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옷소매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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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건너기 위해 도로의 양쪽 방향을 살피고 있을 때였다.

그런 그의 왼쪽 소매를 무엇인가 당기는 듯한 느낌에 지환이 고개를 돌렸다.

대여섯살 되어 보이는 꼬마 아이가 녀석의 소매를 움켜잡고 슬며시 그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두려움이 가득한 녀석의 얼굴 표정에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눈망울은 마치 도와달라는 호소를 하는 듯 보였다.

슬며시 손을 펴고 녀석의 작은 손을 잡았다.

그리고 녀석의 보폭에 맞추어 도로 위로 발을 옮겼다.

그렇게 그의 옆에서 몇 발자국 옮기던 그 꼬마 녀석이 지환의 시야에서 한 순간 변하더니 우울한 표정을 하고 있는 우안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괜찮아요.  조금만 더 가면돼요.” 
그런 그를 보고 지환이 다독였다.

고개를 앞으로 돌리는 지환의 시야에 끝없이 넓은 하얀 백사장이 펼쳐져 있었다.
그 백사장 뒤로  푸르른 숲이 보이고, 그 위로 파아란 하늘이 이어졌다. 
언뜻 고개를 돌린 지환의 눈에 흰 옷을 입고 밝게 웃고 있는 인혁의 얼굴이 들어왔다.
지환의 손을 꽉 잡고 인혁은 걸음을 멈추었다.

“난 이제 괜찮아.”
안타까울 정도로 얼굴 가득 환한 웃음을 담고는 그는 지환의 두 눈을 들여다 보았다.
그가 두 눈에 여전히 웃음을 머금고 지환의 손을 놓았다.
“이제 다 왔어.  넌 여기서 기다려.”

그렇게 지환을 세워놓고 인혁은 그 숲을 향해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향해 안타까운 표정으로 손을 뻗고 한 발을 앞으로 옮기려는 순간 그의 눈앞에 장현이 나타나 그를 가로막았다.

“더 이상 오지 마라.” 
무표정한 얼굴로 그가 빤히 지환을 마치 노려보듯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에게 가려져 이제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인혁을 보려고 그가 고개를 빼들고 다시 한걸음 옮기려고 발을 들었다.

“야!”

험상궂은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며 악을 쓰는 장현의 모습에 놀라 그가 눈을 떴다.





“출근 안할 거냐?”

그를 내려다 보고 있는 장현의 모습에 그가 놀라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서 나와서 씻고 아침먹자. 너 늦었어.”

그가 한번 흘끗 지환을 돌아보고는 방 밖으로 나갔다.




 


“오늘도 다른 생각말고 그냥 일이나 하면서 조용히 내근해라.”

안전벨트를 풀고 있는 지환을 돌아보면서 장현이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사장님한테는 내가 얘기를 해 놓을테니까.”



그를 보고 고개를 한번 숙여보이고는 문의 손잡이에 손을 갖다 대는 지환을 보고 다시 그가 입을 열었다.

“너가 그 우안이란 녀석에게 무슨 말을 듣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말에 지환은 손잡이를 잡고 있던 손을 슬며시 놓았다.

“얘기 들어보니 걔네 부모도.....정말 진상중에 진상........” 장현이 미간을 찌푸리고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의 말에 지환이 고개를 돌려 그런 그를 돌아보았다.

“또 한 살 아래 여동생도 있다면서?”

“........”

“그래도 잘사는 집 아들이라는 소문은 또 어떻게 알고는 ......”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장현이 피식 웃었다.

 
“처음부터 딱 짤라 버려야 하는 데 한두번 죽는 소리하니까 안됐다 싶어서 도와준 걸, 나중에는  회사까지 찾아오는 걔네 부모 등쌀에 여기저기 융통해서 손에 쥐어주고,....”

“.........”

“준하 그 자식 뒷조사를 좀 하다보니까 내가 아는 대학 선배가 그 자식이 다니던 회사에 같은부서 팀장이더라.  아무일 아닌 척 하고 슬쩍 물어보니 술집 작부처럼 치장한 여자가 와서 여러번 돈 봉투 받아갔다고...

”.........“

”사람은 누구든지 우리가 보지 못하는 다른 면이 있는거야.  집집마다 남이 모르는 비밀은 꼭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는 말도 있잖냐.“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장현이 끌끌 혀를 찼다.

그런 그의 시선을 피해 굳은 표정으로 지환이 차의 문을 열고 슬며시 빠져나왔다.







 

 



“열흘정도예요. 길어봐야 한 보름정도.....”

“그럼 그 사이에 전에처럼 지환이 겁주려고 또 어떤 놈이 오는 거 아냐?”

“그렇진 않을거예요. 지환이 녀석만 가만히 있으면요.”

“..........”

“그때까지만 사무실에 잡아 놓기만 해 주세요.”

“그래...알았다.”

 

 

점심을 같이 먹자는 장현의 전화를 받았을 때만 해도 그저 오랜만에 세상 살아가는 얘기나 하면서 간단하게 낮술 한잔 하자는 생각인 줄 알았다.

하지만 녀석은 음식이 나오자 마자 지환에 대해서 뜻밖의 얘기를 꺼냈다.

 

“그럼 어쨌든, 그 방화는 우안이란 애가 저지른 것이 아닐수도 있다는 말이네?”

내 말에 장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자식들, 지들이 뭔가 큰 일을 저지른 걸 무마하려고 일부러 그렇게 한건 확실한 것 같은데.....” 녀석이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화재와 관련된 일이 경찰에서 아직 미해결 사건으로 계류되어 있는 것 같애요. 관련된 놈들이 힘 좀 있는 금수저집 아들놈들이고....경찰도 수사할 의지도 없으니 서둘러 사건 종료를 하고 싶어했는데  자꾸 민원이 들어오니까요.”

“........”

“이제 수사 종료가 다 되어 가는데 지환이 녀석이 다 꺼진 잿더미를 들쑤 신 것 같더라고요. 녀석들 입장에서는 조용히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우안이가 저렇게 종로를 휘젓고 있으니....  아무튼, 곧 종료 될 듯 하다니까, 그때까지만 지환이 녀석 조용히 있게 붙잡아 주세요.”

“........”

“그게 무슨 일인지는 제가 어떻게든 알아보고 나중에 알려드릴게요.”

“그래 알았어.” 그를 보면서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나의 말에 그가 들었던 젓가락을 놓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 녀석들은 어떻게 알고 있는거야? 너하고는 별로 공통점이 없어보이는데....”

나의 말에 그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전에 철없을 때........”

“........”

“나랑 똑같이 노는 놈들이 종로에 있더라구요. 그래서, 안면트고 지내다가 모두 강남에 살고 있으니 그 다음부턴 가끔 강남 술집 빌려서 놀고...그러다가... 그때까지는 좋았는데....”

그가 빈 술잔을 슬며시 들었다.

나는 술병을 들고 녀석의 잔을 채웠다.

 

“언젠가, 그 중 한 놈이 생일이라고 해서 어디로 놀러갈까 얘기하다가 크로아티아에 두브로브니크라는데가 아주 경치가 좋다길래 그리로 우르르 몰려갔죠.”

말을 멈추고 그가 술잔을 슬쩍 입에 대었다.

“거기서 술 졸라 처먹고 놀고 있었는데, 이 미친놈들이 한국에서 반반하게 생긴 두 놈을 공수해서 데리고 온거예요.”

“........”

“정해진 금액만 맞춰주면 시키는 대로 뭐든지 다한다는 놈들이 자기 인적사항 올려놓고 초이스 해달라고 하는 그런 비밀 사이트가 있었거든요.

“그런데가 있었어?” 놀란 목소리로 내가 물었다.

“세상에 뭐는 없겠어요? 아마 지금도 있을걸요?” 녀석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 새끼들 노는데, 입에서 욕 튀어나오게 살다살다 내가 정말 *새끼들 다 뒤지라고 욕하고 대판 싸우고 그 다음부터 상종 안했죠.”

“...........”

“지 부모가 돈있고 권력있고, 나라에서 한자리 한다고 별장에서 여자들 불러놓고 미친 짓거리 하니, 배운 게 그거라고....”

“........”

“문제 생기면 동네 양아치 시켜서 입 막아버리고....”

“........”

 

 

“지환이 많이 좋아하지?“

말을 멈추고 무의미한 젓가락질을 하고 있는 녀석을 보면서 내가 슬며시 물었다.

“좋아하긴요.”

녀석이 나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세상 물정 모르고 멍청한 놈 무슨 일 생기면, 직원이라고 달랑 하나 밖에 없는데 사장님 또 사업에 차질 생길 거 아닙니까.” 녀석이 투덜거렸다.

“나도...그래도...투자자잖아요. 손해 보면 안되죠.”

 

“전에 지환이 녀석이 찾아왔었어요.”

잠시의 침묵 후에 장현이 다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우안이가 어떤 애인지 아는대로 알려달라고.....”

“.......”

“어쩌다가 지 얘기가 나왔는데, 그러더라구요. 천안에 간 적이 있다고. 죽으려고 그랬다고....”

“..........”

“대학다닐 때 아웃팅 당하고 좌절하고, 세상이 무서워졌다고.... 그래서 참다참다 마지막으로 자기 엄마에게 털어놨대요. 딴에는 엄마한테 살가운 말이 듣고 싶었겠죠. 근데 그랬다더라구요. 동네 부끄러우니까 집에 들어오지 말라고.....”

“.........”

“사람이 돈 없고 착하기만 하고 만만해 보이면 주변에서 그런 취급 받죠.”

말을 멈추고 녀석이 술잔을 들었다.

“난 별짓 다했어도 주변에서 꼼짝 못했거든요. 사고쳐서 경찰서 가면 아버지 전화 한통이면 다 해결되는 줄 알았어요.” 잔을 내려놓으면서 녀석이 피식 웃었다.

“대학 다닐 때에도, 저도 그때 사귀던 녀석이 눈치 없이 우리학교 와서 말 실수 하는 바람에 친구 놈 몇 놈이 눈치깠죠. 그 다음에 나를 대하는 표정이 좀 바뀐 듯 싶다 한 놈을 뒷골목에 끌고 가서 손 좀 봐줬더니, 그 다음부터 알아서 기더라구요.”

“그래도 지들끼리 있을 때에는 너 욕하고 그랬을거 아냐.” 녀석을 보면서 내가 툭 던졌다.

“그렇게 하기 쉽지 않아요.” 녀석이 나를 보고 빙긋 웃었다.

“그 중 한 놈이 나에게 꼰지를까봐 함부로 말 못하죠.”

“.........”

“내 마음에 안 들면 야려보기만 하면 내 눈을 똑바로 보지도 못했어요.”

“너, 순 양아치였네.”

내 말에 녀석이 다시한번 피식 하고 웃었다.

“대학 졸업하고, 그래도 조금 정신 차렸다고 뭐라고 해보겠다고 하니까, 부모님 좋아서 잔치한다고......” 녀석이 다시 한번 피식 하고 웃었다.

“뭐든 마음만 먹으면 최고 전문가 붙여주겠다고.....”

“..........”

“인생이 다 그런 건 줄로만 알고 살아오다가....지환이 녀석 얘기 들으니까....”

녀석이 말을 잇지 못하고 씁쓸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냥 그렇게만 알고 계시고, 잘 좀 붙잡아 놓아 주세요. 또 이상한 짓 하지 못하게......”

그런 녀석의 말을 듣고 나는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저 왔어요. 사장님!”

퇴근 시간이 가까워 올 무렵, 사무실을 열고 윤주가 들어왔다.

“이거... 도시락이예요.” 무엇인가 담겨있는 비닐봉투를 들어 올려 보이고는 그녀는 그것을 비어있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왠거냐?” 통화중이던 나는 휴대폰을 귀에 댄 채로 그녀를 보고 물었다.

“아까 통화중에 지환이가 오늘 일이 좀 있어서 야근할 듯 싶다고 해서요.”

 

나를 보고 슬며시 웃어보이고는 그녀는 지환에게 고개를 돌렸다.

“장현 오빠는 아직 안 왔어?”

 

“나는 왜?” 탕비실에서 믹스커피 잔을 들고 나오면서 장현이 그녀를 보고 물었다.

“아, 오빠 계셨네?” 그녀가 뻘쭘하게 웃으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딴 게 아니고, 오늘 일 끝나고 지환이 퇴근 할 때 저도 오빠네 집에 놀러 가면 안돼요?”

“왜?” 뜨거운 커피잔을 입에 가져다 대면서 그가 물었다.

“밑반찬도 좀 만들어왔구요.”

“반찬 해주는 아주머니 계신데...” 그가 태연한 표정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청소도 해주시고.....”

“매일요?”

“매일.”

“반찬은 오빠 입에 잘 맞아요?”

“요리 잘한다고 소문나서 울 엄마가 붙여주신 분이야.”

“그래도 정성은 제가 더 나을텐데.”

“아줌마 반찬 보면, ‘정성’이라고 써 있어.”

“아 진짜!” 놀리는 듯한 표정으로 싱글거리면서 웃고 있는 장현을 보면서 그녀가 짜증이 난다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그냥, 놀러 오라고 해주면 안돼요?”

“그럼 그냥 놀러 와.” 여전히 뺀질거리는 표정으로 그가 그녀를 보고 싱글싱글거렸다.

“도시락은 뭘로 사온거냐?”

“죽요.”

그녀의 말을 듣고는 장현이 입을 딱 벌리고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야근까지 하는데 죽 먹고 되겠냐?”

“아. 오빠! 정말!”

다가와서 그녀가 장현의 등을 손바닥으로 때렸다.

“아!”

그녀에게서 슬며시 몸을 피하면서 그가 낮은 비명을 질렀다.

“야. 무슨 여자애가 그렇게 손이 맵냐? 넌 결혼하면 남편 잡겠다.”

“걱정 말아요.” 그녀가 그를 보고 뾰루퉁한 표정을 지어보이고 비닐가방 속에서 도시락을 꺼냈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지환의 책상위에 놓여있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

발신자를 확인한 후에 전화를 집어들지 못하고 지환이 근처에 서 있던 장현의 눈치를 살폈다.

“누군데?” 장현의 시선이 지환의 얼굴에서 휴대폰으로 옮겨갔다.

 

꼼짝 않고 자신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는 지환을 흘끗 보고는 잠시 무슨 생각이라도 하듯 가만히 서 있던 장현이 지환의 휴대폰으로 손을 뻗었다.

 

“여보세요.”

휴대폰을 자신의 귀에 대고는 장현이 나를 흘끗 돌아 보았다.

“너가 지환이 친구 우안이지? 나 지환이 형이야.”

짐짓 다정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지환이가 지금 바빠서 그런데, 무슨 일인데?”

멍한 얼굴로 지환은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의 옆에서 슬며시 팔짱을 끼고는 윤주가 통화를 하고 있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혹시, 내일 나와 잠시 만날 수 있을까? 내가 할 말이 있는데...”

녀석이 지환의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연필을 손에 들고 메모지에 무엇인가를 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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