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최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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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戀人>

-part 3. 최종회.


 눈은 그치지 않고 내렸다. 어느새 두터워진 어둠 속에서도 그 백색의 투명함은 여전히 빛
을 발하고 있었다.
 커피숍과 주점을 거쳐 이곳 낯선 여관방에 들어설 때까지 '재강'은 말이 없었다. 차를 마시
며, 술을 마시며... 일방적으로 '정수'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이 또한 그리 많은 것은 아
니었다. 그리고 그나마 많지 않은 이야기들 대부분도 재강 아버지에 대한 단편적인 추억들
이 전부였다. 잠시 동안 '수혁'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제외하곤 그 긴 시간과 넓은 공간에 두
사람의 정적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밤은 깊었고, 두 사람은 취해갔다.
 재강에겐 이 의미 없는 시간에서 벗어날 기회들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정수삼촌과
함께 이곳까지 다다랐다.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간단한 샤워를 마친 정수가 대충 속옷을 추려 입고 욕실을 나오자 재강은 여전히 꼿꼿하게
앉은 자세로 그를 바라보았다. 정수의 몸은 많이 달랐다. 그러나 그것이 분명 어렸을 적 보
았던 그의 모습이기도 했다.
 "좀 씻을래?"
 "아니오."
 재강은 짧게 대답하고 재킷을 벗어 가지런히 접어 옆에 놓았다. 얼추 셔츠와 바지를 걸친
정수는 편의점에서 사온 술병과 안주거리를 들고 재강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두 개의
컵에 술을 따랐다.
 "아버지는 죽기 전에 너를 보기 원했었다. 실은 네가 대학에 진학하며 집을 나간 이후 줄
곧 보기 원했지."
 재강은 대답 없이 술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수는 뭔가 더 말하려다 그만두고 술잔을 비
웠다.
 "아버지는 너를 정말 사랑했어."
 재강은 더 이상 정수의 너덜난 아버지의 추억을 참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아버지가 자신
을 사랑했다는 이야기는...
 "저는 두개의 저주를 이겨내고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하나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죄
책감. 그리고 두 번째는 내 스스로 여자를 품지 못한다는 사실..."
 재강은 술을 들이키고 잠시 숨을 고른 후 이야기를 이었다.
 "그날 보았던 일로 두 가지 저주에 대한 의문은 풀려버렸죠. 어머니의 죽음도 어쩌면 나의
잘못이 아닐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지금 내가 남자와 함께 살 수 밖에 없는 이유도... 아버지
의 더러운 피를 타고났으니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재강이 너... 정말..."
 정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아버지의 친구라구요? 며칠 전 전화를 받으며 얼마나 황당했는지 모르실 겁니다. 아버지
의 친구라... 당신은 아버지의 친구가 아니예요. 아시겠습니까? 진짜 친구라면 함께 몸을 섞
고 침대에서 뒹굴지 않아요. 하지만 그건 확실히 하고 싶네요. 그래서 당신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제 인생의 지겨운 의문을 한순간에 풀어 준 것이 당신이니까."
 정수는 조용히 술잔만 기울였다.
 한참동안 둘은 말없이 술을 마셨다.

 "네 아버지는 끝까지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렇게 할 수가 없다. 네가 생각
하는 저주라는 거... 그건 잘못 생각하는 거다. 생모에 관해 이야기 해주마. 네 짐작이 맞아.
네 어미는 너를 낳다 죽은 게 아니다."
 재강은 정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알 수 없다. 살아있다면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쩌면 이미 저 세상 사람
이 돼버렸는지."
 "그게 무슨 얘깁니까?"
 정수는 담뱃불을 붙이고 말을 이었다.

 "네 아버지는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못된 사람이 아니다. 멋진 사람이었지. 젊은 나이에 번
듯한 직장에서 인정받았고, 주변 사람들에겐 늘 온화한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혼자 몸으로
아이를 입양해 키웠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대단한 사람인 거야."
 재강은 정수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처음 나에게 아이를 입양하겠다고 했을 때 나는 극구 반대했었다. 하지만 네 아버지의 바
램은 너무나 간절했고 곧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어. 처음 너를 안고 집에 들어설 때 네 아
버지 표정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는 세상 누구보다 너를 사랑했었다. 네 아버지와
나. 우리는 함께 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던 이유는 내가 지방에서 생활하는 탓도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네 아버지의 소박한 결심 때문이었지. 바로 너를 위해서였다. 오로지
너 하나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거야. 결국 그날 이후 모든 것은 변했다. 네 아버지의 몰
락은 그의 능력 밖이었다. 어차피 너를 잃고 나서 그에게 남은 것은 없었으니까."
 정수는 얼마 남지 않은 술을 마저 술잔으로 옮겼다.
 "저주받은 운명이라고? 네가 고등학생 때 보고 말았던 나와 네 아버지의 그 일. 그날 그
시간에 저주를 받은 것은 바로 네 아버지였다."

 재강은 더 이상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여관방을 뛰쳐나왔다.
 '말도 안돼는 소리. 엿 같은 소리. 개 같은...'
 겨울 밤바람의 냉기가 그의 폐부 깊숙이 파고들자 조금 전 믿지 못할 현실들은 저만큼
멀어졌다. 지금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쌓인 눈에 자칫 미끄러질 뻔했던 재강은
손을 뻗어 전신주를 잡고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그는 전신주에 몸을 의지하고 한참을 그냥
서있었다. 그리고 주머니에 손을 넣어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라이터 불빛에 전신주에 붙
어있는 지저분한 전단과 포스터들이 드러났다. 정말 지저분하게 얽혀 붙어있는...
 어느새 지겹게도 내리던 눈은 그쳐있었다.


 며칠 후...
 퇴근길에 재강은 수혁을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로 얼마 전 봤던 비디오의 영화음악을 골랐
다. 화가인 수혁은 자신이 직접 그린 재강의 초상을 선물했다.
 그날 저녁 두 사람은 어느 때보다 소박하지만 따뜻한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있었다.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영화음악이 열 번째 트랙에 다다르자 재강은 수혁에게 물었다.
 "왈츠 출 줄 아니?"
 뜬금없는 그의 질문에 수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리고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뭔들 처음부터 알고 있는 게 있겠습니까? 어찌어찌 하다보면 잘 되겠지요."
 수혁이 불쑥 내민 손을 재강은 평소와 달리 쑥스럽다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곧 둘의
엉성한 스텝은 넓지 않은 공간을 분주히 가득 채웠다. 하지만 왈츠는 오래가지 않았다. 두
사람은 곧 서로를 껴안고 그냥 편안하게 리듬을 즐기는 모양새가 돼버렸다.
 "역시 생각처럼 쉽지 않군."
 재강의 말에 두 사람은 웃음을 주고받았다. 잠시 후 재강의 귀에 수혁이 나지막이 속삭였
다.
 "너 그거 아냐? 넌 좀 독특한 녀석이야.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거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좀더 솔직하고 적극적으로 의사를 표현한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닐
지도 모르지."
 수혁의 말에 재강은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아버지를 닮았을 거야... 아마..."

 음악이 끝날 때까지 재강은 수혁의 하얀 목에 고개를 묻고 어색한 발놀림에 적응해갔다.
재강은 며칠 전 정수삼촌의 이야기를 생각했다. 그것이 진실이던 아니던 이제는 더 이상 중
요한 것이 아니리라. 모든 것은 휩쓸려 사라진 과거일 뿐 아닌가. 묘한 설움이 밀려왔다. 그
는 입술을 다부지게 깨물었다.
 "너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어. 한 남자 이야기야..."
 재강은 수혁에게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신이 자라왔던 과거와 슬픈 기억
들, 정수삼촌을 통해 들었던 이야기도 전할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끝내 마음속에만 품
고 있었던 진실한 '연인(戀人)'에 대해서도...

 수혁은 리모콘으로 지금 막 끝난 음악을 되돌렸다. '쇼스타코비치'의 왈츠는 그렇게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 The End.





 반응 보여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주변상황과 여건으로 힘겹게 급조되고 부족한 글이지
만 여러분들의 과분한 말씀... 큰 힘이 되었습니다.
 다시 한 번 새해인사 드립니다. 행복한 새해 되시고 복 많이 받으십시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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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단하시다는 말밖엔 할 수가 없습니다... 계속 기다리겠습니다. 시간나시는대로 님의 생각을 나누어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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