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사들의 노리개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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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겨울에 입대를 한 이등병들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그 묘한 느낌이 있다.
열려진 창문 너머로 불어오는 바람.
자신의 얼굴을 따스하게 비추는 햇볕.
코끝에 여린 풀내음이 스치며 봄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면
그 느낌은 더욱 커지고 애달파진다.
겨울이 지나갔구나.
이제 완연한 봄이구나.
입대를 하던 그 날.
그 추웠던 겨울날에는 마치 세상이 끝난 것 같았는데,
더 이상 봄 따윈 오지 않고,
영원토록 얼어붙은 동토 위에서 떨어야 할 것 같았는데.
‘시간이 지나가기는 하는구나...’
그리고 그런 밝은 생각을 하며 하늘을 바라보던 고개를 내리는 순간
가시 돋친 윤형 철조망과 높다란 담장에
밝았던 기분도 삽시간에 사라지고,
힘들고 지치는 현실만이 다가오는 느낌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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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우: 하아...
재우는 창턱에 손을 짚고 가만히 그 너머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가장 만족스럽던 그 광경도
이제는 더 이상 가슴을 동하게 만들지 못했다.
재우: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대를 둘러싸고 있는 철조망은 자신의 성벽이요
이 대대는 자신만의 성채였는데
이제는 일반 병사들이 느끼는 것과 별반 차이 없이 그 철조망은
성벽이 아닌 감옥의 벽으로 다가왔다.
더 이상 이 안에 있는 것이 즐겁지 않았다.
한시라도 빨리 퇴근을 하고 싶고,
혹여나 다른 병사, 간부들과 마찰이 생기지는 않을까 극도의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그 셋이 아니라면
지금까지 자신이었던 엄격하고, 잔혹한 모습을 보여주어도 상관없겠지만...
재우: 언제까지... 비밀이 지켜질 수 있을까...
그 한 문장이 마음에 걸린 나머지
나머지 인원들에게 조차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지금 상황이 정말 다행스럽게도 별 탈 없이 지속된다면
나머지 인원들이야 재우의 걱정 대상이 아니겠지만
언제까지고 그럴 것이라는 보장을, 확신을 재우는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지금 현수가 가지고 있는 권력은 마치 전염병과도 같았으니까.
정말 사소한 대화로도, 조그마한 말실수로도 전염될 수 있는
그런 것이었으니까.
그 병을 치료할 수 없는 지금.
오늘도 재우의 한숨은 늘어만 가고,
그 권력을 가지고 있는 녀석들의 요구는 커져만 간다.
.
.
.
금요일 오후.
체력단련마저 끝나가는 늦은 오후는
군대에 갇혀 있는 녀석들에게도 제법 설레는 시간이 아닐 수 없다.
오늘은 개인정비를 하면 전부 지나가는 것이요.
내일은 오전 체력단련만 하면 통째로 쉬는 날이요.
그 다음 날 까지 쉴 수 있는 날이기에.
병사들의 얼굴에는, 하다못해 5대기 인원들의 얼굴에조차 꽤나 밝은 웃음이 걸려있었다.
그러나......
우진: 흐아아암... 졸리다...
현수: ......
식사 집합을 기다리며 생활관에 드러누워 있는 시간.
생활관 끄트머리에는 TV가 켜져 신나는 음악과, 예쁜 누나 동생 들이 나오는 중이지만
현수는 평소 좋아하던 그 엠넷에조차 시선을 돌리지 않고 멍하게 정면만을 응시하였다.
마치 어딘가 나사가 풀린 것 같은 모습에 일 이등병들 마저 녀석을 힐끔댈 판이었으니
녀석의 동기인 우진 또한 그런 현수를 마냥 외면할 수가 없었다.
멍하게 있는 것도 어느 정도여야지
저 정도로 오랜 시간 멍을 때리는 것은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것이 확실했고, 그런 경우에 녀석의 말상대를 하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같은 왕고인 자신 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천천히 현수에게 다가간 우진은 자신이 바로 옆에 앉았는데도 고개조차 돌리지 않는 녀석을 쿡쿡 찌르며 말을 걸었다.
우진: 현수야? 너 무슨 일 있어?
현수: 아 ㅆl발 뭐야! 간지러워!
우진: 너 왜 그래? 여친한테 차였.. 아니 그러기엔 너 이미 일병 때 깨졌잖아.
현수: ㅆl발 여기서 그 얘기가 왜 나오냐.
우진: 너가 지금 딱 그때 표정이거든. 초점도 안 맞고, 멍하게 공기만 보고.
멍하게 있던 와중에 너무 훅 들어온 우진의 말에
현수는 반사적으로 욕설부터 내 뱉었지만
자신을 걱정한다는 느낌이 절절하게 스며있는 동기의 말에 금방 누그러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현수: 아으.. 젠장. 몰라. 그냥 조금 심란해서 그러니까.. 별거 아냐. 걱정했냐?
우진: 응. 당연히 걱정하지.
현수: 짜식... 감동이다...
우진: 너 탈영하면 그 뒷처리는 누구한테 감당하라고 그러냐.
현수: ...아직도 그 소리냐. ㅆl발 그건 그때 그냥 잠깐 울컥해서 했던 말이잖아!
우진: 예예~ 그러니까 현수야. 오늘 분대장 관찰일지 대상은 너다. 우리 현수가 무슨 일로 심란하니?
그렇게 말하며 정말로 앞주머니에서 분대장 수첩을 꺼내는 녀석을 보자
현수의 표정은 기괴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현수: ......뭐... 하냐?
우진: 보호 관심병사 관찰. 이따가 일일결산 때 제출할라고.
현수: 미친놈이?
우진: ...멍하게... 정신이.. 팔려.. 있다가, 말을.. 걸면.. 격해진... 감정.. 상태로... 응대함.
아무런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저 얼빠진 짓도 집어치우겠지 싶었는데
자신이 한 욕을 가지고 저런 식으로 관찰일지를 쓸 줄은 몰랐었다.
보통은 병장이 무슨 짓을 해도 신경 쓰지 않는 게 기본일진데
저놈의 동기 녀석은 지금 자신을 가지고 무슨 짓을 하는 거지 라는 생각이 현수의 머리를 뒤 흔들었다.
현수: 야... 너 장난이지?
우진: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하며,
현수: 멈춰!! 하지마 이 ㅅH끼야!
우진: 분대장에게... 폭언, 욕설까지.. 사용하는... 자제가.. 되지 않는... 모습을... 보임. 됐다! 이제 다 했어 현수야.
현수: 이 ㅅH끼가! 야! 너 그거 당장 내놔!
저 놈이라면 가능하다.
우진이 놈이라면 정말로 저런 내용의 관찰일지를 소대장께 보여주고 싸인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아무리 장난이라고 해도... 혹시나 하는 의혹을 품은 눈빛을 한동안 받아야 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현수는
아까까지 멍하고 힘이 없어보이던 모습은 간데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우진에게 달려들었다.
현수: 내놔! 당장 내놔 이 새꺄!
우진: 어어? 현수야! 이러면 안돼! 분대장 말 들어야지!
현수: 닥쳐!!! 내가 이거 당장 찢어 버린... 버린... 아씨... 장난이었냐...?
잠깐의 몸싸움 끝에 뺏어낸 수첩을 펼치며
오늘 작성한 부분을 찢어내려고 하던 현수는
오늘의 날짜 밑으로 이어지는 공란을 보며 허탈한 한숨을 내 뱉었다.
분명 무언 갈 작성하는 것처럼 볼펜까지 놀렸는데... 그게 다 자신을 놀리려는 연기였다는 사실과, 그런 것에 낚인 자신이 그렇게 한심할 수 없었다.
우진: 후훗.. 어떠냐 이 형님의 회복마법이! 기분은 좀 풀렸어?
현수: 시끄러 임마...
저 망할 동기 녀석 덕분에 멍하게 있던 정신이 한 번에 깨워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힘 따위 전혀 들어가지 않은 늘어진 목소리로 대답하는 현수였다.
우진: 진짜 무슨 일이 있긴 한가본데? 나한테도 말 못하는 거야?
현수: 하아... 아니야. 별 거 아냐.
현수: (어떻게 말하냐... 이틀 동안 대대장 못 본다고 하니까 심란해서 이런다고...)
그랬다.
오늘은 금요일.
오늘 재우가 퇴근을 한다면 주말 동안에는 부대로 복귀하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는 것은 자신 또한 재우를 한동안 괴롭힐 수 없다는 뜻이었다.
현수: (고작... 그게 뭐라고...)
어찌 보면 별 것도 아닌 일.
고작해야 주말 동안 평소처럼 지내면 되는 일이었음에도
이상하게 그 일이 전혀 쉬워 보이지 않았다.
한번 쾌락의 맛을 봐 버린 녀석의 리비도는
녀석의 머리에 끈덕지게 눌러 앉아서 계속해서 그 쾌감을, 우월감을 느끼기를 요구해 댔다.
그러다보니 멍하게 근무를 서는 시간에도, 잠을 자기 직전 그 짧은 어둠 속에서도
현수의 머릿속을 점령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밑에 무릎을 꿇고 울상을 짓고 있는 재우의 모습이었다.
자신보다 강대한, 지금껏 봐온 누구보다 수컷다운 강자를 굴복시키며 얻은 쾌락은 일종의 중독과도 같았다.
자신보다 아래에 있는 후임들을 갈구며 얻는 쾌감 따위로는
더 이상 만족시킬 수 없는 지독한 중독.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고,
헤어나오기 조차 싫은.
현수: 담배... 피러 가자.
우진: .....그게 나한테 한 말이라면... 애들이 없는 데서 이야기 하고 싶다는 걸로 받아들일게.
현수: 맞으니까.. 가자. 너한테 아니면... 누구한테 말을 하겠냐.
.
.
.
현수: 후우... 진짜 별 것도 아니지?
우진: ......내 동기가 드디어 미쳤나봐.
현수: 아 ㅆl발. 그래서 내가 말하기 싫었는데.
우진: 대대장이 보고 싶다니... 그걸 더 괴롭히고 싶다니... 뭐야 그게.
우진은 담배를 꼬나물고 있는 현수를 보며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분대장으로써 지금까지 해 왔던 어떤 상담보다 대답해주기 어려운 상담.
지난 주 까지만 하여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로 고민하고 있는 자신의 동기가 조금은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럼에도 저 말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은 것은......
현수: ...그러게나 말이다. 나도 내가 정상이 아닌 것 같은데... 아 ㅆl발 이게 대체 왜 좋지...
우진: 프로이트, 라캉, 애착이론 뭐 설명해줄 것은 많은데.. 어차피 안 들을게 뻔하니까.. 내가 해 줄 말은 하나다!
현수: ...뭔데...
우진: 그게 왜 문제인데? 너가 그걸 원한다는 거잖아. 그냥 해 버려.
현수: 그게.. 말이냐. 방구냐. 난 엄청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거든?
우진: 그러니까 그 고민을 왜 하냐고. 보통 고민을 하는 이유는 자신이나 상대방이 피해를 볼까봐 하는 거잖아. 그런데 지금 너가 대대장님을 괴롭히면 누가 피해를 보는데?
현수: 그거야 ㅆl발 당연ㅎ...... 대대장 뿐이지...?
우진: 아니지. 대대장도 원하는 것이 있으니까 우리 행동을 참고 견디는 거잖아.
현수: 미친ㅅH끼... 그러니까 지금 니 말은...
우진: 괜찮다 친구야!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
현수는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동기를 바라보았다.
해맑게 웃으며 엄지를 치켜세우고 있는 녀석이
갑자기 낯설고, 처음으로 무섭게 느껴졌다.
현수: 그 순둥순둥한... 너가 할 소리냐 그게...
딱히 독한 구석도 없고,
모난 데 없이 무난하게 지내는 녀석이었는데...
그렇게 화를 내는 성격도 아니고, 남들 말을 잘 들어주는 부드러운 녀석이기에
실질적으로 더 파워가 있는 자신을 제치고 분대장 자리를 꿰찬 녀석일 진데.
지금 우진의 입에서 나온 말은 평소와는 너무나도 다른 말이었다.
욕망에 휘둘리는 와중에도 한 가닥 남은 이성이 있어
그 실낱에 의지하여 했던 상담.
도저히 혼자서는 멈추지 못할 자신의 브레이크가 되어 주기를 바랬는데
자신을 멈춰주기는커녕 오히려 망설임을 없애주는 말을 하고 있으니
이 대답을 기껍게 받아들여야 할 지,
아니면 오히려 녀석에게 역정을 내야 할 지 쉽게 판단이 서지 않았다.
현수: (아니지... 화를 왜 내... 저 녀석은 그냥 내 편일 뿐인데... 내가 병.신이지 내가 병.신이야.)
누구를 탓할까.
먼저 대대장을 괴롭힌 것도 자신이요.
그 일에 쾌락을 느끼는 것도 자신이니.
그저 자신의 편에 서서 지지해 주고 있을 뿐인 우진에게 잘못을 전가할 만큼 뻔뻔하지는 못했다.
현수: 고맙다... 이런 말을 해도 너는.. 내 편이네.. 고맙다 새꺄... 진짜로...
이제는 끄트머리조차 남지 않은 담배를 내 던지고 새로운 담배를 꺼내 물었다.
느릿한 동작으로 라이터를 켜서 불을 붙이자
매캐한 연기가 목구멍 깊숙한 곳을 따갑게 만들었다.
자신을 탓하지 않고, 비난해주지 않는 동기 대신
그 연기가 자신을 질책한다 생각하며
현수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담배만을 빨아들였다.
현수: 그래도 역시 진짜로 계속 하는 건 아니겠지?
이성과 본성의 싸움.
그 판정을 떠넘기려던 현수는.
우진: ? 뭐야. 너 내 말 듣긴 한거야? 그냥 하라니까?
현수: ...ㅁ.. 뭐?!
정말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기의 행동에 얼빠진 소리를 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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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수: 하하... ㅆl발... 내 고민은 뭐냐.
우진: 고민이고 뭐고, 내 소중한 분대원을 건드렸는데 그걸 그냥 넘어가라고?
현수: ...참 내.. 의외의 모습이란 말이지.
평소 조용하던 녀석이 빡돌면 앞뒤를 가리지 않는 경우가 있다.
지금의 우진이 딱 그런 경우였다.
자신의 분대원을, 그것도 꽤나 귀여워하던 녀석을 그런 꼴로 만든 대대장에게까지
맹하고, 사람 좋은 모습을 보여줄 필요 따위도, 그럴 생각도 없었다.
우진: 나한테 직접적으로 괴롭히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서 얼타긴 하겠는데... 남이 괴롭히는 걸 막아줄 생각 따위도 없으니까. 그러니까.. 힘내 현수야!
현수: ...참내... 이렇게 응원을 듣게 되냐.. 고맙...다? ......잠깐만.. 그거 그냥 네 손 더럽히기는 싫고, 그렇다고 냅두기도 싫어서 나한테 짬치는 건... 아니지?
그리고...
그 말에 돌아온 대답은
고요한 침묵과, 해맑은 미소뿐이었다.
현수: ......아 몰라! 내 맘대로 할거야 ㅆl발.
우진: 그래. 그러면 되는 거야. 장하다. 내 분대원!
현수: 뭐래. 난 올라간다............. 그리고... 고마워...
마지막 말을 하기 부끄러웠기에
급하게 몸을 돌려서 생활관으로 올라가는 현수의 등 뒤로
녀석의 귀에까진 닿지 못했던 작은 목소리가 바닥에 내려깔렸다.
우진: 나도 고마워... 솔직히.. 나도 대대장 괴롭히는 게... 이상하게 끌려서 고민하고 있었는데... 덕분에 멈출 필요가 없어졌네... 너를 핑계 삼아서 미안한데, 내가 상담해줬으니까 그냥 퉁치자. 내 사랑하는 동기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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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수: 그렇게 되었으니 오늘 외박 좀 하고 싶은데 말임다?
재우: ..알겠다. 일요일 복귀로 끊어주면 되겠지?
현수: 흐음... 일단은 내일 까지만. 그리고, 이따 퇴근할 때 우리도 좀 데려가시면 되겠습니다.
재우: 알겠네... 준비 하고 30분 뒤까지 나오도록...
재우는 고개조차 들지 않은 상태로 자신의 컴퓨터를 만지작거렸다.
보통 이런 일은 행정병을 시키긴 했지만 그렇다고 재우의 컴퓨터에까지 관련 문서가 없지는 않았다.
괜히 행정병에게 시켜서 저 녀석이 여기에 더 오래 죽치고 있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자신이 직접 외박증을 만들고, 통보하는게 더욱 빠르게 일처리 하는 게 나을 것이다.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는지 재우의 손에서 완정되어 가는 외박증을 보던 현수는
준비를 해야 겠다며 녀석의 생활관으로 올라가 버렸다.
재우: 하아... 차라리 저 놈을 한 달 동안 휴가 보내 버릴까...
평소 잘 주지도 않던 포상휴가까지 떠올리며 고민하던 재우는
어느새 완성되어 버린 외박증에 도장을 찍어 올려두고는
의자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재우: 퇴근... 하기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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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 갑자기 무슨 외박입니까? 좋기는 한데...
우진: 야아. 난 외박 귀찮아! 이 동네 할 것도 없단 말야!
현수: 이미 늦었어 새꺄. 술이나 먹게 따라와.
현수의 갑작스러운 외박 통보에 대일과 우진은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아직 상병인 대일은 나간다는 것을 전혀 거부할 생각이 없어 그대로 전투복으로 환복을 시작했고, 말년인 우진은 만사가 귀찮다는 듯이 생활관 바닥에 철썩 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우진: 나가면 뭐 할건데...
현수: 술! 술 먹자고!
우진: 주말 모텔이 얼마나 비싼데! 군인 등쳐먹는 놈들 배 불리고 싶지 않아.
여전히 바닥에 엎어져 반쯤 눌린 얼굴로 투덜대는 녀석을 보며
현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천천히 몸을 숙였다.
현수: 우진아...
그리고... 녀석의 입에서는 마법의 말이 속삭여 졌다.
현수: (대대장 집 가서 술 먹자. 그러면 숙박 공짜, 술 먹으면서 가지고 놀 장난감도 있을 유. 오케이?)
우진: 오..오케이. 코올!!!
그렇게 재우만 모르는
재우의 집에서 벌어지는
술 파티가 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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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제시했던 30분은 아직 반 밖에 흐르지 않았지만
상병장들이 의욕적으로 움직이는 이상, 그 시간은 모든 준비를 마치고 재우의 앞에 도달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무언가 기대가 어려 있는 녀석들의 표정을 가만히 바라보던 재우는
속으로 짧게 한숨을 내 쉬고는 천천히 자신의 차로 걸음을 옮겼다.
자박... 자박.
거친 모래알갱이들이 전투화에 짓밟히며 가느다란 신음 소리를 흘린다.
아니. 어쩌면 그 신음을 흘리고 있는 것은 재우의 마음일지도 몰랐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시간들에.
그럼에도 비명조차 지르기 싫어 이를 악물고 억지로 참아내는 동안
다물어진 잇새를 비집고 흘러나오는 신음이었다.
그래도 조금만 더 버티자.
10분. 기껏해야 10분이면 시내가 나올 것이다.
그러면 저 녀석들을 떨궈두고, 느긋하게 집으로 돌아가 지친 몸과 마음을 쉬게 해 주어야지.
주말 이틀 동안 저 녀석들에 대한 걱정 없이 푹 쉬어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재우는 최대한 녀석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물었다.
재우: 역 근처에 내려주면 되겠나?
현수: 아! 말하는 것을 잊었습니다! 우리 대대장님 집으로 갈 겁니다.
재우: 무, 뭐!!
현수: 가기 전에 술 사게 편의점 좀 들리시고, 이따가 술시중 들어주시면 됩니다.
재우: 이..이ㄱ... 차라리 대대장이 숙소를 잡아 줄 테ㄴ
현수: ...저랑 딜합니까? 더 굴러봐야 정신 차리려나...
자신의 마지막 남은 평온마저 헤치는 그 말에 발끈하던 재우는
자신과 달리 피할 생각이 없는 현수의 눈초리에
뒷말을 삼키며, 비릿한 맛이 날 때까지 입술을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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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어릴 때 이런 걸 못해봤어.
명수혀어엉
어릴 때 못 했으니 지금 하는거야. 그러니까 말리지 마악!]
현수: 푸흡....
우진: 우헤헿.. 술 먹으면서 보니까... 더 웃기다...
대일: 에헤이. 우진이 형! 술 흘립니다.
재우: 하아......
녀석들이 술을 먹으며 웃고 떠드는 동안
그 옆에 선 재우는 점점 난장판이 되어가는 자신의 거실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이 상황이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 있는 이곳은 분명 자신의 집이건만
전혀 편안한 마음 따위 들지 않았고, 오히려 갓 입대한 훈련병 마냥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고 있었다.
물론 그런 데에는...
현수: 따라요.
재우: ......
지금 자신에게 술잔을 내밀며
당당하게 술시중을 요구하는 저 당돌한 녀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재우의 집을 차지한 녀석들은 마치 정말 제 집이라도 되는 양 냉장고를 뒤적이고,
거실 한 가운데에 술판을 깔더니...
종국에는 녀석들이 술을 마시는 동안 잔이 비면 바로 채워야 하는 역할까지 떠넘겼다.
당장이라도 벗어 던지고 싶었던 저 녀석들의 오물로 얼룩진 전투복을 벗을 틈도 없이,
그저 잠깐이라도 마음 편히 쉴 수도 없이.
자신의 집을 어지르는 녀석들을 도와주어야 한다...
[찰랑~]
현수: 아 ㅆl발.. 대대장님. 술도 똑바로 못 따르십니까?
그 생각을 하느라 살짝 감정이 흐트러져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나 보다.
술로 거의 가득 채워져 가던 현수의 잔은
당장이라도 눈물이 넘칠 것 같은 재우의 눈처럼
제 안을 채우고 있던 독한 액체를 바닥으로 뚝 뚝 떨어뜨렸다.
재우: 미안..하네... 금방 닦을 것을 가져
현수: 스토옵~ 대대장님? 뭐하러 닦을 것을 찾으러 가십니까?
재우: 그냥... 두라는 건가..?
그렇게 말하는 재우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린다.
저 녀석들과 지내야 한지 1주일도 되지 않았지만...
제 몸이 혹사당하며, 제 마음이 갈기갈기 찢겨가며 겪어야 했던 녀석들의 행동들은
앞으로 이어질 전개를 예상케 했기 때문이다.
재우: (...ㅆl발... 진짜...)
제발 그것만은 아니길 빌어보지만
자신이 돔의 입장에 있다고 생각해 봐도 지금 상황에서 걸2ㅔ를 못 가져오게 한 녀석이 요구할 것은 하나뿐이었다.
현수: 대대장님이 흘리셨는데, 대대장님으로 닦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핥으십쇼.
재우: ......
예상을 하고 있었기에 깊은 반발심은 들지 않았다.
마치 당연한 것처럼.
정말 술시중을 들다 실수한 섭처럼.
재우는 자연스럽게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자신의 고개를 아래로 가져갔다.
술잔에서 떨어진 소주가, 바닥을 적신 방울들이 재우의 눈앞으로 다가왔다.
점차, 점차 가까워지는 거리.
입을 벌리고 혀를 내민다면 금방이라도 흘린 술을 핥을 수 있는 곳까지 내려가는 것은 금방이었다.
그러나...
현수: ? 뭐 하십니까 대대장님? 흘린거 안 치우십니까??
재우: ......
딱 거기까지.
거기까지가 재우가 스스로 자존심을 굽힐 수 있는 마지노 선이었다.
마치 개처럼 네 발로 엎드린 상황에서
저 녀석들 앞에서 머리를 땅바닥 가까이까지 처박은 상황에서
더 이상 자존심이라는 것이 남아있기나 할런지 스스로도 의문이었지만
그럼에도 도저히 입술이 벌어지지 않았다.
재우: 끄윽... 끅...
벌어지기는커녕 점점 더 강하게 다물려지는 입.
뜨겁게 달아오르는 눈시울은 금방이라도 물을 쏟아낼 것 같았다.
그 눈물을 참고자, 녀석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자.
재우는 눈을 강하게 감았다 뜨며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려 했다.
현수: 가지가지 하네.
물론 그렇게 늑장을 부리는 꼴을 계속 두고 볼 생각이 없던 현수는
재우의 상태 따위 조금도 감안해 주지 않았다.
자신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있는 것으로 보이는 재우를 자극하고자
더욱 더 그를 수치스럽게 만들고 모욕하고자.
현수는 아직 마시지 않고 들고 있었던 술을
천천히 재우의 머리 위로 붓기 시작했다.
[쪼르르르....]
재우: 허억?!
차가운 물줄기가 머리를 적시자
재우의 입에서는 헛바람 들이마시는 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놀란 마음에 반사적으로 들리던 고개를 억지로 내리누르며
재우는 더욱 강하게 눈을 감고, 입술을 다물었다.
재우: 크윽...
짧은 머리카락을 타고 흘러내린 술이
마치 눈물처럼 재우의 볼을 타고 내려가
그 입술 근처를 간질였다.
긴장으로, 발안으로 인해 가빠져 오는 호흡 사이로
찐한 알콜의 향기가 스며든다.
지금이라면... 울어도 숨길 수 있지 않을까?
아니야. 나약한 생각 마라 강재우! 제발... 제발 저딴 ㅅH끼들한테.. 지지..마...
수많은 생각이 그 잠깐의 사이에도 재우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그러나... 과연 자신이 할 수 있을까?
과연 여기서 더욱 더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
저 ㅅH끼들이 원하는 수준까지 자신을 떨어트릴 수 있을까?
내 몸 하나 보하고자... 그렇게까지 자신을 몰아갈 수 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재우의 상념은
이어지는 현수의 말에
아침 안개처럼 녹아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현수: 핥아. 개새꺄.
그 말은 그 어떤 소리보다 크게 재우의 귓전을 때렸다.
분명 이럴 것이라 예상을 했음에도
그 생각을 현실로 옮기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었다.
언제나 개를 부리는 주인의 입장이었지
자신이 누군가의 개가 되어 바닥을 핥아야 한다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그 당연하고, 절대적이라 생각했던 명제는 너무나도 쉽게 뒤집혀 버렸으니.
개가 되지 않는다면...
또다시 끔찍한 고통을 당해야 할 것이다.
그것도... 자신이 굴복할 때까지... 계속해서...
재우: 끅....
그것이 의미가 있을까?
그 고통을 참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일까?
배를 처 맞아서 숨 막히는 고통을 참아내는 것이,
짓밟힌 불알이 울부짖는 것 같은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것이.
과연... 의미 있는 일일까?
어차피... 그 고통을 겪던, 겪지 않던... 해야 하는 일에는 변함이 없을 텐데...
재우: 끄윽... 끕...
더 이상 막아낼 수 없던 눈물이 터져나오고,
악다문 입술 사이로 흐느낌이 새어나왔다.
이런 상황에 놓인 자신이 불쌍해서
이런 생각까지 하는 자신이 한심해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런 와중에도 자신에게 그런 생각까지 들게 만드는 현수의 다음 행동이 두려워
재우는 도저히 벌릴 수 없을 것 같던 입술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자신이 하는 행동은 그저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하기 전에는 절대로 끝나지 않을 일이니 몸이라도 멀쩡하게 두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고 자신의 자존심을 속였다.
그 옛날.
자신이 가장 낮았던 신입생 시절.
선배님들 앞에서 기어야 했던 것을 떠올리며.
지금 이 굴욕도 훗날을 위해서라고 자위하면서
재우는 천천히 혀를 뻗어
바닥에 떨어진 술을
개처럼 핥아 먹었다.
겨울에 입대를 한 이등병들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그 묘한 느낌이 있다.
열려진 창문 너머로 불어오는 바람.
자신의 얼굴을 따스하게 비추는 햇볕.
코끝에 여린 풀내음이 스치며 봄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면
그 느낌은 더욱 커지고 애달파진다.
겨울이 지나갔구나.
이제 완연한 봄이구나.
입대를 하던 그 날.
그 추웠던 겨울날에는 마치 세상이 끝난 것 같았는데,
더 이상 봄 따윈 오지 않고,
영원토록 얼어붙은 동토 위에서 떨어야 할 것 같았는데.
‘시간이 지나가기는 하는구나...’
그리고 그런 밝은 생각을 하며 하늘을 바라보던 고개를 내리는 순간
가시 돋친 윤형 철조망과 높다란 담장에
밝았던 기분도 삽시간에 사라지고,
힘들고 지치는 현실만이 다가오는 느낌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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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우: 하아...
재우는 창턱에 손을 짚고 가만히 그 너머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가장 만족스럽던 그 광경도
이제는 더 이상 가슴을 동하게 만들지 못했다.
재우: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대를 둘러싸고 있는 철조망은 자신의 성벽이요
이 대대는 자신만의 성채였는데
이제는 일반 병사들이 느끼는 것과 별반 차이 없이 그 철조망은
성벽이 아닌 감옥의 벽으로 다가왔다.
더 이상 이 안에 있는 것이 즐겁지 않았다.
한시라도 빨리 퇴근을 하고 싶고,
혹여나 다른 병사, 간부들과 마찰이 생기지는 않을까 극도의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그 셋이 아니라면
지금까지 자신이었던 엄격하고, 잔혹한 모습을 보여주어도 상관없겠지만...
재우: 언제까지... 비밀이 지켜질 수 있을까...
그 한 문장이 마음에 걸린 나머지
나머지 인원들에게 조차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지금 상황이 정말 다행스럽게도 별 탈 없이 지속된다면
나머지 인원들이야 재우의 걱정 대상이 아니겠지만
언제까지고 그럴 것이라는 보장을, 확신을 재우는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지금 현수가 가지고 있는 권력은 마치 전염병과도 같았으니까.
정말 사소한 대화로도, 조그마한 말실수로도 전염될 수 있는
그런 것이었으니까.
그 병을 치료할 수 없는 지금.
오늘도 재우의 한숨은 늘어만 가고,
그 권력을 가지고 있는 녀석들의 요구는 커져만 간다.
.
.
.
금요일 오후.
체력단련마저 끝나가는 늦은 오후는
군대에 갇혀 있는 녀석들에게도 제법 설레는 시간이 아닐 수 없다.
오늘은 개인정비를 하면 전부 지나가는 것이요.
내일은 오전 체력단련만 하면 통째로 쉬는 날이요.
그 다음 날 까지 쉴 수 있는 날이기에.
병사들의 얼굴에는, 하다못해 5대기 인원들의 얼굴에조차 꽤나 밝은 웃음이 걸려있었다.
그러나......
우진: 흐아아암... 졸리다...
현수: ......
식사 집합을 기다리며 생활관에 드러누워 있는 시간.
생활관 끄트머리에는 TV가 켜져 신나는 음악과, 예쁜 누나 동생 들이 나오는 중이지만
현수는 평소 좋아하던 그 엠넷에조차 시선을 돌리지 않고 멍하게 정면만을 응시하였다.
마치 어딘가 나사가 풀린 것 같은 모습에 일 이등병들 마저 녀석을 힐끔댈 판이었으니
녀석의 동기인 우진 또한 그런 현수를 마냥 외면할 수가 없었다.
멍하게 있는 것도 어느 정도여야지
저 정도로 오랜 시간 멍을 때리는 것은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것이 확실했고, 그런 경우에 녀석의 말상대를 하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같은 왕고인 자신 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천천히 현수에게 다가간 우진은 자신이 바로 옆에 앉았는데도 고개조차 돌리지 않는 녀석을 쿡쿡 찌르며 말을 걸었다.
우진: 현수야? 너 무슨 일 있어?
현수: 아 ㅆl발 뭐야! 간지러워!
우진: 너 왜 그래? 여친한테 차였.. 아니 그러기엔 너 이미 일병 때 깨졌잖아.
현수: ㅆl발 여기서 그 얘기가 왜 나오냐.
우진: 너가 지금 딱 그때 표정이거든. 초점도 안 맞고, 멍하게 공기만 보고.
멍하게 있던 와중에 너무 훅 들어온 우진의 말에
현수는 반사적으로 욕설부터 내 뱉었지만
자신을 걱정한다는 느낌이 절절하게 스며있는 동기의 말에 금방 누그러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현수: 아으.. 젠장. 몰라. 그냥 조금 심란해서 그러니까.. 별거 아냐. 걱정했냐?
우진: 응. 당연히 걱정하지.
현수: 짜식... 감동이다...
우진: 너 탈영하면 그 뒷처리는 누구한테 감당하라고 그러냐.
현수: ...아직도 그 소리냐. ㅆl발 그건 그때 그냥 잠깐 울컥해서 했던 말이잖아!
우진: 예예~ 그러니까 현수야. 오늘 분대장 관찰일지 대상은 너다. 우리 현수가 무슨 일로 심란하니?
그렇게 말하며 정말로 앞주머니에서 분대장 수첩을 꺼내는 녀석을 보자
현수의 표정은 기괴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현수: ......뭐... 하냐?
우진: 보호 관심병사 관찰. 이따가 일일결산 때 제출할라고.
현수: 미친놈이?
우진: ...멍하게... 정신이.. 팔려.. 있다가, 말을.. 걸면.. 격해진... 감정.. 상태로... 응대함.
아무런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저 얼빠진 짓도 집어치우겠지 싶었는데
자신이 한 욕을 가지고 저런 식으로 관찰일지를 쓸 줄은 몰랐었다.
보통은 병장이 무슨 짓을 해도 신경 쓰지 않는 게 기본일진데
저놈의 동기 녀석은 지금 자신을 가지고 무슨 짓을 하는 거지 라는 생각이 현수의 머리를 뒤 흔들었다.
현수: 야... 너 장난이지?
우진: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하며,
현수: 멈춰!! 하지마 이 ㅅH끼야!
우진: 분대장에게... 폭언, 욕설까지.. 사용하는... 자제가.. 되지 않는... 모습을... 보임. 됐다! 이제 다 했어 현수야.
현수: 이 ㅅH끼가! 야! 너 그거 당장 내놔!
저 놈이라면 가능하다.
우진이 놈이라면 정말로 저런 내용의 관찰일지를 소대장께 보여주고 싸인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아무리 장난이라고 해도... 혹시나 하는 의혹을 품은 눈빛을 한동안 받아야 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현수는
아까까지 멍하고 힘이 없어보이던 모습은 간데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우진에게 달려들었다.
현수: 내놔! 당장 내놔 이 새꺄!
우진: 어어? 현수야! 이러면 안돼! 분대장 말 들어야지!
현수: 닥쳐!!! 내가 이거 당장 찢어 버린... 버린... 아씨... 장난이었냐...?
잠깐의 몸싸움 끝에 뺏어낸 수첩을 펼치며
오늘 작성한 부분을 찢어내려고 하던 현수는
오늘의 날짜 밑으로 이어지는 공란을 보며 허탈한 한숨을 내 뱉었다.
분명 무언 갈 작성하는 것처럼 볼펜까지 놀렸는데... 그게 다 자신을 놀리려는 연기였다는 사실과, 그런 것에 낚인 자신이 그렇게 한심할 수 없었다.
우진: 후훗.. 어떠냐 이 형님의 회복마법이! 기분은 좀 풀렸어?
현수: 시끄러 임마...
저 망할 동기 녀석 덕분에 멍하게 있던 정신이 한 번에 깨워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힘 따위 전혀 들어가지 않은 늘어진 목소리로 대답하는 현수였다.
우진: 진짜 무슨 일이 있긴 한가본데? 나한테도 말 못하는 거야?
현수: 하아... 아니야. 별 거 아냐.
현수: (어떻게 말하냐... 이틀 동안 대대장 못 본다고 하니까 심란해서 이런다고...)
그랬다.
오늘은 금요일.
오늘 재우가 퇴근을 한다면 주말 동안에는 부대로 복귀하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는 것은 자신 또한 재우를 한동안 괴롭힐 수 없다는 뜻이었다.
현수: (고작... 그게 뭐라고...)
어찌 보면 별 것도 아닌 일.
고작해야 주말 동안 평소처럼 지내면 되는 일이었음에도
이상하게 그 일이 전혀 쉬워 보이지 않았다.
한번 쾌락의 맛을 봐 버린 녀석의 리비도는
녀석의 머리에 끈덕지게 눌러 앉아서 계속해서 그 쾌감을, 우월감을 느끼기를 요구해 댔다.
그러다보니 멍하게 근무를 서는 시간에도, 잠을 자기 직전 그 짧은 어둠 속에서도
현수의 머릿속을 점령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밑에 무릎을 꿇고 울상을 짓고 있는 재우의 모습이었다.
자신보다 강대한, 지금껏 봐온 누구보다 수컷다운 강자를 굴복시키며 얻은 쾌락은 일종의 중독과도 같았다.
자신보다 아래에 있는 후임들을 갈구며 얻는 쾌감 따위로는
더 이상 만족시킬 수 없는 지독한 중독.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고,
헤어나오기 조차 싫은.
현수: 담배... 피러 가자.
우진: .....그게 나한테 한 말이라면... 애들이 없는 데서 이야기 하고 싶다는 걸로 받아들일게.
현수: 맞으니까.. 가자. 너한테 아니면... 누구한테 말을 하겠냐.
.
.
.
현수: 후우... 진짜 별 것도 아니지?
우진: ......내 동기가 드디어 미쳤나봐.
현수: 아 ㅆl발. 그래서 내가 말하기 싫었는데.
우진: 대대장이 보고 싶다니... 그걸 더 괴롭히고 싶다니... 뭐야 그게.
우진은 담배를 꼬나물고 있는 현수를 보며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분대장으로써 지금까지 해 왔던 어떤 상담보다 대답해주기 어려운 상담.
지난 주 까지만 하여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로 고민하고 있는 자신의 동기가 조금은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럼에도 저 말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은 것은......
현수: ...그러게나 말이다. 나도 내가 정상이 아닌 것 같은데... 아 ㅆl발 이게 대체 왜 좋지...
우진: 프로이트, 라캉, 애착이론 뭐 설명해줄 것은 많은데.. 어차피 안 들을게 뻔하니까.. 내가 해 줄 말은 하나다!
현수: ...뭔데...
우진: 그게 왜 문제인데? 너가 그걸 원한다는 거잖아. 그냥 해 버려.
현수: 그게.. 말이냐. 방구냐. 난 엄청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거든?
우진: 그러니까 그 고민을 왜 하냐고. 보통 고민을 하는 이유는 자신이나 상대방이 피해를 볼까봐 하는 거잖아. 그런데 지금 너가 대대장님을 괴롭히면 누가 피해를 보는데?
현수: 그거야 ㅆl발 당연ㅎ...... 대대장 뿐이지...?
우진: 아니지. 대대장도 원하는 것이 있으니까 우리 행동을 참고 견디는 거잖아.
현수: 미친ㅅH끼... 그러니까 지금 니 말은...
우진: 괜찮다 친구야!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
현수는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동기를 바라보았다.
해맑게 웃으며 엄지를 치켜세우고 있는 녀석이
갑자기 낯설고, 처음으로 무섭게 느껴졌다.
현수: 그 순둥순둥한... 너가 할 소리냐 그게...
딱히 독한 구석도 없고,
모난 데 없이 무난하게 지내는 녀석이었는데...
그렇게 화를 내는 성격도 아니고, 남들 말을 잘 들어주는 부드러운 녀석이기에
실질적으로 더 파워가 있는 자신을 제치고 분대장 자리를 꿰찬 녀석일 진데.
지금 우진의 입에서 나온 말은 평소와는 너무나도 다른 말이었다.
욕망에 휘둘리는 와중에도 한 가닥 남은 이성이 있어
그 실낱에 의지하여 했던 상담.
도저히 혼자서는 멈추지 못할 자신의 브레이크가 되어 주기를 바랬는데
자신을 멈춰주기는커녕 오히려 망설임을 없애주는 말을 하고 있으니
이 대답을 기껍게 받아들여야 할 지,
아니면 오히려 녀석에게 역정을 내야 할 지 쉽게 판단이 서지 않았다.
현수: (아니지... 화를 왜 내... 저 녀석은 그냥 내 편일 뿐인데... 내가 병.신이지 내가 병.신이야.)
누구를 탓할까.
먼저 대대장을 괴롭힌 것도 자신이요.
그 일에 쾌락을 느끼는 것도 자신이니.
그저 자신의 편에 서서 지지해 주고 있을 뿐인 우진에게 잘못을 전가할 만큼 뻔뻔하지는 못했다.
현수: 고맙다... 이런 말을 해도 너는.. 내 편이네.. 고맙다 새꺄... 진짜로...
이제는 끄트머리조차 남지 않은 담배를 내 던지고 새로운 담배를 꺼내 물었다.
느릿한 동작으로 라이터를 켜서 불을 붙이자
매캐한 연기가 목구멍 깊숙한 곳을 따갑게 만들었다.
자신을 탓하지 않고, 비난해주지 않는 동기 대신
그 연기가 자신을 질책한다 생각하며
현수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담배만을 빨아들였다.
현수: 그래도 역시 진짜로 계속 하는 건 아니겠지?
이성과 본성의 싸움.
그 판정을 떠넘기려던 현수는.
우진: ? 뭐야. 너 내 말 듣긴 한거야? 그냥 하라니까?
현수: ...ㅁ.. 뭐?!
정말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기의 행동에 얼빠진 소리를 내야 했다.
.
.
.
현수: 하하... ㅆl발... 내 고민은 뭐냐.
우진: 고민이고 뭐고, 내 소중한 분대원을 건드렸는데 그걸 그냥 넘어가라고?
현수: ...참 내.. 의외의 모습이란 말이지.
평소 조용하던 녀석이 빡돌면 앞뒤를 가리지 않는 경우가 있다.
지금의 우진이 딱 그런 경우였다.
자신의 분대원을, 그것도 꽤나 귀여워하던 녀석을 그런 꼴로 만든 대대장에게까지
맹하고, 사람 좋은 모습을 보여줄 필요 따위도, 그럴 생각도 없었다.
우진: 나한테 직접적으로 괴롭히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서 얼타긴 하겠는데... 남이 괴롭히는 걸 막아줄 생각 따위도 없으니까. 그러니까.. 힘내 현수야!
현수: ...참내... 이렇게 응원을 듣게 되냐.. 고맙...다? ......잠깐만.. 그거 그냥 네 손 더럽히기는 싫고, 그렇다고 냅두기도 싫어서 나한테 짬치는 건... 아니지?
그리고...
그 말에 돌아온 대답은
고요한 침묵과, 해맑은 미소뿐이었다.
현수: ......아 몰라! 내 맘대로 할거야 ㅆl발.
우진: 그래. 그러면 되는 거야. 장하다. 내 분대원!
현수: 뭐래. 난 올라간다............. 그리고... 고마워...
마지막 말을 하기 부끄러웠기에
급하게 몸을 돌려서 생활관으로 올라가는 현수의 등 뒤로
녀석의 귀에까진 닿지 못했던 작은 목소리가 바닥에 내려깔렸다.
우진: 나도 고마워... 솔직히.. 나도 대대장 괴롭히는 게... 이상하게 끌려서 고민하고 있었는데... 덕분에 멈출 필요가 없어졌네... 너를 핑계 삼아서 미안한데, 내가 상담해줬으니까 그냥 퉁치자. 내 사랑하는 동기야아....
.
.
.
현수: 그렇게 되었으니 오늘 외박 좀 하고 싶은데 말임다?
재우: ..알겠다. 일요일 복귀로 끊어주면 되겠지?
현수: 흐음... 일단은 내일 까지만. 그리고, 이따 퇴근할 때 우리도 좀 데려가시면 되겠습니다.
재우: 알겠네... 준비 하고 30분 뒤까지 나오도록...
재우는 고개조차 들지 않은 상태로 자신의 컴퓨터를 만지작거렸다.
보통 이런 일은 행정병을 시키긴 했지만 그렇다고 재우의 컴퓨터에까지 관련 문서가 없지는 않았다.
괜히 행정병에게 시켜서 저 녀석이 여기에 더 오래 죽치고 있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자신이 직접 외박증을 만들고, 통보하는게 더욱 빠르게 일처리 하는 게 나을 것이다.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는지 재우의 손에서 완정되어 가는 외박증을 보던 현수는
준비를 해야 겠다며 녀석의 생활관으로 올라가 버렸다.
재우: 하아... 차라리 저 놈을 한 달 동안 휴가 보내 버릴까...
평소 잘 주지도 않던 포상휴가까지 떠올리며 고민하던 재우는
어느새 완성되어 버린 외박증에 도장을 찍어 올려두고는
의자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재우: 퇴근... 하기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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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 갑자기 무슨 외박입니까? 좋기는 한데...
우진: 야아. 난 외박 귀찮아! 이 동네 할 것도 없단 말야!
현수: 이미 늦었어 새꺄. 술이나 먹게 따라와.
현수의 갑작스러운 외박 통보에 대일과 우진은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아직 상병인 대일은 나간다는 것을 전혀 거부할 생각이 없어 그대로 전투복으로 환복을 시작했고, 말년인 우진은 만사가 귀찮다는 듯이 생활관 바닥에 철썩 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우진: 나가면 뭐 할건데...
현수: 술! 술 먹자고!
우진: 주말 모텔이 얼마나 비싼데! 군인 등쳐먹는 놈들 배 불리고 싶지 않아.
여전히 바닥에 엎어져 반쯤 눌린 얼굴로 투덜대는 녀석을 보며
현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천천히 몸을 숙였다.
현수: 우진아...
그리고... 녀석의 입에서는 마법의 말이 속삭여 졌다.
현수: (대대장 집 가서 술 먹자. 그러면 숙박 공짜, 술 먹으면서 가지고 놀 장난감도 있을 유. 오케이?)
우진: 오..오케이. 코올!!!
그렇게 재우만 모르는
재우의 집에서 벌어지는
술 파티가 결성되었다.
.
.
.
처음에 제시했던 30분은 아직 반 밖에 흐르지 않았지만
상병장들이 의욕적으로 움직이는 이상, 그 시간은 모든 준비를 마치고 재우의 앞에 도달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무언가 기대가 어려 있는 녀석들의 표정을 가만히 바라보던 재우는
속으로 짧게 한숨을 내 쉬고는 천천히 자신의 차로 걸음을 옮겼다.
자박... 자박.
거친 모래알갱이들이 전투화에 짓밟히며 가느다란 신음 소리를 흘린다.
아니. 어쩌면 그 신음을 흘리고 있는 것은 재우의 마음일지도 몰랐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시간들에.
그럼에도 비명조차 지르기 싫어 이를 악물고 억지로 참아내는 동안
다물어진 잇새를 비집고 흘러나오는 신음이었다.
그래도 조금만 더 버티자.
10분. 기껏해야 10분이면 시내가 나올 것이다.
그러면 저 녀석들을 떨궈두고, 느긋하게 집으로 돌아가 지친 몸과 마음을 쉬게 해 주어야지.
주말 이틀 동안 저 녀석들에 대한 걱정 없이 푹 쉬어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재우는 최대한 녀석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물었다.
재우: 역 근처에 내려주면 되겠나?
현수: 아! 말하는 것을 잊었습니다! 우리 대대장님 집으로 갈 겁니다.
재우: 무, 뭐!!
현수: 가기 전에 술 사게 편의점 좀 들리시고, 이따가 술시중 들어주시면 됩니다.
재우: 이..이ㄱ... 차라리 대대장이 숙소를 잡아 줄 테ㄴ
현수: ...저랑 딜합니까? 더 굴러봐야 정신 차리려나...
자신의 마지막 남은 평온마저 헤치는 그 말에 발끈하던 재우는
자신과 달리 피할 생각이 없는 현수의 눈초리에
뒷말을 삼키며, 비릿한 맛이 날 때까지 입술을 깨물었다.
.
.
.
[난 어릴 때 이런 걸 못해봤어.
명수혀어엉
어릴 때 못 했으니 지금 하는거야. 그러니까 말리지 마악!]
현수: 푸흡....
우진: 우헤헿.. 술 먹으면서 보니까... 더 웃기다...
대일: 에헤이. 우진이 형! 술 흘립니다.
재우: 하아......
녀석들이 술을 먹으며 웃고 떠드는 동안
그 옆에 선 재우는 점점 난장판이 되어가는 자신의 거실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이 상황이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 있는 이곳은 분명 자신의 집이건만
전혀 편안한 마음 따위 들지 않았고, 오히려 갓 입대한 훈련병 마냥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고 있었다.
물론 그런 데에는...
현수: 따라요.
재우: ......
지금 자신에게 술잔을 내밀며
당당하게 술시중을 요구하는 저 당돌한 녀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재우의 집을 차지한 녀석들은 마치 정말 제 집이라도 되는 양 냉장고를 뒤적이고,
거실 한 가운데에 술판을 깔더니...
종국에는 녀석들이 술을 마시는 동안 잔이 비면 바로 채워야 하는 역할까지 떠넘겼다.
당장이라도 벗어 던지고 싶었던 저 녀석들의 오물로 얼룩진 전투복을 벗을 틈도 없이,
그저 잠깐이라도 마음 편히 쉴 수도 없이.
자신의 집을 어지르는 녀석들을 도와주어야 한다...
[찰랑~]
현수: 아 ㅆl발.. 대대장님. 술도 똑바로 못 따르십니까?
그 생각을 하느라 살짝 감정이 흐트러져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나 보다.
술로 거의 가득 채워져 가던 현수의 잔은
당장이라도 눈물이 넘칠 것 같은 재우의 눈처럼
제 안을 채우고 있던 독한 액체를 바닥으로 뚝 뚝 떨어뜨렸다.
재우: 미안..하네... 금방 닦을 것을 가져
현수: 스토옵~ 대대장님? 뭐하러 닦을 것을 찾으러 가십니까?
재우: 그냥... 두라는 건가..?
그렇게 말하는 재우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린다.
저 녀석들과 지내야 한지 1주일도 되지 않았지만...
제 몸이 혹사당하며, 제 마음이 갈기갈기 찢겨가며 겪어야 했던 녀석들의 행동들은
앞으로 이어질 전개를 예상케 했기 때문이다.
재우: (...ㅆl발... 진짜...)
제발 그것만은 아니길 빌어보지만
자신이 돔의 입장에 있다고 생각해 봐도 지금 상황에서 걸2ㅔ를 못 가져오게 한 녀석이 요구할 것은 하나뿐이었다.
현수: 대대장님이 흘리셨는데, 대대장님으로 닦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핥으십쇼.
재우: ......
예상을 하고 있었기에 깊은 반발심은 들지 않았다.
마치 당연한 것처럼.
정말 술시중을 들다 실수한 섭처럼.
재우는 자연스럽게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자신의 고개를 아래로 가져갔다.
술잔에서 떨어진 소주가, 바닥을 적신 방울들이 재우의 눈앞으로 다가왔다.
점차, 점차 가까워지는 거리.
입을 벌리고 혀를 내민다면 금방이라도 흘린 술을 핥을 수 있는 곳까지 내려가는 것은 금방이었다.
그러나...
현수: ? 뭐 하십니까 대대장님? 흘린거 안 치우십니까??
재우: ......
딱 거기까지.
거기까지가 재우가 스스로 자존심을 굽힐 수 있는 마지노 선이었다.
마치 개처럼 네 발로 엎드린 상황에서
저 녀석들 앞에서 머리를 땅바닥 가까이까지 처박은 상황에서
더 이상 자존심이라는 것이 남아있기나 할런지 스스로도 의문이었지만
그럼에도 도저히 입술이 벌어지지 않았다.
재우: 끄윽... 끅...
벌어지기는커녕 점점 더 강하게 다물려지는 입.
뜨겁게 달아오르는 눈시울은 금방이라도 물을 쏟아낼 것 같았다.
그 눈물을 참고자, 녀석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자.
재우는 눈을 강하게 감았다 뜨며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려 했다.
현수: 가지가지 하네.
물론 그렇게 늑장을 부리는 꼴을 계속 두고 볼 생각이 없던 현수는
재우의 상태 따위 조금도 감안해 주지 않았다.
자신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있는 것으로 보이는 재우를 자극하고자
더욱 더 그를 수치스럽게 만들고 모욕하고자.
현수는 아직 마시지 않고 들고 있었던 술을
천천히 재우의 머리 위로 붓기 시작했다.
[쪼르르르....]
재우: 허억?!
차가운 물줄기가 머리를 적시자
재우의 입에서는 헛바람 들이마시는 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놀란 마음에 반사적으로 들리던 고개를 억지로 내리누르며
재우는 더욱 강하게 눈을 감고, 입술을 다물었다.
재우: 크윽...
짧은 머리카락을 타고 흘러내린 술이
마치 눈물처럼 재우의 볼을 타고 내려가
그 입술 근처를 간질였다.
긴장으로, 발안으로 인해 가빠져 오는 호흡 사이로
찐한 알콜의 향기가 스며든다.
지금이라면... 울어도 숨길 수 있지 않을까?
아니야. 나약한 생각 마라 강재우! 제발... 제발 저딴 ㅅH끼들한테.. 지지..마...
수많은 생각이 그 잠깐의 사이에도 재우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그러나... 과연 자신이 할 수 있을까?
과연 여기서 더욱 더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
저 ㅅH끼들이 원하는 수준까지 자신을 떨어트릴 수 있을까?
내 몸 하나 보하고자... 그렇게까지 자신을 몰아갈 수 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재우의 상념은
이어지는 현수의 말에
아침 안개처럼 녹아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현수: 핥아. 개새꺄.
그 말은 그 어떤 소리보다 크게 재우의 귓전을 때렸다.
분명 이럴 것이라 예상을 했음에도
그 생각을 현실로 옮기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었다.
언제나 개를 부리는 주인의 입장이었지
자신이 누군가의 개가 되어 바닥을 핥아야 한다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그 당연하고, 절대적이라 생각했던 명제는 너무나도 쉽게 뒤집혀 버렸으니.
개가 되지 않는다면...
또다시 끔찍한 고통을 당해야 할 것이다.
그것도... 자신이 굴복할 때까지... 계속해서...
재우: 끅....
그것이 의미가 있을까?
그 고통을 참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일까?
배를 처 맞아서 숨 막히는 고통을 참아내는 것이,
짓밟힌 불알이 울부짖는 것 같은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것이.
과연... 의미 있는 일일까?
어차피... 그 고통을 겪던, 겪지 않던... 해야 하는 일에는 변함이 없을 텐데...
재우: 끄윽... 끕...
더 이상 막아낼 수 없던 눈물이 터져나오고,
악다문 입술 사이로 흐느낌이 새어나왔다.
이런 상황에 놓인 자신이 불쌍해서
이런 생각까지 하는 자신이 한심해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런 와중에도 자신에게 그런 생각까지 들게 만드는 현수의 다음 행동이 두려워
재우는 도저히 벌릴 수 없을 것 같던 입술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자신이 하는 행동은 그저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하기 전에는 절대로 끝나지 않을 일이니 몸이라도 멀쩡하게 두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고 자신의 자존심을 속였다.
그 옛날.
자신이 가장 낮았던 신입생 시절.
선배님들 앞에서 기어야 했던 것을 떠올리며.
지금 이 굴욕도 훗날을 위해서라고 자위하면서
재우는 천천히 혀를 뻗어
바닥에 떨어진 술을
개처럼 핥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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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pa…
- 작성일
잘 읽었습니다. 오랜만에 올라왔네요 이제 더 쎈 수위 기대해보겠습니다 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