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옷소매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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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 후, 누군가 사무실을 찾아왔을 때 나는 거래처와 한참 통화중이었다.
새로운 도안으로 신규 물품을 주문하고 싶다는 김 사장과 새롭게 보충해야할 필요한 내용을 정리해보느라 머릿속이 꽉 차 있어서 사무실 문을 열고 낮선 젊은 남자가 들어오는 것도, 그리고 그가 지환을 불러내어 같이 나가는 것에도 나는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그가 아마도 지환의 친구이거나 같은 상가 건물에 새로 입주한 사무실 직원이려니 했다.
아니면 우리 회사의 일에 대해 관심이 있어서 문의하러 온 새로운 손님일 수도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사무실 문을 나가는 그 둘을 슬쩍 돌아본 후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서 펜을 들고 책상위에 놓인 백지위에 이것저것을 끄적거리면서 김사장이 제안하는 가격을 맞출 수 있을지 한참 머릿속으로 따져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냥 조용히 입 다물고 따라오라’는 남자의 위협적인 표정과 말투에, 사무실 안에서 어떠한 소란도 일으키고 싶지 않았던 지환은 얼떨결에 그를 조용히 따라 나섰다.
이준하란 남자를 처음 만나던 날, 그에게 두려운 표정으로 윤주가 하던 말이 떠올랐다.
덩치 큰 남자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기면서 슬며시 공포가 엄습하기 시작했다. 머릿속 한 구석에서 그를 따라가면 안된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살려달라’고 외치기를 해야하는 것이 그가 살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대로 그를 따라가면 어떠한 봉변을 당하게 될지, 혹은 납치되어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진 사람들 중에 하나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공포가 그를 에워쌓았지만,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두려움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면서 마치 줄에 묶여 끌려가는 강아지마냥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의 앞에서 걷던 떡대 같은 남자가 상가건물의 옆에 딸린 주차장에서 발을 멈췄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주차되어있는 다른 차량과 확연히 눈에 띄는 고급 외제 승용차의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차 밖으로 나와 지환의 앞에 서서 그를 빤히 응시했다.
두려움 속에서도 지환은 침착하려고 애를 썼다.
한낮이었다.
주차장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도, 그 앞에서 공을 가지고 놀고 있는 꼬마들도 눈에 띄었다.
자신을 납치하거나 해코지를 할 의도였다면 백주 대낮에 그의 회사의 주차장에서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언뜻, 그렇게 자신을 경멸스러운 눈초리로 노려보고 있는 상대 남자가 어딘지 눈에 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호텔로 준하를 찾아갔던 날 화장실 앞에서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던 남자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분명히 그 남자였다.
“김지환씨?”
그가 지환을 보면서 조소의 눈빛으로 피식 하고 웃었다.
“고양이가 왜 죽었는지 알아?”
밑도 끝도 없이 남자가 그에게 뚱딴지 같이 물었다.
“.........”
“주제 파악을 못했기 때문에 그래.”
그가 손을 뻗어 지환의 목 주위의 옷깃을 만졌다.
“한주먹도 안 되는 고양이 새끼가 주제파악 못하고 남 일에 기웃거리다가 한 방에 ‘찍’소리도 못하고 골로 간 거지.”
여전히 비웃음을 날리며 그가 지환을 노려보았다.
“가끔 지가 개돼지인 것도 모르고 똑같이 두 발로 서서 돌아다닌다고 모두 똑같은 인간인줄 착각하는 새끼들이 가끔 그 짓거리를 하고 다닐때도 있지.”
그가 슬며시 지환의 옷깃을 손아귀에 움켜쥐었다. 꼼짝도 못하고 지환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네 뭐냐?”
그 순간, 지환의 뒤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환의 눈을 노려보고 있던 남자의 시선이 지환의 뒤로 옮겨가고 그의 표정이 슬며시 바뀌었다.
“넌 왜 여기 나와 있냐?”
그가 지환의 뒤에서 다가와 지환의 등을 툭 하고 쳤다.
“그냥 잠깐 소소한 일상의 담소를 나누고 있던 것 뿐이다.” 지환의 옷깃을 움켜쥐고 있던 남자가 손을 펴고는 손바닥으로 툭툭 지환의 옷깃을 털었다.
“지*한다.”
이제 지환의 옆으로 와서 걸음을 멈춘 장현이 그를 노려보았다.
“너네 아직까지 동네 똘마니들 델꾸 다니면서 힘없는 애들 괴롭히면서 노냐?”
장현의 말에 그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건 너네들 동네에서나 해라.” 낮은 목소리였지만 경멸의 어조로 그런 그에게 장현이 쏘아붙였다.
“형님은 조용히 좀 살자.”
“야, 나도 그러고 싶지.” 그가 장현의 말에 대꾸했다.
“그런데 꼭 이렇게 일부러 일을 만들면서 손봐달라는 새끼들이.....”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장현이 그의 말을 가로 막았다.
“그냥 처음부터 없었던 일로 치고 피차 조용히 살던지, 너 아홉시 뉴스에 한번 나오던지 둘 중에 하나 선택해라.”
장현의 말에 그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피식 하고 웃었다.
“웃기는.....짜식...” 그런 그를 보면서 장현도 같이 코웃음을 쳤다. 여전히 그의 이글거리는 눈은 그 남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야. 너네 부모가 너 게이인것만 알게 되도 너 개털되는 거 시간문제야. 안 그러냐?”
장현의 말에 그의 얼굴에 웃음이 사라졌다.
“애, 잘 간수해라. 주제파악 못하고 나대지 않게.”
시선을 돌려 지환을 슬쩍 보고는 다시 그가 장현을 굳은 얼굴로 바라보았다.
다시 한번 날카롭게 장현을 잠시 노려본 후, 그는 몸을 돌려 승용차에 올랐다.
“너, 도대체 무슨 짓거리를 하고 돌아다니는거냐?”
시야에서 그들이 탄 승용차가 사라지자 장현이 지환을 노려보았다.
“............”
“너, 쟤네들이 어떤 애들인지나 알고 있냐?”
“...........”
“살다보면 교통사고도 일어나지?”
“..........”
“눈 떠보니 태평양 한 가운데 원양어선에 있네. 환장하지? 밤에 잠자는데 서너명이 들러붙어서 끌려 나갔는데, 고기 많이 낚이도록 제물이 필요하단다. 심청이나 돼야 용왕이 구해 주던지 말던지 하지.”
“.........”
“잠에서 깨어보니 너무 깜깜하고 답답해. 어쩐 일인지 몸을 옴짝달싹도 못하겠어. 점점 숨쉬기가 곤란해. 정신 차려보니 산채로 묻혔네?”
“.......”
“어떻게 된 일인지, 사무실에 올라가서 사장님 앞에서 얘기할래. 아니면 지금 나에게 털어놓을래?” 그가 지환을 빤히 바라보았다.
“정말 너...”
그가 손가락으로 지환을 가리켰다.
“도대체.... 제 정신이냐?”
지환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장현이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왜, 임마.” 장현이 험악한 표정으로 지환을 바라보았다.
“그게......”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지환이 장현의 눈치를 살폈다.
“우안이란 사람은 괜찮을까요?”
“야!” 지환의 말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장현이 소리를 질렀다.
카페의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던 몇몇 사람들이 놀란 듯 고개를 돌리고 그들을 쳐다보았다.
“니 코가 석자야 임마. 누가 누굴 걱정해?”
“..............”
“너 그렇게 나쁜 머리로 무슨......”
“...........”
“해코지를 하려고 들었으면 진작에 했지, 임마. 걔는 그래도 뭔가 있으니까 십년 넘게 그냥 놔두고 있는 것 아니냐. 이 자식아.”
“.........”
“우선은, 사무실에 올라가자. 사장님이 무슨 일 인가 하고 기다리시겠다.”
장현이 옆에 놓여있는 자신의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를 따라 지환도 슬며시 몸을 일으켰다.
“여기, 이 놈은 어떤지 한번 생각해 봐요.”
장현이 나의 책상에 이력서 한 장을 올려놓았다.
“전에 그 두 놈이 성에 안 차신듯 보이길래 한 놈꺼 더 가져왔어요.” 그가 나를 한번 흘끗 보고는 다시 자신의 가방을 열었다.
“그리고.... 이거는 괜찮은 아이템인 것 같은데.... 지금 우리 회사에서 이 일까지 감당을 할 수가 없어서....”
책상 위에 녀석이 서류파일 하나를 꺼내 놓았다.
“직원 한 놈 더 구하는데, 일이라도 좀 많아야 밀리지 않고 월급이라도 줄 거 아녜요.” 녀석이 선심 쓴다는 표정을 슬며시 지어보였다.
“착한 척은.....” 녀석을 보고 피식 웃는 나를 보고 장현이 혀를 찼다.
“형님. 내가 형님 회사에 투자도 했는데, 투자자에게 못하는 말이 없으시네.”
녀석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김사장이었다.
“나 가요. 언제 점심이나 해요. 셋이서.”
녀석이 가방을 챙겨들고 나에게서 몸을 돌렸다.
책상 앞에 앉아있는 지환의 옆에 발을 멈추고 서서 장현은 어깨너머로 통화를 하고 있는 나를 흘끗 보았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돌려 앉아있는 지환을 내려다 보았다.
“내놔라.”
“네?‘ 갑작스런 그의 말에 지환이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준하란 새끼 전화번호.”
지환이 손을 뻗어 자신의 휴대폰을 들고 자신의 통화목록 속에서 준하의 번호를 찾아냈다.
“적어드려요? 아니면 문자로....”
그의 말을 무시하고 마치 빼앗아 가듯이 지환의 손에 있는 휴대폰을 낚아채고는 장현이 통화버튼을 눌렀다.
“나다. 한 장현. 기억하지?” 차갑고 거친 목소리로 그가 전화기에 대고 낮게 말했다.
“만나서 얘기 좀 해야겠다. 내가 다시 내 전화로 연락 할테니까. 기다려.” 상대방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가 종료 버튼을 누르고 지환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문자로 이 새끼 번호 보내.”
통화를 마치고 휴대폰을 내려놓는 나를 장현이 돌아보았다.
“사장님, 오늘은 지환이 내근만 좀 시켜야겠는데요. 내가 좀 부탁할게 있어서요. 괜찮으시죠?”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보고는 다시 녀석이 지환에게 고개를 돌렸다.
“너, 오늘 어디 나가지 말고 꼼짝말고 사무실이나 지켜. 퇴근전에 다시 올테니까.”
말을 끝내고 녀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무실 문을 향해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문을 열고는 고개를 돌리고 나와 지환을 흘끗 보고는 문을 닫았다.
서류를 손에 들고 모니터에 눈을 고정하고 있으면서도 지환은 일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황망한 표정으로 오전을 보내고 오후가 되어 나와 함께 커피를 한잔 마신 후에야 제대로 제 정신을 차린 듯 보였다.
그런 그를 나는 모르는 척 했다. 무슨 일인지 묻고 싶었지만, 때가 되면 알아서 녀석이 내게 말을 해주길 기다리는 편이 나을 듯 했다.
그리고 나는 거래처를 돌아보기 위해 사무실을 나섰다.
자리에 앉아 지환은 지난 밤 있었던 일을 다시 곰곰이 떠올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멱살을 잡고 노려보는 야수와 같은 준하의 눈빛이 천천히 변해갔다.
멱살을 움켜취고 있던 그의 손아귀의 힘이 점점 더 약해지고, 마침내 그가 지환의 옷깃을 슬며시 놓았다.
“그냥. 내 부탁대로 녀석이 더 이상 나를 찾지 않도록 말해주고, 그 다음엔 그 녀석을 내버려둬 줘요.”
이제 그의 눈 속에 번뜩이던 분노는 사라진 듯 보였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도 차분함을 찾고 있었다.
“그게 내가 지환씨에게 부탁하는 전부예요.”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겨 골목을 나와 큰길가로 나왔을 때, 지환의 시야에 길가에 차를 세워놓고 차에 기대어 서 있는 한 남자가 들어왔다.
그리고 한 순간 그 남자가 지환을 바라보았다.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돌리고 지환은 지하철 역을 향해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간신히 진정된 마음으로 남아있던 일을 마무리 짓고 있을 때, 사무실의 문이 열리고 장현이 들어왔다.
“너.”
그가 지환을 내려다보고 굳어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당분간 우리집에서 지내면서 내 차 타고 출퇴근해.”
“.......”
“그리고, 이제부터는 화장실가서 똥싸는 것도 나한테 보고하고 가. 알았어?”
굳은 표정으로 그가 자신의 감정을 참고 있는 듯, 낮은 목소리로 지환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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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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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어디로 흘러가는 건지...
스릴러 소설 보는 것 같아 즐겁습니다.
스릴러 소설 보는 것 같아 즐겁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