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너머의 세상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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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홀 안의 수많은 전시 부스에 우리 주변에서 항상 보이던 평범한 상품들이 상상을 초월하는 온갖 새로운 디자인으로 변신한 모습을 뽐내며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 잡고 있었다.
입구에 있는 첫 번째 부스부터 흔한 테이크 아웃 종이컵의 디자인 뿐이 아닌 다양한 디자인이 눈을 끌었다. 어떤 컵은 잡는 손가락에 맞도록 홈이 파여져 있고 또 그 손가락이 닿는 부분에는 특수재질의 물질이 첨가되어 있어 뜨거운 음료로부터 손을 보호하고 음료의 온도도 가능한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고 있었다.
“이거 좋은데요? 어때요?” 옆에서 내가 컵을 만지작거리는 것을 보고 있던 상현이 형에게 물었다.
“좋긴 한데요. 제조 과정이 복잡해지고 새로운 재료가 들어가게 되어서 제조 가격이 올라갈 것 같은데요. 그럼 가격 때문에 현실적으로는 좀....” 말끝을 흐리고는 그가 나의 눈치를 보면서 피식 하고 웃었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해 보이고는 다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형!”
“네?” 그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를 보면서 내가 피식하고 웃었다.
“왜요?” 내가 그렇게 웃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그가 물었다.
“‘형’ 하고 불렀는데, ‘네’가 뭐예요? ‘응’ 하고 대답해야죠.”
나의 말에 그가 무안해진 표정으로 뒷통수를 긁적거렸다.
나도 형에게 그냥 편하게 반말......까지는 아니고, 그래도 편하게 말하고 싶은데 형이 자꾸 존댓말을 하니까 불편하잖아요.“
“아....” 그가 크게 웃었다.
“그래. 알았어.” 다시 한번 웃어 보이더니 그가 나의 팔꿈치를 슬며시 잡았다.
“이제 됐지?”
“진작 그렇게 하시지. 얼마나 좋아요?” 여전히 무안해 보이는 표정을 하고 있는 그를 마주 보면서 나도 피식하고 웃었다.
두 번째 라인에 설치된 부스가 끝날 무렵에 위치해 있던 부스를 지나고 있었다.
다양한 종류와 디자인의 산업용 장갑이 전시 되어 있던 곳을 무심코 지나던 중, 그 부스의 안쪽에 앉아서 어떤 남자와 대화중인 한 중년부인이 나의 눈에 띄었다.
얼굴에 웃음이 가득한 채로 무엇인가 열심히 대화중이던 그녀의 모습이 어딘가 낯이 익어 보였다.
진열장에 전시되어 있던 장갑들의 색깔과 디자인을 들러보면서, 그리고 옆에 설치된 커다란 모니터를 통해서 방송되고 있는 상품의 광고에 시선을 두면서도 나는 슬며시 그녀를 곁눈질로 훔쳐보았다.
“왜?” 다음 부스로 넘어가던 그가 그렇게 어정쩡하게 서 있던 나를 돌아보고는 물었다.
“아. 아니예요.”
대답을 하고는 그를 따라서 코너를 도는 순간 반대편에서 급하게 걸어오던 한 남자와 부딪쳤다.
깔끔한 양복차림의 그는 앞머리가 이마를 덮고 눈썹아래까지 흘러내려와 있었다. 밝은 표정과는 달리 우수에 차 있는 듯 한 눈빛의 그 남자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나는 마치 얼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
“지석아.” 나를 보고는 나만큼 놀란 듯 보이는 그가 뚱그래진 눈으로 얼떨결에 나의 이름을 불렀다.
“......”
그런 그의 얼굴을 나는 여전히 놀란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의 눈앞에서 그렇게 굳어있던 그의 표정이 조금씩 부드러워지고 그의 입꼬리가 마치 웃는 듯, 혹은 우는 듯 움직이기 시작할 때였다.
“지훈아!” 나의 등 위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그의 눈이 나의 얼굴에게서 내 등 뒤로 옮겨갔다.
순간, 그 부스에 앉아있던 그 중년여성의 모습과 예전에 카페에서 나의 뺨을 세차게 후려갈기던 여자의 얼굴이 오버랩 되었다.
그러자, 곧 마치 그것이 바로 방금 전에 일어났던 일인 것처럼 나의 뺨이 얼얼해졌다.
눈에서 눈물이 핑 돌았다.
“미국에서 김 사장님 오셨다. 와서 인사드려야지.” 그녀의 가증스럽게 부드럽고 달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가요. 형.” 눈 앞에 그렇게 서있는 그의 얼굴을 외면하고 얼떨떨한 표정으로 나와 그의 눈치를 살피고 있던 상현이형의 팔을 잡고는 슬며시 그를 피해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서 그녀의 여우같은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마치 에우뤼디케의 손을 잡고 저승에서 벗어나던 오르페우스 마냥 그렇게 그의 손을 잡고 부지런히 걸었다.
전시 부스와 사람들이 과거로 빨려가는 것처럼 그렇게 나의 시야 밖으로 지나쳐갔다.
나에게 손이 잡힌 그도 아무 말 없이 나의 뒤를 따라왔다.
그리고 마침내 전시장 밖으로 나온 후, 찬 겨울바람이 얼굴에 닿는 순간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는 그를 돌아보았다.
그가 슬며시 팔을 벌려 나를 그의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팔!‘
나의 입에서 참았던 분노가 튀어나왔다.
“욕이라도 한바가지 퍼부어주고 올 걸...” 나의 울음섞인 목소리가 시원스럽게 터져 나오지 못하고 혼잣말처럼 입 밖으로 나와 간신히 내 귓가에 닿았다,
그리고 그렇게 그에 기댄 채, 입을 악물고 참으려고 했지만 꼭 감은 눈 밖으로 눈물이 배어나왔다.
“씨*새끼. 망할 년!” 그를 부둥켜안은 채, 머릿속에 떠오른 나를 노려보던 그의 어머니의 모습에 대고 저주를 퍼부었다.
무슨 일 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슬며시 나의 등을 다독이고 있었다.
싱가폴 바이어에게서 연락이 온 것은 점심식사를 마친 후,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지난 주말에 도착한 물품 중에서 불량품이 섞여 있다는 컴플레인이 접수된 후, 국내의 생산업체와 통화를 하고는 부장이 나를 불렀다.
“한지석씨. 급하게 좀 싱가폴에 다녀와야 할 것 같은데....”
“예. 불량품은 얼마 정도나...”
“그걸 가서 알아 보고 와. 전화상으로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보다 한지석씨가 거기 가서 눈으로 정확하게 불량률 확인하고 그쪽이 바라는 것 좀 잘 들어보고 해결방안 좀 찾아 보자고. 그 자료를 가지고 오면 그걸로 생산업체로 가서 다시 따져보고 말야.”
‘예. 알겠습니다.“
“당장, 오늘내일은 무리일 테니까, 수요일에 출발해서 목요일 하루 일 잘 보고 금요일에 오는 걸로 하지. 거래업체에는 스케줄 미리 연락해 놓고. 왕복 비행기표 잡아 놓고....”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자리에 돌아와서 앉아 모니터를 멍하니 바라보면서 처리해야할 일보다 먼저 반디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2박3일을 혼자 집에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승호에게 부탁을 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도 요즈음 무슨 일인지 바빠서 주말에도 얼굴을 비치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오산까지는 먼 거리였다.
애완동물을 잠시 맡길 수 있는 보호소나 탁아소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인터넷을 뒤져보다가 갑자기 1층에 살고 있는 노부부가 머리에 떠올랐다.
애완견을 사랑하고 마음도 넓으신 것으로 여겨지는 분들이셨으니 사정믈 말하면 그 동안 반디를 맡아 주실 듯 싶었다.
그렇게 앞이 꽉 막혀 있다면 그렇다고 좌절을 할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살아가다가 문제가 생길 때 둘러보면 어떻게든 해결책은 있는 듯 싶었다.
그래도 앞이 꽉 막혀 있다면, 그래도 더 버텨봐야 하는 것이 인생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만 슬며시 조금 돌려서 시야를 넓히기만 하면 그때까지 보이지 않던 희망의 끄트머리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불량품도 어떻게든 방법을 찾으면 해결책이 있을 것이었다.
세상의 일은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다.
항상 새 자전거처럼 그렇게 기분좋게, 신나게 달릴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낡은 타이어가 펑크가 났다고 해서 그곳에서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스스로 펑크가 난 타이어를 관찰해 보고 수리해보고 돌봄으로서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동행해야만 하는 것들에 관심을 갖게 되고 그것으로 지혜를 얻게 된다.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나는 걸어 놓았던 패딩을 입고 회사의 건물을 나섰다.
그리고 빠르게 돌아가고 있는 세상의 바쁜 저녁 시간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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