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비스워커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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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술에 취해서 들어왔다.
그렇게 술에 취해 있는 그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내가 그의 집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는 날이었다.
그의 입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한없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눈꼬리에는 주름이 잡히고 입꼬리가 올라간 채로 그는 실실 웃고 있었다.
“같이 맥주 한 잔 할까?”
그가 느긋한 발걸음으로 냉장고로 향했다.
“벌써 많이 드신 것 같은데, 괜찮으신 거예요?”
“괜찮아. 괜찮아.”
냉장고 안에서 캔맥주 두 개를 꺼내 식탁의 나의 맞은 편에 앉아 손가락으로 캔의 굽혀진 고리를 집어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리 주세요.”
손을 뻗어 그가 들고 있던 캔맥주를 집어들었다.
“그게 고장이 났나 봐.”
실실거리고 웃는 그의 말에 어이가 없어서 나도 웃음이 났다.
뚜껑을 딴 후, 그에게 캔 맥주를 내밀었다. 그것을 손으로 움켜쥔 후 그는 다시 나에게 내밀어서 건배를 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네. 내일 집으로 가는 거지?”
“예.”
“나는 내일 아침에....” 그가 말을 멈추고 들고 있던 캔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일찍 본가에 갈거야. 일이 좀 있거든.”
그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대충 정리하고 조심해서 가라.”
“네. 근데, 아침 일찍 가셔야 한다면서 이렇게 술 많이 드셔도 괜찮아요?”
“괜찮아.” 그가 다시 나를 보고 취한 얼굴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처음에는 그래도 걱정이 많이 되었는데 이제 혼자 일을 볼 수 있을 정도로 거래 내용을 이해 할 만큼은 됐네?”
“형 덕분이죠.” 그를 보고 웃어보였다.
“그리고, 처음엔 형이 며칠 걸릴거라고 하셨는데, 벌써 열흘이 넘었잖아요.”
“그게 무슨 차이가 있어.” 그가 느긋한 표정으로 다시 웃어보였다.
“......”
“그리고 그동안 고생 많았어. 내 눈치 보느라....”
“아니예요.” 그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형 한테 신세를 많이 져서..... 이런 일은 아무나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나의 말에 그가 무안한 표정으로 웃어보였다.
“그런데, 형...” 조용히 입을 다물고 여전한 미소만 얼굴에 띠고 있는 그에게 내가 입을 열었다.
“우영이하고 형이 같은 회사에 다니는 줄은.....”
“아....” 그가 나의 말에 슬며시 씁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사실 말이다.” 그가 맥주캔을 들고 다시 한모금을 마셨다.
“일년 전 즈음, 그 녀석이 신입사원이라고 자기 부서장하고 같이 인사를 왔었어. 내 사무실로...”
“.......”
“가끔 일 때문에 부딪쳐야 하는 부서라서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온 거였지.”
나는 그를 보고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일 때문에 몇 번 왔다갔다 하면서 보기도 했는데, 어쩌다가 그 녀석을 종로 술집에서 마주치게 된거야.”
그가 말을 멈추고 피식 하고 웃었다.
“뭐, 그럴수도 있는거지. 그렇지?” 그가 고개를 들어서 나를 보았다.
“네. 뭐...”
“회사에서는 말과 행동을 조심하기로 하고, 그 후에도 어쩌다가 종로에서 오다가다 보기도 했다.”
“.......”
“그러다가 그 녀석이 우리 부서 한 대리하고 같은 프로젝트에서 일을 하게 되었어. 한 대리 알지? 한수진 대리말야.”
“네.”
“아 맞다.” 그가 문득 무엇인가 떠오른 듯,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 한 대리도 너처럼 군산 출신이거든. 남편은 지금도 군산에서 직장생활 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애도 할머니가 키워주시면서 거기서 유치원 다니고 있고.... 그래서 한 대리가 주말마다 내려가거든....”
“아....”
“너 처음 만나서 말투에서 뭔가 느껴져서 혹시나 하고 고향 물어봤더니 너도 군산이라고 그랬다고...”
“그랬군요.”
그의 말에 처음 나를 보고 서류를 내려다보면서 나의 고향을 묻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여튼...”
그가 슬며시 맥주를 내려놓고 기지개를 켰다.
“승우야.”
“네?” 술이 취한 상태로도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그의 눈을 보면서 대답했다.
“그런데 말야...” 그가 다시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나도 많이 살아온 것도 아니고, 인생을 안다고 말하기도 많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곁에 두고 싶은 사람, 혹은 멀리 해야 겠다 싶은 사람을 알아보게 되지 않겠니?”
“......”
“그런데, 우영이는 말야. 가깝게 곁에 두고 친한 사람으로 지낼 놈은 아니야.”
“......”
“너는, 네 친구니까, 다르게 생각하겠지만 말이다.”
“......”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야 하지. 자신을 위해서 남들이 하는 희생을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그가 말을 멈추고 잔을 내려놓고 나를 보았다.
“그러면서 자신은 절대로 손해 보는 일은 안하거든. 회사 생활에서도 마찬가지고...”
“........”
“그런 녀석이란 것을 느끼고 있었으면서도... 그래도 처음에는 같은 게이인데다가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은 녀석이 곤경에 빠진 것을 못 본척 할 수가 없어서..... ”
그가 말끝을 흐리고 나를 취한 눈빛으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쩐지 그런 그의 눈에 후회와 아픔이 서려있는 듯 했다.
“뒤틀린 욕심으로 내 발목을 붙잡을 줄은 모르고......”
그가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추고 그는 침묵을 지켰다.
“그런 녀석에게 우정이라고 다를까?”
다시 입을 열고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혹시라도 자기가 필요할 때에만 우정이란 말을 내세우면서 남들한테 자신에게 도움이 되도록 강요하는 그런 녀석은 아닐까?”
“......”
“너가 걔를 생각해주고 있는 것처럼 우영이도 너를 생각해 줄 거라고 생각하니?”
“......”
잠시 말 없이 나를 보던 그가 슬며시 낮은 한숨을 쉬었다.
“며칠전에 너와 내가 회사 앞에서 우영이를 만났을 때.. 그때에도 너는 네가 나와 있는 것을 우영이가 보고 기분이 나빠할까봐 전전긍긍했었지. 만나자 마자 묻지도 않았는데 너는 우영이 입장에서 기분이라도 상할까봐 변명부터 늘어놓았어.”
“......”
“그거, 너는 네 입장을 정당화 하려고 한 것이라기 보다 우영이가 상처 받을까봐 한 말이지?”
나는 아무 말 못하고 그저 잠자코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똑같은 것 같아도, 그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는거거든.“
“네가 나와 같이 지낸다고 툭 던져 놓고 내가 화장실을 갔다 온 사이에, 우영이와 너가 둘만 남겨져 있었을 때, 혹시라도 말야. 우영이가 ‘잘됐다’, ‘둘이서 잘해 봐라, 형은 아무래도 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하니까...’ 라면서 마음에 없는 말이라도 너에게 해 주던?”
“.....”
“만약에 상황이 바뀌어서 그때 네가 우영이 입장이었더라면 너는 뭐라고 말했을 것 같니?”
“......”
“너에게 관심을 보이지도 않고 너를 바라보지도 않는 사람을 차지하고 싶고 남에게 뺏기고 싶지 않다는 욕심 때문에, 혹시라도 네 친구가 그 사람하고 어떻게 엮이게 될까봐, 그게 싫고 두려워서 네 친구에게 불쾌감을 나타내고 냉정하게 대하고 그럴꺼냐? 우영이처럼?”
“......”
“그게 네가 말하는 소위 베프인거냐?”
“......”
“너, 그런 친구를... 어찌보면 굉장히 이기적인 그런 녀석을 베프라고 믿고 인생을 공유하면서 살아가고 싶은거냐?”
“내 눈에는....”
잠시 침묵 후에 그가 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걔는 너한테는 친구라기 보다는 그냥 네가 넘어야 하는 장애물처럼 느껴진다.”
그의 말에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어떤 면에서는 녀석은 너에게는 너의 회사 윤대리와 비슷한 놈이야.”
“형...”
“녀석의 마음속에 무엇을 품고 있는지 모르는 거잖아.”
“........”
“그 녀석에게서 벗어나서 시선을 돌려보렴. 다, 그런 녀석만 있는 것은 아니란다.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정말로 편하고 즐거워서 소소한 것 하나까지도 공유하고 지낼 그런 친구말이다. 그러면서 닮아가는 그런 친구들 말야.”
“.......”
“우영이가 너에게 그런 친구인거냐?”
“.....”
“그래, 나는 그렇게 생각해서 네가 그것을 깨닫길 바라면서 그렇게 여러 가지 상황을 만들어 보았는데 너는 시선을 옆으로 돌려보질 않아.”
그가 피식 웃었다.
“다, 내 욕심인가보다.” 그가 언뜻 뜻 모를 말을 했다.
“......”
“미안하다. 내가 술이 취해서 횡설수설하는구나.”
그가 두 손을 뻗어 손가락으로 내 양쪽 볼을 슬며시 쥐고는 흔들어보였다.
그리고 몸을 일으켰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에는 이미 열시반이 넘어있었다.
그리고 그는 집에 없었다.
짐을 챙기고 그의 집을 나오기 전, 그에게 어떤 것이라도 나의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를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가방에서 흰 종이쪽지를 꺼내서 ‘고맙습니다’ 라고 쓴 후에 주방의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그가 나에게 해 준 그 모든 것에 비해서 볼품 없는 인사지만, 그래도 혹시라도 그렇게 써놓은 글을 읽으면서 나의 감사하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아주기를 바랬다.
수정된 계약서를 컨펌 받기 위해서 월요일 오후 2시에 클리오네를 찾아갔다.
한수진 대리가 나를 맞았다.
“갑자기 외부 손님이 오셔서 과장님이 잠시 외출중이네요.”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나에게 자바칩 프라푸치노 커피잔을 내밀었다.
“과장님이 부탁 하신거에요.” 그녀가 웃었다.
“이 승우씨 프라푸치노 좋아한다고..”
그녀의 말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졌다.
“과장님 사무실로 안내해 드릴게요.” 나에게 커피를 건넨 후, 그녀가 나의 앞에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사무실의 문을 열고는 나를 보고 한번 웃어보였다.
그의 사무실에 들어간 것은 처음이었다.
아늑한 느낌을 주는 그의 방에 들어서자 그의 냄새가 나는 듯 했다.
커피를 홀짝거리면서 그의 책상 앞에 놓여진 손님용 소파에 앉아있던 나는 조금 지루해졌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그의 사무실 여기저기를 슬그머니 구경하기 시작했다.
창가의 벽에 붙어있던 모네의 물빛이 아름다운 정원의 그림에서 그의 의자 뒤쪽에 걸려있는 고사성어가 적혀있는 액자로, 그리고 이제는 그의 책상으로 나의 시선이 옮겨갔다.
그의 책상의 한켠에 놓여있던 사진이 보였다.
그가 강아지 한 마리와 공원에서 산책을 하고 있는 사진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 그의 책상을 덮고 있는 보호 유리판 속에 끼워져 있는 쪽지가 눈에 띄었다.
글씨체가 눈에 익었다.
‘고맙습니다’ 라고 여러번 반복해서 진하게 쓰여 있는 그 부분만 오려내어 그 유리판 아래에 넣어져 있었다.
나의 그런 작은 감사의 표현이 그에게 그렇게 오려내어 따로 보관할 만한 것인가 하는 생각에 쑥스러워져서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그런 나의 글씨 아래에 그가 다시 조그맣고 흐릿한 글씨로 써 놓은 것이 눈에 띄었다.
흐릿한 그 글자를 읽어 보려고 나는 고개를 숙였다.
사무실 문에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려오고 문이 열렸다.
마치 무슨 나쁜짓이라도 하다가 들킨 것 마냥 놀라서 나는 몸을 돌렸다.
서류파일을 손에 들고 우영이가 고개를 들이밀고 방안을 둘러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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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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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대해 진지한 고찰을 하는 밤이 되겠네요.
다른 작품들에 비해 전개가 좀 느린 편이지만
그만큼 깊이 있게 접근하게 되네요.
다른 작품들에 비해 전개가 좀 느린 편이지만
그만큼 깊이 있게 접근하게 되네요.





