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옷소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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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접근하는 사람에게, 특히 그가 자신의 삶의 터전인 회사의 사장의 꽤 친한 지인이기에 그런 그에게 단칼에 선을 긋듯이 거절한다는 것은 내성적이며 소심한 지환에게는 그렇게 쉽지 않았다.
보다 못한 내가 나설 수 밖에 없는 듯 했다.
하지만 ‘그다지 관심없어 하는 듯 하다’는 나의 말에도 장현이는 마치 더 알아가려면 시간이 필요할 뿐이라는 듯 여유로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마 녀석은 평생 상대방을 거절하는 것에만 익숙해진 탓일 듯 했다.
그래서 마치 자신이 거절을 당할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전혀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는 듯 시간이 지나면 녀석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는 듯 했다.
그렇게 그 녀석은 지환의 거절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랬던 녀석이 무슨 일인지 크리스마스 이브에 자신이 일방적으로 약속을 잡고 지환과 같이 씨지뷔에서 영화를 보기로 했던 약속을 갑자기 취소해 버렸다.
연말의 무르익은 분위기 속에서 종로에서 갑자기 지환은 아무 약속도 없이 혼자가 되어버렸다.
지하철로 길을 옮기던 녀석도 그런 분위기 속에서 싱숭생숭해진 것은 아마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 녀석은 다시 걸음을 옮겨 종로3가의 골목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앞을 흘끔거리면서 휴대폰을 꺼내 시간이 되는 녀석이 있는지 톡으로 확인을 해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녀석들에게 톡을 보내놓고 지환은 소주방의 자리를 미리 잡아놓고 기다리기로 했다. 연말이라 술집에 자리를 잡는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서 였다.
하지만 이미 가 볼만한 곳은 모두 만석이었고 친구 녀석들의 답문자를 알리는 톡 신호음도 울리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골목안의 으슥한 작은 소줏집을 찾아 들어가다가 어느 한 곳에서 어둑한 구석에 빈 자리가 하나 남아 있는 것이 그의 눈에 띄었다.
남에게 뺏길까 두려운 마음에 마치 먹잇감을 향해 수직하강하는 독수리 마냥 그는 그 곳으로 돌진했다.
하지만, 다행이라는 미소를 짓는 그의 눈에 한쪽 의자에 마치 숨겨놓은 듯 놓여있는 낡은 가방이 들어왔다.
‘그럼 그렇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조용한 구석자리가 그를 위해서 남겨져 있을 리가 없을 터였다.
아마도 이미 그 곳을 먼저 자리잡아 놓은 사람은 기분좋게 화장실에 가서 볼일이라도 보고 있는 중인 듯했다. 아니면 추위에 떨면서도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담배를 입에 물고 승리자의 넉넉한 표정을 하고, 예전의 유명한 홍콩 영화배우 흉내를 내고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허탈한 감정으로 돌아서는 그의 앞에, 그 테이블로 돌아오던 ‘그’와 마주쳤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잠시 머쓱한 표정을 짓던 상대방의 입 주위에 부드러운 웃음이 번졌다.
왼쪽 입술 끝 부분부터 이어지는 그의 흉터자국이 희미하게 보였다.
“어! 안녕하세요.” 그런 그를 보고 지환이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잘 지내셨지요?” 그가 슬며시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예.....” 무의식적으로 지환도 손을 내밀어 그런 그의 손을 슬며시 잡았다.
그가 지환에게서 시선을 돌려 그 술집의 입구를 한번 돌아보았다. 그리고 다시 지환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혹시 혼자 오신거라면 잠깐만 앉아서 같이 한잔 하고 가실래요?” 그가 지환을 보고 한번 빙긋 웃어보이고는 자리를 손으로 가리켰다.
“어떻게 혼자 오셨어요?” 주문을 받고 홀 서빙을 하던 직원이 돌아간 후, 지환이 그에게 물었다.
“아, 예. 친구들이 아직 오는 중이라서.....” 말 끝을 흐리면서 지환이 멋쩍게 웃었다.
직원이 소주병과 소주잔을 들고 와서 테이블 위에 놓고는 바쁜 걸음으로 뒤돌아갔다.
“저..그러고 보니까....”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직 정식으로 인사도 못했네요.”
“장우안이라고 합니다.” 겸연쩍은 표정으로 그가 지환을 향해서 술잔을 받으라는 듯 소주병을 들었다.
“예. 전 김지환입니다.” 어색한 느낌에 슬며시 자신의 이름을 얼버무리고는 잔을 들었다.
우안이 그의 잔을 가득히 채웠다.
“그런데 어떻게 혼자서.....” 딴이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아 지환은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그에게 다시 물었다.
여전히 잘 모르는 타인일 뿐인 그와 이렇게 마주앉아 있다는 것이 어색하고 불편해졌다.
우안과 약속을 한 상대방이 아마도 지금 오고 있는 중일 것이라고 지환은 생각했다. 그래서 잠시 말동무나 하다가 헤어지자고 그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그게... 동생네 집에 짐을 좀 옮겨 놓느라 들렀다가....” 그가 다시한번 멋쩍게 웃어보였다.
“예?”
“이제, 거처를 서산으로 옮기거든요.” 그가 다시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서산에서 서너달 기거하다가 어짜피 또 안양시로 옮겨갈 듯하지만요.”
“........”
“뭐 저 같은 사람은 일거리가 있는 곳에서 부르면 가는 거라서....” 그가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서산에 있을 방이 너무 비좁아서요. 뭐 혼자 쓸수 있는 방도 아니고..... 그래서 당장 쓰지 않을 짐을 동생네 집에 맡겨 놓으려고 올라왔다가 이렇게...” 말을 마치지 못하고 그가 다시 어색하게 배시시 웃었다.
빈 소주병 세 개가 테이블 바닥의 한쪽에 덩그러니 놓여질 때까지 지환의 친구들에게서는 연락이 없었고, 또한 그의 예상과는 달리 아무도 우안을 찾아오지 않았다.
이제 취기가 몰려오던 지환은 적당히 마무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야 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갑자기 피곤해져서 눕고 싶어지기도 했다.
상대도 이제 꽤 취한 듯 보였다.
술기운을 빌어 이제 또 그만큼 여유있어 보이는 표정이었다. 이제 그는 지환의 앞에서 자신의 볼의 상처를 완전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냥 인식하지 않고 편하게 드러내고 다니셔도 별 상관 없어 보이는데요...” 지환이 그의 왼쪽 볼 쪽을 슬며시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제 일도 아닌데 오지랖을 떨어서 죄송하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을 것 같아서요.” 말을 마치고 지환이 머쓱하게 웃어보였다.
“사실.....” 지환의 말에 그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다시 잠시 묘한 표정으로 그가 침묵을 지켰다.
“이 화상이.....” 잠시 후 그가 슬며시 다시 입을 열었다.
“목 아래에도 계속....” 자신의 볼을 가리키던 그의 검지 손가락이 천천히 목을 거쳐 가슴쪽으로 내려왔다.
“여기에도 크게....”
“........”
“어깨하고 겨드랑이하고 등 뒤에도 좀 많이.....”
“아!” 그의 말에 지환이 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말을....” 황망한 표정을 지환이 지어보였다.
“아니예요.” 그가 손을 저었다.
“이 화상 자체는 그다지 부끄럽지 않아요. 불편하지도 않고요. 사실 말처럼 그렇게 심한 화상도 아니었고요.”
“......”
그런데, 이 화상이 끊임없이 내가 얼마나 부족하고 못난 인간이었는지.....“ 어두워진 표정으로 그가 말끝을 흐렸다.
”......“
“나라는 놈이 나 같은 자식을 아끼고 사랑해주던 사람에게 얼마나 끔찍한 일을 저질렀는지.....” 그가 손을 들어 무의식적으로 뺨을 문질렀다.
“오래전 일이었지만, 사람들이 이 상처를 물어 볼 때마다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이었는지 계속 상기하게 되거든요. 마치 어제 일처럼 고통도 몰려오고....”
“.......”
예상하지 못했던 뜻밖의 그의 그런 말에 지환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뭐, 그때 나의 잘못에 대한 벌이겠지요. 평생 내가 짊어지고 가면서 고통 받으며 치러야 하는....” 어두운 표정으로 그가 씁쓸한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아무리 용서를 빌어도, 전혀 덜어낼 수 없는 죄책감이 남아 있어요. 아마 그러라고 나에게 이런 자국이 생긴거겠죠.”
“.......”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공연히 그의 상처에 소금을 뿌린 것은 틀림없어 보였다. 미안한 생각이 들면서 또 한편으로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실례를...”
“아닙니다. 지환씨는 전혀 상관없는 일인걸요.” 그가 씁쓸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리고 한참을 그는 그렇게 멍하니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자신의 소주잔만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와 지환의 사이로 주변의 사람들의 떠들썩한 대화 소리와 웃음소리가 퍼져 나갔다.
“십년전이었어요.”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던 그가 다시 넋을 놓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겨우 스물하나 일 때.... 저는 그냥 삶의 방향도, 목적도 없이 하루하루 숨이 쉬어지기에 살아가는, 그런 아무 의미 없는 허수아비 같은 녀석이었어요.”
“........”
“아! 그래도 허수아비는 농작물이나 지켜주는 군요. 허수아비에게 실례되는 말을 해버렸습니다.” 그가 몽롱한 눈빛으로 허허 하고 웃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형을 만났어요.” 그의 초점 없이 흐린 눈에 한 순간 작은 빛이 반짝였다. 마치 꺼져있던 전구의 플러그를 연결한 듯, 순간적으로 생명의 빛이 보였다.
“우연히 처음 마주친 순간, 등에 전율이 흐르더군요. 이런 걸 첫눈에 반한다고 하는 거구나 하고요.” 그가 지환을 보고 희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무 대꾸 없이 지환은 소주병을 들고 그의 잔을 채웠다.
“그렇게 사람들 사이에 서 있는 그 형을 나도 모르게 빤히 바라보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그 형과 눈이 마주쳤는데.... 당황해서 나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 버렸지요.”
그가 자신의 잔을 들고 지환에게 건배를 해 보였다.
“다시 시선을 슬며시 돌려 보았는데, 그 형이 바로 내 앞에 서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거예요. 싱글싱글 웃으면서요.” 서글픈 웃음을 짓고 그가 소주를 한 입을 털어 넣었다.
“갑자기 그런 형을 대하면서 그런 형의 눈빛에 얼마나 숨이 막혔는지....”
“........”
“그날부터 그 형하고 예상치 못하게 사귀게 되었어요.” 그가 소주병을 들고 지환의 잔을 채웠다.
“사실, 그때 우리집은 완전히 콩가루 집안이라서....” 그가 말을 멈추고 낮은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는 직업도 없이 매일 술에 절어 살았고.....엄마는 어디에선가 생활비를 벌어왔는데... 아무래도 그게... 엄마의 외모와 관계가 있어 보였어요. 엄마가 꽤 예뻤거든요.”
“......”
“원래 저도 엄마쪽을 닮아서 예전엔 봐 줄만 했었어요. 그때에는....” 그가 말을 멈추고 하릴없이 웃었다.
“지금도 별 볼일 없는 인간이지만, 그때에도 저는 배운것도 없었고 머리도 나빴고.... 해서, 여기저기 알바 하면서 간신히 생활비만 벌던 때였는데....”
그가 말을 멈추고 낮은 한숨을 쉬었다.
“그런 사정을 알게 된 형이 몇 개월 사귀고 난 후, 자신의 집에서 같이 지내자고 했었어요.”
“......”
“그 당시에, 형은 연신내 근처에서 혼자 독립해서 살고 있었어요. 집은 대전이었는데, 서울에 취업을 해서... ”
멍하게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지환의 눈 앞으로 그가 빈 소주잔을 내밀었다.
그제서야 제 정신이 돌아온 듯 병을 들고 지환은 그의 잔을 채웠다.
“두세번 사양을 했는데, 괜찮다는 형의 말에 못이기는 척.... 그렇게 형의 집으로.....”
희미한 미소를 띠고 그가 자신의 술잔을 들고 한 번에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그렇게 형하고 아주 행복했어요. 처음에는.....”
지환이 소주병을 들고 그의 잔을 다시 채웠다
떨리는 손으로 지환에게서 병을 건네받은 그는 지환의 잔을 채우고는 카운터 쪽으로 소주병을 들어 보였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 중에서 한 두 사람이 문제였어요.”
그가 지환을 기다리지 않고 한 순간 자신의 술잔을 들어 한번에 비웠다.
“아니, 사실은 그게 아니라....”
“......”
“문제는 바로 나였어요.” 그가 손을 들어 지긋이 자신의 관자놀이를 눌렀다.
“어느 때부터인가, 형을 믿지 못하기 시작했어요. 형은 능력도 있고, 잘 생겼으니까, 인기도 많으니까, 애인이 있건 없건 술김에 들이대고 보는 그런 주변의 사람들을 한 두명씩 보게 되면서.... 또 가끔은 전에부터 알고 있었다고, 연락도 없이 술에 취해서 집으로 찾아와서 막무가내로 자고 가겠다고... 민폐인지도 모르고 우기는 사람도 있었고......”
“.........”
“불편해하는 표정을 짓는 나에게, 나보다 더 먼저 형을 알고 지냈는데, 마치 나 때문에 일이 잘못된 것이라는 그런 표정을 짓는 사람도 있었고....”
“........”
“그래도 형은 자신만 믿으라고 했어요. 형에게는 나밖에 없다고.... 자신을 못 믿어하는 나를 보면서 이제 그런 사람들하고 거리를 두겠다면서... 집도 알아보고 사람들이 모르는 곳으로 이사도 가자고.....”
지환이 조용히 다시 그의 잔을 채웠다.
“그래도 난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연락이 늦어지거나 할 때에는 터무니 없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르고... 형이 나 이외에 다른 사람이 생기면 나는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이.....” 그가 말을 멈췄다.
“그게 사실은.....” 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이제와서 보면, 형의 사랑을 잃을까봐 두려워 했다기 보다 그냥 형을 잃어버리는 것이 두려웠었던 듯해요.”
그가 힘들게 고개를 들고 지환을 바라보았다.
“형에게서 버려지는 것이 두려웠을 거예요.”
“........”
“형이 나에게서 등을 돌리면 오갈 곳 없어지는 내 형편이..... 나는 어떻게 살 수 있을 까 하는 불안감 때문에...”
그가 낮은 한숨을 쉬었다.
어두운 불빛에 그의 창백한 볼이 경련을 일으켰다.
“형은 그런 나를 끌어안아 주었어요. 내가 느끼는 불안감 모두 다 이해하고 있다고....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고.. 평생을 나하고만 보낼 거라면서... 자신의 인생은 우리가 만나기 전부터 그렇게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라고.....” 그의 입술이 다시한번 파르르 떨렸다.
술을 마실수록 그는 오히려 제 정신을 차리는 듯 보였다. 마치 신부 앞에서 고해성사를 하는 사람의 모습처럼 더욱 차분해 보였다.
“그런데......” 그가 고개를 들고 지환을 흘끗 보았다.
“내가 형보다 친구의 말을 믿게 되면서 문제가 터져 버렸어요.”
“.......”
“친하게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하던 녀석이 어느 날 나에게 ‘형 간수 좀 잘하라’ 고...‘자신에게 들이댔다’고...‘너 생각해서 해주는 말이니 혼자서만 알라.’고....”
그가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힘들게 쓴 웃음을 지어보였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 자식도 형을 좋아하는 티를 대놓고 내던 놈이었는데 말이예요.”
“......”
“술에 완전히 절어서 집에 돌아갔어요. 사실 어떻게 간건지, 내 발로 걸어서 가긴 한 건지도 지금도 기억이 나지 않아요.”
그가 자신의 앞에 놓여 있는 술잔을 들여다 보았다.
“기억 속에는 내 앞에 있는 형에게 '형이 나에게 어떻게 이렇게 할 수가 있냐‘ 면서 윽박질렀었어요. ’대체 왜 그러느냐‘ 라는 형의 말도 듣지 않고 그렇게 나를 달래는 형의 모습도 모두 이중인격자의 모습으로 보였어요. 그리고는 그 다음에는 기억이 나지 않아요.”
말을 멈추고 그는 슬며시 소주잔을 자신의 손바닥으로 쥐었다.
“새벽에 형이 갑자기 나를 깨웠어요. ‘일어나라’ 고 ‘불이났다’고.... 그런 형의 목소리가 들렸어요. 일어나려고 했지만 여전히 취한 제 몸을 가눌수가 없었어요.”
“........”
“형이 저를 부축을 하고 걸어나가는데, 불기둥 같은 것이 형과 저의 위로 덮쳤어요. 그때 형이 크게 신음하는 것을 들었어요. ‘형’ 하고 불렀는데, 형은 나에게 ‘괜찮다’ 라면서 여전히 나의 어깨를 잡고 끌었어요. 그런 형의 웃옷에 불이 붙어 있는 것이 보였어요. 나는 손으로 그것을 가리켰는데, 어쩐 일인지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어요. 그리고 불이 붙었다고 말을 해야 하는데, 입에서 나오는 말은 ‘형 미안해.’라고....”
그가 말을 멈추고 두 손을 들어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덮었다.
그리고 한참을 그는 그렇게 가만히 있었다.
그런 그에게 지환이 해줄 것이 없었다.
그저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보며 그가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릴 수 밖엔 없었다. 마치 그와 함께 그런 상황에 같이 있기라도 한 듯, 아무것도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밖에 나왔을 때, 소방대원인 듯한 사람이 제 몸에 소화기를 뿌렸어요. 그때까지도 제 몸에 불이 붙어 있었는지도 모르고 있었어요. 그저 참을 수 없이 뜨겁다고만....”
“.......”
“사람들의 고함소리에 고개를 돌렸는데, 옆에 있던 형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어요. 누군가의 목소리가 나에게 물었어요. ‘안에 다른 사람이 또 있느냐’고.... 멍한 상태에서 고개를 젓기만 했는데... 눈앞이 핑핑 돌고 사방이 멍해져서 아무 감각도 없어져 버렸어요.”
그가 희미하게 보이는 눈물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화재가 진압되고 형이 발견되었는데.....”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두운 불빛 속에서도 그의 꼭 감은 눈으로 새어나오는 눈물이 보이는 듯했다.
악문 그의 입 사이로 낮은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무슨 대단한 것이라고 작은 상자같은 것을 품에 안고 형이 누군지 알 수도 없는 형체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고....”
그가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래 봤자 다 타버려서 그게 무엇인지 알아볼수도 없었다던데, 그게 대체 뭐길레 날 이렇게 놔두고... 자신의 목숨을....”
그가 한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은 채, 꺽꺽 거리는 신음 소리를 내면서 흐느끼기 시작했다.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그의 잔이 굴러서 날카로운 소리를 내면서 바닥에 떨어졌다.
그를 향해서 손을 내밀어 보았지만, 여전히 지환이 그를 위해서 해 줄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그렇게 무거운 어두움이 내려앉은 그의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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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가 여러 갈래로 펼쳐 지네요.
전체적으로 몰입되고
재미있게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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