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너머의 세상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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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공기가 새삼 상쾌하게 느껴지는 수요일이었다.
계단을 내려와 현관 밖으로 나와서 몇 걸음 옮기던 중, 길가의 풀숲에서 아침 이슬이 맺혀있는 이파리 사이로 고개를 빼끔히 내밀고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강아지가 나의 눈에 들어왔다.
“티이투우. 이리와.” 작고 새까만 털의 그 녀석을 처음 보았을 때, 갑자기 머리에 떠오르는 이름이었다. 그래서 내 멋대로 그렇게 그 녀석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 녀석은 자신을 부르는 나의 목소리에 귀를 세우고 고개를 모로 기울이고는 꼬리를 흔들었다.
“착하지? 티이투우.” 쪼그리고 앉아서 손을 내밀자 그 녀석이 슬그머니 풀숲 밖으로 기어나와 나에게 다가와서 그에게 내민 나의 손 끝에 코를 박고 킁킁거렸다.
“맛난거 주고 싶은데 지금은 아무것도 없네.” 아쉬움에 슬며시 그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녀석 방금 아침 먹고 나왔어.”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슬며시 몸을 일으켜서 돌아보았다.
1층에 사시는 노부부였다.
두 분이서 아침 일찍 산책을 다녀오시는 길인 듯 했다.
“안녕하세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출근하는겨?” 희미한 웃음을 지으면서 그 자리에 서계신 할아버지와 달리 할머니가 천천히 나에게 다가오시고는 나를 올려다 보시고 싱긋 웃으셨다.
“이 눔 이름은 똘똘이여.” 나에게서 강아지에게 시선을 돌리시고 손을 뻗어 강아지를 품에 안으셨다.
“개 좋아하나봐?” 뒤쪽에 서 계시던 할아버지가 얼굴에 웃음을 가득 지으시고 물으셨다.
“예. 아주 좋아합니다. 녀석, 아주 귀여워요.” 손바닥으로 할머니의 품에 안겨 있는 강아지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보였다.
“가끔 제가 산책 시켜도 될까요? 저 402호 사는.....”
“알고 있어.” 할머니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활짝 웃으시면서 답하셨다.
“젊고 잘생긴 총각이 이사왔는데 모를 리가 있남?” 말을 마치시고는 겸연쩍으신 듯, 야위고 주름이 가득하고 틀-니를 넣지 않아 움푹 패인 볼에 화사한 웃음을 지어보이셨다.
“어여 회사 댕겨와. 늦을라...”
“예. 그럼....” 발길을 돌려 역 쪽으로 향하는 나의 뒤에서 그 노부부의 목소리가 다시한번 들려왔다.
“똘똘아. 이제 집에 들어가자.”
점심 식사를 마치고 막 사무실로 돌아와 관리과에서 넘어 온 서류를 훑어보고 있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승호였다.
“여보세요.”
“점심 맛나게 먹었지?” 쾌활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아주 맛있게 먹었어. 니두 점심 먹었지?”
“오늘 퇴근하고 차 한잔 할까? 아니면 간단하게 소주 한잔?” 나의 말에 대답대신 말을 바꾸어 그가 물었다.
“이제 겨우 수요일인데....” 주중에 만나자는 그의 말에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너 오산 산다면서, 퇴근하고 부지런히 가도 집에 도착하면 한밤중 아냐?”
“괜찮아.” 그가 여전히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자주 봐야. 정도 새록새록 생겨서 서로 가까워지지.” 말을 마치고 그가 크게 한바탕 웃었다.
“뭐, 그럼. 나야 괜찮지만...”
“그럼 퇴근하고 ‘이끼나리’에서 한잔 하는 게 어때?”
그의 말에 나의 뇌의 네비게이션이 작동하고는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
“아.. 거기 좀 구석지지 않았어? 앞 골목도 후미지고 해서 어둡던데...”
“찾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 조용하게 대화할 수 있잖아. 뭐 주중이니 어디든 그렇긴 하겠지만... 그리고 내가 좀 으슥한 곳을 좋아하잖아.” 은근하게 그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하고는 키득거렸다.
“그래. 그럼 거기서 보자. 퇴근하고 곧장 갈게.”
나의 대답에 그가 한번 더 웃어보이고는 전화를 끊었다.
결재 서류를 부장의 자리에 올려놓고 돌아오니 호진으로부터 문자가 와 있었다.
‘오늘 뭐하냐?’
그 전에도 사이가 좋긴 했지만, 이렇게 자주 부딪치고 연락하는 사이가 아니었기에 그의 그런 문자가 뜻밖이었다.
‘주중이긴 하지만 썸남하고 술 한잔 하기로 했다.’
‘어디서?’ 문자를 보내기가 무섭게 다시 그로부터 온 카톡의 신호가 울렸다.
‘이끼나리에서... 너도 합석하고 싶으면 와.’
하지만, 나의 그 마지막 문자에 대한 그의 답은 오지 않았다.
‘하긴, 나 같아도 물 좋고 깔끔한 곳이 많은데 거기로 오라고 하면 망설이게 되던지 거절할 것이었다.
그렇게 오후의 시간이 흘렀다.
퇴근 후 에 찾은 그 술집은 역시 거의 비어있었다.
한쪽 구석의 테이블에 앉아 있던 60대 후반 정도 되어 보이는 세 명의 남자가 우리가 들어가자 한번 흘끗 시선을 주고는 그들만의 대화로 돌아갔다.
자리에 앉아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역시 여전처럼 실내는 고풍스럽다 못해서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어둑한 조명은 마치 칙칙한 실내 인테리어를 감추고 싶은 속내를 비추는 듯 했다.
예전, 주말에 사람들이 한창 모이는 시간에 다른 술집들이 모두 만석일 뿐만 아니라 대기까지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는 귓소문을 통해 이곳에 한두번 와 본 적이 있었다.
그때에는 그래도 술을 마시는 사람들의 대화소리와 웃음소리가 술집의 분위기가 주는 답답함을 상쇄하고도 남아, 열린 문 밖으로 흘러나오는 밝은 웃음소리에 더불어 기분이 좋아졌었다.
역시, 나와 상관 없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그들이 주변에서 발산하는 따뜻한 체온은 관계없는 타인에게도 위안을 건네 준다.
예전부터 나이 든 사람들이 그랬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곧 황폐해지고 무너진다고... 그저 그 안에 사람이 산다는 그 이유 만으로도 집은 버텨준다고.... 그렇게 사람의 손길이 큰 힘을 가지고 있다고.. 그것이 바로 기적이라고....
하지만, 다시 사람들이 사라진 그 곳은 어둡고 우울했다.
“근데......” ‘왜 여기에서 만나자고 한거야?’ 라고 묻고 싶었지만, 그냥 그 말을 삼켜버렸다. 나의 꿈이 타인의 악몽이 될 수 있듯이, 나의 악몽이 타인의 꿈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다.
말을 꺼내고 입을 다물어버린 나를 그가 빤히 쳐다보았다.
“왜? 무슨 할 말 있어?”
“아냐. 그냥.... 여긴 그럭저럭 괜찮은데, 화장실이 밖에 있다는 거, 그거 좀 불편하더라고.”
“아. 좀 그렇긴 하지? 겨울 되면 춥고 하니 귀찮기도 하고.” 그가 맞장구를 치고는 씨익 웃었다.
‘그래도 그냥... 처음 종로에 나와서 사람들 만난데가 여기였거든. 지금이야 내가 이렇게 뺀질거리지만 그때에는 초행이라 쭈뼛거리고 낯을 가리고 해서... 여기 몇 번 오게되니까 그냥 편하더라고.“ 그가 말을 멈추고 씨익 웃어보였다.
다시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소주 두병을 비우고 세 병째의 뚜껑을 열었다.
이제는 알맞게 둘 다 얼굴이 발그레 해졌고 실없는 웃음이 얼굴 전체에 슬슬 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뜻언뜻 말투에서 혀가 꼬이는 듯 싶다는 느낌이 올 때에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의 통화에 관심이 없는 듯, 나는 슬며시 고개를 돌려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보다가 내 휴대폰을 들어 무의식적으로 뜻 없이 손끝으로 여기저기 만져 보았다.
하지만 신경의 한쪽 부분은 그의 통화하는 대화에 있었다. 하지만 어쩐일인지 그의 대화내용이 잘 들리지 않았다. 내가 술이 취한 것일까? 아니면 그의 낮은 목소리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면, 공허한 홀 안을 채우는 걸그룹의 시끄러운 고음의 반복적인 코러스 때문일까?
“나 화장실 좀.” 통화를 끝낸 그가 여전히 희미한 미소를 띤 채로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슬며시 그에게 웃어보였다.
그가 자리를 비운 후, 또 다른 걸그룹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악을 쓰기 시작했다. 돌아오라고 악을 쓰다가 미워한다고 샐쭉해 했다. 그런 그녀들의 목소리가 내 귓속을 채웠다. 귀안에 먹먹해져 왔다.
슬며시 몸을 일으켜 문 밖으로 나왔다. 어둑한 좁은 도로도 지나는 사람 없이 을씨년스러웠다.
그러는 나의 귀에 길의 한쪽 구석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순간 신경이 곤두서면서 쭈뼛해졌다. 그리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두움 속에서 두 사람의 실루엣이 희미하게 보였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멱살을 잡고 있었다. 한참 몸싸움으로 실랑이를 벌이는 중인 듯 보였다.
“너 내 손에 죽는 줄 알아!” 한 사람의 둔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씨이바 새끼가!” 다른 남자가 응수했다. 그런데 익숙한 목소리였다.
“승호냐?”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그들이 있는 쪽으로 한걸음 옮겼다.
“너. 내 말 명심해. 아님 너 죽는다.” 작고 낮은 목소리였지만, 상대 남자의 목소리는 위협적으로 들려왔다. 그리고 승호의 멱살을 풀고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개애새끼.” 승호가 손으로 웃옷의 옷매무시를 고치면서 흐린 가로등 불빛 안으로 들어왔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깜짝 놀라 그에게 물었다.
머리는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었고 그의 아랫 입술은 찢어져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그 개애새끼!” 그의 눈에서 불이 튀고 주먹을 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괜찮아.” 자리에 돌아와 앉아서 나의 시선을 피하면서, 그는 냅킨으로 피가 배어있는 입술을 눌렀다.
“왜? 무슨일인데?” 그의 눈치를 살피면서 슬며시 다시 물었다.
“아. 나도 몰라.” 그도 전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화장실 갔다가 나오는데 별 미친놈이 시비를 걸잖아.” 그가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요새 묻지마 범죄가 장난이 아니라던데... 진짜 세상에 싸이코 새끼들 많아.” 그가 기가 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한번 짓고는 다시 나를 보았다.
“너두 조심해. 착하고 물러 터져서는....”
“내가 어때서?” 슬며시 그런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만만해 보이면 당하는 세상이야.” 그가 다시 나를 보고는 손을 뻗어 소주병을 들어 내 잔을 채웠다.
“...........”
“이제 집에 일찍일찍 들어가고 집에 도착하면 매일 밤 나에게 전화해서 보고해. 알았지?”
그의 말에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해. 너 방금 나 한테도 시비거는 놈 못봤냐?” 그가 정색을 하고는 나를 보았다.
“너 사는 동네도 인적 드물다면서. 내말대로 해. 알았지?”
“알았어.” 얼굴에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한가득 담고 다짐을 받으려는 듯 하는 그에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래, 이렇게 나를 걱정하는 사람이 있다.
누군가와 헤어지면 그것으로 바닥모를 절망과 고통의 심해 속에서 절대 벗어나지 못할 것 같지만, 조금씩 우리는 수면을 향해서 상승한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했던 어느 순간 물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참았던 숨을 내쉬게 된다.
그리고 또 다른 밝은 세상. 훨씬 편해진 세상을 접하게 된다.
그렇게 물 위에서 부유하다보면 예상치 못했던 누군가가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우리에게 손을 내민다.
그렇게 삶은 이어지고 우리는 또 다른 행복을 찾게 된다.
“근데....” 그가 슬며시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뭐?”
“너.. 전에 사귀던 사람. 어떤 사람이었어?” 그가 민망한 표정으로 말을 끝내고는 나에게서 시선을 돌려 소주잔으로 손을 뻗어 집어들고 나에게 내밀었다.
“갑자기 뜬금없이 내가 전에 사귀던 사람은 왜?”
“아니 그냥...” 그가 말을 얼버무렸다.
“사실, 그것도 궁금해서 너 만나면 한번 물어봐야지 했던 거거든.” 그가 말을 하고는 피뭍은 티슈를 버리고 새 티슈를 뽑아서 입술에 갖다 댔다.
“뭐... 특별히......” 갑작스러운 질문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지.” 나의 잔을 들어 그의 잔에 갖다 대면서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래도......” 그가 소주잔을 한번에 비우고 다시 나를 슬며시 바라보았다.
“왜 그 사람하고 헤어진거야?”
“그게 왜 궁금해?” 멋쩍은 웃음을 지으면서 그에게 물었다.
“아니.. 너를 오래 만난 것은 아니지만, 너 진짜 괜찮은 애거든. 성격도 모나지도 않고 외모도 괜찮고 은근히 귀엽기도 하고...” 그가 말을 멈추고 나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그런데 왜 헤어졌을까 궁금하더라고.... 나는 그 사람의 전철을 밟으면 안되잖아.” 그가 다시 한번 나를 보고는 씨익 웃었다.
“그러게....”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소주병을 들어 그의 잔을 채웠다.
“나도 왜 헤어졌는지.. 왜 그렇게 됐는지 모르겠어. 그냥 그가 어느 순간 내가 모르는 타인이 되어있었어. 왜 그렇게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변했는지 아직도 이해가 안 돼.” 슬며시 그가 눈치채지 않도록 한숨을 쉬었다.
“처음엔, 그렇게 변한 그가... 나에게 냉담해진 태도로 싸늘하게 말을 하던 그가 싸이코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리고 그 다음에는 어떻게든 그를 이해해보려고 했는데, 이해가 안돼.” 말을 멈추고 잔을 들고 그가 내미는 소주병에서 술을 받았다.
“하긴.... 살아가면서 내가 내 자신의 행동이나 생각도 이해가 안될때가 있는데, 남이야 말할 것도 없겠지.” 말을 멈추고 다시 한번 슬며시 한숨을 쉬었다.
“그래... 아무리 그래도.. 누군가와 헤어지고 싶다고 해도.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거였는데... 그렇게 사람이 갑자기 딴 사람이 된 듯이 말을 내 뱉어서 그래도 그때까지는 ‘연인’ 이였던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그렇게 쉽게 내뱉다니...” 마치 혼잣말로 넋두리를 하듯이 중얼거리고는 고개를 들어서 그를 바라보았다.
“맞아. 그냥. 싸이코야. 아무리 생각해도 그 형은 싸이코야.”
나의 말에 그는 아무 대답도 없이 그냥 소주병을 들어 나의 잔을 채웠다.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했는지 물어보고 싶은데, 니 표정 보니까 물어보면 안될 거 같다.” 그가 말을 하고는 씁쓸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너두 참. 어디서 사람이 없어서 싸이코나 만나고..” 말을 멈추고 그가 그의 입술에 붙어있던 티슈를 떼어내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찬찬히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가자. 늦어가는데 너 집 앞에까지 데려다 주고 갈게.”
“거기가 어디라고 그 먼데까지 이시간에...” 그의 말에 내가 다시 픽 하고 웃었다.
“왜? 멀면 어때? 특히 오늘은 너가 집에 안전하게 들어가는 거 보고 돌아서야 마음이 편해지겠다. 알았지?” 그가 손을 뻗어 나의 손을 잡았다.
“거기 일산 거의 다 가는데야. 나 데려다 주면 너 집에 못 들어 가. 차도 없어.”
“괜찮아. 홍제동에 우리 형이 살아. 하루 신세지면 돼.” 그가 피식하고 웃었다.
“친형이?”
그가 나의 대답에 다시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불안해서 오늘은 꼭 너 데려다 주고 가야겠다. 어젯밤 꿈도 뒤숭숭하더니. 기분이 안좋아.” 그가 슬며시 몸을 일으켰다.
그런 그의 호의에 몸을 일으키면서도 편하지가 않았다.
부담스러운 것인지 미안한 것인지 아니면 그냥 나 혼자 가고 싶은 사적인 시간과 공간을 그가 침범하는 것으로 내가 여기고 있는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외투를 걸치고 있는 나를 흘끗 보고서 그가 먼저 계산대로 걸음을 돌렸다.
“이 동네 진짜. 한적하네. 인적도 없고....” 역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가면서 그가 입을 열었다.
그 옆에서 발을 맞추어 걸음을 옮기면서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신축공사장과 버려진 땅들, 그리고 채소를 심어 놓은 밭이 보이고 그 뒤로 검은 빛의 작은 산이 나의 시야가 그 너머로 벗어나는 것을 막고 있었다.
“난 출퇴근 할 때 아무 생각도 안하고 그냥 앞만 보고 다니는 걸...” 그를 돌아보고 한번 씨익 웃었다.
“길에 가로등도 너무 드문드문 있고, 뭐 이런 동네에는 골목에 씨씨티비를 달아놨을리도 없고 말야. 늦게 다니면 진짜 안되겠다.”
“오늘 왜 그래?” 그의 팔을 슬며시 잡으면서 다독이듯이 말했다.
“내가 무슨 여자도 아니고, 누가 나한테 무슨 짓을 하겠어?” 그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너 모르는거야. 앞일을 모르니 그저 조심. 조심하는게 최고지. 예전에는 남자도 새우잡이 배로 납치해가지고 간다는 말도 돌았었잖아.” 그의 말에 다시 한번 그를 돌아보고는 피식 하고 웃었다.
“이 집이야. 다 왔어.” 그에게 다세대 주택의 4층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집은 좋네. 새로 지은건데?” 그가 슬며시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월세도 비싸겠는걸. 이 정도면 꽤 할건데..”
“얼마 안돼. 그냥.....” '무보증에 월세10만원' 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고 입안에서 사라져 버렸다. 자존심 때문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럴듯하게 벌고 그런만큼 괜찮은 비용을 들여서 산다는 이미지를 그에게 주고 싶었을 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예전에 지훈이형에게 보여주었던 그런 밑바닥 인생은 아니다. 남에게 궁색한 모습 보여주지 않고 내 손으로 그럴듯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이 정도의 허세야 남들도 다 부리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의 그런 지지리궁상을 떠는 모습에 그가 지겨워졌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나의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그의 어머님에게 발각된 것이 오히려 나를 떼어낼 절호의 기회로 그가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적당하게 내고 살지 뭐.” 밝은 목소리로 억지 웃음을 지으면서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생각을 지워냈다.
나의 말에 그가 손을 뻗어 나의 손을 잡아 끌었다.
“왜?”
“여기도 씨씨티비는 없는 것 같은데?” 그가 씨익 웃었다.
“그게 중요해?”
“중요하지.” 그가 말을 하고는 나에게 얼굴을 들이밀고는 입술을 내밀었다.
“사람들 봐. 여기 우리 집 앞이야.”
“알았어.” 그가 말을 하고는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이리와.” 나의 팔을 잡고는 그가 건물의 구석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나의 뒤통수를 잡고는 자신의 입술을 나의 것에 슬며시 갖다 댔다.
그의 혀의 맛을 느끼면서 그의 목을 슬며시 끌어안았다.
그리고 나의 가슴속에 무엇인가 슬며시 피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희미한 안개와 같은 그것은 아마도 사람들이 행복이라고 부르는 것일 듯 했다. 그리고 그렇게 그의 품에 안겨서 이제 그 늦은 시간에 그가 다시 돌아가야 하는 길이 또한 멀다는 것에 미안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가 다시 한번 나의 코에 입술을 댄 후, 나의 얼굴을 어둠속에서 들여다보았다.
“나 갈게.” 그가 나를 보고 눈을 찡긋 하고 윙크를 하더니 몸을 돌렸다.
“라면 먹고 가도....”
“됐네 이 사람아. 그가 다시 몸을 돌려 나를 보고 ‘큭’ 하고 웃었다.
“내일 아침에 너 편안하게 출근 해야지. 이번 주말에 내가 떡라면 사줄게.” 그가 다시 한번 피식 하고 웃더니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그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희미한 미소를 지으면서 바라보았다.
금요일 밤, 막 잠자리에 들기 위해 침대로 들어가려는 데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아무 생각 없이 상대방 에게 말했다.
“..............”
“여보세요?” 대답하지 않고 있는 상대를 다시 한번 불러보았다.
“나야.”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
“지훈이.”
“................”
그의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멍해져 왔다. 몽롱한 상태에서 온몸에 힘이 빠져 침대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왠일이에요?” 나의 목에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나의 대답과 함께 휴대폰 속으로 스며들어갔다.
“뭐라고 다른말은 하지 않을께.” 그가 조용하게 말했다.
“..............”
“너가 지금 만나는 녀석이 어떤 놈인지 너 알아?”
“.............”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몰라 나는 얼어붙은 듯 그렇게 가만히 있었다.
"걔, 너가 생각하고 있는 그런 애 아냐.“
“내가 뭘 생각하고 있는데요?‘ 갑자기 화가 나서 그에게 소리쳤다.
“걔......” 잠시 침묵을 지킨 후 그가 다시 말했다.
“너에게 절대 도움 될 그런 애 아냐.”
“형이 그 사람을 어떻게 알아요?‘ 진정하려고 했지만 그에게 분노가 치밀어서 온몸이 떨려왔다.
“그리고, 그런 말은.... 믿었던 내 뒤통수를 사정없이 후려친 형이 할 말은 아니죠.”
“............”
“끊어요. 그리고 앞으로는 절대로 전화하지 말아요. 목소리도 듣고 싶지 않으니까!” 휴대폰에 소리를 지르고 나서 끊어버리고는 휴대폰을 옆으로 던져버렸다.
한참을 그렇게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나의 숨소리가 고르게 된 후, 갑자기 슬며시 양쪽 눈에서 눈물이 배어나왔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열고는 방금 걸려온 그의 전화번호를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멍하니 화면에 찍힌 번호를 바라보다가 휴대폰을 끌어안고는 침대속으로 천천히 기어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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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님은 치정극의 달인이 아닐지..
아직은 승호한테 정도 안가고 뭔가 못미더운데 앞으로의 전개가 궁금합니다
아직은 승호한테 정도 안가고 뭔가 못미더운데 앞으로의 전개가 궁금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