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너머의 세상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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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철도의 열차는 막 운서역을 지나고 있었다.

 

창 밖으로 한 겨울의 찬바람속에서 건조하고 메마른 나무들이 희망을 잃은 듯 멀거니 서 있었고 사이사이로 보이는 건물들이 무겁게 웅크리고 있는 듯 보였다.

   

 

싱가폴의 거래처에서 확인한 불량품의 상태는 예상보다 더 좋지 않아 보였다.

 

잔뜩 불만스러운 표정의 바이어는 전량 반품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그런 그를 간신히 설득하여 불량품의 110%를 올해 안으로 다시 선적하고 그에 따른 모든 부대비용은 전적으로 한국 업체측에서 부담하는 것으로 합의를 했다.

 

연말에 예상치 못했던 출혈로 인해 회사측에서는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 틀림 없어 보였다.

 

 

캐리어를 끌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우선 회사로 향했다.

 

사리사욕을 취할 줄 모르고 무던한 성격인 부장이 어떻게 그 불량건을 윗선에 보고했는지 몰라도 뜻밖의 평온한 사무실의 분위기에 나는 사뭇 놀랄 수밖에 없었다.

 

부장과의 간단한 회의를 끝내고 보고서를 작성하고는 다시 캐리어를 끌고 퇴근을 하는 다른 직원들의 뒤를 따라 건물 밖으로 빠져나왔다.

 

 

역에서 내려 걸음을 재촉하는 찬바람에 부지런히 발을 움직여 마침내 건물로 들어왔다.

 

1층 노부부댁 현관의 벨을 누르고, 그제서야 느긋하게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래, 출장 잘 다녀왔어?” 현관문을 열고는 할머니가 반가운 표정으로 웃으시면서 나를 올려다보셨다.

“예. 반디 봐주시느라 고생 많으셨죠?” 그렇게 말을 하면서 나는 슬며시 집 안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나의 목소리에 쪼르르 달려 나와야 할 반디가 보이지 않았다.

“고생은 무슨....” 여전히 할머님은 웃는 얼굴로 나를 올려다 보셨다.

“근데, 반디는.....”

“어제 친구가 와서 데리고 갔는데? 목욕도 시키고 동물병원에서 진단도 받게 한다면서....4층 총각에게도 연락했다던데?”

“네? 어떤 친구가요?” 그녀의 말에 깜짝 놀라 집안을 둘러보던 시선을 그녀에게 돌렸다.

“전에 반디 주인이었다고 그러던데... 자기가 데리고 있다가 출장에서 돌아오면 직접 데려다 준다고 강아지 케이지까지 가지고 왔던데....” 나의 놀란 얼굴을 의아한 표정으로 할머니가 올려다보았다.

불안한 마음에 휴대폰을 들어 승호에게 전화를 했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걱정과 조바심이 나면서 혹시나 해서 휴대폰에 저장해 놓았던 승호의 사진을 찾아 할머니에게 보여드렸다.

“이 친구인가요?”

나의 말에 그녀가 잠시 그의 사진에 시선을 둔 후에 고개를 저었다.

“이 사람 아닌데....” 할머니가 나를 올려다 보았다.

나의 표정을 살피면서 그런 할머니도 점점 불안한 모습으로 바뀌어갔다.

“혹시 그 사람 말고 다른 친구가 데려갔겠지.” 마치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말씀하셨지만 그목소리에는 나와 같은 불안함이 뭍어나고 있었다.

 

승호외에 반디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상현이 형 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내가 살고 있는 곳도 모르고 있었다. 게다가 그에게 강아지의 이름을 말한 적도 없었고, 내가 출장을 가는 동안 1층 노부부에게 반디를 맡길 거라는 것은 더더욱 그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 도대체 누가 반디를 데려간 것일까.

 

눈 앞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마치 누가 나의 목을 조르는 듯, 아니면 산소가 부족한 공간에 갇히게 된 것처럼 숨을 쉬는 것이 힘들어졌다.

“예. 우선 제가 그럼 알아보겠습니다.” 넋이 나간 얼굴로 할머니에게 간신히 말을 건넨 후 몸을 돌렸다.

 

그렇게 어떻게 된 일인지 전혀 영문도 모른 채 멍한 상태로 계단을 걸어 올라와 집의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캐리어는 현관 문 안에 떨구어 놓은 채 방안으로 들어와 의식하지 못한 채로 패딩을 벗어서 침대위에 던져 놓고는 팔짱을 끼고는 방안을 왔다갔다 걷기 시작했다.

 

생각을 하려고 해도 마치 방해 전파로 인해 주파수가 제대로 잡히지 않는 무전기 마냥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휴대폰을 다시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이번에는 한참 동안의 신호 뒤에 승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야.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조바심에 짜증섞인 목소리가 나의 입을 통해 나왔다.

“아, 미안. 일이 많아서 요새 꼼짝을 못하네.....”

“그건 그렇고..” 급한 마음에 그의 말을 중간에 잘라버렸다.

“싱가폴 출장 동안에 1층에 사는 할머니에게 반디를 맡겨 놓았는데, 그 사이에 아는 친구가 데려갔다고 하시네. 너 아니지?”

“나 아닌데.. 나 지금 일 때문에 며칠째 춘천에 와 있다.”

“그럼, 누구지?” 마치 혼잣말을 하듯이 그에게 물었다.

“잘 생각해 봐. 혹시 나에게 말고 거기 맡기기 전에 맡아달라고 연락해 본 사람 없었어? 나중에라도 마음 바뀌어서 돌봐주려고 데리고 갔을 수도 있지.”

“아니야.” 마치 그가 앞에 서 있는 것처럼 고개를 저었다.

“아무에게도 말 안했어. 그럴 사람도 없고....”

“그럼....” 그가 말을 꺼내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왜? 뭔데?”

“아냐. 그럴리는 없겠지.” 그가 여전히 의심스러운 투로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뭔데? 그냥 말해 봐.”

“혹시...정말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

네 전 애인 아닐까 해서...너가 예전에 성격이 싸이코라고 하길래...”

“.........”

“설마 그렇진 않겠지?” 그가 모호한 말투로 슬며시 말했다.

 

전화를 끊고는 침대 가장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여전히 상식적으로 그럴리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누군가 반디를 데려갔다는 사실도 여전히 이해 되지 않는 일이었다.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나는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

그리고 혹시나 내가 삭제하지 않고 남겨놓은 지훈이형의 사진이 있는 지 휴대폰의 사진폴더를 뒤져보기 시작했다. 그의 사진이 나오면 아래층에 내려가서 할머니에게 보여주고 확인만 해보면 되는 일이었다.



혹시라도 스쳐 지나갈 까봐 수많은 사진을 하나씩 눈여겨 보면서 확인했지만, 그곳에 남아 있는 그의 사진은 없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휴대폰의 통화 목록을 뒤져 보기 시작했다.

예전에 그가 나에게 전화를 한 적이 있었다. 승호를 조심하라는 그런 터무니 없는 말을 그는 했었다.

그의 휴대폰 번호는 이미 나의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의 손은 계속해서 통화 목록을 돌려보고 있었다.

‘왜’ 인지는 알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나에게 전화를 한 그 후, 멀거니 그의 낯선 휴대폰 번호를 들여다 보는 순간 마치 익숙한 번호처럼 그렇게 기억속에 남겨져 버렸다.

 

눈으로 그의 번호를 확인하려고 휴대폰의 액정화면을 이리저리 돌려보던 손가락이 천천히 그의 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지훈이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갑자기 입 밖으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괜찮아. 너 인거 알아.” 그가 낮고 부드럽게 말했다.

“저기....”

그 와의 관계가 끝이 나던 날, 통화중에 들리던 그의 빈정거리던 말투가 고스란히 다시 귓속에 들리는 듯 했다. 눈 앞에는 그의 어머니의 날카로운 눈빛이 아른거렸다.

‘욱’하고 울분이 쏟아져 나오려고 했지만 만일 그가 정말로 반디를 데려갔다면, 그리고 그 녀석을 찾아오기 위해서는 감정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정적으로 맞섰다가 그가 반디에게 해코지라도 한다면 더 큰 일이었다.

“혹시... 내 강아지 데리고 갔어?‘ 감정을 최대한 억누르고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

“.........”

‘반디 말야. 형이 데리고 갔어?“ 휴대폰을 잡고 있는 왼손에 땀이 배어나왔다. 오른손으로는 슬며시 가슴을 문질렀다.

“형. 그러지 말고 반디는 돌려 줘. 제발 부탁해.” 그렇게 말을 하고는 천천히 낮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 혹시라도 내가 예전에 형에게 잘못한 게 있어서 많이 화가 났다면.... 그래서 전에 우리집 현관 앞에 오물 쏟아버리고 간 거라면... 그런 거 다 이해해.”

“.........”

“하지만 그렇다고 반디는 마음대로 데려가면 안 되는 거잖아. 그래도 살아있는 생명인데...”

“......”

여전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화난 거 있으면 분풀이는 나에게 하고 반디는 돌려줘.” 가능한 침착한 목소리로 천천히 휴대폰에 대고 말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그가 그랬을 리가 없다는 생각이 가득 차 있었다. 내가 생각지 못했던 다른 일이 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끝이 좋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와 사귀던 일년 반 동안의 그의 모습은 따뜻한 모습이었다. 절대 그런일을 벌일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 그의 낮은 목소리가 마침내 다시 들려왔다.

“돌려줄게.”

 

 

 

어두운 방안에서 침대에 웅크리고 모로 누워있었다.

 

설마 그가 그랬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말도 없이 반디를 데리고 갔다는 사실이, 그리고 그것이 나를 괴롭히기 위한 이유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그가 예전에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라는 이유만은 아니었다.

그도 평범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생명체에 대한 사랑과 경외감을 가지고 있었다.

 

 

 

 

예전에 그와 사귀던 시절 어느 토요일, 종각역 뒤편에 있던 김밥천국에서 같이 점심을 먹을 때였다.

김밥에 떡라면을 맛있게 먹던 그가 나에게 물었다.

“뭐 색다르게 먹고 싶은 거 없어?”

“음.. 뭐 먹고 싶은거야 많지만 딱 하나만 고르자면.....” 그의 질문에 눈앞에 여러 음식의 먹음직스런 모습이 지나갔다. 모두 입맛을 당기게 하는 것이었고 그 중에 한가지를 고른다는 것이 어려웠다.

그렇게 딱 한가지를 고르지 못하는 나를 보던 그가 씩 하고 웃더니 입을 열었다.

“그럼, 다음주말에는 샐러드 바에 갈까? 스테이크 하나 시키고...”

“에이, 무지 비쌀건데... 최소 칠팔만원은 넘을 건데....” 내가 그를 보고 손을 저었다.

“괜찮아. 다음 주 목요일이 형 급여일이잖아. 맛있는 거 사주고 싶어서 그래.” 그가 해맑은 눈빛으로 환하게 웃었다.

“그럼......” 그렇게 무엇인가 나에게 해주고 싶어 하는 그를 보면서 무엇인가 그에게 부담이 되지 않으면서도 같이 기쁨을 나눌만한 가격선에서 있을만한 메뉴를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길 건너편에 일식 음식점이 있던데... 거기서 스시 세트로 먹으면 어때? 가격도 2인에 삼만원이라고 적혀 있던데...”

“스시......?” 그가 나를 보면서 멋쩍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왜? 스시 싫어해?” 그런 그를 보면서 놀란 듯 그에게 물었다.

“아냐. 그래. 그럼 스시 먹으러 가자.” 그가 씨익 웃어보였다.

하지만, 어딘가 그의 표정이 불편해 보였다. 혹시 그가 스시를 못 먹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라도 알레르기가 있는데도 나를 위해서 가겠다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왜? 표정이 아닌데 뭐. 형도 좋고 나도 좋아야지. 얼른 솔직하게 털어나 봐. 스시 못먹어?”

나의 질문에 다시 그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사실...” 그가 잠시 머뭇거렸다.

‘어렸을 때, 식구들 따라서 횟집에 간 적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아주 비싼 회를 시키셨어. 그런데 회가 나왔는데, 생선이 아직 살아서 꼬리도 움직이고 입도 뻐끔 거리는 거였어.“

“.......”

“그런데 몸은 모두 조각조각 베어져서 접시 위에 올려져 있는 거였어. 가족들은 모두 맛있다고 집어다가 초고추장에 찍어서 먹는데, 나는 못 먹겠더라고...”

그가 말을 멈추고 피식 하고 웃었다.

“어린 마음에 ‘사람이 제일 잔인한 동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 물고기가 너무 불쌍하기도 하고.... 그 다음부터 생선회를 보면 그 물고기가 떠올라서 말야. 나 너무 예민한거지?” 그가 다시한번 피식 하고 웃었다.

“어. 형. 너어어무 예민해.” 내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나를 보고는 형은 무안한 듯 다시 한번 겸연쩍은 표정으로 웃어보였다.

“어렸을 때, 그걸 봐서 아무래도 정신적인 충격이 좀 있었나 봐. 하지만 뭐, 너가 먹고 싶다면 다시 시도해 볼게. 너하고 하는 건데 이 세상에서 못할게 뭐가 있겠어?”

그렇게 말하고는 그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는 다시 한번 환하게 웃었다.

 

그렇게 웃던 그의 모습이 여전히 그렇게 침대에 누워있던 나의 뇌리에 새겨진 채 남아서 나를 괴롭혔다.

“형....” 슬며시 입을 벌려 힘들게 불러보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내가 정말 형한테 무슨 큰 상처라도 주고 기억조차 못하는걸까?”

고개를 돌려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울리다가 어느 순간에 멈춰버렸다.

 

그리고 나는 밤새도록 그렇게 있었다. 과거로 돌아가서 그와의 기억을 더듬으려고 했다.

내가 그에게 상처를 준 일을 더듬어갔다. 나를 대하는 그를 그렇게 바꿀 정도라면 내 기억속에 있어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뒤져봐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아니면, 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뇌의 어느 부분에 감추어 놓고 내 자신조차도 접근을 허가하지 않는 지도 모르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누워서 지나가지 않는 밤을 힘들게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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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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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고 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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