿐인 거실 바닥이 마치 늪처럼 내 발목을 잡아끄는 듯했다. 금방이라도 뭔가가 스윽 하
고 나의 등을 어루만질 것만 같아 나의 발걸음은 더욱 빨라졌다.
바로 그 순간 거짓말같이 초인종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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