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옷소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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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도 이제 예전의 종로가 아니네.”
소주 한잔을 걸친 후, 준이가 마치 한탄이라도 하듯이 읊조렸다.
“몇년전엔 주말에 여기 오면 마치 고향에 온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지고 느긋해지고 그랬었는데 말야.”
“야, 말해 뭐하냐.” 술병을 들고 빈 잔에 소주를 채우면서 한이가 맞장구를 쳤다.
“정말 순식간에 일반 커플들이 여기를 다 점령해버렸네. 이젠 골목을 다니면서 어느 순간 우울하다고 느낄 정도니까 말야.”
“그것도 뭐 다 한때지.” 다른 녀석들과는 사뭇 다른 표정으로 석이가 끼어들었다.
“방송에서 한번 ‘어디어디가 요즈음 뜨는 핫 플레이스다’ 라고 떠들면 그걸 보고 우르르 몰려오는 거지. 조금 지나면 여기도 또 시큰둥 해지고, 또 다른 어디가 다시 뜬다고 하면 그리로 다 몰려갈거야.” 한이가 따르는 술잔을 받고는 다시 녀석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여기도 이러다가 단 물 다빠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썰물에 물고기떼 몰려나가듯 다 빠져나가 버릴거야.”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준이가 잔을 들고 건배를 하면서 피식 웃었다.
“장사하는 사람들에겐 좀 미안하긴 하지만.....” 녀석이 키득거렸다.
거리에 봄의 기운이 완연하다는 것이 느껴지는 4월 초의 토요일이었다.
친구녀석 셋의 연락을 받고 지환은 그들과 함께 여의도로 벚꽃 구경을 갔었다.
하지만 아직 자신들은 꽃을 피울 준비가 안됐다는 듯, 잔뜩 움츠리고 있는 나뭇가지들만 보다가 발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친구녀석들과 일찌감치 시작한 술자리는 찾아오는 봄꽃이 아닌 종로에 대한 아쉬움에서 시작되었다.
그래도 처음엔 대화를 나누기가 어색할 정도로 조용했던 술집은 시간이 가면서 시끄럽게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한쪽 구석에 있는 작은 화장실의 문 앞에는 이미 사용중인 사람이 빨리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두어명의 손님이 눈에 띄었고, 음식이 담겨있는 쟁반을 들고 알바생들은 테이블 사이를 분주히 돌아다녔다.
“저기 히즈끼형 아냐?”
문을 열고 들어와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는 일행중의 한 명을 턱으로 가리키며 준이가 가리켰다.
“그렇네.” 준이의 시선을 따라 시선을 주던 한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 형은 정말 발도 넓어. 종로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걸.”
“그러고 보니, 저번에 저 형이 혹하나 달고 와서 우리 테이블에 떨궈놓고 사라졌잖아.” 한이가 소주병을 들고 빈잔에 술을 채웠다.
“그랬지. 왼쪽 볼인가에 화상 자국 있던 사람 말야.”
그의 말에 다른 친구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사람도 참 안되어 보이긴 했어.” 준이가 술잔을 비우고는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좀 심해 보이던데, 여간해서는 없애기가 쉽지 않아 보이고 말야.”
“혹시.....”
자신도 빈 술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면서 마치 지나가는 말투로 지환이 입을 열었다.
“너네 준하라는 사람 알아?‘ 마치 지나가는 말투로 그가 물었다.
“야...” 준이가 그런 지환을 보고는 피식하고 웃었다.
“한양에서 김서방 찾냐?”
녀석의 말에 다른 친구녀석들도 까르르 웃었다.
“준하라는 이름이 좀 흔하긴 하지. 나도 친구 중에 준하라고 있는데.. 이쪽이 아니긴 하지만..”
“그게.....” 녀석들의 말에 지환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예전에 그 준하라는 사람이 잘나가는 모임에 리더였다고.. 지금은 삼십대 후반일테고...”
그의 말에 맞은 편에 앉아있던 석이가 고개를 젓더니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준하라는 사람을 한 사람 본 적이 있긴한데.....” 한이가 지환을 슬쩍 쳐다보았다.
“그래?” 일부러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 척 하면서 지환이 슬며시 그를 바라보았다.
“근데.....네가 말하는 그 준하라는 사람이 그 형일리는...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녀석이 실실거렸다.
“왜? 어떤 사람인데?” 오히려 준이와 석이가 지환보다 더 관심을 가진 듯 솔깃한 표정으로 한이에게 귀를 기울였다.
“아니... 그 형은.....” 한이가 다시 피식 웃었다.
“워낙 우리와는 노는 물이 다르니까.”
그런 한이의 말에 다른 녀석들이 더 한층 관심을 보였다.
“나도 딱 한번 본 것 뿐이야.” 한이가 어깨를 한번 으쓱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대전에서 살다가 대학 입학하면서 서울로 올라왔다는데. 얼굴 졸라 잘 생겼지, 말도 졸라 잘해. 목소리는 또 어떻고... 명문대학 나와서 똑똑하고 강남에서 자기 사업하고..... 이제 나이도 겨우 삼십대 후반밖에 안됐을 건데.”
“야. 나 좀 소개시켜줘.” 한이의 어깨를 툭 치면서 준이가 아양을 떨었다.
“야, 나도 우연찮게 한번 본 게 다라니까.” 녀석이 슬그머니 꼬리를 뺐다.
“그냥, 어쩌다 강남에서 잘사는 집 애랑 알게 되었는데 걔랑 친한 형이 예전에 그 준하라는 사람하고 같은 모임에 있었대.”
녀석은 말을 잇기 전 자신의 잔을 들고 남아있던 소주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 친구가 자기 친한 형한테 같이 저녁 얻어먹자고 해서 나간 적이 있었거든. 카페에서 그 형을 기다리는데, 그 카페 한쪽에 한눈에 확 띄는 잘생긴 사람이 있더라구. 친구인 듯한 사람하고 둘이서 있던데 은근이 슬쩍 곁눈질로 보고 있었는데, 그 친구 아는 형이 온거야. 근데 그 형이 그 잘생긴 사람한테 아는 척하더라고. 그래서 뭐 합석도 하게 됐지.”
“그게 언제였는데?” 조용히 있던 지환이 그에게 물었다.
“몇 년 됐어.” 말을 멈추고 그가 은근한 눈웃음을 지으며 다시 지환을 바라보았다.
“너 설마 지금 내가 말 한 그 사람이 너가 아는 그 준하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건 아니지?”
“.....”
“그 친구도 그렇고 걔가 아는 그 형도 그렇고, 그 준하라는 사람도 그렇고, 우리랑 달라도 너무 다른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이야.”
“.......”
“그 모임이라는게 없어진지 꽤 오래 되긴 했지만, 그때 장난 아니었대.”
“.......”
“거기 있는 사람들이 다 한집안 한다는 집 자식들이었다고.... 그 준하라는 사람이 대기업다니다가.... 뭐 직장인이 다 거기서 거기긴 하지. 직장일이 다 빡세긴 하잖냐. 그래서 사업구상을 하고 있었는데, 부족한 사업자금을 그 모임에 있던 사람 몇 명이 모아서 대준거라더라.”
“정말?” 놀란 목소리로 석이가 물었다.
“그 까짓거 가지고 뭘 그래.” 석이를 보고 준이가 피식하고 웃었다.
“그 강남 친구 누나도 몇년전에 시집갈 때 집에서 부모가 15억 밖에 안해줬다고 그것 가지고 어떻게 아파트 사느냐고 불평했다고 하더라.”
“........”
“그 모임에 있던 사람들은 말야. 툭하면 유럽, 아프리카 같은데로 단체로 놀러다니고, 생일이라고 뉴욕에 가서 샴페인 마시고 오고, 국내에 있을 때에도 강남의 유명한 바에서만 놀아. 그러다가 이제 우리같은 서민은 어떻게 살고 있나 구경하러 어쩌다가 한번 종로와서 우리들 노는거 보면서 자신들이 얼마나 고급지게 사는지 확인하고 가는거지. 자신들이 넘사벽, 선택받은 존재들이라고 만족하면서 말이야.”
“쫌 재수없는데?” 석이가 피식 하고 웃었다.
“혹시 그 준하라는 사람.....” 조용히 있던 지환이 입을 열었다.
“연락처 한번 구할 수 있을까?” 지환의 그 말을 농담으로 받아 들었던 한이가 진지해진 지환의 표정에 정색을 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너가 왜?”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지환은 계속 그를 바라보았다.
“뭐야?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거야? 그런거야?”
우안이 죽었다고 말하는, 하지만 여전히 살아있다는 얘기가 돌고 있는 그 준하라는 사람을 지환은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어졌다. 그를 직접 만나서 어떻게 한다던가 하는 것은 차후의 일이었다. 그저 혼란스러운 자신의 머릿속을 해결해 줄 실체의 인물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 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을 하면 우안의 말이 모두 거짓이라는 것을 확실히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에스엔에스 같은 걸로 그 사람 확인해 볼수 있지 않을까?” 석이가 언뜻 생각이 난 듯 말했다.
“그 사람들이 워낙 폐쇄적이라.... 자칫하면 강제로 커밍아웃 당하는 수도 있고.... 그쪽이 워낙 보수적이라 엄청 조심하는 것 같더라구.” 준이가 마치 무슨 일급기밀이라도 말하듯 조심스럽게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직은 여전히 서늘한 금요일의 밤이었다.
따뜻한 햇볕으로 온 몸을 나른하게 만들고 난 후 찾아온 서늘한 기운의 밤공기는 얇은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을 골탕먹여 버리겠다는 심술로 가득했다.
“지환씨.”
퇴근 후,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겨서 집 앞의 골목을 돌아 들어가려는 그의 등 뒤에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특유의 목소리에 배어있는 무거운 우울함이 순간 그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쭈뼛거리는 머리카락을 무의식적으로 손바닥으로 쓸어넘기면서 지환은 슬며시 몸을 돌렸다.
“문자를 드렸는데 답이 없고.... 전화도 받지 않으시길래...”
“제가 요새 좀 바빠서요.” 긴장된 목소리로 지환이 대답했다.
우안이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게 아니고.... 전에 빌려 입었던 옷을 가져왔어요. 세탁하고 가져오느라 좀 늦었습니다.”
손에 들고 있던 비닐 백을 지환에게 넘겨 주면서 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말없이 손을 뻗어 그가 건넨 가방을 받은 후, 어색한 분위기가 그 둘 사이에 감돌았다.
“일부러 이렇게까지...고맙습니다.”
“.......”
“그럼 전...이만.....”
“저....” 서둘러 몸을 돌리는 지환을 향해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간단하게 저녁이라도 사드리고 싶은데요. 아니면 술이라도 한잔....”
그의 말에 불편한 표정으로 지환이 그를 바라보았다.
“전에 도움도 받았고 해서... 사양하시지 마시고....그래야 저도 마음이...”
“그럼, 집에 이것 좀 두고 올게요.” 잠시 망설인 후, 마지못해 지환이 그에게 비닐 백을 들어올려보였다.
그리고 몸을 돌려 지환은 어두워진 골목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제육볶음옆에 주인 아주머니가 서비스로 내 놓은 어울리지 않는 샐러드가 담겨 있는 접시가 놓여있었다.
그리고 그 접시에 비스듬하게 포크가 걸쳐 있었다.
포크의 뾰족한 끝 부분이 전등의 불빛에 반짝였다.
의미없는 일상적인 대화가 잠시동안 이어졌다.
그리고 이렇게 대충 그에게 말 상대가 되어주다가 적당한 시간이 되면 지환은 그와 자연스럽게 헤어질 계획이었다.
“서산까지 가시려면 이제 대충 일어나야 하지 않나요?” 휴대폰의 표면을 슬그머니 손가락으로 눌러 시간을 확인해본 후 지환이 넌지시 물했다.
“아, 이번주부터 안양시로 옮겨왔어요. 여기서 지하철을 타면 많이 걸리지 않아요.”
그의 말에 순간 다시 눈앞이 아득해졌다.
어쩌다가 자신의 ‘호의’라는 멍청한 행동이 부주의하게 자신을 모래늪으로 몰아 버렸다. 그리고 그 후에도 제대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어리석음 때문에 발목까지 올라온 모래늪은, 이제 순식간에 그의 무릎 부분까지 넘실 거렸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이 어두운 늪은 곧 그의 전체를 삼켜버릴 듯 해 보였다.
간신히 목 윗부분만 남긴 채, 늪에 빠져서 머리위로 손을 뻗고 허우적 거리는 자신의 모습이 눈 앞에 떠올랐다. 순간 답답함에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화장실을 가기 위해 우안이 몸을 일으키고 지환에게 등을 보이며 문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의 시선은 무의식적으로 접시 위에 놓은 포크의 뾰족한 끝에 닿았다.
오늘따라 동네 한 구석에 위치한 그 술집은 그들 이외의 다른 일행은 없었다.
주인 아주머니는 주방에서 무슨 일을 하는 것인지 얼굴도 내밀지 않고 있었다. 아니 느긋하게 방에 들어가 티비를 보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슬며시 그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돌아보았다.
무기로 쓸 만한 것이 무엇이 있지? 두리번 거리는 그의 시야에 별다른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상대에게는 무엇이든 위협을 할 수 있는 무기로 변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어처구니 없는 상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는 자신을 엄습한 두려움에 온전하게 생각하기가 힘들어졌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112를 미리 눌러놓고 대기하고 있을 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경찰이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자신은 생명이 꺼진 몸뚱아리 만이 바닥에 구르고 있는 다음일 듯했다.
만일에 그가 무기를 들고 자신을 덮칠 경우을 대비해서 그는 테이블에 두 손을 대고 앞으로 밀어 보려고 팔에 힘을 주었다. 힘껏 밀어버리면 상대는 중심을 잃고 쓰러져 자신에게도 기회를 줄 것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테이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지환은 상체를 숙여 테이블의 다리쪽을 살펴 보았다. 하지만 바닥에 고정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럼 왜 움직이지 않는 것일까.
엉거주춤 앉아있던 그의 시야에 문을 열고 돌아오는 우안의 모습이 들어왔다.
자리에 돌아와 앉은 그가 포크를 들고는 샐러드를 한 덩어리 찔러서 입안에 넣었다.
포크를 다시 내려놓고 우물거리면서 입을 놀리던 그가 갑자기 다시 예전의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 형과 전에 사귀고 있을 때에는.......”
이제 술이 꽤 취한 듯 보이는 그의 모습이 지환에게는 더욱 불편해지고 불안해졌다.
이미 십년이 넘게 지난 일들이 그에게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듯 보였다.
그는 그 ‘형’ 이라는 과거속의 존재와 현재를 같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느껴졌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그때에서 한 걸음도 앞으로 더 앞으로 내닫지 못하고 우안은 그 속에서 안주하고 만족하고 있는 듯 보였다.
한순간 그런 지환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우안이 갑자기 표정을 바꾸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 미안합니다. 예전의 일이 너무 상처가 되어서 아물지가 않고 수시로 떠올라서 나를 괴롭혀서요.” 그가 쓸쓸한 표정으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그런일에 대해서 속 시원하게 말이라도 털어놓을 사람이 아직까지 아무도 없었거든요.” 그가 손을 들어 자신의 이마를 한번 문지르고는 눈을 비볐다.
“이 나이 되도록 친구도 제대로 사귀어 보질 못하고..... 한밤중에도 잠이깨면 새벽을 그대로 꼬박 지새울 때도 있고요.”
두려움 속에서도 어쩐 일인지, 그의 말에 반박하고 싶은 충동이 지환의 마음 한쪽에 스멀거리기 시작했다.
‘너를 구하고 너를 위해 죽었다고 네가 믿고 있는 그 형이라는 사람은 멋진 성 안에서 네가 아닌 다른 놈과 행복에 겨운 삶을 살고 있다’고..... ‘너를 그렇게 사랑했다고 믿는 그런 남자는 처음부터 없었다’고....... “너의 일그러진 욕망에 상대를 네 멋대로 왜곡하여 만들어낸 네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허구속의 인물일 뿐이다‘라고..... ’네가 생각하는 그 형이란 남자는, 네가 이렇게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순간에도 네가 아닌 다른 어떤 남자와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침대속에서 뒹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사랑한다‘고 ’너 밖에 없다‘고 신음소리를 내면서 뜨거운 입술을 비벼대며 너가 아닌 다른 남자와 바로 지금 절정에 올라 열에 들뜬 환희의 비명을 지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우안이 갑자기 두려움의 존재인 동시에 고치안에 숨어서 자신을 감추고 있는 나약한 벌레와 같은 존재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런 그에게 그 준하라는 사람의 현재의 사진을 눈 앞에 들이밀어 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에게 따져 묻고 싶었다.
‘너를 구하고 자신은 죽었다고 네가 주장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럼 지금 네 눈앞에 있는 이 사진속의 남자는 과연 누구지?’
‘알아낸거야?’ 그 사진을 본 우안의 표정이 점점 잔인하게 변하기 시작한다.
‘몰랐더라면 좋았을텐데....’
잔인한 표정과 함께 비열한 웃음이 그의 얼굴에 번져간다. 눈의 흰자위에 붉은 실핏줄이 튀어나오고 있다.
‘그랬더라면 아무일도 없었을텐데. 왜 그랬지?’
그가 입술을 실쭉이며 이죽거린다.
‘그랬다면 조금은 더 네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을텐데... 네가 자초한 일이야.’
포크를 움켜 쥔 그의 손등에 근육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기 시작한다.
우안이 고개를 숙이고 관자놀이를 검지로 눌렀다.
“저.....” 지환의 말에 그가 다시 고개를 들어 지환을 바라보았다.
“그건 어떻게 확인하신거예요?”
“뭐가요?” 우안이 물었다.
“..........”
쉽게 다시 묻지 못하고 지환은 다시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분이......” 낮은 한숨을 쉬고는 다시 지환이 입을 열었다.
“누군지 알수도 없는 모습이 되어있었다고....."
“..........”
“그럼 그분이 아니실지도.....”
“나를 구하고 다시 집으로 뛰어들어간 사람은 형이었어요.”
“.............”
그가 다시 술병으로 손을 뻗었다.
“다시 들어간 사람이 그분인 것은.....”
말을 잇기 전 지환은 다시 나직히 한숨을 쉬었다. 그가 자신의 잔에 소주를 따랐다.
“확실한 거예요?
그가 고개를 들고 지환을 응시했다.
“혹시 잘못 보셨을 지도.... 아니면 다른 분하고 착각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그가 손에 집었던 잔을 다시 내려놓았다.
“아뇨...” 그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느끼며 지환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냥...저는....” 마치 사과하듯이 지환이 고개를 숙였다.
“........”
“죄송합니다.”
“제말을 못 믿으실 수도 있을거예요.” 예상과는 다른 차분한 그의 목소리에 지환이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형이 만약에 죽지 않았다면....”
“........”
그가 다시 소주잔을 들고 한입에 삼켰다.
“내 앞에서 그날 이후로 그렇게 사라질 수는 없으니까요.”
마치 상처를 받았다는 말투로 그가 씁쓸한 표정을 짓고는 다시 소주병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가 다시 굳어진 표정으로 지환을 바라보았다.
“거기에 있던.....” 그가 병을 기울여 소주잔을 채웠다.
“소방대원이.....” 잔을 움켜지고 그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다시 한입에 털어넣었다.
“확실하게 나에게 말했어요.”
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의 부어 오른듯한 두 눈에서 눈물이 고이는 듯 하더니 한쪽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죽은 사람이 ‘이준하’씨 라고요.”
“.......”
“그만 가지요.”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순간 멍해 있던 지환이 천천히 그를 따라 일어났다.
우안이 자신의 바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저기... 여기는 제가....”
“아닙니다.” 지환의 말을 가로막으며 우안이 성큼성큼 카운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보이지 않던 주인 아주머니가 어느새 카운터쪽으로 걸어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지폐를 손으로 펴서 아주머니에게 건넨 후, 다시 그가 지환을 돌아보았다.
“이제는 더 이상 폐 안끼칠게요.”
상처 받았다는 말투로 내뱉고는 그가 고개를 돌려 지환을 외면했다.
잔돈을 건네 받은 그가 등 뒤에 지환을 세워두고 음식점 문을 향해서 부지런히 발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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