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비스워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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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을 한 후, 월요일 아침 회의를 마치고 나왔다.
자리에 앉아 나의 옆을 지나가는 윤대리의 인기척을 애써 모른 척 했다. 그리고 부지런히 컴퓨터를 켜고 마치 모니터를 노려보듯이 바라보았다.
회의 중에도 나는 윤대리의 시선을 피했다.
그가 나에게 지시를 할 때에도 나는 그의 넥타이 위의 목 부분에 불룩 솟아오른 썩은 사과조각 같은 그의 목젖이 징그럽게 움직이는 것을 보거나 그가 매고 있는 넥타이의 울긋불긋한 파라솔 무늬들을 멍하게 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고개를 똑바로 들지 못하고 마치 무슨 죄라도 지은 것 마냥 잔뜩 주눅이 들어있었다.
내가 이 자리를 차지하기 전, 아침마다 이 자리로 출근하던 신입사원도 나와 마찬가지로 이런 과정을 겪었을까? 눈치를 보면서 낙오되지 않도록, 어떻게든 이 곳에서 이를 악물고 버텼을까?
아니면 자신이 참을 수 있는 한계를 미리 정해 놓고 인내 게이지가 그곳에 다다르는 순간 그때까지 마음속에 꽉 누르고 있었던 분노를 윤대리에게 터뜨리고 나갔을까? 멋지게? 영화처럼?
그러는 사이에, 다행하게도 사무실은 조용해 졌고, 나는 혼자 남겨져 있었다.
그제서야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 본 다음 자리에서 일어나서 조용하게 커피를 뽑아 내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기분좋은 생각을 하고 싶었다.
이렇게 지내려고 그렇게 먼 곳에서 온 서울이 아니었다.
토요일 아침, 주형이 형의 침대에서 일어났던 일이 떠올랐다.
잠이 막 깨어, 눈을 뜨고 정신을 차린 후 느꼈던 당혹감이 다시한번 몰려와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침식사라도 하고 가라는 그를 한사코 마다하고 나는 그가 건네주는 그의 옷을 대충 걸치고 난 후, 마치 도망치듯 그의 집에서 빠져나왔다.
세탁소에 맡겨 놓은 나의 옷은 시간이 될 때 받으러 오겠다고 했다.
여분의 양복이 제대로 손질이 되어 나의 옷장에 준비되어 있는지 생각해 볼 겨를도 없었다.
이중인격자로, 상종하지 말아야 할 최악의 인간으로 여기고 입에 담지 말아야 할 말을 건방지게 그에게 거침없이 내뱉었던 기억이 떠 올라, 내 자신이 창피하고 낯부끄러워 그를 마주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의 집의 앞에 있는 화단에 노오란 꽃이 만발하게 피어있었다.
천천히 발을 옮겨 큰길로 이어지는 계단을 천천히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그는 어젯밤 무거운 나를 어떻게 끌고 이곳을 올라 그의 집에까지 데리고 갔던 것일까.
계단 양쪽으로 정성스럽게 꾸며놓은 작은 공간을 따라 예쁜 꽃들이 피어나고 있었다.
내 키만한 노오란 장다리 꽃이 산들바람에 흔들거리고 여러 색깔의 철쭉꽃들이 여기 저기 어지럽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큰 도로에 닿은 후 몸을 돌려 다시 한번 동화 속 같은 그 계단을 올려다 보았다.
그가 그 곳 너머에 살고 있었다.
아무 상관도 없는 나에게 다가와 이해하지 못할 이야기를 나에게 전해주고 좌절한 나에게 어깨를 빌려준 그가 지금 그곳에 있었다.
커피잔을 손에 들고 베란다에 나와 조금 전 내가 지나친 꽃밭 위에 어우러지고 있는 꽃을 내려다보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영이만 아이었다면....
갑작스런, 그런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 떠올라 나도 몰래 얼굴을 붉혔다.
우영이가 없다고 한들 나의 손에 닿을 리가 없는 그였다.
나와는 너무 다른 세계에 그가 살고 있다는 것을 나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여전히 실질적인 회사 업무를 잘 모르고 있던 나는, 점심 식사를 한 후에 업무 파악을 위해서 예전에 작업했던 데이터들과 거래처들과의 거래 상황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았다.
나는 이미 윤대리의 눈 밖에 나 있었기에 내가 모르는 이 모든 일들이 언제든지 나에게 치명적인 약점으로, 윤대리에게는 나를 공격하는 손쉬운 무기로 사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아무리 내가 발버둥을 친다고 해도 쉽게 성취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좌절감에 나도 몰래 낮은 한숨이 나왔다.
외출에서 돌아온 윤대리가 내 등 뒤의 자리에 앉아서 또다시 큰 목소리로 통화를 하면서 부산하게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의 자리 옆으로 와서 걸음을 멈추고는 나의 책상에 서류파일 하나를 던졌다.
“클리오네 거래 서류다.” 그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제부터 너가 그거 맡아서 해.”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 보았다.
“그 정도는 혼자 해 볼 수 있지?” 그가 나를 내려다 보고 물었다.
“........”
“그럴 능력도 없이 어떻게 월급을 받아가냐? 뭐 회사가 자선사업을 하는데도 아니고.”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책상위에 놓여진 클리오네 파일로 눈을 돌렸다.
“뭐, 능력이 안되면 어쩔수 없는 거고.... 안 그래?” 그가 빈정거리는 투로 말을 툭 뱉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죽이 되는 밥이 되는 너가 알아서 한번 해봐.” 나의 등 뒤에서 그가 히죽거렸다.
클리오네 파일을 열고 자리에 앉아서 끙끙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처음 오퍼 시점에서 다른 관련된 생산업체들과의 협력관계에 얽힌 것들과 마지막으로 계약이 성사되기까지 몇 번을 훑어봐도 이해는 커녕 그 거래의 대략적인 윤곽조차도 도대체 보이질 않았다.
실무에 부족한 경험은 차치하더라도 그 거래의 흐름조차 잡히질 않았다.
몇 번을 망설였지만 이곳에서 생존하기 위해 내가 얻을 수 있는 유일한 해답은 그것 뿐이었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슬며시 사무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 후, 다시 비상계단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여보세요.”
차분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전화를 했으면 말을 해야지.” 그의 목소리가 내 귓속에 퍼졌다.
“저.....”
“.......”
“제가 클리오네 일을....” 등에서 식은 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
“도와주세요. 형..”
“윤대리가 이 일을 너에게 맡아서 하라고 했다고?”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그런 그를 보면서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자식 지금, 이제나 저제나 네가 두손들고 항복하길 기다리겠구나.”
기가막히다는 듯 그가 피식하고 웃었다.
“네가 못하겠다고 그렇게 그 놈 앞에서 꼬리 내리고 나면 널 다루기가 훨씬 쉬워지겠지. 그놈 꼬붕이 되어서 알아서 바짝 기거나 아니면 못버티고 퇴사하거나....”
“왜 그렇게까지.....” 그런 그의 말에 초조해져서 입안이 바짝 말랐다.
“원래 그런 못된 놈일수도 있지. 아니면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거나.....”
“........”
나는 가방을 열고 그에게 우리 회사의 클리오네 거래 서류를 꺼내서 그의 앞에 내밀었다.
그런 나의 얼굴을 한번 언뜻 보고 그가 손을 뻗어 그것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미꾸라지 같은 놈.” 서류를 보던 그가 피식 웃었다.
“........”
“승우야.” 어느 순간, 그가 서류에서 시선을 떼고 나를 바라보았다.
대답 대신 나는 바짝 긴장한 상태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몰라 그의 입에 시선을 집중했다.
“마음 단단히 먹고 이 일 네가 맡아서 한번 해 보겠냐?”
“........”
“우리 회사와의 거래에 관련된 것이니 계약에 관해서 내가 자세히 설명은 해 주마.”
“예....”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녀석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거야.”
“.........”
“우리 회사와 계약을 차질없이 이행하려면 여기 적혀있는 이 제조업체들로는 절대로 가능하지도 않고...”
그가 연필로 서류에 적혀있는 업체의 상호명 위에 희미하게 동그라미를 쳤다.
“그리고 아직까지 해 온 일 중에서도 여러곳을 수정해야 하는 데....”
그가 말을 멈추고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고는 무엇인가 생각하는 듯 하다가 고개를 들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윤대리가 절대로 호락호락하게 그냥 네가 하겠다는 대로 내버려 두지는 않을거다. 네가 맡는다고 해도....”
“........”
“그래도 나 믿고 한번 해 볼래?”
그가 여전히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지금보다 훨씬 그 자식이 널 괴롭힐수도 있어. 터무니 없는 트집을 잡아가면서....”
“.........”
“그래도 한번 끝까지 버텨보겠냐?”
멍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던 나는 마침내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어짜피 그를 믿는 것 이외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보였다.
다시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하는 듯 보이던 그가 나를 보고 입을 열었다.
“내일부터 우리 집에 와서 지내라.”
예상치 못한 그의 말에 당황해져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와서 며칠동안 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기본적인 것부터 교육을 좀 받아.”
“........”
“그리고, 이것도 너의 회사 기밀인데 남들 눈도 있고 또 당연히 보안도 필요한 것이니까.”
그가 멍해져 있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방 하나 비워놓으마. 와서 편하게 지내면서 당분간 출퇴근 해. ”
여전히 당황해서 아무 말 못하는 나를 보고는 그가 잠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일만 네가 잘 해내면 그 자식도 너를 우습게 볼수만은 없을거다.”
“.........”
“네가 마음만 먹으면 녀석의 다른 구린 곳도 캐낼 수 있을거라고 생각할 수 있거든.”
“.........”
“녀석 눈치를 보면서 일을 나눠서 달라고 해. 자기가 하고 있는 일만 건드리지 않으면 그 자식도 아무 말 안할거다.”
그렇게 말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앞에 높여있는 많은 장애물 중에서 이제 겨우 윤대리라는 자그마한 돌덩어리 하나를 넘어가는 것이라고 내 자신에게 위안을 했다.
그리고 서울에서 깊이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 어떻게든 버텨내겠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다음 날, 거래하는 제조업체를 바꿔보고 싶다는 내 말에 그가 터무니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이 서류의 내용이 무슨 내용인지 이해는 하고 말하는 거냐?”
“열심히 파악하고 있습니다.” 조롱하는 그의 표정 앞에서 나는 주눅이 들지 않으려고 목에 힘을 주었다.
“제게 일을 맡기셨으니 제가 한번 제 방식대로 해보도록 허락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윤대리님.”
“잘못되면 모든 책임은 네가 지는 거다. 알고 있지?”
“예.” 담담한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하면서 그를 보고 고개를 꾸벅해 보였다.
나의 말에 그가 자신의 의자에 등을 대고 편안하게 앉아 빈정대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히죽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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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어요 연속으로 마지막까지 작가님덕분에 퇴근하고 집에오면 아무것도 못하게 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