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너머의 세상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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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의 구름이 우중충하게 하늘을 온 가득 덮고 있는 금요일 오후였다.
선사로부터 선하증권을 발급 받고 사무실로 들어와 주거래은행에서 네고(Nego)에 필요한 서류들을 부지런히 준비하고 있었다.
네고가 완료되고 은행의 외환계에서 수출금액을 회사 계좌로 넘겨 받아야 당장 금일까지 결재를 해 줘야 하는 거래업체의 부족한 대금을 채울 수 있었다.
무던하고 관대한 부장은 자신의 자리에서 내가 하고 있던 네고와 관련된 건에는 짐짓 관심이 없는 듯 했지만 가끔씩 정신없이 허둥지둥하면서 서두르던 나의 모습을 흘끗 보곤 했다. 그리고 여전히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컴퓨터의 모니터에 시선을 주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 한켠에서는 내가 제대로 처리 하기를 바라면서 걱정이 되었을 것이다.
네시가 넘어서야 은행의 외환계에 도착해 담당자에게 서류를 넘기고는 서늘한 날씨에도 이마에 배어나오는 땀을 손등으로 무심코 문질러 냈다.
신용장의 내용과 다른 서류들을 확인하고 있는 외환 담당자 이대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지난번 술 모임에서 전화번호를 주었던 남자였다.
“여보세요.”
“아. 저번에 술 모임에서 전화번호를 받은 사람인데요. 기억하시죠?” 조심스럽고 어색해 하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그럼요. 이승호씨.”
내 말에 이대리가 얼굴을 들고 내 얼굴을 흘끗 보고는 씨익 하고 한번 웃음을 짓고 다시 책상위의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그제서야 그런 그의 가슴께에 달려있는 ‘이승호 대리’ 라는 이름표에 눈길이 갔다.
“오늘이 금요일인데 무슨 다른 약속 있어요?” 그는 그렇게 묻고는 내가 대답을 할 틈을 주지 않고 다시 말을 이었다.
“같이 술이나 한잔 해요. 오늘 정도는 다시 만나야 멀어지지 않고 연락을 유지할 수 있는 사이가 될 거 같아요. 괜찮죠?”
“뭐, 특별한 약속은 없는데... 그럼, 퇴근하고 8시 경에 종로에서 볼까요?”
“예. 그럼...” 나의 대답이 끝나자 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갑자기 볼륨을 올린 듯한 스피커 소리마냥 그의 높아진 목소리가 나의 귓속에서 울렸다.
“예전 퀄컴자리 앞에서 볼까요? 늦지 않게 갈 테니까 한잔 할 장소는 만나서 정하는 게 어때요?”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를 처음보다 훨씬 편하고 밝아져 있었다.
“예. 그럼 그렇게 하지요.”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보니, 이대리가 빙긋 웃으면서 네고가 완료 되어 회사의 통장으로 입금이 되었다는 전표를 내게 내밀었다.
“이승호씨 만나시나 봐요? 재미있는 시간 되세요.”
“아! 예...” 그가 나와 전화속의 이승호라는 사람의 미묘한 관계를 눈치채고 있을 리 없으련만 도둑이 제발 저리다고 슬며시 얼굴이 붉어지면서 겸연쩍은 표정이 지어졌다.
어쩌다 보니 40분이나 일찍 약속장소에 도착하게 되었다.
애매한 시간이었다.
그 정도의 시간은 밖에서 서서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성가신 일이다.
특별히 어떤 피시방에 들어가서 다른 유저의 캐릭터를 향해서 총질을 한다던가, 커피숍에서 느긋하게 앉아 시간을 죽이기에는 지출해야 하는 금액이 아까운 느낌을 떨굴 수 없다.
앞의 종로 대로를 달려 지나가는 차량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지하철 5호선의 5번 출구로 향하는 도로위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초점 없이 시선을 돌렸다.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보다가, 맞은 편 카페의 2층에서 남남커플인 듯 보이는 두 남자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다정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 유리창을 통해 나의 눈에 들어왔다.
그 둘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 지 얼굴에 웃음이 가득한 채로 대화에 몰두하고 있었다. 오른쪽에 앉아있는 남자의 커피잔을 든 손가락과 대화중에 취하는 날렵하고 우아한 손동작은 자신의 정체성을 숨김없이 확실하게 드러내고 있는 듯 했다.
슬며시 손을 들어 자신의 입을 반쯤 가리고 웃고 있는 그를 올려다 보면서 나도 모르게 ‘큭’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 너도 천상 게이구나.’
“야. 너 한지석...”
그렇게 그들에게 시선을 주면서 빙글거리고 웃고 있는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한 남자가 눈웃음을 지으면서 나를 보고 미소 짓고 있었다..
“누구....”
“야! 내가 코 좀 손봤다고 설마 날 못 알아보냐?” 그가 말을 마치고 피식하고 웃었다.
“아. 너 호진이!”
그제서야 그를 알아보는 나를 보고 슬며시 그가 눈을 흘겨보였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눈가에는 반가운 미소가 번져 있었다.
“너 진짜 훈남 됐다. 전에는 흔남 이었는데.”
나의 말에 그가 손을 들어 나의 팔뚝을 툭 하고 쳤다.
“예전에도 종로에 나만 나타나면 몇 놈은 침을 질질 흘리면서 내 뒤 따라다녔어. 이거 왜 이러셔.” 샐쭉한 표정을 한번 지어보이더니 곧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너. 얘기 들었다.”
“무슨 얘기?”“ 난데없는 그의 말에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너... 지훈이 형하고 헤어졌다는 거....” 그가 말을 멈추고 나의 표정을 살폈다.
“난 또 무슨 얘기라고....” 별일 아니라는 듯 의식적으로 자연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이려고 하면서 헛기침을 하고는 목소리를 다듬었다.
“헤어진 지 오래됐어. 뭐. 다 그렇게 만나고 헤어지고 하는 거지. 인생이 그런거잖아.”
“그래. 다 그런 것이긴 하지.” 그가 맞장구를 쳤다.
“그 형. 결혼할 여자랑 대판 싸우고 얼마전에 파혼했다면서? 쌤통이지 뭐.” 그가 고소하다는 듯 조소하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뭐?”
“뭐야? 너 몰랐어?” 놀라는 나의 표정을 보면서 그가 물었다.
“하긴. 알아서 뭐하겠냐.” 그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재벌은 아니라 해도, 뭐, 꽤 잘사는 갑부집 아들에다가 뭐 듣기로는 지지난해인가? 뉴욕에서 공부하던 형이 사고로 죽어서 이제 집안에서 그 형이 그 재산 모두 물려받을건데...결혼만 하고 부모한테 고분고분하게 살면 그게 다 나중에 자기 재산 되는 거지....” 그의 표정의 한 편에 부러움이 묻어나는 듯도 했다.
“...........”
나는 전혀 모르는 사실이었다.
지훈이형이 부잣집 아들이라니... 그리고 결혼할 여자가 있었다니...
그는 나와 사귀는 일년 반 동안 굉장히 검소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김밥천국 집에서 카레덥밥을 맛있게 먹으면서 나를 바라보고 웃음짓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와 데이트 하던 중에 흔한 그의 모습이었다. 브랜드 커피를 비싼 돈 주고 마실 필요 없다고 편의점 커피를 사가지고 나와, 밖에 놓여진 자리에 앉아서 나와 슬며시 건배를 하고 마치 소주를 한잔 들이킨 듯 ‘카아.’ 소리를 내면서 그는 나를 보고 싱긋 웃었었다.
그가 차를 몰고 데이트에 나온 적도 없었으며 같이 택시를 탄 적도 드물었다.
그는 서울의 지하철 노선의 중요한 역은 모두 꿰뚫고 있었으며 그가 들고 다니던 휴대폰도 최신폰과는 거리가 멀었다.
“너....” 그런 그와 앞의 녀석이의 이야기 속의 인물이 전혀 동일 인물이 아닌 듯해서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전에 사귀던 그 지훈이 형 말하는 것 맞지?”
“야!” 나의 말에 그가 어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너 그 지훈이형 말고 또 다른 동명이인도 사귄적 있어?”
“........”
“뭐야? 그럼 너 혹시 그 형이 부잣집 아들인 것도 몰랐던 거야.”
그의 말에 슬며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형이 결혼하려던 여자가 있었다는 것도 정말 아직 몰랐던 거였고?”
다시 떨떠름하게 고개를 슬며시 끄덕인 후에 그의 시선을 피해서 고개를 돌렸다.
“하긴....” 그가 나의 기분을 이해했는지, 다시 목소리를 바꾸어 입을 열었다.
“그 형이 좀 짜게 놀긴 했어. 뭐 종로에 자주 나오는 사람도 아니었지만, 어쩌다가 봐도 밥한 번 안사주고 더치페이 하곤 했으니까.”
“...........”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나의 눈치를 보면서 그도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잠시 우리 둘은 지나가는 사람들을 어색하게 바라보면서 침묵을 지켰다.
“결혼 할 여자하고는 왜 싸웠던 거래?” 잠시 망설이다가 그래도 마음 한쪽에서 궁금함이 생겨 그에게 슬며시 물었다.
“자세한건 나도 몰라.” 그가 고개를 저었다.
“나도 아는 형한테 어쩌다가 들은거라....” 그가 말을 얼버무렸다.
“참. 나 약속 시간에 늦었는데, 너하고 이러고 있다.” 그가 피식 하고 웃고는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았다.
“나. 가봐야 해. 울 애인이 맨날 나보고 만날때마다 늦는다고 잔소리 하는데.”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려 두세걸음 옮기더니 슬며시 고개를 나에게 돌리고 손을 들어 한번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 곧 그는 그의 뒤를 걸어가던 어린 녀석들의 뒷모습에 가려졌다.
알맞게 취기가 올랐을 때 즈음, 시끄러운 소주방에서 승호가 발개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제 우리 말 좀 터도 될까요? 나이도 별로 차이도 안나는데..”
“그래도 저보다 한 살 위이신데...” 헤벌레 해진 얼굴로 그에게 대답했다.
“그게 그거죠 뭐. 불편하면 말 끝에 가끔 그냥 ‘형’ 이라고 붙이시던가요.” 그가 소주잔을 들어 나에게 들이밀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의 소주잔을 들어 그의 잔에 슬며시 갔다 댔다.
“넌 보통때는 잘 모르겠는데....” 그가 소주잔을 입안에 털어 넣은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술이 알맞게 취하면 항상 웃는 얼굴이다. 그거 아냐?”
“정말?” 간신히 그의 말에 맞춰 반말로 대답을 했다.
“어. 너 웃는거 보기 좋아. 앞으로 내 앞에서 그렇게 많이 웃어 줬으면 좋겠다.”
말을 마치고 그가 슬며시 손을 뻗어서 나의 손을 잡았다. 어색해진 나는 이마를 만지는 척 하면서 나의 손을 그의 손에서 슬며시 빼냈다.
“내가 아직 연애는 초짜라....” 그가 그런 나를 보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상대방의 기분에 리듬을 못 맞춰.” 그가 한바탕 크게 웃었다.
“그래서 내가 아마 음치인가봐.”
“노래 잘 못해?” 슬며시 그에게 물었다. 그가 나의 질문에 기분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노래 하면 다들 귀 막아.” 그가 다시 한번 피식 하고 웃고는 소주병을 들어 나의 잔을 채웠다.
“그럼 우리 노래방 한 번 갈까? 얼마나 음치인지 좀 보게.” 내 소주잔을 내려놓고 소주병을 건네받아 그의 잔을 채웠다.
“진짜? 가자고 해놓고 내가 노래 부를 때 비웃으면 안돼.” 그가 싱글거렸다.
“비웃기는... 그리고 게이들은 다 한노래 하던데. 그리 못 부를려고.. 말이 그런거겠지.”
그와 다시 한번 소주잔을 부딪쳤다.
딴이 그의 노래를 듣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가 나의 손을 잡았을 때 일부러 내가 피했다는 것에 그가 기분이 상하지나 않았을 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그는 그냥 웃어넘겼을 것이었다. 하지만 소심한 나의 마음에는 그렇게 남아서 그에게 뭔가 기분이 좋아지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음치라면 기분좋게 들어주고 박수를 쳐 주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술잔을 내려놓고 그가 먼저 일어나서 옆에 놓여 있던 그의 가방을 집어들었다. 그런 그의 뒤를 나도 따라 대화의 파도가 일렁이는 소주방의 테이블 사이를 마치 서핑하는 기분으로 빠져나갔다.
역시 그는 게이였다.
음치라는 그의 말은 그저 그가 노래를 시작하기 전 미리 큰 기대를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연막을 치기 위한 말인 듯 했다.
듣기 좋은 톤으로 감정이 알맞게 들어간 그의 목소리는 듣는 나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계속되는 나의 ‘앵콜’로 그는 여러곡을 연속으로 불러 제쳤다.
그리고 목을 다듬느라 테이블위에 놓여져 있는 캔맥주를 한입 마시고는 마이크를 나에게 넘겼다.
“너도 한곡 해. 니 노래 듣고 싶다.‘
“음치라고 해놓고 이렇게 잘 불러버리면, 내가 그 다음에 어떻게 불러?” 짐짓 그를 흘겨보면서 내가 불평을 했다.
“니 목소리면 다 좋아. 아무거나 불러.” 그가 싱글거리면서 나에게 한걸음 다가왔다.
“불공평해. 차라리 나부터 부를 걸.” 그런 그를 보고 픽하고 웃었다.
“그럼....” 그가 한걸음 더 나에게 다가 왔다.
“키스해. 그럼 공평해져.” 그가 나에게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댔다.
“그런 말이 어딨어.” 씨익 웃으면서 그에게서 슬며시 한걸음 뒷걸음질을 쳤다. 그런 나를 보자 그가 다시 무안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순간, 갑자기 지훈이형의 얼굴이 떠올랐다. ‘너 목소리 좋아.’ 나의 노래를 듣고난 후 나를 슬며시 껴안고는 그렇게 내 귀에 속삭였었다.
그가 결혼할 여자가 있었다. 언제부터 그녀를 만났던 것일까. 나와 헤어진 후였을까? 아니면 그 이전에? 나와 그녀 사이를 오갔던 것일까? 그가 나와 헤어진 후 그 몇 개월만에 누군가를 만나서 결혼을 결정하고 약혼하고 파혼까지 하는 일이 가능했을까?
마지막 나에게 그렇게 상처주는 무심한 말을 한 것은 그 전부터 모두 그의 머릿속에서 계획된 것이었을까?
그렇게 순간 허공을 맴돌던 나의 정신과 시선이 다시 내 앞의 승호에게 돌아왔다.
허리를 굽히고 그는 맥주에 손을 뻗치고 있었다.
손을 뻗어 맥주를 쥔 그의 손목을 슬며시 잡았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나의 시선이 내려와 그의 코와 슬며시 벌어진 그의 입술에서 멈췄다.
그의 부드러운 입술이 느껴졌다. 그리고 천천히 그가 입을 열었다.
나의 뒷통수에 그의 손이 느껴졌다. 나의 입안에 그의 혀가 들어왔다. 두 손으로 그의 목을 끌어 안았다. 나의 입안에서 그의 신음소리가 희미하게 퍼졌다.
그의 손이 나의 가슴에서 배꼽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다시 그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와 이미 딱딱하게 발기해 있는 나의 것을 슬며시 쥐었다.
갑자기 지훈이형의 얼굴이 슬며시 내 머리의 한쪽 구석에 떠올랐다.
‘꺼져.’ 그렇게 희미하게 나타난 그에게 외쳤다.
그리고 마치 그에게 보란 듯이 승호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면서 그의 입안을 탐닉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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