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너머의 세상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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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온이 갑자기 뚝 떨어진 금요일 오후였다.
점심시간이 지날 무렵부터 어두워지던 날씨가 세시경이 되면서부터 눈발이 하나둘씩 날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눈이 이런거야’ 라는 맛보기만 보여주는 듯이 곧 매서운 바람만 남겨놓고 눈의 그림자는 사라져 버렸다.
“부장님 보고서 결재 부탁드립니다.”
싱가폴 바이어가 돌아간 후, 새로 체결한 계약건에 대한 보고서를 들고 그렇게 부장의 자리 앞에 서 있었다.
“어, 그래.”
컴퓨터 모니터에 시선을 두고 있던 부장이 내가 그에게 내민 결재서류에 시선을 두었다.
“근데, 한지석씨. 혹시...” 서류를 받아 놓고는, 왼손으로 옆머리를 긁적이면서 부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네?”
“며칠전에 회식하면서 음식점에서 결제하고 받은 영수증이 안보이네.” 말을 멈추고 그가 들고 있던 펜을 책상에 툭툭하고 쳤다.
“분명히 받은거 같은데 말야.” 그가 몸을 뒤로 기울여 의자 등받이에 기대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부장님, 그거...”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채고는 멋쩍게 웃어보였다..
“경리과에서 경비처리 빨리 해달라고 독촉하는데 부장님 자리에 그때 안계셔서 제가 그냥 은행 홈페이지에서 재발급해서 올렸습니다.”
“아. 그래?” 그의 어두웠던 표정이 한순간 밝아졌다.
“그런게 있었어? 난 그런것도 모르고 영수증이 없길래 며칠전에 쓰레기통까지 뒤져봤거든.” 그가 말을 마치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다행이네. 고마워.”
“아닙니다. 부장님.”
“서류는 나중에 확인해 볼테니까. 퇴근 시간 다 되었으니 정리하고 퇴근해. 남은 일은 급한거 아니면 월요일에 하지 뭐.” 그가 나를 보고 너털웃음을 웃어보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막 회사 건물의 정문을 나올 때 휴대폰이 울렸다.
“불금인데 소주한잔 할까?” 승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어쩌지? 오늘 다른 친구하고 만나기로 했는데...”
“아, 그래? 누군데?”
“뭐, 누구라고 말하면 알아? 호진이라고 오늘 차 한잔 하기로 했어.” 말을 하고는 내가 ‘픽’하고 웃었다.
“다른 약속이 있으면....뭐 어쩔 수 없지.”
“주말에 봐. 그땐 다른 약속 없으니.”
“그래. 알았어.”
“근데....” 그가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 다음에는 무슨 일 없지?”
“......”
“또 누가 와서 저번처럼 소동 피운 건 아닌가 해서...”
“아..... 속으로 좀 불안불안 했는데, 그 다음엔 아무일도 없네. 다행히...”
“다행이네. 너 혼자 있을 때 또 누가 와서 지-랄하면 어쩌나 했는데...”
“그러면, 그때는 경찰 불러야지.” 당연하다는 듯이 여유로운 목소리로 내가 대꾸했다. 싸이코의 미친짓에는 경찰이 최선의 방법이 틀림 없었다.
“그것도 좋지만......” 그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력범죄도 감당 못하는데, 그런일에 경찰이 뭐 신경 많이 써주겠어? 이래라 저래라 왔다갔다 너만 경찰서 들락거리느라 불편해질수도 있지.”
“뭐, 그래도 일단은 그 방법 밖에는....” 그의 말에 갑자기 한숨이 나왔다.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한번 같이 찾아보자.” 그가 나에게 위안을 주려는 듯 그의 말에 힘을 주었다.
“재미있게 보내고 집에 가면서 문자해. 걱정되니까.”
“그래 알았어. 그럴게.”
전화를 끊고는 걸음을 옮기면서 순간 지훈이 형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의 모습과 함께 설마와 혹시 라는 물음표가 따라왔다. 하지만 왜? 무엇 때문에 그가 그런짓을? 이미 한참 전에 자기가 버린 전 애인에게?
그가 아니면 도대체 누가?
10분 여유있게 카페에 도착했지만, 호진이와 상대방 남자는 이미 먼저 도착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호진이에게 손을 슬쩍 들어보인 다음, 그를 향해서 꾸벅하고 인사를 해 보였다.
그도 그런 나를 보고 얼굴 한가득 웃음을 지으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상현이라고 합니다.” 그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한지석입니다. 키가 크시네요.” 그의 손을 잡아 악수를 하면서 그에게 말했다.
“아. 예. 뭐.... 그리 크진 않은데요.” 그가 한번 쑥스러운 표정으로 씨익 웃어보이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말은 했지만, 그는 180은 확실히 훌쩍 넘어보였다.
“뭐 마실래?” 호진이가 나를 보고 물었다.
“그냥 따뜻한 아메리카노.”
나의 말에 호진이 옆에 앉아있던 그가 벌떡 일어나 카운터쪽을 향해 걸어갔다.
“나와줘서 고맙다.” 주문을 하는 그의 뒷모습을 한번 흘끗 보고는 그렇게 말하는 호진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녀석이 그런 나를 보고 쑥스러운 표정으로 웃어보였다.
그런 호진이에게 갑자기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소개해 준 상대가 자리를 비우게 되면, ‘저 사람 진짜 괜찮은 사람이야.’ 이라던가, ‘저 사람 잘 생겼지?’ 와 같은 그런 말을 늘어놓을 것이라는 나의 예상과는 달리, 그는 나를 보면서 그렇게 고마움을 표현했다.
내가 혹시 나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을까? 내가 약속을 어길 사람처럼 보였던가? 아니면 어쨌든, 이런 상황에 대해서 나의 반응이 불안했을까?
“너 몸은 괜찮은거지?” 호진이 다시 나에게 물었다.
“나? 나야 건강하지 왜?” 갑작스러운 그의 질문에 내가 당황스러워졌다.
“너, 나랑 통화할 때 들으니까 목소리 완전히 가라앉았던데 뭐. 재채기도 하고.....” 그가 빙긋 웃었다.
“요새 감기 걸리면 오래 가. 조심해야지.”
“아....” 그의 말에 나는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 주문을 마친 그가 돌아왔다.
호진이 화장실에 가 버린 후로,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커피를 한모금 마신 후 그는 붉어진 얼굴로 얼굴에 미소를 띤 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듯 했지만 계속 머뭇거리는 듯 싶었다.
“저.....” 그런 그를 보면서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네?” 내가 먼저 말을 거는 것이 반가운 듯 그가 기쁜 얼굴로 반응을 보였다.
“뭐라고 호칭을....그냥 상현이형이라고 불러도 되지요?”
“아. 네. 편하신대로...” 그가 미소를 지었다.
“키도 크시고 멋지시네요. 운동도 하셨나봐요?”
물론 그가 잘생긴 외모와 멋진 몸매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틀림 없었다. 하지만, 혹시라도 나중에 나로 인해서 호진이 불편한 상황에 처하지 않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에게 최소한 좋은 인상을 주어야 겠다는 생각에 그의 외모를 칭찬하는 말이 입 밖으로 쉽게 나왔다.
그의 외모가 얼마나 멋지건 그는 나와 인연이 아닌 사람처럼 여겨진 것이 또한 내가 그를 편한 마음으로 대하도록 만들어 준 듯 했다.
“아. 예. 감사합니다.” 그는 마치 소년 같은 미소로 나를 보고 웃어 보이고는 다시 손을 뻗어 자신의 커피잔을 들었다.
“혹시 직업이 보디가드신가요?”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칭찬과 관심을 보이는 것이 가장 좋은 화술이라고 어딘가에서 들은 듯 했다. 그래서 그의 외모를 보고 드는 생각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아. 그런건 아니구요. 몇 년 동안 항공기 스튜어드로 일했어요.”
“아....” 그의 말에 항공사의 유니폼을 입은 그를 상상해 보았다. 꽤 잘 어울릴듯했다.
“그런데, 왜 아직 혼자신지...”
“아...” 나의 질문에 그가 입을 벌리고 한번 씨익 웃어보였다.
“외국으로 많이 다니다보니 국내에서 지내는 스케줄이 일정치 않아서요. 누굴 만나게 되면 혹시라도 내가 그를 외롭게 만들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럼 지금은...”
“지금은.... 얼마전부터 지상근무로 자리를 옮겼어요. 그러면서 ‘이제 시간적 여유가 되니까 연애 좀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시군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딴이 다른 할 말을 찾지 못해서 호진이가 돌아오길 기다렸지만 여전히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전에 지석씨를 몇 번 본적이 있어요.” 그가 이제 한결 편해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그냥. 반말 하셔도 되는데요.”
“예, 나중에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그가 쑥스러운 듯 다시한번 씨익 웃어보였다.
그런 그를 보면서 슬며시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예전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석씨가 지훈이 만나고 있을 때 종로에서 몇 번 오다가다 스쳐지나가다 보았어요.” 말을 마치고 그가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지훈이형 아세요?” 그의 입에서 지훈이 형의 이름이 나온것에 놀라 무의식적으로 큰 소리가 나와버렸다.
“아, 친한 건 아니고요. 그냥 얼굴만 알아요. 술자리에서 몇 번 마주친거라서....” 그가 나의 반응에 조금 놀란 듯, 상기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다가 어쩌다 헤어졌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 말을 하면서 그는 마치 그것이 자신의 탓인 것 마냥 미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짐짓 별일 아니라는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하면서 나는 커피잔을 들어 한모금 마시고는 다시 내려놓았다.
“올해 7월 중순에 홍콩에서 인천국제공항으로 비행기 타고 오셨죠?” 그가 웃으면서 물었다.
“정확히 7월 16일 12시30분 캐세이패시픽 비행기였는데....” 그가 나의 표정을 살피면서 다시한번 씨익 웃었다.
“그럼, 혹시.....”
“네. 그 비행기에서 승객 서비스를 하다가 지석씨가 탑승한 것을 봤어요. 회사 부장님이라는 분하고 같이 타신 것 같던데.... 제가 음료 서비스하면서 의식적으로 눈 마주치고 했었는데 저 못 알아보더라구요.” 말을 마치고 그가 크게 웃었다.
“아. 죄송합니다.” 무의식적으로 왼손으로 뒷통수를 긁적거렸다.
“아니예요.” 그가 그런 나를 보면서 여전히 밝게 웃으면서 손사래를 쳤다.
“그날, 일 마치고 집에 돌아간 다음에 일기까지 썼는걸요. 이게 인연일 거라고.... 반드시 인연이어야 한다고...”
“.............”
“무슨 부담을 주려고 한 말은 아닙니다.” 그의 말에 고개를 슬며시 숙이는 나를 보고 그가 다시 큰 소리로 웃었다.
“전 그냥, 호진이에게도 말해 놓았지만, 지석씨 아는 친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가깝게 알고 지내면서 힘들 때 의지가 될 수 있고 편하게 의논할 수 있는 그런 상대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호진이에게 말한거거든요.”
그의 말에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전, 그거면 돼요. 더 욕심 안부릴게요. 여튼 지금 만나보고 있는 사람도 있는걸로 알고 있어서......” 그가 말 끝을 흐리고는 다시 커피잔을 들었다.
“그런데......”
내가 입을 열자 그가 마시던 커피잔을 다시 내려놓고 나를 바라보았다.
“왜 저예요? 상현이형처럼 멋진 분이 저같이 흔한 놈을.... 훨씬 더 나은 사람들도 많을텐데...”
“지석씨가 어때서요?” 나를 보고 그가 씨익 웃었다.
“그리고 사실....그건 또 운명적인 거예요.”
“.........”
“어떤 홀 안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어느 순간 어떤 누군가를 보게 되면서, 그 이후에는 다른 사람들은 전부 보이지 않는거예요. 그때부터는 세상이 그 상대를 중심으로 돌게 되는거죠. 마치 사진을 찍을 때 그 사람만 윤곽이 정확하게 보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흐릿하게 나오는 현상과 같은거죠.” 그가 말을 멈추고 나의 얼굴을 보고는 다시 밝게 웃었다.
“전 그런 적이 없는 것 같은데요.” 그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건...” 그가 다시 자신의 커피에 손을 뻗으면서 입을 열었다.
“지석씨의 인연이 그 안에 없었기 때문이죠. 인연을 만난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가요? 운명의 신이 세상 사람들의 삶으로 베틀을 돌려서 천을 짜는데, 그 셀 수 없이 많은 실 중에서 가느다란 실 두 개가 천번을 스쳐야 그런 인연이 맺어지는 거래요.” 그가 커피를 한모금 마시고 다시 나를 보고 씨익 웃어보였다.
“그렇게 진정한 인연은 만나기가 어려우니 대부분 사람들이 적당히 현실과 타협해서 몇 번에서 몇십번 스쳐지나갔던 인연과 적당하게 살아가는 거래요.”
“.........”
“그냥 가끔 이렇게 만나서 세상 돌아가는 얘기 하면서 지내요.” 평안하고 낮은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인생은 럭비공 같아서 절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튀지 않거든요. 그래서 살아가다보면 친구들과 지인들이 필요하지요. 잘못된 방향으로 튈 때 붙잡아 줄 수 있거든요. 본인은 자신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것을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은 보게 되잖아요.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진실한 벗들이 필요하지요. 그리고 자신도 스스로 그만한 현명함을 갖추어야만 하고요.”
끝내 호진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한참 후에 ‘집에 급한 일이 생겨서 가게 되었다’ 고 ‘미안하다’ 는 문자만 달랑 왔을 뿐이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집을 향해 천천히 발을 옮기고 있었다.
11월 말의 차가운 바람이 등 뒤에서 불어와 나를 앞으로 밀었다. 가을까지 땅위에서 살아 숨쉬던 생명체들이 모두 사라져 버린 듯 어둡고 을씨년스러웠다. 올려다 본 하늘에는 얼어붙은 듯 보이는 달조각과 흩뿌려진 별들이 그런 세상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렇게 길을 걸어가면서 갑자기 대화할 상대가,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립다는 생각이 들 때, 휴대폰이 울렸다.
“집에서 쉬고 있어?” 승호가 물었다.
“이제 집에 거의 다와 가.”
“좀 늦었네?” 그의 목소리가 쓸쓸한 듯 느껴졌다.
“어쩌다 보니 좀 늦었다.”
“어서 들어가서 쉬어야지. 피곤할텐데...”
“가서 대충 씻고 그냥 자야겠다. 좀 피곤하네.” 그의 말에 맞장구를 치고는 슬며시 낮은 한숨을 쉬었다.
“아! 그건 그렇고.” 그가 무엇인가 잊었다가 기억났다는 듯 목소리가 커졌다.
“........”
“너 아무래도 그렇게 있는 것이 걱정되어서, 내가 강아지 한 마리 주려고....”
“뭐? 웬 강아지?” 그의 뜻밖의 말에 언 뜻 발을 멈추고 그에게 물었다.
“치와와인데, 너 가져다 키워. 없는 것보다 훨씬 나을거야. 모르는 사람이 집에 들어오거나 하면 가만 안있을 거다. 그게 몸은 좁쌀 만해도 낯선 사람한테는 성질이 지-랄 맞아서. 혼자 있는 것보다는 훨씬 의지가 될거야. 나도 너 생각하면 마음 좀 편해질테고... ”
“.......”
“왜 대답이 없어?” 가만히 대답도 하지 않고 있는 나를 느끼고 그가 물었다.
“강아지를 키울 생각을 해 본적이 없어서....”
“키우다가 안되겠다 싶으면 내가 다시 데리고 오던가 할게.”
“.........”
“그렇게 해봐. 당분간만이라도.... 치와와 그거 무지 비싼거다. 너 알어?”
“..........”
“알았지? 주말에 데리고 갈게. 당분간이라도 잘 키워봐. 그런데 너 정 한번 붙이면 아마 나중에 내가 데려간다고 해도 안된다고 펄쩍 뛸걸.” 그의 웃음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샤워를 마치고 방안에 들어와 침대 끝에 걸터 앉았다.
갑자기 강아지라니....
나는 아직까지 나 혼자, 내 자신을 건사하기도 벅찬 삶을 살아왔다. 그런 내가 또 다른 한 생명을 책임질 수 있을까?
그의 말대로 내가 집에 없는 사이에 누군가 타인이 강제로 내 집에 들어오려고 한다면 강아지가 지킴이 역할을 할 수 있을 듯 싶었다. 어느 누구든 여러 가구가 살고 있는 공간에서 타인들의 시선을 끌만한 소란을 부리고 싶지는 않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내가 강아지를 키우는 목적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어쩐지, 나의 집에서 내가 살아가는데, 내 자신이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닌 그가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느낌이 언 뜻 들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나를 위한 결정이었을 것이라는 것은 틀림 없었다.
내가 생각지도 못하는 사이에, 삶의 다른 곳에서 다른 것에 신경을 쓰고 있는 동안에도 그는 나의 안전을 계속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를 위해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었을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여튼, 그의 제안을 따르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의 호의를 거절하는 것이 쉽지 않았고, 또 만일 내가 생각한 대로 그 강아지와의 동거가 흘러가지 않는다면 그에게 다시 돌려주면 되는 일인 듯 싶었다.
전등을 끄고 나는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그리고 눈을 감고 슬며시 현실이 아닌 다른 세상으로 여행을 하기 시작했다.
점심시간이 지날 무렵부터 어두워지던 날씨가 세시경이 되면서부터 눈발이 하나둘씩 날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눈이 이런거야’ 라는 맛보기만 보여주는 듯이 곧 매서운 바람만 남겨놓고 눈의 그림자는 사라져 버렸다.
“부장님 보고서 결재 부탁드립니다.”
싱가폴 바이어가 돌아간 후, 새로 체결한 계약건에 대한 보고서를 들고 그렇게 부장의 자리 앞에 서 있었다.
“어, 그래.”
컴퓨터 모니터에 시선을 두고 있던 부장이 내가 그에게 내민 결재서류에 시선을 두었다.
“근데, 한지석씨. 혹시...” 서류를 받아 놓고는, 왼손으로 옆머리를 긁적이면서 부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네?”
“며칠전에 회식하면서 음식점에서 결제하고 받은 영수증이 안보이네.” 말을 멈추고 그가 들고 있던 펜을 책상에 툭툭하고 쳤다.
“분명히 받은거 같은데 말야.” 그가 몸을 뒤로 기울여 의자 등받이에 기대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부장님, 그거...”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채고는 멋쩍게 웃어보였다..
“경리과에서 경비처리 빨리 해달라고 독촉하는데 부장님 자리에 그때 안계셔서 제가 그냥 은행 홈페이지에서 재발급해서 올렸습니다.”
“아. 그래?” 그의 어두웠던 표정이 한순간 밝아졌다.
“그런게 있었어? 난 그런것도 모르고 영수증이 없길래 며칠전에 쓰레기통까지 뒤져봤거든.” 그가 말을 마치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다행이네. 고마워.”
“아닙니다. 부장님.”
“서류는 나중에 확인해 볼테니까. 퇴근 시간 다 되었으니 정리하고 퇴근해. 남은 일은 급한거 아니면 월요일에 하지 뭐.” 그가 나를 보고 너털웃음을 웃어보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막 회사 건물의 정문을 나올 때 휴대폰이 울렸다.
“불금인데 소주한잔 할까?” 승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어쩌지? 오늘 다른 친구하고 만나기로 했는데...”
“아, 그래? 누군데?”
“뭐, 누구라고 말하면 알아? 호진이라고 오늘 차 한잔 하기로 했어.” 말을 하고는 내가 ‘픽’하고 웃었다.
“다른 약속이 있으면....뭐 어쩔 수 없지.”
“주말에 봐. 그땐 다른 약속 없으니.”
“그래. 알았어.”
“근데....” 그가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 다음에는 무슨 일 없지?”
“......”
“또 누가 와서 저번처럼 소동 피운 건 아닌가 해서...”
“아..... 속으로 좀 불안불안 했는데, 그 다음엔 아무일도 없네. 다행히...”
“다행이네. 너 혼자 있을 때 또 누가 와서 지-랄하면 어쩌나 했는데...”
“그러면, 그때는 경찰 불러야지.” 당연하다는 듯이 여유로운 목소리로 내가 대꾸했다. 싸이코의 미친짓에는 경찰이 최선의 방법이 틀림 없었다.
“그것도 좋지만......” 그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력범죄도 감당 못하는데, 그런일에 경찰이 뭐 신경 많이 써주겠어? 이래라 저래라 왔다갔다 너만 경찰서 들락거리느라 불편해질수도 있지.”
“뭐, 그래도 일단은 그 방법 밖에는....” 그의 말에 갑자기 한숨이 나왔다.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한번 같이 찾아보자.” 그가 나에게 위안을 주려는 듯 그의 말에 힘을 주었다.
“재미있게 보내고 집에 가면서 문자해. 걱정되니까.”
“그래 알았어. 그럴게.”
전화를 끊고는 걸음을 옮기면서 순간 지훈이 형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의 모습과 함께 설마와 혹시 라는 물음표가 따라왔다. 하지만 왜? 무엇 때문에 그가 그런짓을? 이미 한참 전에 자기가 버린 전 애인에게?
그가 아니면 도대체 누가?
10분 여유있게 카페에 도착했지만, 호진이와 상대방 남자는 이미 먼저 도착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호진이에게 손을 슬쩍 들어보인 다음, 그를 향해서 꾸벅하고 인사를 해 보였다.
그도 그런 나를 보고 얼굴 한가득 웃음을 지으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상현이라고 합니다.” 그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한지석입니다. 키가 크시네요.” 그의 손을 잡아 악수를 하면서 그에게 말했다.
“아. 예. 뭐.... 그리 크진 않은데요.” 그가 한번 쑥스러운 표정으로 씨익 웃어보이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말은 했지만, 그는 180은 확실히 훌쩍 넘어보였다.
“뭐 마실래?” 호진이가 나를 보고 물었다.
“그냥 따뜻한 아메리카노.”
나의 말에 호진이 옆에 앉아있던 그가 벌떡 일어나 카운터쪽을 향해 걸어갔다.
“나와줘서 고맙다.” 주문을 하는 그의 뒷모습을 한번 흘끗 보고는 그렇게 말하는 호진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녀석이 그런 나를 보고 쑥스러운 표정으로 웃어보였다.
그런 호진이에게 갑자기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소개해 준 상대가 자리를 비우게 되면, ‘저 사람 진짜 괜찮은 사람이야.’ 이라던가, ‘저 사람 잘 생겼지?’ 와 같은 그런 말을 늘어놓을 것이라는 나의 예상과는 달리, 그는 나를 보면서 그렇게 고마움을 표현했다.
내가 혹시 나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을까? 내가 약속을 어길 사람처럼 보였던가? 아니면 어쨌든, 이런 상황에 대해서 나의 반응이 불안했을까?
“너 몸은 괜찮은거지?” 호진이 다시 나에게 물었다.
“나? 나야 건강하지 왜?” 갑작스러운 그의 질문에 내가 당황스러워졌다.
“너, 나랑 통화할 때 들으니까 목소리 완전히 가라앉았던데 뭐. 재채기도 하고.....” 그가 빙긋 웃었다.
“요새 감기 걸리면 오래 가. 조심해야지.”
“아....” 그의 말에 나는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 주문을 마친 그가 돌아왔다.
호진이 화장실에 가 버린 후로,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커피를 한모금 마신 후 그는 붉어진 얼굴로 얼굴에 미소를 띤 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듯 했지만 계속 머뭇거리는 듯 싶었다.
“저.....” 그런 그를 보면서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네?” 내가 먼저 말을 거는 것이 반가운 듯 그가 기쁜 얼굴로 반응을 보였다.
“뭐라고 호칭을....그냥 상현이형이라고 불러도 되지요?”
“아. 네. 편하신대로...” 그가 미소를 지었다.
“키도 크시고 멋지시네요. 운동도 하셨나봐요?”
물론 그가 잘생긴 외모와 멋진 몸매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틀림 없었다. 하지만, 혹시라도 나중에 나로 인해서 호진이 불편한 상황에 처하지 않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에게 최소한 좋은 인상을 주어야 겠다는 생각에 그의 외모를 칭찬하는 말이 입 밖으로 쉽게 나왔다.
그의 외모가 얼마나 멋지건 그는 나와 인연이 아닌 사람처럼 여겨진 것이 또한 내가 그를 편한 마음으로 대하도록 만들어 준 듯 했다.
“아. 예. 감사합니다.” 그는 마치 소년 같은 미소로 나를 보고 웃어 보이고는 다시 손을 뻗어 자신의 커피잔을 들었다.
“혹시 직업이 보디가드신가요?”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칭찬과 관심을 보이는 것이 가장 좋은 화술이라고 어딘가에서 들은 듯 했다. 그래서 그의 외모를 보고 드는 생각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아. 그런건 아니구요. 몇 년 동안 항공기 스튜어드로 일했어요.”
“아....” 그의 말에 항공사의 유니폼을 입은 그를 상상해 보았다. 꽤 잘 어울릴듯했다.
“그런데, 왜 아직 혼자신지...”
“아...” 나의 질문에 그가 입을 벌리고 한번 씨익 웃어보였다.
“외국으로 많이 다니다보니 국내에서 지내는 스케줄이 일정치 않아서요. 누굴 만나게 되면 혹시라도 내가 그를 외롭게 만들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럼 지금은...”
“지금은.... 얼마전부터 지상근무로 자리를 옮겼어요. 그러면서 ‘이제 시간적 여유가 되니까 연애 좀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시군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딴이 다른 할 말을 찾지 못해서 호진이가 돌아오길 기다렸지만 여전히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전에 지석씨를 몇 번 본적이 있어요.” 그가 이제 한결 편해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그냥. 반말 하셔도 되는데요.”
“예, 나중에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그가 쑥스러운 듯 다시한번 씨익 웃어보였다.
그런 그를 보면서 슬며시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예전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석씨가 지훈이 만나고 있을 때 종로에서 몇 번 오다가다 스쳐지나가다 보았어요.” 말을 마치고 그가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지훈이형 아세요?” 그의 입에서 지훈이 형의 이름이 나온것에 놀라 무의식적으로 큰 소리가 나와버렸다.
“아, 친한 건 아니고요. 그냥 얼굴만 알아요. 술자리에서 몇 번 마주친거라서....” 그가 나의 반응에 조금 놀란 듯, 상기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다가 어쩌다 헤어졌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 말을 하면서 그는 마치 그것이 자신의 탓인 것 마냥 미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짐짓 별일 아니라는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하면서 나는 커피잔을 들어 한모금 마시고는 다시 내려놓았다.
“올해 7월 중순에 홍콩에서 인천국제공항으로 비행기 타고 오셨죠?” 그가 웃으면서 물었다.
“정확히 7월 16일 12시30분 캐세이패시픽 비행기였는데....” 그가 나의 표정을 살피면서 다시한번 씨익 웃었다.
“그럼, 혹시.....”
“네. 그 비행기에서 승객 서비스를 하다가 지석씨가 탑승한 것을 봤어요. 회사 부장님이라는 분하고 같이 타신 것 같던데.... 제가 음료 서비스하면서 의식적으로 눈 마주치고 했었는데 저 못 알아보더라구요.” 말을 마치고 그가 크게 웃었다.
“아. 죄송합니다.” 무의식적으로 왼손으로 뒷통수를 긁적거렸다.
“아니예요.” 그가 그런 나를 보면서 여전히 밝게 웃으면서 손사래를 쳤다.
“그날, 일 마치고 집에 돌아간 다음에 일기까지 썼는걸요. 이게 인연일 거라고.... 반드시 인연이어야 한다고...”
“.............”
“무슨 부담을 주려고 한 말은 아닙니다.” 그의 말에 고개를 슬며시 숙이는 나를 보고 그가 다시 큰 소리로 웃었다.
“전 그냥, 호진이에게도 말해 놓았지만, 지석씨 아는 친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가깝게 알고 지내면서 힘들 때 의지가 될 수 있고 편하게 의논할 수 있는 그런 상대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호진이에게 말한거거든요.”
그의 말에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전, 그거면 돼요. 더 욕심 안부릴게요. 여튼 지금 만나보고 있는 사람도 있는걸로 알고 있어서......” 그가 말 끝을 흐리고는 다시 커피잔을 들었다.
“그런데......”
내가 입을 열자 그가 마시던 커피잔을 다시 내려놓고 나를 바라보았다.
“왜 저예요? 상현이형처럼 멋진 분이 저같이 흔한 놈을.... 훨씬 더 나은 사람들도 많을텐데...”
“지석씨가 어때서요?” 나를 보고 그가 씨익 웃었다.
“그리고 사실....그건 또 운명적인 거예요.”
“.........”
“어떤 홀 안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어느 순간 어떤 누군가를 보게 되면서, 그 이후에는 다른 사람들은 전부 보이지 않는거예요. 그때부터는 세상이 그 상대를 중심으로 돌게 되는거죠. 마치 사진을 찍을 때 그 사람만 윤곽이 정확하게 보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흐릿하게 나오는 현상과 같은거죠.” 그가 말을 멈추고 나의 얼굴을 보고는 다시 밝게 웃었다.
“전 그런 적이 없는 것 같은데요.” 그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건...” 그가 다시 자신의 커피에 손을 뻗으면서 입을 열었다.
“지석씨의 인연이 그 안에 없었기 때문이죠. 인연을 만난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가요? 운명의 신이 세상 사람들의 삶으로 베틀을 돌려서 천을 짜는데, 그 셀 수 없이 많은 실 중에서 가느다란 실 두 개가 천번을 스쳐야 그런 인연이 맺어지는 거래요.” 그가 커피를 한모금 마시고 다시 나를 보고 씨익 웃어보였다.
“그렇게 진정한 인연은 만나기가 어려우니 대부분 사람들이 적당히 현실과 타협해서 몇 번에서 몇십번 스쳐지나갔던 인연과 적당하게 살아가는 거래요.”
“.........”
“그냥 가끔 이렇게 만나서 세상 돌아가는 얘기 하면서 지내요.” 평안하고 낮은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인생은 럭비공 같아서 절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튀지 않거든요. 그래서 살아가다보면 친구들과 지인들이 필요하지요. 잘못된 방향으로 튈 때 붙잡아 줄 수 있거든요. 본인은 자신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것을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은 보게 되잖아요.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진실한 벗들이 필요하지요. 그리고 자신도 스스로 그만한 현명함을 갖추어야만 하고요.”
끝내 호진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한참 후에 ‘집에 급한 일이 생겨서 가게 되었다’ 고 ‘미안하다’ 는 문자만 달랑 왔을 뿐이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집을 향해 천천히 발을 옮기고 있었다.
11월 말의 차가운 바람이 등 뒤에서 불어와 나를 앞으로 밀었다. 가을까지 땅위에서 살아 숨쉬던 생명체들이 모두 사라져 버린 듯 어둡고 을씨년스러웠다. 올려다 본 하늘에는 얼어붙은 듯 보이는 달조각과 흩뿌려진 별들이 그런 세상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렇게 길을 걸어가면서 갑자기 대화할 상대가,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립다는 생각이 들 때, 휴대폰이 울렸다.
“집에서 쉬고 있어?” 승호가 물었다.
“이제 집에 거의 다와 가.”
“좀 늦었네?” 그의 목소리가 쓸쓸한 듯 느껴졌다.
“어쩌다 보니 좀 늦었다.”
“어서 들어가서 쉬어야지. 피곤할텐데...”
“가서 대충 씻고 그냥 자야겠다. 좀 피곤하네.” 그의 말에 맞장구를 치고는 슬며시 낮은 한숨을 쉬었다.
“아! 그건 그렇고.” 그가 무엇인가 잊었다가 기억났다는 듯 목소리가 커졌다.
“........”
“너 아무래도 그렇게 있는 것이 걱정되어서, 내가 강아지 한 마리 주려고....”
“뭐? 웬 강아지?” 그의 뜻밖의 말에 언 뜻 발을 멈추고 그에게 물었다.
“치와와인데, 너 가져다 키워. 없는 것보다 훨씬 나을거야. 모르는 사람이 집에 들어오거나 하면 가만 안있을 거다. 그게 몸은 좁쌀 만해도 낯선 사람한테는 성질이 지-랄 맞아서. 혼자 있는 것보다는 훨씬 의지가 될거야. 나도 너 생각하면 마음 좀 편해질테고... ”
“.......”
“왜 대답이 없어?” 가만히 대답도 하지 않고 있는 나를 느끼고 그가 물었다.
“강아지를 키울 생각을 해 본적이 없어서....”
“키우다가 안되겠다 싶으면 내가 다시 데리고 오던가 할게.”
“.........”
“그렇게 해봐. 당분간만이라도.... 치와와 그거 무지 비싼거다. 너 알어?”
“..........”
“알았지? 주말에 데리고 갈게. 당분간이라도 잘 키워봐. 그런데 너 정 한번 붙이면 아마 나중에 내가 데려간다고 해도 안된다고 펄쩍 뛸걸.” 그의 웃음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샤워를 마치고 방안에 들어와 침대 끝에 걸터 앉았다.
갑자기 강아지라니....
나는 아직까지 나 혼자, 내 자신을 건사하기도 벅찬 삶을 살아왔다. 그런 내가 또 다른 한 생명을 책임질 수 있을까?
그의 말대로 내가 집에 없는 사이에 누군가 타인이 강제로 내 집에 들어오려고 한다면 강아지가 지킴이 역할을 할 수 있을 듯 싶었다. 어느 누구든 여러 가구가 살고 있는 공간에서 타인들의 시선을 끌만한 소란을 부리고 싶지는 않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내가 강아지를 키우는 목적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어쩐지, 나의 집에서 내가 살아가는데, 내 자신이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닌 그가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느낌이 언 뜻 들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나를 위한 결정이었을 것이라는 것은 틀림 없었다.
내가 생각지도 못하는 사이에, 삶의 다른 곳에서 다른 것에 신경을 쓰고 있는 동안에도 그는 나의 안전을 계속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를 위해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었을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여튼, 그의 제안을 따르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의 호의를 거절하는 것이 쉽지 않았고, 또 만일 내가 생각한 대로 그 강아지와의 동거가 흘러가지 않는다면 그에게 다시 돌려주면 되는 일인 듯 싶었다.
전등을 끄고 나는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그리고 눈을 감고 슬며시 현실이 아닌 다른 세상으로 여행을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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