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너머의 세상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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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찬바람이 기승을 부리는 1월말의 토요일 이었다.
감기로 벌써 일주일 동안을 고생하다가 그제서야 숨을 쉬고 살아 돌아 다닐만한 기운이 돌아온 듯 느껴졌다.
추운 날씨에도 한낮의 따뜻한 햇살이 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왔다.
슬며시 몸을 일으켜 창 밖을 내다 보았다.
전날 퇴근한 후, 원흥역에서 집으로 걸어오는 사이에 희끗희끗하게 소리없이 떨어지는 눈송이가 보였는데 밤사이에 폭설이 내렸는지 창밖의 세상은 하얗게 변해 있었다.
창문을 슬쩍 열고는 고개를 밖으로 내밀자, 눈 위에서 마치 제 세상을 만난 듯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는 똘똘이가 내려다 보였다.
하얀 눈 위에 선명하게 대조되는 새까만 털의 그 녀석은 하얀 눈이 그저 신기 한 듯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한쪽구석에서 눈 속에 코를 박고는 킁킁거렸다.
뜰의 한쪽 구석에서는 1층 노부부가 빗자루를 들고 서서 그 녀석의 재롱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웃고 계셨다.
다시 몸을 돌려 창문을 닫고는 다시 침대에 걸터 앉았다.
딴이 할 일이 없는 주말이었다.
새로운 한 해가 시작 되면서 모든 것을 새롭게 다시 시작해보고 싶었다. 괴롭고 불행했던 지난해의 찌꺼기들은 모두 뒤로 흘러가버리는 시간의 주머니에 집어넣고 보내버렸다고 생각했다.
슬그머니 집안을 돌아보았다.
승호를 생각하면 여전히 오싹해지는 기분이 드는 집안이었다.
사람을 불러 ‘집 안에 설치된 몰카는 없다’라는 확인을 받았지만, 여전히 가끔씩 순간순간 머리카락이 쭈뼛하게 서는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날씨가 풀어지면 방부터 보러 다녀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승호는 이 모든 것을 돈 때문에 벌인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묘한 구석이 있었다.
은행에 가서 은행계좌를 확인을 했을 때, 나는 은행원의 말을 듣고 의아할 수 밖에 없었다.
이천만원중에서 출금된 금액은 이백만원 뿐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천 팔백만원은 고스란이 계좌에 남아있었다.
계좌를 닫아 버리고 새로운 계좌에 남은 돈을 넣으면서도 ‘도대체 왜?’ 라는 의문이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난 다른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지난해에 일어났던 불쾌했던 일은 하나도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모두 하얗게 지워버리고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그렇게 햇볕을 쬐면서 앉아있다 보니 온 몸이 나른해지기 시작했다.
병든 병아리처럼 그렇게 끄덕거리면서 졸다가 햇볕이 잘 드는 쪽에 얼굴을 대고 웅크리고 누웠다. 그리고 다시 현실과 꿈의 가장자리의 어느 지점을 지나고 있었다.
울리는 전화벨이 나를 현실로 끌어당겨 왔다.
“여보세요.” 손을 뻗어 쥐고는 귀에 대고 귀찮다는 듯 대답을 했다.
“나야.” 상현이 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지금 어딘지 알아?” 항상 그렇듯 그는 밝은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어딘데요?” 졸리움에 취해서 코맹맹이 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원흥역.” 그가 대답을 하고는 크게 웃었다.
그의 말에 놀라 몸을 일으켰다.
“원흥역에는 왜요?”
‘원흥역에 내가 왜 왔겠어? 너 보려고 왔지.“
“........”
“집에 있는 것 맞지?” 그가 여전히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예. 그렇긴 한데....”
“그럼 금방 찾아갈게. 호진이한테서 주소 받았거든.. 그래도 괜찮지?”
"........"
통화를 끝내고 부지런히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거울에 비친 나의 몰골은 눈뜨고 봐 줄수 없는 상태였다.
머리카락은 새집을 지은 듯 기름으로 떡칠이 되어서 제멋대로 뻗쳐 있었고 눈에는 눈곱이 붙어 있었다.
부지런히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하고나와 방과 거실을 청소할 겨를도 없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던 휴지조각과 벗어놓은 옷가지를 치우자 현관문의 초인종이 울렸다.
열린 문틈으로 상현이 형의 싱글거리는 얼굴이 나를 내려다 보았다.
“아랫층 입구문은 어떻게 열고 들어왔어요?”
“아.. 어떤 할머니 한분이 그 앞에 계시다가 열어주시던데?” 그가 빙긋 웃었다.
“4층 총각이 감기 걸린 것 같다고 날더러 맛난 것 좀 사주고 가라고 당부하시던 걸?”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열린 문을 통해서 들어오지 않고 그렇게 문밖에 여전히 서 있었다.
“들어오세요. 추우실텐데....” 그렇게 서 있는 그를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근데, 혼자 온 것이 아니라서....”
“네?” 그의 말에 동행인을 찾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나를 보면서 그가 다시 씨익 웃고는 문 밖의 벽 뒤에 놓여있는 것을 손에 번쩍 들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케이지 앞의 열린 틈을 통해서 똥그란 두 눈으로 무엇인가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숨이 멎은 듯, 나는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았다.
케이지의 커버가 열리고 그 안에 있던 녀석이 드디어 밖으로 나와서 나를 올려다 보았다.
그 녀석은 그렇게 까만 눈동자로 나를 잠시 동안 경계의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거실과 주방을 돌아보았다.
그렇게 원래대로 낮선 이방인이 된 모습으로 그 녀석은 또 다시 한쪽 구석으로 슬그머니 기어가서 나를 외면하고는 벽을 바라보고 누웠다.
“녀석, 어색한가 보다.” 아쉬움에 낮은 한숨을 쉬는 나를 보면서 그가 말했다.
“아....” 그제서야 그가 여전히 신발을 신은 채 현관에 서 있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들어오세요.” 옆으로 비켜서서 그에게 들어올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근데, 반디는 어떻게.....”
“아.....” 그가 씨익 하고 웃었다.
“호진이에게서 너가 저 녀석 잃어버렸다는 얘기 들었다.”
“.......”
“대충 어떻게 된 건지 다른 얘기도 좀 듣고....” 그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말을 멈추고는 나의 표정을 살폈다. 태연하려고 애썼지만 이미 그는 나의 속 마음을 모두 읽어버린 듯 했다.
“다른 건 몰라도 저 녀석은 꼭 다시 찾아서 주고 싶었어. 너가 전에 나와 통화할 때 속삭이던 네 목소리가 내 귓전에 아직도 배어있단 말이지. 그때 네 목소리가 얼마나 달콤했는데....” 그가 씨익 웃었다. 나는 무안해져서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슬며시 그의 시선을 피해 반디를 돌아보았다.
“여기저기 알아보고 수소문 하고 하다가 간신히 저 녀석을 입양한 사람을 찾았지.”
“........”
“춘천이더라고... 근데 그 집에서 녀석이 적응을 잘 못했나봐. 집에 온 날부터 가까이가면 도망 다니면서 벽만 바라보고 있다고... 그러다가 아무래도 키우는 게 힘들 것 같아서 군산에 있는 친척집에 보냈대. 그래도 여튼, 그 녀석을 데려올 수 있겠다는 생각에 또 군산까지 한걸음에 달려갔지.”
“.......”
거기에는 다른 개도 몇 마리 있던데, 다른 강아지들하고도 어울리지 못하고 외톨이로 지냈나 보더라구. 그래서 전 주인이 꼭 다시 찾길 원한다고 사정해서 받아왔어.“
“그래도....” 간신이 입을 열고는 억지로 얼굴을 들고 그를 보았다.
“그냥 돌려주진 않았을텐데....”
그런 나를 보고 그가 ‘큭’하고 웃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네 가족인데....당연히 보답은 하고 받아와야지.” 그가 크게 웃었다.
“찾기 정말 힘들었을건데 어떻게 찾으셨어요?” 낮은 목소리로 간신히 그에게 물었다.
“뉴욕에 있는 지훈이에게도 연락했었어.”
“...........”
“너에게 약속했다면서? 저 녀석 돌려주기로....”
“..........”
“사실, 지훈이가 미국에 있으면서도 사람들에게 수소문해서 알아보고 있었나봐. 반디 데려간 사람 찾았다고 그러더라고... 그렇지 않아도 나에게 연락하려고 했다고... 반디 좀 찾아다가 너에게 전해달라고...”
“.........”
나는 슬며시 그에게서 창문 아래의 구석에서 벽을 보고 누워있는 반디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다시 냉정하고 무심하게 변한 녀석의 모습에 낮은 한숨이 나왔다.
“나를 잊어버렸나보네요. 이 집도......” 슬며시 마치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녀석, 상처받아서 그래.” 그의 말에 다시 그에게 시선을 돌려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다시 기다려줘야지 어쩌겠어.” 그가 슬며시 나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자기가 너에게서 버려진 것으로 여기고 있을거야. 우리도 모두 그렇지 않아? 우리가 볼 수 있는 시야는 너무 좁아서 그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지. 그럴 때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우리가 만든 안경을 쓰고는 판단하게 되잖아. 그리고 그것을 일반적인 상식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그럴듯하게 정당화시키지. 그리고 그런 다음에는 그걸 사실이라고 확신하고 믿어버리고 말야.”
그가 다시 한번 겸연쩍게 웃어보이고는 내 뒤편의 구석에 누워있는 반디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 녀석도 마찬가지 일거야.”
“........”
“저 녀석도 너가 자기를 버렸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거야. 나에겐 그렇게 보여.”
“.......”
“저 녀석에게는 그 동안에 벌어진 일은 자신의 시야와 사고의 범위를 벗어난 일이었으니... 간신히 친해진 너가 다시 자기를 버렸다는 생각에 상처를 받은걸 거야. 그 녀석이 어떤일이 일어난 것인지 이해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가 잠시 말을 멈추고 나를 보고는 슬며시 웃어보였다.
“그리고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으려면 그렇기 때문에 많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림이 필요한 거라고 생각해. 그렇게 참고 기다려 주는 것이 나중에 그만한 결과를 얻게 되는 필수적인 과정이 아닐까 싶어. 그렇게 오랜 시간을 누군가를 기다려 준다는 것은 그를 그만큼 사랑한다는 또 다른 증표일거라는 생각이 들어.”
그가 다시 나에게서 반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우리의 삶에서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나의 소중한 시간을 기다림에 소모하진 않을테니 말야.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기에 그렇게 하겠지.”
“........”
“저 녀석에게도 상처가 아물 시간을 좀 줘. 그리고 네가 여전히 저 녀석을 사랑하고 있다는 모습도 보여주고....”
“그리고.....”
그가 입을 열고는 슬며시 몸을 일으켰다.
“네 주변에도 네 상처가 아물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좀 알아줬으면 좋겠어.”
“..........”
“나도 그렇고 호진이도 그렇고 또..... 지훈이도 마찬가지고.....” 그가 말을 멈추고는 싱긋 웃었다.
그가 슬며시 몸을 돌려 자신의 운동화를 신었다.
“힘들게 오셨는데 커피라도 한잔 하시고 가시는 게......”
나의 말에 그가 고개를 돌려 겸연쩍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 집에 가는 거 아닌데?”
“.............”
“할머니에게 약속까지 했는데 말야. 너 감기 때문에 몸도 안 좋은데.. 맛난거라도 사주겠다고...” 그가 말을 멈추고 씨익 웃었다.
“마트에 간다. 근처에 큰 쇼핑몰도 생겼다고 하던데.....”
다시 한번 나를 보고 밝게 웃어보이고는 그는 문을 열고 나갔다.
창문 밖으로 등을 보이면서 쌓인 하얀 눈을 밟으면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창문에 기대어서 그렇게 멀어지는 그를 바라보았다.
눈 위에 남겨진 그의 발자국은 마치 나에게 그가 가고 있는 곳을 알려주는 듯 그렇게 선명하게 남겨져 있었다.
그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아직까지 나에게 생긴 일들을 모두 편하게 털어버리고 다시 가벼워진 모습으로 돌아보았을 때 그가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작은 바램이 마음속에 싹트기 시작했다.
그가 돌아와서, 그리고 저 주방에서 나를 위해 무엇인가를 열심히 만들고 있을 때, 그에게 불쑥 말을 꺼내도 되는 것일까? 내가 편해질 때까지 기다려줄 수 있냐고?
그때도 지금처럼 환한 웃음을 나에게 보여줄 수 있냐고?
그리고 드디어 나의 삶 속으로 들어와 줄 수 있냐고?
나는 슬며시 시선을 돌려 여전히 나를 외면하고 있는 녀석으로부터 넉넉한 거리를 두고 슬며시 그 녀석을 외면한 채, 낮은 목소리로 머리에 떠오르는 멜로디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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