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옷소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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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마신 후, 오후의 일을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아서였다.
책상위에 올려져 있던 지환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컴퓨터에 들어있던 도안의 마지막 확인 작업 때문에 모니터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던 지환이 자신의 휴대폰을 쥐고 발신인을 확인하더니 슬며시 나의 눈치를 보았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건물 복도의 창문을 열면 건물의 밖에 있는 정원에 서 있는 벚꽃나무의 가지가 마치 손에 닿을 듯이 가까이에서 한들거렸다.
그리고 가지에 하나 가득 만개한 꽃들이 자신의 최고의 자태를 한껏 드러내고 있었다. 마치 이제 곧 자신의 수명이 끝날 것이라는 것을 아는 듯이..... 마지막까지 자신의 존재의 화려함을 기억해 달라는 듯이....
“무슨일이야?”
열린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고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별일 아닌 일이라면 문자를 날렸겠지만, 친구 녀석이 일부러 전화까지 했다는 것에 혹시나 자신이 예상한 것은 아닐까 하는 기대감이었다.
“이번 주 금요일 저녁 7시에 강남 코엑스 옆에 있는 아틀란티스 호텔 1층 로비에서 모일거라는 연락 왔다.” 낮은 목소리였지만 마치 흥분을 감출 수 없다는 듯한 한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대여섯명 모인다는데, 그 중에 그 준하라는 사람도 온대.”
“어떻게 알았어?”
“그 강남 친구한테 진짜 괜찮은 사람 소개시켜준다고 뻥치고 한번 재주껏 알아봐 달라고 했었거든....” 녀석의 피식하고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 땜에 한 거니 네가 걔한테 소개시켜 줄 사람 구해놔. 아니면 너라도 내가 끌고 갈거야.” 녀석이 키득거렸다.
“나중에 어떻게 됐는지 나한테 꼭 보고 해야 된다. 알았지?”
그렇게 말하고 지환이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급한 일이라도 있는 듯 녀석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지환은 다시 시선을 만개하고 있는 한아름의 벚꽃에 두었다.
산들바람이 불어와 나뭇가지를 흔들고 다시 지환의 이마의 머리카락을 흩뜨리고 지나갔다.
생각해보니, 그는 준하라는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렇다고 다시 친구에게 자신이 연락처를 구해달라고 부탁을 했던 그 사람이 사실은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도 모른다고 다시 도움을 청한다는 것도 터무니없이 우스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상관없었다.
어짜피 모두 지나간 일이었다. 이제 지환이 그를 찾을 이유가 사라진 후였다.
자신이 직접 담갔다면서 퇴근 후에 집으로 김치 한통을 싣고 온 윤주와 함께 캔커피 하나씩을 들고, 동네에 있는 작은 공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제 어두워진 공원의 벤치에 지환은 그녀와 함께 나란히 앉았다.
늦게 까지 놀고 있던 아이가 엄마의 부르는 소리에 큰 소리로 대답을 하고는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동생인 듯한 어린 녀석이 비명을 지르면서 누나의 뒤를 따라 뛰었다.
“이제 그럼 더 이상은 연락 안 오겠네?” 가로등의 불빛 속에서 하늘거리며 날리고 있는 꽃잎을 올려다보면서 윤주가 입을 열었다.
“그렇겠지.”
“다행이다. 걱정 했었는데.....” 양팔을 들어 슬며시 기지개를 켜고 그녀가 고개를 돌려 지환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사람.... 자라왔던 가정환경도 그렇고..... 내가 처음 봤을 때 그 사람 엄청 취해서 자기 몸도 못가누고, 눈빛에는 세상에 있는 아픔하고 불만은 혼자 다 가진 듯 보였고.....”
“그건 나도 그렇잖아.” 조용한 목소리로 지환이 그녀의 말을 막았다.
“그래도........너는....” 무엇인가 지환이 그와 다르다는 것을 말해주려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나도 비슷해....” 지환이 슬며시 그녀를 보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다른점은....” 말을 잇기 전 그가 그녀의 손목을 슬며시 툭하고 건드렸다.
“내 옆에 너가 있어준다는 거야.”
그의 말에 그녀가 피식하고 웃었다.
“그거 아주 큰거다. 너.” 지환이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리고 보잘 것 없는 내 능력을 믿어주고 묵묵히 지켜봐주는 사장님과 회사가 있고....”
“.........”
“그런 내 주변의 사람들이 사라지면 나도 똑같지 뭐.”
“그렇지 않아.” 그녀가 핀잔하듯 말하며 지환의 어깨를 툭하고 쳤다.
“나도 그 사람처럼 힘들 때, 너가 내 옆에 와 준거거든.....” 지환이 다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예전에 다니던 대학에서 아웃팅 당하고, 친하다고 생각했던 친구들 모두 다 등 돌리고, 더러운 소문 돌아다니고..... 주위의 차가운 시선에 내가 전혀 알지도 못했던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에, 모욕에.....”
“........”
“지금 돌이켜 보면 뭐 그런 것 웃어넘기고 내 인생 산다고 하면서 지낼수도 있었겠지만.. 그때에는 작은 일도 상처가 되어서 사소한 일도 견딜수가 없었어.”
“.........”
“군대로 도망쳤다가 다시 복학했을 때 처음엔 얼마나 학교 생활이 조마조마 했는데..... 혹시나 예전 학교에서 다니던 애들이 남아있다가 나를 알아보거나 .... 졸업하고도 우연히 놀러 왔다가 마주치게 되어서 다시 소문이 퍼지면 어쩌나 하고......”
윤주가 손을 들어 지환의 어깨에 얹었다.
“2년 동안 호주로 워홀 갔다가 와서 나도 혼자였어.” 위로하듯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가 입을 열었다.
“우연히 과제 때문에 같은 조에 들게 된 인연이 너뿐만 아니고 나에게도 얼마나 다행이었는데....”
“‘이유 없는 우연이란 없다’고 나는 생각해.” 고개를 돌려 지환이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냥 모두 지나칠 뿐이지. 깨닫지 못하고.....”
그가 고개를 돌려 다시 자신의 앞으로 시선을 두었다.
“어느 순간 너가 어떻게든 그것을 알아 준거야. 내가 누군가의 도움이 그렇게 꼭 필요하다는 것을....”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예전에, 내가 중학교 때... 과외선생님이 있었어. 아직도 그 선생님 이름도 기억해. 강인혁이라고....”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려 자신의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많이 좋아했었다. 내가 과외비를 내고 배운 학생과 선생님 사이도 아니었는데....”
“........”
“그런데 나중에 내가 군대에 가기 직전에 우연히 다시 만났어. 서점에서... 그리고 군대에 가 있는 동안 그 선생님과 이따금씩 이메일을 주고 받곤 했는데.... 가끔 그때 그 선생님이 보내신 이메일 중에 내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더라구....”
그가 말을 멈추고 낮은 한숨을 쉬었다.
“그때는 그냥 ‘그렇게 멋있고 대단해 보이는 선생님도 나와 똑같은 사람이구나.’ 라고만 생각하고 넘겨버렸었는데.......” 그가 다시 말을 멈추고 낮은 기침을 했다.
“그게 선생님이 나에게 보내는 신호였던거야. ‘도와달라’ 고... ” 지환이 고개를 슬며시 돌려 윤주를 흘끗 보고는 다시 시선을 자신의 발끝으로 떨구었다.
“바보같이....너무 늦은 다음에야 알게 되었어. 그게, ‘지환아. 내 손 좀 잡아주렴.’ 이라는 말이었다는 걸....”
“그래서 그랬어.” 한참의 침묵 후에, 다시 지환이 입을 열었다.
“그 우안이란 사람이 어떤 식으로든 내 도움이 필요했던거라고... ”
“.......”
“그런 이유로 우연을 가장해서 내 옆으로 오게 된 거라고.... ”
“.......”
“마치 처음 보는 꼬마아이가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에서 슬며시 손을 뻗어 옆에 서 있는 나의 옷소매를 잡은 거라고....... 두렵고 불안하니 같이 길을 건너 달라고...”
“...........”
“그런데 이제는 나도 잘 모르겠어.”
“그 남자 찾았어.” 멍하니 있던 지환이 다시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누구?” 그의 말에 가로등 빛에 날리던 꽃잎에 시선을 두고 있던 윤주가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 준하라는 남자... 이준하라는....”
“어떻게?” 눈이 똥그래져서 그녀가 물었다.
“그냥. 아는 친구가 발 넓은 지인이 있어서....”
“연락해 보려구?”
“이번 주 금요일에 강남에 있는 호텔 로비에서 모임이 있다나봐.”
“그럼....가 볼 거야?”
“모르겠어. 그 사람 얼굴도 모르는데... 그리고 이제 가서 확인해 볼 이유도 없고....”
말을 마치고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늦었다. 너도 이제 출발해야지. 내일 출근도 해야하잖아.” 말을 마치고 그가 윤주에게 손을 내밀었다.
슬며시 지환의 손을 잡고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나란히 공원의 입구를 향해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높은 천장의 중앙에 황금빛의 거대한 샹들리에가 밝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넓은 라운지의 인테리어는 고풍스럽고 화려한 느낌을 주었다. 커피숍으로 향하는 방향의 벽에는 모네의 거대한 그림이 걸려 있었고 그 그림속의 연못가에 또한 고급스러운 명품을 걸친듯한 여인이 값비싸 보이는 양산을 들고 화려하게 피어있는 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그림의 아래로 또 다시 명품으로 온몸을 두른 듯한 사람들이 여유있는 표정으로 자신감 있는 걸음걸이로 지환의 옆을 지나갔다.
그들의 발 아래에는 밟고 지나가기에도 미안할 정도의 반짝거리는 광택이 나는 바닥이 사람들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방금 지환의 옆을 지나간 젊은 남녀커플의 어깨 위로, 젊은 남자의 호위를 받고 있는 나이 지긋한 여성의 주변으로 섬세한 바이올린의 소리가 잔잔하게 번졌다.
그렇게 빈틈없이 완벽한 아틀란티스 호텔의 로비 한쪽에서 쭈뼛거리며, 지환은 지나가는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더 이상 자신이 관여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와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라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는 어느 순간 자신이 있는 곳이 그 호텔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치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한순간에 텔레포트가 되어버린 그런 느낌이었다.
한쪽 벽에 걸린 황금색의 벽시계가 이제 곧 7시가 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결국 이렇게 와 버렸다.
호텔에서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찾기라니.... 터무니 없어서 헛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미 그의 시선은 주변에서 가장 ‘준하’라는 사람일 듯한 모습을 찾고 있었다.
그렇게 뻘줌하게 로비의 한 구석에 서 있던 그의 눈에, 커피숍으로 통하는 통로의 입구에 삼십대로 보이는 남자 다섯명이 둘러서서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 들어왔다.
공연히 이상하게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는 슬그머니 휴대폰을 손에 들고 마치 인터넷 뉴스라도 읽는 것처럼, 그것을 들여다보며 슬며시 그들이 서 있는 곳으로 몇 발자국 가까이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의 무리 속에서도 ‘한눈에 확 들어올 정도로 잘생긴’ 사람이라는 것 밖에는 그에 대한 힌트는 없었다.
하지만 사실 그것도 보는 사람의 주관적인 판단 아닌가.
그러면서도 지환은 그들로부터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슬며시 걸음을 옮기며 곁눈질로 그들 한명 한명의 얼굴을 확인해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 외모가 가장 나아 보이는 듯 한 사람을 정면으로 볼 수 있는 곳에서 발을 멈추고 그의 얼굴 표정을 살피기 시작했다.
밝은 표정으로 무엇이 그렇게 기쁜지 얼굴 전체에 웃음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하얀 치아가 모두 드러날 만큼 입을 크게 벌리고 웃는 그를 보다가 그런 모습으로 서 있는 자신이 한심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역시 아무소용 없는 일이라는 생각에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휴대폰을 자신의 주머니 속에 넣었다.
그리고 천천히 발을 옮기려는 때였다.
“준하형!”
아직까지 그가 눈여겨 보고 있던 남자가 지환의 뒤쪽을 향해 큰 웃음을 보이면서 손을 들어보였다.
반사적으로 그의 시선을 따라 지환도 몸을 돌려 자신의 뒤쪽을 향해서 얼굴을 돌렸다.
다크네이비 색의 정장핏이 완벽하게 어울리는 밝은 표정에 싱그러운 웃음을 머금고 서글서글한 눈빛을 한 남자가 환하게 웃으면서 손을 들어보였다.
한순간 그 남자는 발을 멈추고 손을 뻗어 지환의 뒤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오른쪽에 있는 안내데스트 뒤편의 화장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성큼성큼 그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저....”
화장실 밖으로 걸어 나오던 남자가 갑자기 그에게 말을 걸어오는 지환을 보고는 발을 멈췄다.
“네?” 양쪽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옅은 미소를 띠면서 그는 지환을 바라보았다. 그의 그런 양쪽 볼에 희미한 보조개 자국이 보였다.
“혹시... 이준하씨 되시는지요..”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내어 지환이 그에게 물었다.
“그러시는 분은 누구신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으면서도 그의 얼굴에 호기심이 번졌다. 그의 한쪽 눈썹의 끝이 슬며시 치켜 올라갔다.
“저는...김지환이라고 하는데....” 순간 그에게 말을 건 자신이 한심하고 이해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래서 될 대로 되라는 생각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장우안씨를 아시는지요.”
지환의 말에 순간 그의 표정이 잿빛으로 바뀌었다. 두 눈은 똥그래지고 웃음이 번지던 얼굴에 핏기가 사라져 버렸다.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그의 눈빛은 이제 지환의 눈에 고정이 되어 있었다. 희미하게 벌어진 그의 입술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파리하게 떨리고 있었다.
한 순간이 지나고 이제 정신을 차린 듯, 그의 표정이 다시 천천히 예전의 모습으로 부드럽게 바뀌기 시작했다. 멍하게 벌려졌던 입술은 다시 굳게 닫히고 짐짓 여유있는 모습을 보이려는 듯 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듯 다시 입을 여는 순간 라운지 쪽에서 부지런히 다가오는 누군가의 구두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형. 여기서 뭐해요?” 그들과 몇 걸음 떨어진 곳까지 한 남자가 다가와 발을 멈추고 물었다.
대답을 하지 못하고 서 있는 남자에게서 그가 시선을 돌려 지환을 머리에서 발끝까지 아래 위로 훑어보았다.
“어서 가요. 형. 지금 출발해야 해요.” 그가 다시 지환에게서 그에게로 시선을 돌리고 손가락으로 자신의 손목시계를 가리켰다.
그리고 그를 따라 남자는 지환을 지나쳐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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