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re Black Christmas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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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니 뜻밖에도 지하실 한 가운데엔 핏기라곤 없는 창백한 얼굴의 은주가 가만히 서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심상치 않은 감정이 교류가 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놀랬잖아. 무슨 일이야?"
내가 다가서자 은주는 거의 울상이 되어버렸다. 나로서는 그녀의 그러한 격한 감정상태를
어떤 식으로 이해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왜 그래? 식구들은 어쩌고 혼자 내려 온 거야? 엉?"
은주의 심상치 않은 표정에서 별안간 꺼림칙한 생각 하나가 스치고 지나갔다.
"뭐야? 설마 그새 무슨 일이라도 벌어진 건 아니겠지?"
나는 다그치듯 은주의 어깨를 잡았다. 그녀의 작은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런 거 아니에요. 사실…… 사장님께 말씀 안 드린 게 있어요."
"뭐? 그게 뭔데……?!"
그녀는 마침내 비밀이라도 털어놓듯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아까 낮에 민지가 정원에서 봤다던 그 남자…… 전 누군지 알 것 같아요."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그 자를 안다니?"
"틀림없이 제 동생일겁니다."
"뭐! 동생이라니?"
그녀에게서 뜻밖의 이야기들이 줄줄이 터져 나왔다.
"형준이라고 친동생은 아니지만 고아원시절 거의 친 오누이나 다름없이 지냈던 사이에요.
저보다 일곱 살이나 어리고 늘 허약해서 제가 친누나처럼 돌봐 주곤 했어요. 그 애도 절 잘
따랐지요. 착하고 얌전한 아이였어요. 하지만 제가 고아원을 나와 이곳에 들어오면서부터 그
애의 성격이 완전 뒤바뀌었어요. 저와 헤어지고 나서부터 고아원 내 못된 아이들과 어울리
기 시작하며 크고 작은 사고들을 도맡아서 저질렀나 봐요. 마침내 원장님도 두 손 두 발 다
들게 되었고 결국 그는 몇 번이나 소년원을 들락거리는 신세가 되었죠. 그런데 며칠 전 그
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어요.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큰 사고를 치고는 도피 중 이랬어요. 이
동네 빈 별장 어딘가에 숨어 있다고 했어요. 그리곤 저에게 큰돈을 요구했어요. 저로서는 도
저히 구하지 못할 액수였죠. 그렇게 큰돈은 없다고 하자 그는 회장님 댁의 돈이나 귀중품을
훔쳐내면 된다고 말했어요. 저는 제 귀를 의심했어요. 그는 이미 예전에 제가 알던 착한 형
준이가 아니었던 거예요. 전화 상으로 최대한 그를 설득하고 타이르려 해 보았지만 막무가
내였죠.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다면 제 힘으로라도 여기 회장님 댁에 침입해서 금품을 훔쳐
낼 기세였어요. 서글펐어요. 정말 친동생처럼 절 따르던 애가 그렇게 변해버릴 줄은 몰랐어
요."
마침내 그녀는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었다.
"사장님, 전 정말 두려웠어요. 민구가 어젯밤 옆 건물에서 누군가를 보았다고 했을 때 저는
형준이가 아닌가 싶어 조마조마했어요. 곧바로 그에게 전화를 해보았지만 휴대폰을 꺼둔 상
태더군요. 그래서 메시지를 남겼죠. 제발 부탁이니 돌아가 달라고요. 만약 그렇지 않으면 경
찰에 신고할 수밖에 없다고 딱 잘라서 얘기했어요. 그 후로도 계속 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언제부턴가 불통이었어요."
나는 언뜻 지난밤에 은주가 누군가와 전화통화를 했었다는 기억이 되살아났다.
"사장님 이제 전 어쩌면 좋지요? 어젯밤 정영혜씨가 보았다던 그 괴한도, 오늘 오전에 이씨
아저씨를 공격한 인물도 또 민지가 정원에서 보았다던 그 정체불명의 남자도 모두 형준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어요. 전 이런 사실들을 좀 더 미리 얘기했었어야 하는 건데 이제서
야 사장님께 털어놓다니……."
말을 마친 그녀는 내 가슴에 머리를 대고 본격적으로 흐느끼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니 어제
오늘 은주의 얼굴에 전에 없던 그늘짐이 순간순간 보였던 것도 같았다. 아무 생각 없이 지
나쳤지만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빛이 역력했었다.
"됐다, 은주야. 이제라도 말해줘서 고맙다. 자 이제 올라가 봐라. 식구들에게는 내가 천천히
알리기로 하고 지금으로선 그 형준인가 하는 친구를 찾아내는 게 급선무야."
나는 잠시 그녀를 진정시킨 후 바닥에 떨어져 있던 담배꽁초를 주시했다.
"그 친구는 분명 조금 전까지 이 곳에 숨어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거야. 이제부터 난 별
장 주변을 좀더 탐색해 볼 테니 넌 올라가서 식구들을 진정시켜 줘. 부탁할게."
은주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눈물이 고인 그녀의 큰 눈동자를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그
녀에게는 어떤 잘못도 없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감당할 수 없는 비밀을 혼자 감추어 두느라
고심했을 그녀가 측은하게 느껴졌다.
은주의 눈물을 닦아준 후 나는 별장 어딘가에 숨어 있을 형준이라는 친구를 찾기 위해 돌아
섰다.
문을 열고 나오니 밖은 한층 더 얼어 있었다. 추위에 귀가 떨어져 나갈 지경이었다.
옷깃을 올리고 간신히 별장 주변을 살펴보았다. 눈보라 때문에 한치 앞을 분간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히이이잉, 하고 우는 바람소리가 마치 귀신의 곡소리가 같았다.
내가 다시 지하실로 몸을 돌렸을 때였다. 나의 시야 범위가 뭔가가 포착되었다.
돌아보니 눈보라 속에 어떤 움직임이 느껴졌다. 정원 저 쪽을 가로지르며 뭔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배트를 쥔 손에 힘이 부쩍 들어갔다. 나는 바로 옆으로 보이는 소나무 둥치에 몸을 숨기고자 했다. 걸을 때마다 눈이 무릎 위까
지 올라와 마치 늪 속을 걷는 것처럼 불편했다. 가까스로 소나무 뒤에 몸을 숨긴 나는 서둘
러 정원 한 가운데로 시선을 던져보았다. 움직임은 계속 포착되었다. 눈으로 뒤덮인 뭔가가
별장을 향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이 어쩌면 현란한 눈발의 움직임이 만들어낸 착시현상일 수도 있기에 나는 느릅나무 뒤
로 몸을 숨겨가며 좀더 자세히 움직임을 관찰하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한발 앞서 나의 발
이 무언가를 감지했다. 느릅나무 아래로 깊숙이 발을 찔러 넣는 순간 바닥 저 끝에서 무언
가 물컹한 것이 밟혔던 것이다. 그것은 지독히 불쾌한 느낌이었다.
허리를 숙여 수북히 쌓인 눈들을 걷어내 보았다. 머릿속에선 수 만 가지 불길한 상상들이
꼬리를 물고 터졌다. 마침내 그것들이 하나로 귀결될 때쯤 나의 손은 덮여 있던 마지막 눈덩이를 걷어 내었다.
바닥에 최후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싸늘하게 식어버린 이씨의 송장이었다.
나로선 비명을 지를 틈조차 없었다. 느닷없이 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죽은 이씨의 모습은
내 전신을 삼켜버릴 만큼의 위력적인 공포였다. 나는 그 기세에 눌려 꼼짝달싹도 할 수 없
었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상상 속에서만이 아닌 피부와 오감이 그대로 느끼는 현실적인
공포였다.
나는 애써 정신을 가다듬었다. 아내와 자식, 그리고 늙은 아버지를 생각했다. 그들을 지킬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나는 두 손 가득 눈 뭉치를 퍼 올려서 그것으로 얼굴을 씻었다. 정신
이 번쩍 들었다.
시선을 다시 정원으로 돌려보니 어떤 움직임도 포착되지 않았다. 그것이 설사 눈보라가 만
들어낸 착시였다고 한들 위험은 이미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으리라. 우리도 모르는 사이 우
리들 깊숙이 스며든 것이다. 이씨의 시체가 그것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다시 별장으로 돌아갔다. 조금 전 나왔던 문을 통해 지하실로 들어간 후 문을 잠갔다.
서둘러 계단을 올라 거실로 가 보았다. 하지만 거실에 도착했을 때 나는 내 눈을 의심해야
만 했다.
가족들 모두가 거실 바닥에 쓰러져 꼼짝도 안 했다. 그 잠깐 사이 모두가 죽어버린 것인가!
어느 틈에 살인마가 별장으로까지 침입한 것인가?!
나는 아연실색하며 힘없이 무너졌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정상적으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엉
금엉금 기어서 가족들에게로 다가갔다. 바닥에 나동그라져 있는 민구부터 맥박을 짚어 보았
다. 미세하게 맥박은 뛰고 있었다. 호흡도 비교적 고른 편이었다. 다행히도 모두들 죽은 것은 아니었다.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찬찬히 둘러보니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거실 탁자엔 국 그릇 네 개가 놓여 있었다. 즉 가족들은 모두 그 국을 마신 것이고 그로 인
해 쓰러진 것이다. 그렇다면 국 속에는 수면제 같은 약이 첨가되어 있었던 것이고 그 때문
에 모두들 잠든 것이다. 비슷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수면제를 먹여서 잠들게 한 후 일가족을
끔찍하게 도살했다는 연쇄살인마……!
또 한가지 사실은 어디에도 은주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가족들에게 국을 먹
게 한 후 사라진 은주……. 어째서 은주는 가족들에게 국을 먹여 잠재운 후 사라졌는가……!
속이 메스꺼웠다. 믿을 수 없는 공포가 눈앞으로 성큼 다가왔음에 몸서리가 처졌다. 거실이
빙빙 도는 듯한 현기증이 밀려왔다.
2층에서 희미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 때였다.
배트가 나와 가족 모두를 지켜줄 최후의 무기라도 되는 양 꽉 부여잡았다. 정신을 추스르지
않는다면 가족들이 정말로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힐끔 벽시계를 바라보니 네 시를 지나고 있었다. 박반장이 서에서 지원병력을 데리고 오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을 아무리 적게 잡아도 왕복 2시간……! 앞으로 30여분은 더 버텨야 했
다.
가까스로 계단 앞까지 걸어가 난간에 기대어 섰다. 미세한 발자국의 진동음이 난간으로 전
해져 손끝으로 느껴졌다. 2층에 누군가가 있다. 하지만 그가 은주인지, 형준인지, 살인마인지 짐작이 서지 않았다. 모든 것이 미심쩍을 따름이다.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2층에서 두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판단력이 흐려져서인지
목소리의 주인공을 쉽사리 분별해 내기 힘들었다.
계단 끝까지 오른 후 조심스레 복도로 몸을 옮겼다. 배트로 사방을 경계하며 길게 난 양쪽
복도를 살폈다. 유난히 어두운 복도가 뱀의 몸통을 연상시켰다.
나의 시야에 서서히 누군가의 모습이 잡혔다. 과연 그녀는 은주였다. 그녀 뒤로 처음 보는
남자의 모습도 보였다. 아찔한 전율이 소용돌이쳤다. 필시 그 남자는 은주가 말한 형준이라
는 녀석임에 틀림없었다. 저 녀석이 벌써 별장 안으로 침입했다니. 그제서야 나는 곧장 옥상
으로 통하는 비상 계단과 통로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옥상은 외부로 연결된 비상 계단
과 내부로 통하는 비상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분명 그 루트를 통해 안으로 들어
온 것 일게다.
어둠 속이라 그들의 표정을 정확히 읽을 수 없었다. 나는 배트를 쥔 손을 앞으로 죽 내밀며
그들을 향해 조금씩 전진했다. 나의 기세에 위협을 느꼈던지 은주가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그녀는 거의 울부짖고 있었다.
"사장님…… 제 말을 들어보세요……. 회장님께서 따뜻한 국이라도 내오라고 하셔서 전 분
부대로 했을 뿐입니다. 국에 수면제 같은 게 들어 있으리라 곤 꿈에도 몰랐어요. 제가 아까
시식할 때만해도 아무렇지도 않았거든요……. 따뜻한 국을 마시던 회장님과 사모님 그리고
아이들 모두 다 갑자기 쓰러져 잠이 들었어요. 전, 너무나 놀라서 어쩔 줄을 몰랐어요…….
그러고 있는데 2층 복도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어요. 달려와 보니 형준이였어요. 그런데 보시
다시피 형준이 짓도 아니에요."
그녀의 울부짖음이 끝날 때쯤 나는 그녀 앞에 도달했다. 비로소 형준이란 청년이 배를 움켜
쥐며 고통스레 신음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많은 양의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었
던 것이다. 하복부를 깊이 찔린 모양이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사태는 점점 더 짐작할 수 없게 변모해갔다. 은주가 울먹이며 입술을 움직였다.
"형준이 말에 의하면 누군가 다른 사람이 또 있대요."
청천벽력과도 같은 은주의 발언에 전혀 새로운 끔찍한 공포가 숨통을 조여옴을 느꼈다. 또
다른 누군가가 별장에 있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다른 사람이 또 있다니?"
은주는 죽어 가는 형준의 모습에서 참을 수 없는 두려움을 느끼며 숨이 넘어가는 듯한 소리
로 말했다.
"형준은 외부 계단을 통해 옥상을 거쳐 2층 복도로 내려왔대요. 그런데 계단을 내려올 무렵
어떤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니 갑자기 무언가 뜨끔한 것이 배속을 파고들었대요. 미처 상대
를 인식할 겨를도, 상황을 파악할 틈도 없이 그렇게 당했나봐요. 간신히 정신을 차려보니 자
신을 공격한 이는 그새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고 자신은 계단 난간에 기대어 피를 흘리고 있
었대요. 그리고 조금 후 제가 달려왔던 거죠."
말을 마친 은주는 손바닥으로 형준의 상처 부위를 열심히 지혈했다. 하지만 이미 손을 쓰기
엔 늦은 듯 싶었다. 상처가 워낙 깊었고 보일러 관이 터진 것 마냥 대량의 핏물을 분출시키
고 있었다.
나는 흐느끼는 은주를 진정시키며 거실로 내려가 있으라고 말했다. 형준의 말이 사실이라면
살인마가 별장 내부로 침투한 상태이고 언제 어느 순간 나와 가족들의 목숨을 노릴지 알 수
없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형준의 맥박이 거의 뛰지 않고 있음을 확인한 나는 그를 복도 바닥에 편안하게 눕혔다. 아
버지의 재산을 훔치기 위해 무단 침입한 그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배려는 그것 뿐
이었다.
먼저 내려간 은주의 뒤를 따라 거실로 내려왔을 때 나는 다시 한번 암담한 공포에 휩싸여야
만 했다.
은주는 거실 한 복판에 쓰러져 있었다. 머리에 상처를 입은 것이 누군가로부터 기습 공격을
당한 듯해 보였다. 결국 나 혼자 남은 것이다. 하나씩 모두 다 죽거나 쓰러지고 이제 결국
나 혼자 남은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녀에게 미처 다가가기도 전에 나 역시 무언가로부터 뒤통수를 심하게 가격
당해야만 했다.
천장과 거실 바닥이 충돌하는 듯한 어지러움을 느끼며 나는 쓰러졌다.
육체가 물에 젖은 솜털만큼 무거웠지만 의식은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었다. 내 주변을 차분
하게 맴도는 발자국 소리도 모두 감지할 수 있었다.
내가 눈을 떴을 때 그는 거실 한 가운데서 내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빤히 내려다
보고 있었다.
나는 미간에 힘을 주었다. 흔들리는 피사체를 분명하게 직시하기 위해서였다. 샹들리에 불빛
아래 드러난 그 얼굴은 분명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얼마간 숨이 멎는 듯한 극도의 전율이
전신을 지배했다.
검은 외투를 뒤집어 쓴 그는 정영혜였다.
그녀는 한 손에 군용 나이프를 다른 한 손엔 반짝이는 권총을 쥐고 있었다. 나이프는 누군
가의 피를 묻힌 채 섬뜩한 기운을 발산했다.
"당신이, 어째서……."
"어째서냐고? 그건 네 아버지에게 물어보면 잘 알 거야. 네 아버지 손영환에게……!"
별안간 그녀의 두 눈이 불타올랐다. 그 눈엔 분노와 통한과 저주가 서려 있었다. 그 저주의
시선이 아버지에게로 꽂혔다. 그제서야 나도 고개를 돌려 아버지와 아내, 자식들을 상태를
확인했다.
그들 모두는 아직 아무 것도 모른 채 잠들어 있었다. 다만 아버지만은 두 손이 수갑에 결박
되어 있었다.
수갑을 보니 문득 박반장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하지만 충분히
짐작이 가능했다. 서로 가던 도중 정영혜는 박반장을 기습했을 테고 그의 시체를 눈 속에
유기한 후 권총과 수갑을 빼앗아 별장으로 되돌아온 것 일 테다.
그렇다면 이씨의 죽음 역시 그런 식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옥상으로 통하는
비상 계단을 이용해 별장 밖으로 몰래 빠져나가 이씨를 살해하고 제설 차량을 망가뜨린 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돌아왔던 것이다. 그렇게 우리 모두를 외부와 격리시킨 것이
다.
형준의 경우는 계산에 없던 살인이었을 테다. 비슷한 시기에 다른 목적으로 별장에 잠입한
그들은 우연찮게 부딪히게 된 것이다.
나는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두개골이 흔들리는 듯한 두통 때문에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았
다. 나의 움직임을 눈치 첸 정영혜가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천천히 권총을 나에게 들이밀자 나의 몸은 얼음처럼 단단히 굳어 버렸다. 그녀는 악
귀 같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잘 들어. 오늘 너희 모두는 다 죽음으로 죄 값을 치르는 거야. 이건 거스를 수 없는 업보
야. 그래, 업보. 나 역시도 그 업보를 따르고 있을 뿐이야."
말을 하는 그녀의 망막에서 유난히 광채가 났다. 그것은 이미 실성한 사람의 눈빛이었다.
이제 다음편이 마지막입니다..
호러물은 별로 안좋아 하시는듯.....:|:|:|
이 글만 쓰고 안써야 겠당...:´(:´(:´(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심상치 않은 감정이 교류가 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놀랬잖아. 무슨 일이야?"
내가 다가서자 은주는 거의 울상이 되어버렸다. 나로서는 그녀의 그러한 격한 감정상태를
어떤 식으로 이해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왜 그래? 식구들은 어쩌고 혼자 내려 온 거야? 엉?"
은주의 심상치 않은 표정에서 별안간 꺼림칙한 생각 하나가 스치고 지나갔다.
"뭐야? 설마 그새 무슨 일이라도 벌어진 건 아니겠지?"
나는 다그치듯 은주의 어깨를 잡았다. 그녀의 작은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런 거 아니에요. 사실…… 사장님께 말씀 안 드린 게 있어요."
"뭐? 그게 뭔데……?!"
그녀는 마침내 비밀이라도 털어놓듯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아까 낮에 민지가 정원에서 봤다던 그 남자…… 전 누군지 알 것 같아요."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그 자를 안다니?"
"틀림없이 제 동생일겁니다."
"뭐! 동생이라니?"
그녀에게서 뜻밖의 이야기들이 줄줄이 터져 나왔다.
"형준이라고 친동생은 아니지만 고아원시절 거의 친 오누이나 다름없이 지냈던 사이에요.
저보다 일곱 살이나 어리고 늘 허약해서 제가 친누나처럼 돌봐 주곤 했어요. 그 애도 절 잘
따랐지요. 착하고 얌전한 아이였어요. 하지만 제가 고아원을 나와 이곳에 들어오면서부터 그
애의 성격이 완전 뒤바뀌었어요. 저와 헤어지고 나서부터 고아원 내 못된 아이들과 어울리
기 시작하며 크고 작은 사고들을 도맡아서 저질렀나 봐요. 마침내 원장님도 두 손 두 발 다
들게 되었고 결국 그는 몇 번이나 소년원을 들락거리는 신세가 되었죠. 그런데 며칠 전 그
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어요.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큰 사고를 치고는 도피 중 이랬어요. 이
동네 빈 별장 어딘가에 숨어 있다고 했어요. 그리곤 저에게 큰돈을 요구했어요. 저로서는 도
저히 구하지 못할 액수였죠. 그렇게 큰돈은 없다고 하자 그는 회장님 댁의 돈이나 귀중품을
훔쳐내면 된다고 말했어요. 저는 제 귀를 의심했어요. 그는 이미 예전에 제가 알던 착한 형
준이가 아니었던 거예요. 전화 상으로 최대한 그를 설득하고 타이르려 해 보았지만 막무가
내였죠.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다면 제 힘으로라도 여기 회장님 댁에 침입해서 금품을 훔쳐
낼 기세였어요. 서글펐어요. 정말 친동생처럼 절 따르던 애가 그렇게 변해버릴 줄은 몰랐어
요."
마침내 그녀는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었다.
"사장님, 전 정말 두려웠어요. 민구가 어젯밤 옆 건물에서 누군가를 보았다고 했을 때 저는
형준이가 아닌가 싶어 조마조마했어요. 곧바로 그에게 전화를 해보았지만 휴대폰을 꺼둔 상
태더군요. 그래서 메시지를 남겼죠. 제발 부탁이니 돌아가 달라고요. 만약 그렇지 않으면 경
찰에 신고할 수밖에 없다고 딱 잘라서 얘기했어요. 그 후로도 계속 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언제부턴가 불통이었어요."
나는 언뜻 지난밤에 은주가 누군가와 전화통화를 했었다는 기억이 되살아났다.
"사장님 이제 전 어쩌면 좋지요? 어젯밤 정영혜씨가 보았다던 그 괴한도, 오늘 오전에 이씨
아저씨를 공격한 인물도 또 민지가 정원에서 보았다던 그 정체불명의 남자도 모두 형준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어요. 전 이런 사실들을 좀 더 미리 얘기했었어야 하는 건데 이제서
야 사장님께 털어놓다니……."
말을 마친 그녀는 내 가슴에 머리를 대고 본격적으로 흐느끼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니 어제
오늘 은주의 얼굴에 전에 없던 그늘짐이 순간순간 보였던 것도 같았다. 아무 생각 없이 지
나쳤지만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빛이 역력했었다.
"됐다, 은주야. 이제라도 말해줘서 고맙다. 자 이제 올라가 봐라. 식구들에게는 내가 천천히
알리기로 하고 지금으로선 그 형준인가 하는 친구를 찾아내는 게 급선무야."
나는 잠시 그녀를 진정시킨 후 바닥에 떨어져 있던 담배꽁초를 주시했다.
"그 친구는 분명 조금 전까지 이 곳에 숨어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거야. 이제부터 난 별
장 주변을 좀더 탐색해 볼 테니 넌 올라가서 식구들을 진정시켜 줘. 부탁할게."
은주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눈물이 고인 그녀의 큰 눈동자를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그
녀에게는 어떤 잘못도 없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감당할 수 없는 비밀을 혼자 감추어 두느라
고심했을 그녀가 측은하게 느껴졌다.
은주의 눈물을 닦아준 후 나는 별장 어딘가에 숨어 있을 형준이라는 친구를 찾기 위해 돌아
섰다.
문을 열고 나오니 밖은 한층 더 얼어 있었다. 추위에 귀가 떨어져 나갈 지경이었다.
옷깃을 올리고 간신히 별장 주변을 살펴보았다. 눈보라 때문에 한치 앞을 분간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히이이잉, 하고 우는 바람소리가 마치 귀신의 곡소리가 같았다.
내가 다시 지하실로 몸을 돌렸을 때였다. 나의 시야 범위가 뭔가가 포착되었다.
돌아보니 눈보라 속에 어떤 움직임이 느껴졌다. 정원 저 쪽을 가로지르며 뭔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배트를 쥔 손에 힘이 부쩍 들어갔다. 나는 바로 옆으로 보이는 소나무 둥치에 몸을 숨기고자 했다. 걸을 때마다 눈이 무릎 위까
지 올라와 마치 늪 속을 걷는 것처럼 불편했다. 가까스로 소나무 뒤에 몸을 숨긴 나는 서둘
러 정원 한 가운데로 시선을 던져보았다. 움직임은 계속 포착되었다. 눈으로 뒤덮인 뭔가가
별장을 향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이 어쩌면 현란한 눈발의 움직임이 만들어낸 착시현상일 수도 있기에 나는 느릅나무 뒤
로 몸을 숨겨가며 좀더 자세히 움직임을 관찰하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한발 앞서 나의 발
이 무언가를 감지했다. 느릅나무 아래로 깊숙이 발을 찔러 넣는 순간 바닥 저 끝에서 무언
가 물컹한 것이 밟혔던 것이다. 그것은 지독히 불쾌한 느낌이었다.
허리를 숙여 수북히 쌓인 눈들을 걷어내 보았다. 머릿속에선 수 만 가지 불길한 상상들이
꼬리를 물고 터졌다. 마침내 그것들이 하나로 귀결될 때쯤 나의 손은 덮여 있던 마지막 눈덩이를 걷어 내었다.
바닥에 최후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싸늘하게 식어버린 이씨의 송장이었다.
나로선 비명을 지를 틈조차 없었다. 느닷없이 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죽은 이씨의 모습은
내 전신을 삼켜버릴 만큼의 위력적인 공포였다. 나는 그 기세에 눌려 꼼짝달싹도 할 수 없
었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상상 속에서만이 아닌 피부와 오감이 그대로 느끼는 현실적인
공포였다.
나는 애써 정신을 가다듬었다. 아내와 자식, 그리고 늙은 아버지를 생각했다. 그들을 지킬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나는 두 손 가득 눈 뭉치를 퍼 올려서 그것으로 얼굴을 씻었다. 정신
이 번쩍 들었다.
시선을 다시 정원으로 돌려보니 어떤 움직임도 포착되지 않았다. 그것이 설사 눈보라가 만
들어낸 착시였다고 한들 위험은 이미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으리라. 우리도 모르는 사이 우
리들 깊숙이 스며든 것이다. 이씨의 시체가 그것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다시 별장으로 돌아갔다. 조금 전 나왔던 문을 통해 지하실로 들어간 후 문을 잠갔다.
서둘러 계단을 올라 거실로 가 보았다. 하지만 거실에 도착했을 때 나는 내 눈을 의심해야
만 했다.
가족들 모두가 거실 바닥에 쓰러져 꼼짝도 안 했다. 그 잠깐 사이 모두가 죽어버린 것인가!
어느 틈에 살인마가 별장으로까지 침입한 것인가?!
나는 아연실색하며 힘없이 무너졌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정상적으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엉
금엉금 기어서 가족들에게로 다가갔다. 바닥에 나동그라져 있는 민구부터 맥박을 짚어 보았
다. 미세하게 맥박은 뛰고 있었다. 호흡도 비교적 고른 편이었다. 다행히도 모두들 죽은 것은 아니었다.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찬찬히 둘러보니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거실 탁자엔 국 그릇 네 개가 놓여 있었다. 즉 가족들은 모두 그 국을 마신 것이고 그로 인
해 쓰러진 것이다. 그렇다면 국 속에는 수면제 같은 약이 첨가되어 있었던 것이고 그 때문
에 모두들 잠든 것이다. 비슷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수면제를 먹여서 잠들게 한 후 일가족을
끔찍하게 도살했다는 연쇄살인마……!
또 한가지 사실은 어디에도 은주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가족들에게 국을 먹
게 한 후 사라진 은주……. 어째서 은주는 가족들에게 국을 먹여 잠재운 후 사라졌는가……!
속이 메스꺼웠다. 믿을 수 없는 공포가 눈앞으로 성큼 다가왔음에 몸서리가 처졌다. 거실이
빙빙 도는 듯한 현기증이 밀려왔다.
2층에서 희미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 때였다.
배트가 나와 가족 모두를 지켜줄 최후의 무기라도 되는 양 꽉 부여잡았다. 정신을 추스르지
않는다면 가족들이 정말로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힐끔 벽시계를 바라보니 네 시를 지나고 있었다. 박반장이 서에서 지원병력을 데리고 오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을 아무리 적게 잡아도 왕복 2시간……! 앞으로 30여분은 더 버텨야 했
다.
가까스로 계단 앞까지 걸어가 난간에 기대어 섰다. 미세한 발자국의 진동음이 난간으로 전
해져 손끝으로 느껴졌다. 2층에 누군가가 있다. 하지만 그가 은주인지, 형준인지, 살인마인지 짐작이 서지 않았다. 모든 것이 미심쩍을 따름이다.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2층에서 두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판단력이 흐려져서인지
목소리의 주인공을 쉽사리 분별해 내기 힘들었다.
계단 끝까지 오른 후 조심스레 복도로 몸을 옮겼다. 배트로 사방을 경계하며 길게 난 양쪽
복도를 살폈다. 유난히 어두운 복도가 뱀의 몸통을 연상시켰다.
나의 시야에 서서히 누군가의 모습이 잡혔다. 과연 그녀는 은주였다. 그녀 뒤로 처음 보는
남자의 모습도 보였다. 아찔한 전율이 소용돌이쳤다. 필시 그 남자는 은주가 말한 형준이라
는 녀석임에 틀림없었다. 저 녀석이 벌써 별장 안으로 침입했다니. 그제서야 나는 곧장 옥상
으로 통하는 비상 계단과 통로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옥상은 외부로 연결된 비상 계단
과 내부로 통하는 비상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분명 그 루트를 통해 안으로 들어
온 것 일게다.
어둠 속이라 그들의 표정을 정확히 읽을 수 없었다. 나는 배트를 쥔 손을 앞으로 죽 내밀며
그들을 향해 조금씩 전진했다. 나의 기세에 위협을 느꼈던지 은주가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그녀는 거의 울부짖고 있었다.
"사장님…… 제 말을 들어보세요……. 회장님께서 따뜻한 국이라도 내오라고 하셔서 전 분
부대로 했을 뿐입니다. 국에 수면제 같은 게 들어 있으리라 곤 꿈에도 몰랐어요. 제가 아까
시식할 때만해도 아무렇지도 않았거든요……. 따뜻한 국을 마시던 회장님과 사모님 그리고
아이들 모두 다 갑자기 쓰러져 잠이 들었어요. 전, 너무나 놀라서 어쩔 줄을 몰랐어요…….
그러고 있는데 2층 복도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어요. 달려와 보니 형준이였어요. 그런데 보시
다시피 형준이 짓도 아니에요."
그녀의 울부짖음이 끝날 때쯤 나는 그녀 앞에 도달했다. 비로소 형준이란 청년이 배를 움켜
쥐며 고통스레 신음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많은 양의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었
던 것이다. 하복부를 깊이 찔린 모양이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사태는 점점 더 짐작할 수 없게 변모해갔다. 은주가 울먹이며 입술을 움직였다.
"형준이 말에 의하면 누군가 다른 사람이 또 있대요."
청천벽력과도 같은 은주의 발언에 전혀 새로운 끔찍한 공포가 숨통을 조여옴을 느꼈다. 또
다른 누군가가 별장에 있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다른 사람이 또 있다니?"
은주는 죽어 가는 형준의 모습에서 참을 수 없는 두려움을 느끼며 숨이 넘어가는 듯한 소리
로 말했다.
"형준은 외부 계단을 통해 옥상을 거쳐 2층 복도로 내려왔대요. 그런데 계단을 내려올 무렵
어떤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니 갑자기 무언가 뜨끔한 것이 배속을 파고들었대요. 미처 상대
를 인식할 겨를도, 상황을 파악할 틈도 없이 그렇게 당했나봐요. 간신히 정신을 차려보니 자
신을 공격한 이는 그새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고 자신은 계단 난간에 기대어 피를 흘리고 있
었대요. 그리고 조금 후 제가 달려왔던 거죠."
말을 마친 은주는 손바닥으로 형준의 상처 부위를 열심히 지혈했다. 하지만 이미 손을 쓰기
엔 늦은 듯 싶었다. 상처가 워낙 깊었고 보일러 관이 터진 것 마냥 대량의 핏물을 분출시키
고 있었다.
나는 흐느끼는 은주를 진정시키며 거실로 내려가 있으라고 말했다. 형준의 말이 사실이라면
살인마가 별장 내부로 침투한 상태이고 언제 어느 순간 나와 가족들의 목숨을 노릴지 알 수
없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형준의 맥박이 거의 뛰지 않고 있음을 확인한 나는 그를 복도 바닥에 편안하게 눕혔다. 아
버지의 재산을 훔치기 위해 무단 침입한 그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배려는 그것 뿐
이었다.
먼저 내려간 은주의 뒤를 따라 거실로 내려왔을 때 나는 다시 한번 암담한 공포에 휩싸여야
만 했다.
은주는 거실 한 복판에 쓰러져 있었다. 머리에 상처를 입은 것이 누군가로부터 기습 공격을
당한 듯해 보였다. 결국 나 혼자 남은 것이다. 하나씩 모두 다 죽거나 쓰러지고 이제 결국
나 혼자 남은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녀에게 미처 다가가기도 전에 나 역시 무언가로부터 뒤통수를 심하게 가격
당해야만 했다.
천장과 거실 바닥이 충돌하는 듯한 어지러움을 느끼며 나는 쓰러졌다.
육체가 물에 젖은 솜털만큼 무거웠지만 의식은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었다. 내 주변을 차분
하게 맴도는 발자국 소리도 모두 감지할 수 있었다.
내가 눈을 떴을 때 그는 거실 한 가운데서 내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빤히 내려다
보고 있었다.
나는 미간에 힘을 주었다. 흔들리는 피사체를 분명하게 직시하기 위해서였다. 샹들리에 불빛
아래 드러난 그 얼굴은 분명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얼마간 숨이 멎는 듯한 극도의 전율이
전신을 지배했다.
검은 외투를 뒤집어 쓴 그는 정영혜였다.
그녀는 한 손에 군용 나이프를 다른 한 손엔 반짝이는 권총을 쥐고 있었다. 나이프는 누군
가의 피를 묻힌 채 섬뜩한 기운을 발산했다.
"당신이, 어째서……."
"어째서냐고? 그건 네 아버지에게 물어보면 잘 알 거야. 네 아버지 손영환에게……!"
별안간 그녀의 두 눈이 불타올랐다. 그 눈엔 분노와 통한과 저주가 서려 있었다. 그 저주의
시선이 아버지에게로 꽂혔다. 그제서야 나도 고개를 돌려 아버지와 아내, 자식들을 상태를
확인했다.
그들 모두는 아직 아무 것도 모른 채 잠들어 있었다. 다만 아버지만은 두 손이 수갑에 결박
되어 있었다.
수갑을 보니 문득 박반장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하지만 충분히
짐작이 가능했다. 서로 가던 도중 정영혜는 박반장을 기습했을 테고 그의 시체를 눈 속에
유기한 후 권총과 수갑을 빼앗아 별장으로 되돌아온 것 일 테다.
그렇다면 이씨의 죽음 역시 그런 식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옥상으로 통하는
비상 계단을 이용해 별장 밖으로 몰래 빠져나가 이씨를 살해하고 제설 차량을 망가뜨린 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돌아왔던 것이다. 그렇게 우리 모두를 외부와 격리시킨 것이
다.
형준의 경우는 계산에 없던 살인이었을 테다. 비슷한 시기에 다른 목적으로 별장에 잠입한
그들은 우연찮게 부딪히게 된 것이다.
나는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두개골이 흔들리는 듯한 두통 때문에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았
다. 나의 움직임을 눈치 첸 정영혜가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천천히 권총을 나에게 들이밀자 나의 몸은 얼음처럼 단단히 굳어 버렸다. 그녀는 악
귀 같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잘 들어. 오늘 너희 모두는 다 죽음으로 죄 값을 치르는 거야. 이건 거스를 수 없는 업보
야. 그래, 업보. 나 역시도 그 업보를 따르고 있을 뿐이야."
말을 하는 그녀의 망막에서 유난히 광채가 났다. 그것은 이미 실성한 사람의 눈빛이었다.
이제 다음편이 마지막입니다..
호러물은 별로 안좋아 하시는듯.....:|:|:|
이 글만 쓰고 안써야 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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