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너머를 달리는 그림자 (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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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가 난 지 거의 4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컴퓨터 받침대 위에 걸터앉아 웃고 있는 행운의 인형의 한쪽 팔에 걸려있는 그의 반지를 볼 때면 가끔씩 그가 생각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나의 삶도 다시 느릿한 강줄기처럼 지루하고 느긋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나의 가슴속 저 아래에 앙금처럼 남아있는 재호에 대한 미움은 내 자신도 놀랄 정도로 사라지지 않고 그렇게 엉겨붙어 가끔씩 나를 괴롭혔다.
‘녀석만 아니었다면’, ‘녀석의 존재만 없었다면 나는 지금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한 학창시절의 추억을 가지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했다.
녀석만 사라지면 다 될 줄 알았다.
속이 시원해 질 줄 알았다.
하지만 인생에서 가장 빛나야 할 십대 후반의 한창때에 녀석 때문에 고통스러웠던 시간들은 내 머릿속에서 그렇게 지워지지 않고 남아 가끔씩 나를 괴롭혔다.
아무래도 이혼을 당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선일이는 나와의 통화중에 슬며시 털어놓았다.
가진 것이라고는 부채와 무능함 밖에 없는데다가 밤에 그 일도 제대로 못하는 남편은 필요없다고 한다면서 녀석은 껄껄거리고 웃었다.
“잘해주지 그랬어.”
나의 말에 녀석은 다시 씁쓸하게 웃었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아랫도리가 말을 안들어. 막상 하려고 하면 그냥 죽어버려.”
“뭐냐. 그 비아인지 뭔지하는 거라도 좀 먹어보던가...”
“그건 그렇고....” 녀석이 나의 말을 끊었다. 갑자기 차분해진 목소리였다.
“재호 사고로 죽은 지 벌써 4년이 다 되간다.”
“........”
“이제 옛날 상처 다 사라졌냐?”
그의 말에 마치 그가 내 앞에서 나를 보고 있는 것 마냥 고개를 저었다.
“나도 잊어버리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된다. 가끔은 자려고 누우면 떠 올라서 나를 괴롭혀.”
“그거 그대로 방치하면 늙어서도 상처 남는다는데....”
녀석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혀를 찼다.
“그럼 재호한테 가서 욕 실컷해주고 와. 속에 담아있던 것 다 쏟아내고 나면 훨씬 나아질걸. 아마.”
“.....”
“재호 화장하고 걔네 선산에 묻혔어. 걔네 어머님이 납골당에 두는 것 싫다고 가족 무덤에 같이 묻고 싶다고 하셔서....”
“.....”
“어쩌다 보니 나도 한번 가 본적 있다.”
녀석의 씁쓸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위치 알려줄테니 한번 갔다와. 가서 하고 싶은 욕이란 욕 다 뱉어주고 와.”
역시 돈이란 것은 살아서 뿐만이 아니고 죽어서도 그 값을 발휘한다 싶었다. 하지만 한줌의 재로 변한 후 근사한 곳에서 묻혀있어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
며칠을 망설였다.
그의 말이 맞다 싶다가고 무엇하러 그 먼 충청도의 산속을 찾아갈까 싶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따금씩 망령처럼 찾아오는 과거로부터 자유롭고 싶었다. 이미 죽어서 재가 된 녀석이었다, 모두 씻어내고 마지막으로 그를 용서하고 탈탈 털어내고 싶었다.
회사에 월차를 냈다. 4년전 사고가 난 그 날이었다.
4년전 오늘 그 녀석이 세상을 떠난 것처럼, 이제 오늘 녀석을 나의 기억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리는 날로 만들고 싶었다.
충청도 외진 자락에 위치한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할아버지에게 물어 위치를 확인한 다음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더운 날씨에 숨이 차고 이마에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래 너는 죽어서도 나를 이렇게 괴롭히는구나.’ 손바닥으로 땀을 닦으며 녀석에게 화를 냈다.
산등성이에 오르자 눈 앞에 차가 다닐만한 도로가 나타났다.
'그럼 그렇지' 하고 헛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차도 없는 내가, 그렇다고 택시를 잡는다고 해도 인적이 없는 여기까지 올라와 줄 것 같지도 않았으니 여튼 나는 처음부터 여기까지 어차피 걸어 올라올 팔자였다.
작은 언덕너머에 드디어 녀석의 무덤이 나왔다.
녀석의 바로 옆에 서 있는 커다란 떡갈나무 그늘에 주저앉아 땀을 식혔다.
손수건으로 이마와 목뒤의 땀을 씻어내며 고개를 돌렸다.
산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푸르른 풍경이 일품이었다.
“그래도 너는 죽어서도 이렇게 좋은데서 지내는 구나. 팔자좋은 자식.”
그렇게 녀석에서 불평을 하고는 녀석의 무덤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주변에서 자라는 향긋한 풀잎내음이 코를 통해서 폐 속을 가득 채우고 풀벌레들의 소리가 귀를 찌르는 듯 했다.
준비해 온 소주병을 따고 잔에 따르고는 녀석의 앞에 놓았다.
“이렇게 네가 여기에 누워있구나. 그렇게 나를 괴롭히더니.....”
녀석에게 어떻게,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너무 많은 상념이 일시에 나의 머릿속을 채워버렸다.
“그래, 내가 오늘 너를 찾아온 것은....”
막 입을 열고 녀석에게 저주를 퍼부으려는 바로 그때, 등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놀란 나는 몸을 일으키며 돌아보았다.
손가방을 한쪽 팔에 끼고 다른 손에는 손수건을 쥔 채로 한 중년여성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나만큼 놀란 표정으로 나에게 다가와 나를 빤히 보고는 곧 화사한 웃음을 지으셨다.
“재호 친구가 찾아와 주었네.”
마치 감격이라도 하셨다는 듯 두 눈에 눈물을 글썽이시면서 나의 손을 덥썩 잡으셨다.
그녀의 그런 얼굴과 예전에 서점에서 나의 참고서를 대신 계산을 해주던 재호의 어머니의 모습이 겹쳐졌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얼떨결에 고개를 숙이고 그렇게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가방을 옆에 내려놓고 가지런히 앉은 그녀 옆에 나도 조용히 앉았다.
고개를 돌려 무덤을 한번 돌아본 후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내가 일찍 알았더라면 재호가 그렇게 가진 않았을텐데.. 이것은 다 내 탓이야.”
그녀가 마치 혼잣말 하듯 입을 열었다.
“녀석에게 무슨일이 있었는지 진작에 알았더라면....”
그녀가 손수건을 집어들고 눈 주위의 눈물을 훔쳤다.
“무슨 말씀이신지...”
그녀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 그녀의 눈치를 보면서 슬며시 입을 열었다.
“재호하고 많이 친했지?”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고 물었다. 눈물 자국이 번진 눈으로 그녀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
“그랬으니까 여기까지 와 줬겠지.”
그녀가 나를 빤히 보면서 표정을 밝게 하고 웃어보였다.
“녀석이 이렇게 좋은 친구는 엄마에게 인사도 안시켜주고....”
그녀가 다시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부모 욕심 때문에 우리 애가 죽은거야. 다 내 탓이지...”
그녀가 슬며시 손을 뻗어 나의 손을 잡았다. 어쩔줄 몰라 나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가슴이 꽉 막히고 멍이 들어서 녀석의 얘기를 알게 된 후로는 죽지 못해 살아왔어. 딴이 이런말을 할 사람도 주변에 없고....”
“.......”
“그냥 예전 친구 엄마가 지나가는 신세한탄하더라 생각하고 한번 듣고 잊어줘요. 응?”
그녀의 말에 그런 그녀를 보고는 무심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재호가 고등학교에 입학하고는 가끔씩 이상한 말을 했었어. 난데없이 전학을 시켜달라고...”
“......”
“입이 무거운 녀석이라 왜 그러냐고 물어도 별 대답도 안하고 그냥 먼 곳에 있는 학교로 전학만 보내주면 안되겠냐고....”
“.....”
“어느 날 애아빠가 물었어. 학교에서 무슨일 있냐고. 그랬더니 녀석이 그때서야 그러더라고 한철이가 보통애가 아니라고 일진이고 닥치는 대로 아이들을 괴롭힌다고....”
“총각도 한철이란 놈 알고 있어요?”
그녀가 나를 빤히 보면서 나직히 물었다. 나는 얼굴이 붉어진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대충 알고 있겠네.”
“......”
“애 아빠가 운영하는 회사의 거래처 중 한곳이 그 한철이 엄마네 회사였어. 나는 몰랐는데 남편이 입학식때 어떤 부부를 보고 인사를 하더라고. 그 녀석 엄마가 자기 아들도 이 학교 입학했다고 잘좀 부탁한다고 남편하고 나에게 깍듯이 인사를 하고.... 재호가 공부 잘한다는 것 알고 있다고 말하고는 옆자리 앉게 힘도 쓰고 그리고 그 후에 남편 사업에 도움도 많이 주었지.”
“......”
“여튼, 그래서 남편이 재호한테 물었지. ‘걔가 너 괴롭히냐’고... 그랬더니 그건 아니라고... 남편은 사업 욕심에 ‘그러면 신경쓰지 말고 계속 다니라’고, ‘지금 아빠가 그 집 덕으로 사업이 번창하고 있는 거’라고...‘또 그것이 나중에 다 네것이 되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
“무뚝뚝하고 엄한 남편에게는 그 다음에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에게는 가끔 그 한철이라는 애가 너무 싫다고 조용한 시골 동네로 전학갔으면 좋겠다고 그러는데 나는 아무 대꾸도 못해주고 그냥 남편 눈치만 봤거든....”
“....”
“2학년 올라가고 5월인가 6월인가 그 즈음에 혼자 곰곰이 생각하다가 안되겠기에 그렇게 전학가고 싶으면 아빠에게 진지하게 엄마가 말해보겠다고 했는데, 또 그때는 녀석이 아니라고 그러더라고.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자기가 지금 빠져나가면 안되는 상황이라고.. 그런 이상한 말을 하면서...”
“.....”
“무슨 말인지 이해는 못했지만 그렇게 그냥 괜찮은 줄 알았어. 아니 괜찮은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을거야. 나도 남편에게 무슨 말 꺼내기가 불편하고 힘들었거든.”
“.....”
“녀석이 사고로 가버리고 난 뒤에도 녀석의 방을 건드리지 않고 가만히 놔두었어. 기다리면 언젠가 살아서 돌아올거라고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부정만 하다가... 그렇게 괴로워만 하다가 남편 성화에 억지로 녀석의 물건들을 정리를 하다가 일기장을 발견했어.”
그녀가 말을 멈추고 가방을 열고는 손을 집어 넣고 그 안에서 작은 노트 하나를 꺼냈다.
“가만히 가지고만 있다가 어느 날 녀석이 너무 그립길레 첫 페이지를 펴고 읽어보기 시작했어. 그리고는 그때야 깨달았어. 우리 아들을 이렇게 죽게한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내 자신이었다는 것을....”
그녀가 노트를 땅에 놓고 손수건을 눈에 가져다 대고는 슬며시 눌렀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 지 한마디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나는 그냥 멍하게 그녀와 땅에 놓여져 있는 노트를 번갈아 보면서 그녀가 진정하기를 기다렸다.
“해마다 재호가 떠난 날이면 이렇게 와서 녀석에게 이 노트를 보여줘. 왜 진작에 말하지 않았냐고. 그렇게 녀석에게 말하면서..... 녀석한테 그렇게 부족했던 엄마를 용서해 달라고. 그렇게 힘들게 살았던 녀석을 알아주지 못하고 녀석을 그렇게 보내고 나서야.... 부족한 엄마가 이제야 우리 아들을 알게 되었다고...”
그녀가 낮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그런 서글픈 한숨 소리에 귀를 따갑게 울리던 풀벌레들은 어딘가로 모두 숨어버리고 언덕 아래에서 불어오던 바람도 멎었다.
“저....”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하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마도 녀석이 쓴 일기에 나도 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이 어떤 마음으로 나를 그렇게 괴롭혔는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죽기 전에 한번이라도 나에 대해서 미안한 감정을 실 한 올 만큼이라도 느꼈었는지 궁금해졌다. 직접 나에게 말을 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혹시라도 녀석이 자신의 일기에 나에 대해 ‘미안하다’ 라는 한마디라도 표현해 주었기를 바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만약에 그랬더라면 기쁜마음으로 용서를 해주고 훌훌 털어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그렇게 입을 열었다.
“괜찮으시면 제가 한번 읽어봐도....”
잠시 망설이는 듯 보이던 그녀가 희미한 미소를 짓고는 노트를 집어서 나에게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나를 보고 다시한번 희미한 웃음을 지어보이고는 그녀는 몸을 일으킨 후, 손을 뻗어 무덤가에 있는 잡초를 뽑기 시작했다.
“어머니 제가 할게요.”
몸을 일으키면서 그렇게 말하는 나에게 그녀는 손사래를 쳤다.
“아니야. 내가 해주고 싶어. 우리 아들하고 조근조근 대화도 하면서....”
그렇게 말하고는 그녀는 손바닥으로 잔디가 터진 부분을 꾹꾹 눌렀다.
그런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려 나의 손에 들려있는 노트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첫장을 넘겨 보았다.
‘지옥같은 삶은 성급하고 아주 하찮은 순간적인 선택에 의해서 결정된다.’
녀석의 일기장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때 내가 그냥 고개를 돌리고 못본 척 했더라면, 내가 감당하기 힘든 일에 뛰어들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녀석의 존재는 처음에는 한철이나 나의 시야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2학년이 되고 난 후 한참을 밖으로 나돌던 한철이가 어느 날 1학년 때 습관적으로 괴롭히던 선일이를 밖으로 끌고 나갔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한철이가 썩은 웃음을 지으면서 나를 보았다.
“야, 이제 저 자식이 내 손에서 벗어나려고 용쓴다. 제 베프까지 파는데?”
나는 그게 무슨 말인가 했다.
“그 놈이 그러는데 저기 앞에 앉아있는 저 우진이란 놈이 게이란다.”
“어떻게 알았대?‘
녀석의 말에 깜짝 놀라서 물었다.
”피시방에서 남자들이 홀딱 벗고 있는 것을 보다가 자기한테 딱 걸렸대.“
”....“
”간만에 기분이 꿀꿀해져서 기분전환겸 손 좀 봐줄랬더니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내불던걸? 역시 주먹 앞에 우정같은 건 개나 줘버리는 거야.“
녀석이 그렇게 나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을 하고는 킬킬거렸다.
“그래?”
하지만 어쩐 일인지 녀석은 그 이후에도 우진이에게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녀석에게는 학교 안팎으로 사고를 칠 무궁무진한 것이 널려있었으니 그럴만도 했다.
하지만 그 우진이란 녀석은 그 이후로 나의 시야 안에서 머물렀다.
내 마음에 들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그 감정은 마치 먼 타국에서 오랫동안 외로운 삶을 살다가 어느 순간 동포를 만난다는 그런 느낌 비슷한 것일 듯 했다.
그렇게 조용했던 시간이 어느 날 우진이 녀석이 장난을 치다가 한철이의 발을 차면서 일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수학수업이 시작되면서 한철이 녀석은 처음에는 자신의 발을 차고도 제대로 사과를 하지 않은 우진이를 노려보면서 어이없어 했다.
그리고 점차 녀석의 잔인한 본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저 새끼, 게이라는데도 내가 별 관심 안두고 내버려뒀더니 손 봐달라고 애걸을 하네.”
그런 녀석의 반응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수업 끝나고 어디 으슥한데로 끌고가서 게이새끼들은 어떻게 그짓을 하나 시범이나 보이라고 해야겠다.”
우진이를 노려보던 녀석이 나를 흘끗 보면서 비열한 웃음을 지었다.
“저 망할새끼 엎어뜨려놓고 바나나를 집어넣고 쑤*볼까? 아니면 마포자루를 쑤* 넣어봐? 어디까지 들어가는지 갑자기 궁금해지는데?”
그런 녀석의 말에 갑자기 숨이 막혀왔다.
수황이나 윤식이 같은 허접한 양아치들한테도 말 한마디 못하는 녀석이 한철이의 손아귀에서 어떻게 될지는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녀석이 한철이를 어떻게 버티느냐하는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얼마나 버티느냐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달은 커녕 일주일안에 녀석은 이 세상을 하직할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온갖 아첨에 간쓸개 다 내어줄 것같이 구는 놈도 녀석은 어느 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3층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리라고 협박했던 놈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마치 무슨 무용담이나 되는 것처럼 자랑스럽게 떠벌리는 그런 잔인한 놈이었다.
우진이가 그 녀석의 손아귀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급하게 녀석을 한철이의 손아귀에서 구해낼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수재가문에서 미운오리새끼였던 그 녀석은 특히 수학에 제일 약했다. 수학 성적 때문에 검사인 자기 아버지에게 뺨까지 맞았다고 분해하던 녀석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아무리 머리를 짜 보아도 그것밖에는 그럴 듯한 다른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시간은 재깍재깍 흘러가고 수업시간의 종료도 이제 기껏해야 5분 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서 내 자신이 악역을 자처했다.
나 답지 않게 녀석에게 어깨를 으쓱해 보이면서 녀석에게 가능한 쿨한 모습으로 말을 걸었다.
“이번 중간고사 수학답안지 재주껏 보여줄테니 저 녀석 나에게 넘겨.”
나의 뜻밖의 말에 녀석이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무엇인가 미심쩍은 눈치를 보였다.
“나도 빵셔틀 있을 때 됐잖아. 하교때 집에까지 무거운 가방 메고 가는 것도 이제 졸업을 해야지.”
그렇게 나는 일진이 되었다.
동물도 아니고 나와 똑같은 인격체의 한 인간을 그렇게 괴롭힌다는 것은 웬만한 짐승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녀석에게 손을 댄 첫 날, 침대에 누워 도대체 내가 녀석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내가 어떤 짐승이 되어있는지 떠오르자 가슴이 저려왔다. 숨을 쉬기도 힘들었다.
도대체 왜 내가 그런 비인간적인 일을 시작해야만 했을까. 그런 선택을 한 내 자신에게 분노가 치밀어 올라 견딜수가 없었다. 이를 악물고 침대의 끄트머리를 움켜쥐었다. 참을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무리 그래봤자 아무 소용없는 일이었다. 아침이면 다시 학교를 가고 나는 또 녀석을 한철이의 손아귀에서 구한다는 명목으로 폭행를 저지르는 일을 이제 계속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눈치없고 운도 없는 녀석은 내가 일부러 녀석을 피하는 날에도 학교 밖에서 한철이 놈의 레이더망에 걸려들었다.
녀석과 집에 돌아오는 길에 어두운 뒤편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났다.
“우진이 새끼 너 피해서 숨었나보다.”
뒤를 흘끗 돌아본 한철이 녀석이 나를 보고 실실거렸다. 짐승같은 녀석은 눈치도 빠르다. 짐승만이 가질 수 있는 본능인 듯 싶다.
“끌어내서 한번 신나게 갖고 놀아볼까?”
“야, 내꺼잖아. 내가 손봐줘야지.”
미련하고 눈치도 더럽게 없는 놈. 지지리 운도 복도 없는 놈. 그렇게 속으로 우진이를 탓하면서 몸을 돌려 무거운 발을 옮기기 시작했을 때, 근처 어딘가에서 고양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나는 얼굴을 한철이에게 돌렸다.
“우진이는 내일 학교에서 손 봐주고 지금은 내가 숨겨놓은 다른 실력을 보여주지.”
그리고 가로등이 비추는 밝은 곳으로 나왔다.
나의 모습을 확실히 보여준다면 우진이 녀석은 놀래서 도망을 가겠지 싶었다. 그 녀석에게 그럴 시간을 벌어주고 싶었다.
쪼그리고 담 위에 앉아있는 길고양이를 정확히 맞출 필요는 없었지만 진짜인 듯 보여야 했다. 진지하게 겨냥하는 폼으로 고양이에게 돌을 던졌다.
하지만 그 녀석도 운도 없고 미련한 우진이 같은 놈이었다. 나의 예상외로 녀석은 나의 허접한 돌팔매질에 정통으로 맞고 말았다.
속에서 울컥하는 뜨거운 덩어리 하나가 가슴에서 목으로 튀어올라왔지만 나는 표정을 가다듬고 한철이 녀석을 돌아보았다.
“봤지? 내가 이 정도야.”
그 놈과 헤어지고 부지런히 달려서 돌아와 보니 고양이는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었다.
녀석을 품에 안고 집으로 뛰었다. 이 한밤중에 문을 연 동물병원도 없을 듯 싶었다.
무슨일이냐는 엄마의 말을 무시하고 고양이의 치료를 해주려고 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그 녀석 옆에서 자리를 지키고 아침이 되기를 기다렸지만 해가 뜨기 전에 녀석은 세상을 떠나버렸다.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이 이렇게 저주스러울 수가 없었다.
엄마와 외출을 했다가 서점에 들렀다.
과외 선생님이 사라는 책을 고르고 엄마와 줄을 섰다.
앞쪽에 서 있는 한 녀석의 뒷모습이 낮이 익었다. 녀석이었다.
이미 진도가 반이나 나가버린 참고서를 들고 있는 것을 보니 또 별볼일 없는 양아치에게 책을 뺏긴 것이 뻔한 일이었다.
녀석이 호주머니를 뒤졌다. 모자란 놈에게 항상 일어나는 뻔한 일이다 어디에다 또 돈을 잃어버렸군. 그런 녀석을 바라보다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엄마에게 같은 학교 학생인데 돈이 없나보다하고 힌트를 주었다.
정 많은 엄마가 그냥 지나칠리 없었다. 그리고 내 예상은 다시한번 적중했다.
믿을 수 없는 녀석의 일기의 내용에 노트를 들고 있던 나의 손이 떨려왔다.
그런 나의 눈에 고등학교때 서점에서 나의 시선을 피해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던 재호의 모습이 비쳐졌다.
내가 알고 있던 재호는 도대체 누구이고 지금 이 일기 속의 재호는 또 누구란 말인가....
머리를 들고 나에게 등을 돌리고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고 있는 그녀에게 멍한 시선을 한번 준 다음 다시 재호의 노트로 눈을 돌렸다.
“니꺼냐?”
수황이 녀석의 책상위에 놓여있는 우진이의 참고서를 발견하고 녀석에게 시비를 걸었다.
“니꺼냐구!”
녀석은 내 눈치를 보더니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수업끝나고 학교 옥상으로 와라.”
녀석에게 나야 큰 존재감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 뒤에 버티고 있는 한철이는 녀석에겐 공포 그 자체였을 것이다.
주먹으로 녀석의 뺨을 갈겼다.
갑자기 나의 마음속에 눌려있던 알지못한 분노가 끓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내 자신이 두려워졌다.
“앞으로는 내 장난감 물건에 손 대지 마라. 다 내꺼니까.”
내 앞에 무릎꿇고 앉은 녀석의 가슴을 운동화 발로 적당히 걷어찼다.
그래도 신은 한가지는 나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고3이 되면서 한철이와 나는 7반 그리고 우진이 녀석은 맨 끝에 있는 1반이 되었다.
이제 좀 살 것 같이 느껴졌다.
항상 소화불량으로 고생하던 내가 이제는 점심 시간에 나의 식도를 통해 들어가는 밥알이 부드러워진 것이 느껴졌다.
이제는 가끔씩 녀석의 반으로 가서 둘러보며 한철이에게는 녀석은 나의 영역안의 내 물건이며 그 반의 주변 양아치들에게는 내 물건의 물건에 손대지 말라는 영역표시를 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녀석은 그것으로 이제 안전할 것이라는 것이 확실해졌다.
갑작스러운 재호의 어머니의 안간힘을 쓰는 소리에 고개를 들고 시선을 그녀에게 돌렸다.
“이게 왜 이리 질겨.”
혼잣말을 하면서 그녀는 무덤의 뒤편에 있는 풀 한움큼과 씨름을 하고 있었다.
“제가 할께요. 어머니.”
나의 말에 그녀가 몸을 일으키고는 옆으로 한 발 물러섰다.
풀을 뽑는 내 뒤에서 그녀가 다시한번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바라지도 않는 잡초는 왜 그렇게 빨리 자라는 지 몰라.”
너무 커버린 잡초를 뽑아 버린 후, 나의 등을 떠미는 그녀에게 못이기는 척 슬며시 돌아와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땅에 내려 놓았던 노트를 다시 집어들었다.
그렇게 아빠가 바라던 의대에 합격했다.
“내 소원 들어주었으니 네가 바라는 게 있으면 뭐든지 말해봐라. 내가 다 들어 줄 테니까.”
그렇게 나를 보고 호탕하게 웃는 아빠를 보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부자간이 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아빠와 나는 보통의 가족의 부자사이와 같은 살가운 사이는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사소한 일도 서로 대화를 한 적이 없었고 또 듣고 싶어하지도 않으셨다. 그래서 남자는 말 안하고 모든 일을 알아서 하는 것으로 교육을 받아왔던 나는 그렇게 말하는 아빠가 오히려 낯설어 보였다.
아니라고 말하려는 순간 머릿속에 녀석이 떠올랐다.
성적도 중간에서도 한참 아래로 내려가서 대학은커녕 취업도 힘들 듯 보였다.
겉모습만 대충 훑어봐도 견적이 나오는 녀석이었다. 처음부터 대학에 진학할 만한 최소한의 능력이 있는 집안도 아니라는 것 쯤은 알 수 있었다.
취업담당 선생님에게 지나가는 말로 한번 슬며시 물었다가 듣게 된 말이 기억이 났다.
“우진이 같은 녀석은 성적도 좋은 편이 아니고, 그렇다고 다른 재주가 있는 게 아니니 몸을 쓰는 공단 밖에 갈 데가 없는데, 한 주먹 밖에 안되는 몸에 체력도 없고 깡도 없고, 잘 버틸수 있을지나 모르겠다.”
나의 대답을 기다리면서 여전히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아빠는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뭐든지 들어 주실거예요?” 슬며시 묻는 나에게 아빠가 고개를 연신 끄덕이셨다.
“그럼....우리학교에 이번에 저랑 같이 졸업하는 애 하나만 거래처에 취직시켜 주세요. 취업담당 선생님 통해서요.”
뜻밖의 나의 말에 아빠가 고개를 돌려 엄마를 빤히 보셨다. 엄마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냥, 내가 빚을 진 것이 좀 있어서 그래요. 그냥 그렇게 해주세요. 아빠. 그 녀석 모르게요.”
며칠 후, 담당 선생님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그 녀석 취업 잘 되었다고 했다. 아빠께도 감사 인사겸 전화 한번 주신다고 하셨다.
고등학교의 졸업과 함께 그렇게 녀석과의 악연은 끝인 줄 알았다.
더 이상 그 녀석을 볼 일이 없을 줄 알았다.
의사가 되는 힘든 과정이 끝나고 적당하게 풀어져서 종로로 나왔다.
돈 냄새는 또 짐승같이 잘 맡는 한철이 놈이 종로에서 뜨고 있다는 핫플레이스에 건물 몇 채를 사 두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녀석이 돌아다니는 동선은 대충 알고 있었다. 그 길만 대충 피하면 되는 것이고 혹시 마주친다 하더라도 여친을 데리고 오기 전 답사를 나왔다고 하면 되는 거였다.
조심스럽게 한 밴드 모임에 가입했다.
다행히 내가 아는 놈은 한명도 없었다. 이제 모든 것을 다 뒤로 흘려 버리고 삶을 즐기고 싶어졌다. 그래서 편안해진 마음으로 종로에 한 걸음을 내딛었다.
어느 날, 밴드의 오프라인 모임에서 화장실로 가다가 예상치 못하게 우진이 녀석과 마주쳤다.
나를 본 녀석의 얼굴이 한순간 차가운 바윗돌처럼 변했다. 그리고 내 눈앞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나는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서 있는 녀석을 무시하고 지나가 버렸다.
화장실 안에서 있는 내내 녀석의 표정이 시리도록 내 가슴에 새겨졌다.
얼마나 그 녀석의 영혼속에 괴물같은 나의 모습이 새겨져 있을까. 그것을, 그 죄를 나는 또한 어떻게 갚을 수 있을까.
밖으로 나가려고 해도 발바닥이 마치 바닥에 붙어있는 듯 떨어지지가 않았다.
나를 보고 공포를 느끼는 녀석을 대할 자신이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넋을 놓고 있다가 억지로 발을 옮겼다. 다행하게도 그 사이에 녀석은 사라져 버렸다.
뜻밖에 한철이 녀석이 나에게 전화를 했다.
‘야, 너 알아?“
”.....“
”고딩때 우진이라고 기억하지? 그 게이새끼. 니 꼬붕. 그 새끼 종로 기어다닌다는데?“
”어떻게 알아?“
”이제 내가 또 종로를 꽉 잡고 있지않냐. 여기가 다 돈밭이거든. 뿌려놓은거 이제 다 거두기만 하면 되는 동넨데. 이제 나 여기서 거의 상주하다 시피한다.“
녀석의 말에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젠 더 이상 네 꼬붕도 아니고, 내 눈에 띄면 전에 못했던거 다 해볼라고....“ 녀석이 킬킬거리면서 웃었다.
녀석이 몰리에르로 들어가는 것이 내 눈에 띄었다.
그럼 그렇지 녀석은 멀리가지 못한다.
위험이 도사리는 지뢰밭만 골라서 다니는 멍청한 자식.
일행과 잠시 대화를 하다가 헤어지고 녀석을 찾아 들어갔다.
이제와서 따뜻한 충고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었다. 먹히지도 않을 것이다. 그저 슬쩍 내 영역이라는 것만 눈치를 줘도 겁많은 녀석이 알아서 접근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한철이 녀석은 종로에서 우진이를 찾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이 녀석의 잔인성을 단념시키지는 못했다.
”여기 돌아다니는 것들 중에 게이들 바글거려.“
술취한 녀석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안중에도 없이 떠들어댔다.
”한두놈 눈에 걸리는 것 잡아서 무슨 짓을 해도 새끼들은 꼼짝도 못해. 죽었다고 나와도 암말도 안할 걸? 사람들이야 게이놈 한둘 죽으나 마나 신경도 안 쓸테고 게이새끼들도 지들이 알아서 쉬쉬할걸? 조용히 덮고 뉴스에 안나오는게 다행이라고...“
”.....“
”그리고 우리 삼촌이 미국에서 좋은 거 가져 왔어. 아주 귀한거야. 너 한번 그거 하면 그 다음부터 나한테 무릎꿇는다. 더 달라고.... 고급 룸 하나 잡고 몸 잘빠진 여자애들 데려다가 질펀하게 놀아야지. 티비 보다가 괜찮은 년 있으면 말해. 내가 끌어다가 니 옆에 앉혀줄게.“
놈은 태어나면서부터 그런 짐승이었다. 그런 그놈이 앞으로 살아가면서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짓밟을 것인가.
의사에게는 질병의 치료도 중요하지만 질병의 발생을 막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그 최악의 병원균은 내 눈앞에서 그렇게 자유롭게 부와 권력을 손에쥐고 세상에 온갖 독소를 뿌려대고 있다.
며칠을 갈등을 했다.
내가 살아 온 삶과 내가 살아 가야만 할 길에 대해서 계속해서 물음표가 떠올랐다.
나의 존재의 의미와 내가 세상에 보내진 이유를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왜 내가 그렇게 어렸을 때부터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는지 그 이유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마음속에서 결론에 다다랐다.
고통과 불안이 사라지고 마음속에 평화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통장을 털고 부모님께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신형 고급차를 샀다.
한철이와 성규에게 시승식을 하자고 제안을 했다. 바닷가 좋은 곳에 고급 호텔을 잡아놓고 미녀들도 준비해놓았다고 했다.
그리고 나의 차를 타고 가면서 새로 산 차의 성능을 평가해 달라고 했다. 두 녀석 다 흔쾌히 그러자고 대답했다.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당장 팔아버리고 자신들이 추천하는 것을 사라고 했다.
놈들과 출발하기 전에 혼자 차를 몰고 나왔다.
사전답사를 했다.
차에 탄 어느 누구도 살아남아서는 안됐다.
고속도로 여러곳을 눈여겨 보았다.
하지만 그곳이 최고였다.
깎아지른 15미터 절벽 위의 고속도로의 한쪽에 있는 갓길에 차를 세워두고 내려다본 풍경은 장관이었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신에게 기도했다. 끝까지 나의 존재의 임무를 완수할 담대한 용기를 달라고......
”모든 게 다 나와 우리남편의 죄가 많아서 그래.“
어느 새 내 곁으로 다가온 그녀가 나를 보고는 쓸쓸한 미소를 띠었다.
우리 재호가 고등학교 다닐 때 남편의 사업에 대한 욕심이 너무 커서 기존 사업 이외에도 또 다른 것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지.
하지만 납품할 만한 마땅한 큰 기업이 없었어.
그 얘길 한철어머님이 어떻게 듣고는 우리집을 찾아왔었어. 기존하청업체하고 거래를 끊고 남편회사에서 생산하는 걸 납품 받아주겠다고.... ”
“.....”
“그럼 기존의 납품업체는 어떻게 되는거냐고 물었더니, 그건 아무 걱정 하지 말라고, 자기가 다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한철이보다 두 살 더 많은 딸이 있는데 요새는 연상연하커플도 대세인데 나중에 재호 베필로 어떻냐고 웃으면서 말하면서...”
“.....”
“나중에야 알게 되었어. 그 기존의 납품업체 사장이 사고를 당했다는 것을.....”
“.....”
“그렇게 남의 눈에 피눈물 나게 하면서 살았으니....그 모든 죄를 재호가 모두 짊어지고...”
그녀가 손수건으로 다시 눈에 고이는 눈물을 훔쳐냈다.
“우리 재호의 일기를 읽고 하도 기가 막혀서 나도 사람을 사서 좀 알아 보았어. 이 한철이라는 놈이 정말 이런 잔악한 놈이었는지... 뒷조사를 시켰지..”
그녀가 손에 들려 있던 손수건을 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늦었지만 경찰서를 찾아갔어. 뻔히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되었는데 다른 사람이 죄를 뒤집어 쓰면 안되지.”
“......”
“사고는 우리 아들의 운전미숙 때문이라고 얘기했어.”
“.....”
’그러니까 잘 나가는 검사인 한철이 아버지가 나에게 화를 내더라고. 날더러 그냥 가만히 있으라고.... 자신이 다 알아서 한다고... 놈이 한 짓이라고.... 놈을 용서할 수 없다고... 자기가 알아서 없애버려야겠다고...“
”...“
”그래서 애들이 마약을 했다고 했어. ‘검사님 처남이 외국에서 마약을 들여왔다’고, 그거 알고 계셨냐고, 그거 애들이 받아서 한 거라고...그거 증거자료 내가 다 가지고 있다고... 외부로 알려지면 아무리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검사님이지만 현재 자리 유지하기 힘들지 않겠냐고, 또 검사님의 가문의 수치가 될거라고..... 그런데 나는 그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고... 그러니까 이쯤해서 조용히 애들 그냥 보내주자고...“
말을 멈추고 그녀가 나에게서 고개를 돌려 떡갈나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감정을 삭이는 그녀의 낮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옆에 서 있는 떡갈나무의 그림자 위치가 많이 바뀌었다.
”저녁이 다 되어가는데도 이리 덥네.“
그녀가 나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시간이 이리 지났으니....“
그녀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름 휴가는 언제예요?“ 나를 내려다 보면서 뜬금없이 그녀가 물었다.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싱가포르에 센토사란 섬이 있거든.“
그녀가 가방을 집어들면서 나를 다시 돌아보았다.
”거기에 작은 칵테일 바가 하나 있는데...“
그녀가 말을 멈추고 희미하게 웃었다.
”이번 일이 있고 나서 알게 된 녀석이 하나 있어. 꼭 우리 아들 재호 같은 애야.“
그녀가 슬며시 이마에 배어나는 땀을 손에 쥔 손수건으로 눌러 닦았다.
”싫다는 걸 내가 내 멋대로 강제로 우겨서 양아들로 삼아 버렸거든. 그 녀석이 거기에 있어.“
”.....“
”그 녀석이 가장 잘 만드는 칵테일이 있는데 아주 일품이야. 혹시 가면 꼭 마셔봐요.“
”....“
”이름이 뭐랬더라? 뭐... 무슨 악인을 죽인다던가?.... 악한의 처형인가? 뭐 그런 비슷한 이름이었는데...“
그녀의 그 말에 가슴이 막혀왔다. 숨을 억지로 내쉬면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이제 나이도 드는데 짝 좀 찾으라고 했더니 인연이 되면 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을거라나 뭐라나....“
마치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그녀가 중얼거리듯 말끝을 흐리고 나를 보고 한번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손을 한번 들어보이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나에게 등을 보이고 언덕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그녀의 모습이 나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다시 주변에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와 풀향기가 요동을 치며 두근거리는 나의 가슴속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끝-
컴퓨터 받침대 위에 걸터앉아 웃고 있는 행운의 인형의 한쪽 팔에 걸려있는 그의 반지를 볼 때면 가끔씩 그가 생각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나의 삶도 다시 느릿한 강줄기처럼 지루하고 느긋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나의 가슴속 저 아래에 앙금처럼 남아있는 재호에 대한 미움은 내 자신도 놀랄 정도로 사라지지 않고 그렇게 엉겨붙어 가끔씩 나를 괴롭혔다.
‘녀석만 아니었다면’, ‘녀석의 존재만 없었다면 나는 지금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한 학창시절의 추억을 가지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했다.
녀석만 사라지면 다 될 줄 알았다.
속이 시원해 질 줄 알았다.
하지만 인생에서 가장 빛나야 할 십대 후반의 한창때에 녀석 때문에 고통스러웠던 시간들은 내 머릿속에서 그렇게 지워지지 않고 남아 가끔씩 나를 괴롭혔다.
아무래도 이혼을 당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선일이는 나와의 통화중에 슬며시 털어놓았다.
가진 것이라고는 부채와 무능함 밖에 없는데다가 밤에 그 일도 제대로 못하는 남편은 필요없다고 한다면서 녀석은 껄껄거리고 웃었다.
“잘해주지 그랬어.”
나의 말에 녀석은 다시 씁쓸하게 웃었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아랫도리가 말을 안들어. 막상 하려고 하면 그냥 죽어버려.”
“뭐냐. 그 비아인지 뭔지하는 거라도 좀 먹어보던가...”
“그건 그렇고....” 녀석이 나의 말을 끊었다. 갑자기 차분해진 목소리였다.
“재호 사고로 죽은 지 벌써 4년이 다 되간다.”
“........”
“이제 옛날 상처 다 사라졌냐?”
그의 말에 마치 그가 내 앞에서 나를 보고 있는 것 마냥 고개를 저었다.
“나도 잊어버리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된다. 가끔은 자려고 누우면 떠 올라서 나를 괴롭혀.”
“그거 그대로 방치하면 늙어서도 상처 남는다는데....”
녀석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혀를 찼다.
“그럼 재호한테 가서 욕 실컷해주고 와. 속에 담아있던 것 다 쏟아내고 나면 훨씬 나아질걸. 아마.”
“.....”
“재호 화장하고 걔네 선산에 묻혔어. 걔네 어머님이 납골당에 두는 것 싫다고 가족 무덤에 같이 묻고 싶다고 하셔서....”
“.....”
“어쩌다 보니 나도 한번 가 본적 있다.”
녀석의 씁쓸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위치 알려줄테니 한번 갔다와. 가서 하고 싶은 욕이란 욕 다 뱉어주고 와.”
역시 돈이란 것은 살아서 뿐만이 아니고 죽어서도 그 값을 발휘한다 싶었다. 하지만 한줌의 재로 변한 후 근사한 곳에서 묻혀있어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
며칠을 망설였다.
그의 말이 맞다 싶다가고 무엇하러 그 먼 충청도의 산속을 찾아갈까 싶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따금씩 망령처럼 찾아오는 과거로부터 자유롭고 싶었다. 이미 죽어서 재가 된 녀석이었다, 모두 씻어내고 마지막으로 그를 용서하고 탈탈 털어내고 싶었다.
회사에 월차를 냈다. 4년전 사고가 난 그 날이었다.
4년전 오늘 그 녀석이 세상을 떠난 것처럼, 이제 오늘 녀석을 나의 기억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리는 날로 만들고 싶었다.
충청도 외진 자락에 위치한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할아버지에게 물어 위치를 확인한 다음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더운 날씨에 숨이 차고 이마에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래 너는 죽어서도 나를 이렇게 괴롭히는구나.’ 손바닥으로 땀을 닦으며 녀석에게 화를 냈다.
산등성이에 오르자 눈 앞에 차가 다닐만한 도로가 나타났다.
'그럼 그렇지' 하고 헛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차도 없는 내가, 그렇다고 택시를 잡는다고 해도 인적이 없는 여기까지 올라와 줄 것 같지도 않았으니 여튼 나는 처음부터 여기까지 어차피 걸어 올라올 팔자였다.
작은 언덕너머에 드디어 녀석의 무덤이 나왔다.
녀석의 바로 옆에 서 있는 커다란 떡갈나무 그늘에 주저앉아 땀을 식혔다.
손수건으로 이마와 목뒤의 땀을 씻어내며 고개를 돌렸다.
산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푸르른 풍경이 일품이었다.
“그래도 너는 죽어서도 이렇게 좋은데서 지내는 구나. 팔자좋은 자식.”
그렇게 녀석에서 불평을 하고는 녀석의 무덤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주변에서 자라는 향긋한 풀잎내음이 코를 통해서 폐 속을 가득 채우고 풀벌레들의 소리가 귀를 찌르는 듯 했다.
준비해 온 소주병을 따고 잔에 따르고는 녀석의 앞에 놓았다.
“이렇게 네가 여기에 누워있구나. 그렇게 나를 괴롭히더니.....”
녀석에게 어떻게,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너무 많은 상념이 일시에 나의 머릿속을 채워버렸다.
“그래, 내가 오늘 너를 찾아온 것은....”
막 입을 열고 녀석에게 저주를 퍼부으려는 바로 그때, 등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놀란 나는 몸을 일으키며 돌아보았다.
손가방을 한쪽 팔에 끼고 다른 손에는 손수건을 쥔 채로 한 중년여성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나만큼 놀란 표정으로 나에게 다가와 나를 빤히 보고는 곧 화사한 웃음을 지으셨다.
“재호 친구가 찾아와 주었네.”
마치 감격이라도 하셨다는 듯 두 눈에 눈물을 글썽이시면서 나의 손을 덥썩 잡으셨다.
그녀의 그런 얼굴과 예전에 서점에서 나의 참고서를 대신 계산을 해주던 재호의 어머니의 모습이 겹쳐졌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얼떨결에 고개를 숙이고 그렇게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가방을 옆에 내려놓고 가지런히 앉은 그녀 옆에 나도 조용히 앉았다.
고개를 돌려 무덤을 한번 돌아본 후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내가 일찍 알았더라면 재호가 그렇게 가진 않았을텐데.. 이것은 다 내 탓이야.”
그녀가 마치 혼잣말 하듯 입을 열었다.
“녀석에게 무슨일이 있었는지 진작에 알았더라면....”
그녀가 손수건을 집어들고 눈 주위의 눈물을 훔쳤다.
“무슨 말씀이신지...”
그녀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 그녀의 눈치를 보면서 슬며시 입을 열었다.
“재호하고 많이 친했지?”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고 물었다. 눈물 자국이 번진 눈으로 그녀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
“그랬으니까 여기까지 와 줬겠지.”
그녀가 나를 빤히 보면서 표정을 밝게 하고 웃어보였다.
“녀석이 이렇게 좋은 친구는 엄마에게 인사도 안시켜주고....”
그녀가 다시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부모 욕심 때문에 우리 애가 죽은거야. 다 내 탓이지...”
그녀가 슬며시 손을 뻗어 나의 손을 잡았다. 어쩔줄 몰라 나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가슴이 꽉 막히고 멍이 들어서 녀석의 얘기를 알게 된 후로는 죽지 못해 살아왔어. 딴이 이런말을 할 사람도 주변에 없고....”
“.......”
“그냥 예전 친구 엄마가 지나가는 신세한탄하더라 생각하고 한번 듣고 잊어줘요. 응?”
그녀의 말에 그런 그녀를 보고는 무심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재호가 고등학교에 입학하고는 가끔씩 이상한 말을 했었어. 난데없이 전학을 시켜달라고...”
“......”
“입이 무거운 녀석이라 왜 그러냐고 물어도 별 대답도 안하고 그냥 먼 곳에 있는 학교로 전학만 보내주면 안되겠냐고....”
“.....”
“어느 날 애아빠가 물었어. 학교에서 무슨일 있냐고. 그랬더니 녀석이 그때서야 그러더라고 한철이가 보통애가 아니라고 일진이고 닥치는 대로 아이들을 괴롭힌다고....”
“총각도 한철이란 놈 알고 있어요?”
그녀가 나를 빤히 보면서 나직히 물었다. 나는 얼굴이 붉어진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대충 알고 있겠네.”
“......”
“애 아빠가 운영하는 회사의 거래처 중 한곳이 그 한철이 엄마네 회사였어. 나는 몰랐는데 남편이 입학식때 어떤 부부를 보고 인사를 하더라고. 그 녀석 엄마가 자기 아들도 이 학교 입학했다고 잘좀 부탁한다고 남편하고 나에게 깍듯이 인사를 하고.... 재호가 공부 잘한다는 것 알고 있다고 말하고는 옆자리 앉게 힘도 쓰고 그리고 그 후에 남편 사업에 도움도 많이 주었지.”
“......”
“여튼, 그래서 남편이 재호한테 물었지. ‘걔가 너 괴롭히냐’고... 그랬더니 그건 아니라고... 남편은 사업 욕심에 ‘그러면 신경쓰지 말고 계속 다니라’고, ‘지금 아빠가 그 집 덕으로 사업이 번창하고 있는 거’라고...‘또 그것이 나중에 다 네것이 되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
“무뚝뚝하고 엄한 남편에게는 그 다음에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에게는 가끔 그 한철이라는 애가 너무 싫다고 조용한 시골 동네로 전학갔으면 좋겠다고 그러는데 나는 아무 대꾸도 못해주고 그냥 남편 눈치만 봤거든....”
“....”
“2학년 올라가고 5월인가 6월인가 그 즈음에 혼자 곰곰이 생각하다가 안되겠기에 그렇게 전학가고 싶으면 아빠에게 진지하게 엄마가 말해보겠다고 했는데, 또 그때는 녀석이 아니라고 그러더라고.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자기가 지금 빠져나가면 안되는 상황이라고.. 그런 이상한 말을 하면서...”
“.....”
“무슨 말인지 이해는 못했지만 그렇게 그냥 괜찮은 줄 알았어. 아니 괜찮은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을거야. 나도 남편에게 무슨 말 꺼내기가 불편하고 힘들었거든.”
“.....”
“녀석이 사고로 가버리고 난 뒤에도 녀석의 방을 건드리지 않고 가만히 놔두었어. 기다리면 언젠가 살아서 돌아올거라고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부정만 하다가... 그렇게 괴로워만 하다가 남편 성화에 억지로 녀석의 물건들을 정리를 하다가 일기장을 발견했어.”
그녀가 말을 멈추고 가방을 열고는 손을 집어 넣고 그 안에서 작은 노트 하나를 꺼냈다.
“가만히 가지고만 있다가 어느 날 녀석이 너무 그립길레 첫 페이지를 펴고 읽어보기 시작했어. 그리고는 그때야 깨달았어. 우리 아들을 이렇게 죽게한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내 자신이었다는 것을....”
그녀가 노트를 땅에 놓고 손수건을 눈에 가져다 대고는 슬며시 눌렀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 지 한마디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나는 그냥 멍하게 그녀와 땅에 놓여져 있는 노트를 번갈아 보면서 그녀가 진정하기를 기다렸다.
“해마다 재호가 떠난 날이면 이렇게 와서 녀석에게 이 노트를 보여줘. 왜 진작에 말하지 않았냐고. 그렇게 녀석에게 말하면서..... 녀석한테 그렇게 부족했던 엄마를 용서해 달라고. 그렇게 힘들게 살았던 녀석을 알아주지 못하고 녀석을 그렇게 보내고 나서야.... 부족한 엄마가 이제야 우리 아들을 알게 되었다고...”
그녀가 낮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그런 서글픈 한숨 소리에 귀를 따갑게 울리던 풀벌레들은 어딘가로 모두 숨어버리고 언덕 아래에서 불어오던 바람도 멎었다.
“저....”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하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마도 녀석이 쓴 일기에 나도 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이 어떤 마음으로 나를 그렇게 괴롭혔는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죽기 전에 한번이라도 나에 대해서 미안한 감정을 실 한 올 만큼이라도 느꼈었는지 궁금해졌다. 직접 나에게 말을 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혹시라도 녀석이 자신의 일기에 나에 대해 ‘미안하다’ 라는 한마디라도 표현해 주었기를 바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만약에 그랬더라면 기쁜마음으로 용서를 해주고 훌훌 털어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그렇게 입을 열었다.
“괜찮으시면 제가 한번 읽어봐도....”
잠시 망설이는 듯 보이던 그녀가 희미한 미소를 짓고는 노트를 집어서 나에게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나를 보고 다시한번 희미한 웃음을 지어보이고는 그녀는 몸을 일으킨 후, 손을 뻗어 무덤가에 있는 잡초를 뽑기 시작했다.
“어머니 제가 할게요.”
몸을 일으키면서 그렇게 말하는 나에게 그녀는 손사래를 쳤다.
“아니야. 내가 해주고 싶어. 우리 아들하고 조근조근 대화도 하면서....”
그렇게 말하고는 그녀는 손바닥으로 잔디가 터진 부분을 꾹꾹 눌렀다.
그런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려 나의 손에 들려있는 노트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첫장을 넘겨 보았다.
‘지옥같은 삶은 성급하고 아주 하찮은 순간적인 선택에 의해서 결정된다.’
녀석의 일기장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때 내가 그냥 고개를 돌리고 못본 척 했더라면, 내가 감당하기 힘든 일에 뛰어들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녀석의 존재는 처음에는 한철이나 나의 시야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2학년이 되고 난 후 한참을 밖으로 나돌던 한철이가 어느 날 1학년 때 습관적으로 괴롭히던 선일이를 밖으로 끌고 나갔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한철이가 썩은 웃음을 지으면서 나를 보았다.
“야, 이제 저 자식이 내 손에서 벗어나려고 용쓴다. 제 베프까지 파는데?”
나는 그게 무슨 말인가 했다.
“그 놈이 그러는데 저기 앞에 앉아있는 저 우진이란 놈이 게이란다.”
“어떻게 알았대?‘
녀석의 말에 깜짝 놀라서 물었다.
”피시방에서 남자들이 홀딱 벗고 있는 것을 보다가 자기한테 딱 걸렸대.“
”....“
”간만에 기분이 꿀꿀해져서 기분전환겸 손 좀 봐줄랬더니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내불던걸? 역시 주먹 앞에 우정같은 건 개나 줘버리는 거야.“
녀석이 그렇게 나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을 하고는 킬킬거렸다.
“그래?”
하지만 어쩐 일인지 녀석은 그 이후에도 우진이에게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녀석에게는 학교 안팎으로 사고를 칠 무궁무진한 것이 널려있었으니 그럴만도 했다.
하지만 그 우진이란 녀석은 그 이후로 나의 시야 안에서 머물렀다.
내 마음에 들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그 감정은 마치 먼 타국에서 오랫동안 외로운 삶을 살다가 어느 순간 동포를 만난다는 그런 느낌 비슷한 것일 듯 했다.
그렇게 조용했던 시간이 어느 날 우진이 녀석이 장난을 치다가 한철이의 발을 차면서 일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수학수업이 시작되면서 한철이 녀석은 처음에는 자신의 발을 차고도 제대로 사과를 하지 않은 우진이를 노려보면서 어이없어 했다.
그리고 점차 녀석의 잔인한 본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저 새끼, 게이라는데도 내가 별 관심 안두고 내버려뒀더니 손 봐달라고 애걸을 하네.”
그런 녀석의 반응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수업 끝나고 어디 으슥한데로 끌고가서 게이새끼들은 어떻게 그짓을 하나 시범이나 보이라고 해야겠다.”
우진이를 노려보던 녀석이 나를 흘끗 보면서 비열한 웃음을 지었다.
“저 망할새끼 엎어뜨려놓고 바나나를 집어넣고 쑤*볼까? 아니면 마포자루를 쑤* 넣어봐? 어디까지 들어가는지 갑자기 궁금해지는데?”
그런 녀석의 말에 갑자기 숨이 막혀왔다.
수황이나 윤식이 같은 허접한 양아치들한테도 말 한마디 못하는 녀석이 한철이의 손아귀에서 어떻게 될지는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녀석이 한철이를 어떻게 버티느냐하는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얼마나 버티느냐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달은 커녕 일주일안에 녀석은 이 세상을 하직할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온갖 아첨에 간쓸개 다 내어줄 것같이 구는 놈도 녀석은 어느 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3층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리라고 협박했던 놈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마치 무슨 무용담이나 되는 것처럼 자랑스럽게 떠벌리는 그런 잔인한 놈이었다.
우진이가 그 녀석의 손아귀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급하게 녀석을 한철이의 손아귀에서 구해낼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수재가문에서 미운오리새끼였던 그 녀석은 특히 수학에 제일 약했다. 수학 성적 때문에 검사인 자기 아버지에게 뺨까지 맞았다고 분해하던 녀석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아무리 머리를 짜 보아도 그것밖에는 그럴 듯한 다른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시간은 재깍재깍 흘러가고 수업시간의 종료도 이제 기껏해야 5분 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서 내 자신이 악역을 자처했다.
나 답지 않게 녀석에게 어깨를 으쓱해 보이면서 녀석에게 가능한 쿨한 모습으로 말을 걸었다.
“이번 중간고사 수학답안지 재주껏 보여줄테니 저 녀석 나에게 넘겨.”
나의 뜻밖의 말에 녀석이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무엇인가 미심쩍은 눈치를 보였다.
“나도 빵셔틀 있을 때 됐잖아. 하교때 집에까지 무거운 가방 메고 가는 것도 이제 졸업을 해야지.”
그렇게 나는 일진이 되었다.
동물도 아니고 나와 똑같은 인격체의 한 인간을 그렇게 괴롭힌다는 것은 웬만한 짐승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녀석에게 손을 댄 첫 날, 침대에 누워 도대체 내가 녀석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내가 어떤 짐승이 되어있는지 떠오르자 가슴이 저려왔다. 숨을 쉬기도 힘들었다.
도대체 왜 내가 그런 비인간적인 일을 시작해야만 했을까. 그런 선택을 한 내 자신에게 분노가 치밀어 올라 견딜수가 없었다. 이를 악물고 침대의 끄트머리를 움켜쥐었다. 참을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무리 그래봤자 아무 소용없는 일이었다. 아침이면 다시 학교를 가고 나는 또 녀석을 한철이의 손아귀에서 구한다는 명목으로 폭행를 저지르는 일을 이제 계속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눈치없고 운도 없는 녀석은 내가 일부러 녀석을 피하는 날에도 학교 밖에서 한철이 놈의 레이더망에 걸려들었다.
녀석과 집에 돌아오는 길에 어두운 뒤편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났다.
“우진이 새끼 너 피해서 숨었나보다.”
뒤를 흘끗 돌아본 한철이 녀석이 나를 보고 실실거렸다. 짐승같은 녀석은 눈치도 빠르다. 짐승만이 가질 수 있는 본능인 듯 싶다.
“끌어내서 한번 신나게 갖고 놀아볼까?”
“야, 내꺼잖아. 내가 손봐줘야지.”
미련하고 눈치도 더럽게 없는 놈. 지지리 운도 복도 없는 놈. 그렇게 속으로 우진이를 탓하면서 몸을 돌려 무거운 발을 옮기기 시작했을 때, 근처 어딘가에서 고양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나는 얼굴을 한철이에게 돌렸다.
“우진이는 내일 학교에서 손 봐주고 지금은 내가 숨겨놓은 다른 실력을 보여주지.”
그리고 가로등이 비추는 밝은 곳으로 나왔다.
나의 모습을 확실히 보여준다면 우진이 녀석은 놀래서 도망을 가겠지 싶었다. 그 녀석에게 그럴 시간을 벌어주고 싶었다.
쪼그리고 담 위에 앉아있는 길고양이를 정확히 맞출 필요는 없었지만 진짜인 듯 보여야 했다. 진지하게 겨냥하는 폼으로 고양이에게 돌을 던졌다.
하지만 그 녀석도 운도 없고 미련한 우진이 같은 놈이었다. 나의 예상외로 녀석은 나의 허접한 돌팔매질에 정통으로 맞고 말았다.
속에서 울컥하는 뜨거운 덩어리 하나가 가슴에서 목으로 튀어올라왔지만 나는 표정을 가다듬고 한철이 녀석을 돌아보았다.
“봤지? 내가 이 정도야.”
그 놈과 헤어지고 부지런히 달려서 돌아와 보니 고양이는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었다.
녀석을 품에 안고 집으로 뛰었다. 이 한밤중에 문을 연 동물병원도 없을 듯 싶었다.
무슨일이냐는 엄마의 말을 무시하고 고양이의 치료를 해주려고 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그 녀석 옆에서 자리를 지키고 아침이 되기를 기다렸지만 해가 뜨기 전에 녀석은 세상을 떠나버렸다.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이 이렇게 저주스러울 수가 없었다.
엄마와 외출을 했다가 서점에 들렀다.
과외 선생님이 사라는 책을 고르고 엄마와 줄을 섰다.
앞쪽에 서 있는 한 녀석의 뒷모습이 낮이 익었다. 녀석이었다.
이미 진도가 반이나 나가버린 참고서를 들고 있는 것을 보니 또 별볼일 없는 양아치에게 책을 뺏긴 것이 뻔한 일이었다.
녀석이 호주머니를 뒤졌다. 모자란 놈에게 항상 일어나는 뻔한 일이다 어디에다 또 돈을 잃어버렸군. 그런 녀석을 바라보다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엄마에게 같은 학교 학생인데 돈이 없나보다하고 힌트를 주었다.
정 많은 엄마가 그냥 지나칠리 없었다. 그리고 내 예상은 다시한번 적중했다.
믿을 수 없는 녀석의 일기의 내용에 노트를 들고 있던 나의 손이 떨려왔다.
그런 나의 눈에 고등학교때 서점에서 나의 시선을 피해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던 재호의 모습이 비쳐졌다.
내가 알고 있던 재호는 도대체 누구이고 지금 이 일기 속의 재호는 또 누구란 말인가....
머리를 들고 나에게 등을 돌리고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고 있는 그녀에게 멍한 시선을 한번 준 다음 다시 재호의 노트로 눈을 돌렸다.
“니꺼냐?”
수황이 녀석의 책상위에 놓여있는 우진이의 참고서를 발견하고 녀석에게 시비를 걸었다.
“니꺼냐구!”
녀석은 내 눈치를 보더니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수업끝나고 학교 옥상으로 와라.”
녀석에게 나야 큰 존재감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 뒤에 버티고 있는 한철이는 녀석에겐 공포 그 자체였을 것이다.
주먹으로 녀석의 뺨을 갈겼다.
갑자기 나의 마음속에 눌려있던 알지못한 분노가 끓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내 자신이 두려워졌다.
“앞으로는 내 장난감 물건에 손 대지 마라. 다 내꺼니까.”
내 앞에 무릎꿇고 앉은 녀석의 가슴을 운동화 발로 적당히 걷어찼다.
그래도 신은 한가지는 나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고3이 되면서 한철이와 나는 7반 그리고 우진이 녀석은 맨 끝에 있는 1반이 되었다.
이제 좀 살 것 같이 느껴졌다.
항상 소화불량으로 고생하던 내가 이제는 점심 시간에 나의 식도를 통해 들어가는 밥알이 부드러워진 것이 느껴졌다.
이제는 가끔씩 녀석의 반으로 가서 둘러보며 한철이에게는 녀석은 나의 영역안의 내 물건이며 그 반의 주변 양아치들에게는 내 물건의 물건에 손대지 말라는 영역표시를 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녀석은 그것으로 이제 안전할 것이라는 것이 확실해졌다.
갑작스러운 재호의 어머니의 안간힘을 쓰는 소리에 고개를 들고 시선을 그녀에게 돌렸다.
“이게 왜 이리 질겨.”
혼잣말을 하면서 그녀는 무덤의 뒤편에 있는 풀 한움큼과 씨름을 하고 있었다.
“제가 할께요. 어머니.”
나의 말에 그녀가 몸을 일으키고는 옆으로 한 발 물러섰다.
풀을 뽑는 내 뒤에서 그녀가 다시한번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바라지도 않는 잡초는 왜 그렇게 빨리 자라는 지 몰라.”
너무 커버린 잡초를 뽑아 버린 후, 나의 등을 떠미는 그녀에게 못이기는 척 슬며시 돌아와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땅에 내려 놓았던 노트를 다시 집어들었다.
그렇게 아빠가 바라던 의대에 합격했다.
“내 소원 들어주었으니 네가 바라는 게 있으면 뭐든지 말해봐라. 내가 다 들어 줄 테니까.”
그렇게 나를 보고 호탕하게 웃는 아빠를 보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부자간이 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아빠와 나는 보통의 가족의 부자사이와 같은 살가운 사이는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사소한 일도 서로 대화를 한 적이 없었고 또 듣고 싶어하지도 않으셨다. 그래서 남자는 말 안하고 모든 일을 알아서 하는 것으로 교육을 받아왔던 나는 그렇게 말하는 아빠가 오히려 낯설어 보였다.
아니라고 말하려는 순간 머릿속에 녀석이 떠올랐다.
성적도 중간에서도 한참 아래로 내려가서 대학은커녕 취업도 힘들 듯 보였다.
겉모습만 대충 훑어봐도 견적이 나오는 녀석이었다. 처음부터 대학에 진학할 만한 최소한의 능력이 있는 집안도 아니라는 것 쯤은 알 수 있었다.
취업담당 선생님에게 지나가는 말로 한번 슬며시 물었다가 듣게 된 말이 기억이 났다.
“우진이 같은 녀석은 성적도 좋은 편이 아니고, 그렇다고 다른 재주가 있는 게 아니니 몸을 쓰는 공단 밖에 갈 데가 없는데, 한 주먹 밖에 안되는 몸에 체력도 없고 깡도 없고, 잘 버틸수 있을지나 모르겠다.”
나의 대답을 기다리면서 여전히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아빠는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뭐든지 들어 주실거예요?” 슬며시 묻는 나에게 아빠가 고개를 연신 끄덕이셨다.
“그럼....우리학교에 이번에 저랑 같이 졸업하는 애 하나만 거래처에 취직시켜 주세요. 취업담당 선생님 통해서요.”
뜻밖의 나의 말에 아빠가 고개를 돌려 엄마를 빤히 보셨다. 엄마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냥, 내가 빚을 진 것이 좀 있어서 그래요. 그냥 그렇게 해주세요. 아빠. 그 녀석 모르게요.”
며칠 후, 담당 선생님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그 녀석 취업 잘 되었다고 했다. 아빠께도 감사 인사겸 전화 한번 주신다고 하셨다.
고등학교의 졸업과 함께 그렇게 녀석과의 악연은 끝인 줄 알았다.
더 이상 그 녀석을 볼 일이 없을 줄 알았다.
의사가 되는 힘든 과정이 끝나고 적당하게 풀어져서 종로로 나왔다.
돈 냄새는 또 짐승같이 잘 맡는 한철이 놈이 종로에서 뜨고 있다는 핫플레이스에 건물 몇 채를 사 두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녀석이 돌아다니는 동선은 대충 알고 있었다. 그 길만 대충 피하면 되는 것이고 혹시 마주친다 하더라도 여친을 데리고 오기 전 답사를 나왔다고 하면 되는 거였다.
조심스럽게 한 밴드 모임에 가입했다.
다행히 내가 아는 놈은 한명도 없었다. 이제 모든 것을 다 뒤로 흘려 버리고 삶을 즐기고 싶어졌다. 그래서 편안해진 마음으로 종로에 한 걸음을 내딛었다.
어느 날, 밴드의 오프라인 모임에서 화장실로 가다가 예상치 못하게 우진이 녀석과 마주쳤다.
나를 본 녀석의 얼굴이 한순간 차가운 바윗돌처럼 변했다. 그리고 내 눈앞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나는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서 있는 녀석을 무시하고 지나가 버렸다.
화장실 안에서 있는 내내 녀석의 표정이 시리도록 내 가슴에 새겨졌다.
얼마나 그 녀석의 영혼속에 괴물같은 나의 모습이 새겨져 있을까. 그것을, 그 죄를 나는 또한 어떻게 갚을 수 있을까.
밖으로 나가려고 해도 발바닥이 마치 바닥에 붙어있는 듯 떨어지지가 않았다.
나를 보고 공포를 느끼는 녀석을 대할 자신이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넋을 놓고 있다가 억지로 발을 옮겼다. 다행하게도 그 사이에 녀석은 사라져 버렸다.
뜻밖에 한철이 녀석이 나에게 전화를 했다.
‘야, 너 알아?“
”.....“
”고딩때 우진이라고 기억하지? 그 게이새끼. 니 꼬붕. 그 새끼 종로 기어다닌다는데?“
”어떻게 알아?“
”이제 내가 또 종로를 꽉 잡고 있지않냐. 여기가 다 돈밭이거든. 뿌려놓은거 이제 다 거두기만 하면 되는 동넨데. 이제 나 여기서 거의 상주하다 시피한다.“
녀석의 말에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젠 더 이상 네 꼬붕도 아니고, 내 눈에 띄면 전에 못했던거 다 해볼라고....“ 녀석이 킬킬거리면서 웃었다.
녀석이 몰리에르로 들어가는 것이 내 눈에 띄었다.
그럼 그렇지 녀석은 멀리가지 못한다.
위험이 도사리는 지뢰밭만 골라서 다니는 멍청한 자식.
일행과 잠시 대화를 하다가 헤어지고 녀석을 찾아 들어갔다.
이제와서 따뜻한 충고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었다. 먹히지도 않을 것이다. 그저 슬쩍 내 영역이라는 것만 눈치를 줘도 겁많은 녀석이 알아서 접근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한철이 녀석은 종로에서 우진이를 찾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이 녀석의 잔인성을 단념시키지는 못했다.
”여기 돌아다니는 것들 중에 게이들 바글거려.“
술취한 녀석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안중에도 없이 떠들어댔다.
”한두놈 눈에 걸리는 것 잡아서 무슨 짓을 해도 새끼들은 꼼짝도 못해. 죽었다고 나와도 암말도 안할 걸? 사람들이야 게이놈 한둘 죽으나 마나 신경도 안 쓸테고 게이새끼들도 지들이 알아서 쉬쉬할걸? 조용히 덮고 뉴스에 안나오는게 다행이라고...“
”.....“
”그리고 우리 삼촌이 미국에서 좋은 거 가져 왔어. 아주 귀한거야. 너 한번 그거 하면 그 다음부터 나한테 무릎꿇는다. 더 달라고.... 고급 룸 하나 잡고 몸 잘빠진 여자애들 데려다가 질펀하게 놀아야지. 티비 보다가 괜찮은 년 있으면 말해. 내가 끌어다가 니 옆에 앉혀줄게.“
놈은 태어나면서부터 그런 짐승이었다. 그런 그놈이 앞으로 살아가면서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짓밟을 것인가.
의사에게는 질병의 치료도 중요하지만 질병의 발생을 막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그 최악의 병원균은 내 눈앞에서 그렇게 자유롭게 부와 권력을 손에쥐고 세상에 온갖 독소를 뿌려대고 있다.
며칠을 갈등을 했다.
내가 살아 온 삶과 내가 살아 가야만 할 길에 대해서 계속해서 물음표가 떠올랐다.
나의 존재의 의미와 내가 세상에 보내진 이유를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왜 내가 그렇게 어렸을 때부터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는지 그 이유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마음속에서 결론에 다다랐다.
고통과 불안이 사라지고 마음속에 평화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통장을 털고 부모님께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신형 고급차를 샀다.
한철이와 성규에게 시승식을 하자고 제안을 했다. 바닷가 좋은 곳에 고급 호텔을 잡아놓고 미녀들도 준비해놓았다고 했다.
그리고 나의 차를 타고 가면서 새로 산 차의 성능을 평가해 달라고 했다. 두 녀석 다 흔쾌히 그러자고 대답했다.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당장 팔아버리고 자신들이 추천하는 것을 사라고 했다.
놈들과 출발하기 전에 혼자 차를 몰고 나왔다.
사전답사를 했다.
차에 탄 어느 누구도 살아남아서는 안됐다.
고속도로 여러곳을 눈여겨 보았다.
하지만 그곳이 최고였다.
깎아지른 15미터 절벽 위의 고속도로의 한쪽에 있는 갓길에 차를 세워두고 내려다본 풍경은 장관이었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신에게 기도했다. 끝까지 나의 존재의 임무를 완수할 담대한 용기를 달라고......
”모든 게 다 나와 우리남편의 죄가 많아서 그래.“
어느 새 내 곁으로 다가온 그녀가 나를 보고는 쓸쓸한 미소를 띠었다.
우리 재호가 고등학교 다닐 때 남편의 사업에 대한 욕심이 너무 커서 기존 사업 이외에도 또 다른 것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지.
하지만 납품할 만한 마땅한 큰 기업이 없었어.
그 얘길 한철어머님이 어떻게 듣고는 우리집을 찾아왔었어. 기존하청업체하고 거래를 끊고 남편회사에서 생산하는 걸 납품 받아주겠다고.... ”
“.....”
“그럼 기존의 납품업체는 어떻게 되는거냐고 물었더니, 그건 아무 걱정 하지 말라고, 자기가 다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한철이보다 두 살 더 많은 딸이 있는데 요새는 연상연하커플도 대세인데 나중에 재호 베필로 어떻냐고 웃으면서 말하면서...”
“.....”
“나중에야 알게 되었어. 그 기존의 납품업체 사장이 사고를 당했다는 것을.....”
“.....”
“그렇게 남의 눈에 피눈물 나게 하면서 살았으니....그 모든 죄를 재호가 모두 짊어지고...”
그녀가 손수건으로 다시 눈에 고이는 눈물을 훔쳐냈다.
“우리 재호의 일기를 읽고 하도 기가 막혀서 나도 사람을 사서 좀 알아 보았어. 이 한철이라는 놈이 정말 이런 잔악한 놈이었는지... 뒷조사를 시켰지..”
그녀가 손에 들려 있던 손수건을 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늦었지만 경찰서를 찾아갔어. 뻔히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되었는데 다른 사람이 죄를 뒤집어 쓰면 안되지.”
“......”
“사고는 우리 아들의 운전미숙 때문이라고 얘기했어.”
“.....”
’그러니까 잘 나가는 검사인 한철이 아버지가 나에게 화를 내더라고. 날더러 그냥 가만히 있으라고.... 자신이 다 알아서 한다고... 놈이 한 짓이라고.... 놈을 용서할 수 없다고... 자기가 알아서 없애버려야겠다고...“
”...“
”그래서 애들이 마약을 했다고 했어. ‘검사님 처남이 외국에서 마약을 들여왔다’고, 그거 알고 계셨냐고, 그거 애들이 받아서 한 거라고...그거 증거자료 내가 다 가지고 있다고... 외부로 알려지면 아무리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검사님이지만 현재 자리 유지하기 힘들지 않겠냐고, 또 검사님의 가문의 수치가 될거라고..... 그런데 나는 그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고... 그러니까 이쯤해서 조용히 애들 그냥 보내주자고...“
말을 멈추고 그녀가 나에게서 고개를 돌려 떡갈나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감정을 삭이는 그녀의 낮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옆에 서 있는 떡갈나무의 그림자 위치가 많이 바뀌었다.
”저녁이 다 되어가는데도 이리 덥네.“
그녀가 나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시간이 이리 지났으니....“
그녀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름 휴가는 언제예요?“ 나를 내려다 보면서 뜬금없이 그녀가 물었다.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싱가포르에 센토사란 섬이 있거든.“
그녀가 가방을 집어들면서 나를 다시 돌아보았다.
”거기에 작은 칵테일 바가 하나 있는데...“
그녀가 말을 멈추고 희미하게 웃었다.
”이번 일이 있고 나서 알게 된 녀석이 하나 있어. 꼭 우리 아들 재호 같은 애야.“
그녀가 슬며시 이마에 배어나는 땀을 손에 쥔 손수건으로 눌러 닦았다.
”싫다는 걸 내가 내 멋대로 강제로 우겨서 양아들로 삼아 버렸거든. 그 녀석이 거기에 있어.“
”.....“
”그 녀석이 가장 잘 만드는 칵테일이 있는데 아주 일품이야. 혹시 가면 꼭 마셔봐요.“
”....“
”이름이 뭐랬더라? 뭐... 무슨 악인을 죽인다던가?.... 악한의 처형인가? 뭐 그런 비슷한 이름이었는데...“
그녀의 그 말에 가슴이 막혀왔다. 숨을 억지로 내쉬면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이제 나이도 드는데 짝 좀 찾으라고 했더니 인연이 되면 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을거라나 뭐라나....“
마치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그녀가 중얼거리듯 말끝을 흐리고 나를 보고 한번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손을 한번 들어보이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나에게 등을 보이고 언덕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그녀의 모습이 나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다시 주변에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와 풀향기가 요동을 치며 두근거리는 나의 가슴속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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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숨이 탁 막힌다... 잘 봤어요. 근대 앞으로 우진이가 어떻게 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